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 KINO
1995년 5월 - 2003년 7월
통권99호
월간
이연호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영화잡지 《스크린》 창간 멤버로 시작해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1995년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함께 영화 전문 비평지 《키노》를 창간, 2003년까지 기자와 편집장을 역임했다. 제1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제2회 도쿄필름엑스영화제를 비롯해 다수의 국내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
인터뷰 및 정리
원승락, 이정민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이라는 말은 칭찬 이상의 평가다. 우리는 바로 그 드문 것들을 여전히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에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너무 일찍 끝나버렸는지 아니면 너무 서둘러 나왔는지 《키노》는 100호를 채우지 못하고 99호 이후, 결국 보기 드물어져 버렸다. 2003년 7월 폐간이 선언됐을 때 '키노키드'들은 사무실이 있는 빌딩 앞에 몰려가 농성을 할 만큼 폐간을 안타까워했다. 창간 초기에 《키노》는 발행부수만 5만 부를 넘었고 판매율도 85퍼센트의 흑자를 기록하는 이른바 잘 나가는 잡지였다. 이후 영화 시장(잡지 구독률)의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자 《키노》는 편집 디자인 등의 변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잡지의 매무새를 고친 키노는 디자인 왕국에서 꽤나 칭찬을 받고, 역시 보기 드문 성공적인(?) 리뉴얼 사례로 특집 기사를 한 번 채우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경쟁지였던 《씨네21》은 《키노》를 영화 잡지의 한 범례를 이룬 잡지로 평가했지만 범례를 활용할 포스트 키노는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99호'라는 상징적 항의로 종결했던 《키노》의 이연호 편집장을 만났다.
키노가 창간된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트렌드라고 해야 할까? 문화 담론 자체의 페러다임이 바뀌는 시기가 있는데 당시가 그런 때였어요. 또 1995년은 영화사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죠. 당시는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라 PC통신에서 영화광들이 '영퀴방(영화퀴즈방)' 등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계속 축적하던 시기였어요. 그때를 일종의 '적분의 시기' 라고도 하는데 계속 쌓기만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지식은 굉장히 풍부해졌어요. 키노가 창간할 때는 IMDB(The Internet Movie Database)조차 초기 단계라 오히려 우리들 머릿속에 있는 정보량이 더 많을 때였죠.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오피니언 리더들 머릿속에 정보가 가득 차서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할 때 바로 키노가 창간됐어요. 키노뿐 아니라 《씨네》이나 《프리미어》도 그때 창간됐죠. 한 시대가 바뀌면서 일종의 뉴웨이브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어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키노를 창간한 정성일 씨는 《로드쇼》를 통해, 저는 《스크린》을 통해 일정한 섹션을 가지고 라이브러리급의 기사를 쓰면서 영화에 대한 갈증을 채우곤 했는데, 다들 만나면 우리도 《레드 시네마》니 《사이트앤사운드》 같은 잡지를 만들어봐야 하지 않느냐, 하고 싶은 영화 이야기를 매거진 안에 숨길 게 아니라 이제 정면에 내세워도 되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시던 분의 도움을 얻어 키노를 창간했어요.
창간 초기에는 거의 독립적인 운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성일 씨가 키노를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죠. 투자하는 분을 만나서 설득하고 독립적인 편집권은 물론 잡지에 관한 전권을 획득하신 분이니까요. 저 역시 어느 정도는 함께했지만 영화사 일을 하던 중이어서 처음부터 함께하지 못했거든요. 제가 합류할 당시에 이미 운영은 독립적이었어요.
폐간 때까지 처음 투자하신 분과 함께하셨나요?
IMF 이후 키노에 투자했던 분 사업이 부도가 나버렸죠. 그럼에도 그분은 잡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문화 차원에서 투자한 잡지라고 하시면서 운영권을 고스란히 넘겨주셨어요. 사실 우리도 잡지를 한 권, 한 권씩 만드는 게 중요했지 경영이나 주식, 우리사주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어요.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하다 보니 문제가 좀 많았죠. 회사는 커져갔는데 오히려 이게 악재가 됐어요. 수익에 대한 고민이 생기면서 자유는 더 적어졌죠. 권리가 있었을 때 그런 부분을 재산권으로 분명히 해놨어야 하는데 관심이 없었어요. 책만 나오게 해주면 되니까. 그런 와중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 같아요.
