『말』 1995.05.작품

「시민 케인」, 그리고 영화의 101년

영화는 현재의 신화

우리에게 영화의 1백1년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1895년 12월 29일에 태어난 영화와 함께 지난 1세기를 통과하면서, 정말 영화는 지난 1백년이라는 역사의 복화술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는 위험한 예술이다. 영화는 선동적인 정치의 미사여구이고, 장사꾼들의 새로운 발명품이며, 노동집약적인 종합노동(종합예술이 아니라)의 산물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역사 속에 있으면서 사회를 경유하여 만들어 지면서, 개인들의 상상력이 모여 창조되며, 또 한편으로 그것과 관계하는 제도와 자본의 순환을 통해 그 모든 것의 '은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비디오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불려 나올 영화들은 증인의 자격이면서 또 한편으로 피고인이기도 한 셈이다. 비디오라는 탈을 쓴 '지나간' 영화들은 흘러간 시간 속에서 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활동하고 있는 유령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전염시키고, 혼령을 앗아가고, 그 자리에 자기의 숨결(이데올로기?)을 불어넣어 마치 홀린 허깨비처럼 만든다. 그렇다. 이 자리는 영화를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다. 영화는 심심풀이가 아니며, 팝콘봉지처럼 부풀려진 허수아비가 아니며, 지루한 넋두리는 더욱 아니다.

영화는 우리가 만들어낸 현실의 뒤집혀진 허상이다. 그것이 '가짜' 이미지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거짓' 이미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사학이 생긴 이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언제나 가짜를 통해, 비유를 통해 우회하면서 거기에 이를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세기는 카메라를 통해, 카메라의 뒤집혀진 상을 통해, 카메라의 뒤집혀진 상을 통해, 뒤집혀져서 거꾸로 우리로부터 바깥에 놓여진 이미지를 통해 우리를 서술하고, 묻고, 애무하고, 흠집 내고, 찌르고, 할퀴고, 저주하고, 받들고, 고해성사 하기도 하였다. 영화는 우리가 미래의 인류학자들을 위해 남겨놓은 현재의 신화이다.

1백년 영화사에서 주목받는 작품

그렇다면 지난 한 세기의 신화 중에서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견줄 만한 영화는 무엇일까? 이의가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오손 웬즈의「시민 케인」(대성비디오)은 이미 수많은 자리에서 그 영광을 차지했다. 지난번『말』(1995년 2월호)지가 선정한 영화사상 1백년에서 3위를 차지했고,『한겨레 21』(1994년 12월 8일자)에서 '영화의 1백년' 특집을 다루며 2위로 선정되었다. 또한 영국 영화잡지『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92년 영화사상 톱 10위에 전세계 영화평론가 1백28명 집계로 1위로 올랐으며, 프랑스 영화지『포지티프』도 역시「시민 케인」을 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10편의 영화 중 하나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조심할 것!「시민 케인」이 영화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를 우리 시대의 걸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오손 웰즈는 모순에 찬 인물이며,「시민 케인」은 오손 웰즈와 할리우드, 더 나아가 영화를 만든다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화이다. 말하지만「시민 케인」은 이의제기를 통하여 비로소 그 가치를 드러내는 걸작이다.

오손 웰즈는 영화가 아니라 연극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19세기적 상상력을 지닌 영화감독이었다. 여전히 수많은 감독들은 지난 세기에 빚을 지고 시작하였다. 장 르누아르는 회화와 오페라에, 알프레드 히치콕은 건축과 연극에, 그리고 프리츠 랑은 건축과 오페라에서 영화를 찾아냈다. 마찬가지로 오손 웰즈는 평생 셰익스피어와 체호프, 그리고 헨리 입센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머큐리 극단을 이끌고 순회공연을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생계의 수단으로 라디오 드라마 대본을 쓰기도 했다.