다른 편집진들은 어떤 식으로 모이게 됐나요?
저희가 생각한 목표는 영화 '잡지'이기보다 '영화' 잡지였기 때문에 일반 잡지사에서 배운 노하우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글 쓰는 습관이 이미 배인 잡지 기자들은 배제한 상태에서 저와 정성일 씨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신규멤버들로 구성했죠. 영화 잡지나 소규모 스터디 그룹을 눈여겨보면 글도 잘 쓰고 영화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을 뽑거나 때로는 시험을 거쳐서 어렵게 한 명 한 명 뽑아서 팀을 만들었죠.
키노가 100호가 아닌 99호로 종결된 사실을 다들 아쉬워하는데….
일부러 거기서 끝낸 측면이 있어요. 한 권 차이이긴 한데 키노가 우리 뜻을 다 이루고 자발적인 의지에서 한 시대를 마감하며 접는 것이었다면 100호를 채우는 게 의미가 있었겠지만 그건 아니었거든요. 더 이상 변질되기 싫어서 스스로 마감하는 의미에서 99호로 끝내자는 생각을 한 거죠.
'변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변질을 우려하신 건가요?
폐간 무렵에는 한국 영화계에 산업화 논리가 기승을 부릴 때였어요. 내용 면에서도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보다는 대중영화나 블록버스터 영화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죠. 당시 거기에 부합하는 영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사실 키노는 그런 영화들을 배제했던 편이에요. 그런 상태로 계속 이어나가기가 어려워지면서 컨텐츠 구성에 있어 상업적인 의도에 맞춰 광고주의 압박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러면서 기업이 투자하기 시작하고 온라인 사업이 시작되고….
폐간 즈음에는 특히 온라인하고 갈등이 많았어요. 《씨네21》이나 《필름2.0》을 보시면 온라인과 오프라인 컨텐츠의 차이가 별로 없잖아요. 그에 반해 '엔키노'는 오프라인 매거진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포털사이트로 탄생했는데 그게 비극이었던 거죠. 둘 사이에 괴리가 너무 심했어요. 키노는 월간지잖아요. 온라인 팀은 하루 단위로 업데이트 해주기를 원했지만, 사실 저희 팀은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거든요. 한동안은 월급도 못 줄 정도로 위기였을 때도 버티면서 고혈을 짜내듯 책을 만들던 상황이어서 데일리 업데이트나 블로그 운영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어요. 키노와의 성격도 맞지 않았고. 결국 엔키노에서 다루는 영화와 키노가 다루는 영화는 너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죠.
힘든 일이 많았을 법한데 듣기로는 기자가 단 두 명만 남았던 적도 있다고 하던데요.
엄밀히 말해 두 명이 아니라 네 명이에요. 저와 정성일 씨 모두 편집장 역할을 하면서 원고를 수도 없이 썼거든요. 기자 생활을 시작한 후에 가장 많이 글을 쓰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네 명인 거죠.(웃음) 당시가 가장 힘들지는 않았어요. 물리적으로 힘들었던 거지 다른 갈등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거든요. 기자 숫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획을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 달에 맞는 아이템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걸 채워 넣기 위해서만 노력했으니까요. 가령 칸영화제에 꼭 가야해서 열흘 동안 출장을 간다면, 칸에 관한 기사만 써서는 책이 안 나오니까 다른 원고도 같이 써서 넘기고 그랬어요.
잡지 시장이 영화뿐만 아니라 대개의 비평지가 순수한 판매수익만으로 살아남기 힘든 구조입니다. 세계적인 비평지로 유명한 《까이에 뒤 시네마》도 작년에 모회사인 《르몽드》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고 들었는데….