1938년 10월 30일 CBS 라디오에서「우주전쟁」을 방송하면서 오손 웰즈는 '올해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원래의 드라마와는 전혀 무관한 드라마를 들려주다가 갑자기 "긴급 방송을 알립니다"로 시작하는 뉴스멘트와 함께「우주전쟁」드라마를 방송했다. 효과는 상상을 넘어섰다. 텔레비전이 없던 당신의 청취자들은 그것을 뉴스라고 착각하고 일대소동을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RKO영화사는 25세의 기이한 재능을 가진 청년 오손 웰즈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그에게 전권을 맡기고, 그리고 영화 연출을 맡기기로 하였다. RKO영화사는 오손 웰즈가 영화에서도 라디오에서처럼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였다. 오손 웰즈는 머큐리 극단을 이끌고 할리우드에 입성하였다. 그는 영화에서 미처 못이룬 연극의 꿈을 꽃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 꿈은 곧 악몽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할리우드는 장사꾼들의 개미지옥이었다.

오손 웰즈는 자신이 직접 시놉시스를 쓰고, 조지프 L 멘키비츠와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작업하고, 스스로 연출했으며, 심지어 주연까지 한 데뷔작「시민 케인」에 착수하였다.

새로운 시대정신 구현한「시민 케인」

거대한 성 제나두에서 신문왕 찰스 포스터 케인이 숨을 거둔다. 그의 유언은 한마디, "장미 봉오리"이다. 케인에 관한 기록영화를 만들던 제작자는 그 말이 못내 가슴에 걸린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기자 톰슨은 이제 케인의 살아 생전 그 곁에 있었던 네 사람을 찾아가 비밀의 흔적을 뒤진다. 영화는 그때부터 서로 다른 네 사람의 눈을 통해 전혀 다른 케인의 삶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장미 봉오리'가 케인이 살아생전 어린 시절에 타던 썰매의 이름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대로「시민 케인」의 미학은 세 가지이다. 그 하나는 종전의 기승전결 구조를 파괴하고 한 인물을 다층적으로 바라보며 삶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 모순된 세상의 구조를 표현한 모더니즘의 이야기 방식이다. 또 하나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장거리 초점의 딥 포커스 촬영과 장시간 이동카메라를 통해 표현주의 세트와 리얼리즘 조명을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로 이끌어낸 새로운 시각적 혁명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화면과 소리의 불일치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분리를 가져온 토키시대의 몽타주를 이룩하였다.「시민 케인」의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토키영화라는 사실이다. 오손 웰즈는 무성영화에 소리를 더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소란스러운 영화에 처음으로 소리를 통해 화면을 사고하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에 태어난 영화가「시민 케인」을 통해 20세기의 사고에로 들어설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다시 뒤집어보면 오손 웰즈는「시민 케인」을 연극과 라디오의 기묘한 결합으로 다시 생각한 것이다.「시민 케인」은 표현주의의 양식을 지닌 연극의 무대를 카메라라는 기계복제장치로 재현해낸 화면으로 만들어져 있다. 오손 웰즈는 평생 연극을 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선배들과 다른 점은 연극을 카메라로 찍는다는 발상으로부터 전환하여 연극 속으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다. 그 무대의 내부에서 오손 웰즈는 라디오의 미학을 실현한다. 그러니까「시민 케인」은 영화의 혁명이라기보다는 19세기 근대 연극의 정신과 20세기 라디오 매체 사이에서 본다는 것을 듣는다는 새로운 발명품의 테크놀로지로 전환하여 사고한 것이다.

영화는 언제나 그 스스로 발전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19세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고전의 거장들이 살아있던 시대의 정신을 여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20세기에 만들어진 테크놀로지를 그보다 왕성하게 걸신들린 것처럼(!) 탐욕스럽게 받아들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19세기 예술과 20세기 대중매체의 기묘한 결합이다.「시민 케인」이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것을 다시 본다는 것은 새로 시작하는 다음 세기의 입구에서 뉴 미디어와 20세기 매체 사이의 또 다른 입구를 기다리는(또는 근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어떤 만남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