《까이에 뒤 시네마》는 키노가 폐간될 즈음 《르몽드》에 인수됐는데, 그 과정에서 전에 있던 비평가나 에디터들이 모두 물러나고 《르몽드》 일간지에서 영화를 담당했던 사람들로 교체됐어요. 신문사 소속의 잡지로 바뀐 다음 구조조정이 이뤄진 셈이죠. 《까이에 뒤 시네마》의 경우는 주목할 만한 점이 또 있어요. 프랑스가 특히 그런 전통이 있는데, 주기적으로 편집방향이 대대적으로 바뀌어요. 예를 들면 굉장히 의미있는 영화가 있으면, 예전 같으면 20쪽씩 특집을 할애하던 것을 다 쪼개서 두 페이지 안에 조각조각 퍼즐처럼 나눠서 다룬다든지… 어떤 한 잡지 아래 시대별로 리얼리즘 시대가 있다면 또 모더니즘 시대로 이어지기도 하죠. 같은 제호지만 편집진들이 맑스주의자에서 구조주의자, 이렇게 바뀌면서 새로운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고 잡지를 바꾸거든요. 시대의 사상이나 철학이 바뀔 때 잡지도 함께 바뀌는 전통이 있는 거죠.
얘들은 이런 전통이 있어서 같은 제호 아래 표지나 그림을 좀 달리 넣고 편집장이 선언을 하면 독자들도 '아, 이 책이 바뀌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힘들죠. 60년 이상 전통을 이어가면서 서너 번씩 변화를 보여준 잡지들이 꽤 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키노가 아무리 앞으로 대중영화를 중심으로 다루겠다고 선언하더라도 힘들죠. 《까이에 뒤 시네마》는 그런 변화를 모색했음에도 결국 심각한 구조조정을 당했잖아요. 그건 이제 오프라인이 사실상 의미가 없는 시대라는 뜻이에요. 키노도 대외적으로 선언을 하고 계속 발행했더라도 뒤에 가서는 역시 구조조정을 당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공적기관에서 투자한 《사이트앤사운드》나 《필름코멘트》처럼 오프라인 잡지가 수익에 대한 압박감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경우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두 잡지를 보면 규모가 굉장히 작아요. 내용도 데이터베이스 중심으로 논쟁적인 이슈를 다루지 못하고 정말 기록적인 의미에서 접근하죠. 키노에서 《사이트앤사운드》와 제휴된 꼭지를 보시면 알겠지만 그 잡지는 영화 하나에도 모든 크래딧을 넣어서 정확한 기록을 후대에 유산으로 남기는 역할을 하거든요. 그리고 철저하게 영국영화 중심으로 다뤄서 영국 내에서는 어느 정도 혁신적인 이슈를 다루지만 그걸 넘어서지는 못해요. 아무래도 공적 자금이 투여되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겠죠. 물론 그런 역할이라도 잘할 수 있는 건 중요하지만. 또 영어권은 시장이 굉장히 넓어서 조금만 팔려도 수익이 생기죠.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구독하잖아요. 일본만 해도 잡지가 굉장히 전문화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영화진흥공사 비슷한 기관에서 나오는 《키네마준보》도 있고 《까이에 뒤 시네마》와 제휴하는 《까이에 자뽕》도 있죠. 《까이에 자뽕》은 철저하게 번역 위주의 컨텐츠에 흑백으로만 인쇄하는 잡지에요. 우리는 그런 잡지도 잘 없었던 것 같아요. 있다가도 욕심을 내기 마련이고.
폐간 즈음에 그런 고민이 많으셨을 법한데 키노는 어떤 식의 모색을 했나요?
키노는 영화에 대한 작가주의 담론이나 예술 담론도 시장으로 가져와서 다채로운 논의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한국에서 단 8년 동안이긴 했지만 굉장히 성공한 편이었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까이에》나 《포지티프》 팀들도 놀라워했어요. 한정된 볼륨 안에서 아주 난해한 작가부터 트렌드를 앞서가는 감독까지 다루는 것에 대해서요. 한국적인 다이내믹함이나 버라이어티가 담겨 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사실 그건 자충수이기도 했어요.
폐간할 때도 키노를 공적 기관에서 발행하는 소규모 잡지나 심도 깊은 비평지로 전환해서라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왜냐 하면 영화 비평 자체가 너무 소수 담론이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잡지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나 속성, 이런 걸 다 포기하는 시장에서 승부도 안 되고. 무엇보다도 영화는 종합매체에요. 흑백으로 비평 담론으로만 지면을 채운, 정말 100명 정도만 소화할 수 있는 잡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키노가 폐간된 지 벌써 4년이 다 되어갑니다. 여전히 포스트 키노는 보이질 않는데요. 비단 영화비평뿐 아니라 비평의 시대가 몰락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어떻게 느끼시는지.
비평의 시대가 몰락했다기보다 한국영화의 산업화가 너무 바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생기는 문제라고 봐요. 키노가 발행되던 동안에도 진행됐는데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다가 2000년대, 즉 2001년부터 불붙기 시작해서 2005년쯤 되면 폭발하거든요. 지금은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감독들이 투자를 끌어내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설사 그런 영화가 있다 해도 몇 개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금방 끝나는 시대죠.
지금 잡지를 창간한다면 비평 자체가 대중영화를 소화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확보한 상태에서 만들어야 될 텐데, 그런 데에 대한 자성이나 준비가 없는 것 같아요. 오프라인 글쓰기가 그저 온라인 글쓰기로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눈 자체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고민들이 제대로 됐는지 의심스러워요. 그러다 보니 평론가가 「놈놈놈」같은 영화를 다룰 때도 예전에 작가주의 영화를 다루던 틀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죠.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비평에 완전히 눈을 뜨기 전에 거치는 과도기인 것 같아요. 물론 그게 굉장히 더디게 오는 게 아닌가 싶지만.
누군가 시네필의 시대가 가고 P2P 세대가 도래했다고 얘기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저희 또래가 가질 수 없는 영화를 바라보는 남다른 면이 있어요. 가령 아주 세밀하게 들어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그런 면이 있거든요. 그 영화나 작가가 놓인 지형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런데 동시대에 다른 쪽 지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시대적인 컨텍스트와 연결하는 작업은 조금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래도 자기가 즐길 정도로 깊이 몰두한 학생들은 알려만 주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면이 있구나' 하면서 굉장히 관심을 보여요. 한쪽에 대한 정확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다른 쪽을 알려주면 소통이 되거든요. 하지만 그런 것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못 주죠. 저는 누가 더 낫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함께 배워나가는 거겠죠. 영화라는 게 굉장히 생명력이 길어나 한 10년 전에 만들어졌어도 어느 자리에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새로운 해석의 눈을 얻거든요.
키노의 편집 다지인이 많이 바뀐 적이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창간 때부터 줄곧 디자인팀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어요. 당시에는 디자인이 컨텐츠에 철저히 종속되는 기조를 유지했는데… 그러다가 아시다시피 회사 체계가 바뀌고 온라인 사이트가 생기면서 오프라인 잡지를 특화시켜야 될 필요성이 생겼어요. 특히 광고 시장의 확대를 염두에 두고 전문적인 외부 디자인팀에게 맡겨서 대대적인 리뉴얼을 진행했죠. 안에서 갈등도 제법 많았고 디자이너에게 완전히 전권을 주지는 못했지만 이전부돠 확실히 개성적으로 나왔다고 생각해요. 만약 전권을 줬으면 디자인 자체로는 더 훌륭했겠지만 영화라는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는 좀 맞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진통은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기억인 것 같아요.
잡지를 만드는 디자이너들에게 조언해주실 말이 있다면.
오프라인 매체가 온라인이라는 괴물하고 비교를 안 당할 수 없는 시대지만 오히려 그걸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잡지가 가지는 오프라인만의 고유성은 갈수록 시장에서 약화되겠지만 그만큼 잘 만들어진 잡지의 존재감을 더 커질 거라고 보고, 그럴수록 디자인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디자인은 키노를 만들면서도 내내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해요. 영화라는 게 굉장히 버라이어티하기도 하지만 깊이 있는 예술성을 강조하려면 따분하고 지루하기 마련인데,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게 만드는 요소가 디자인이라고 봤던 것이죠. 마우스에 뺏겨버린 그 촉감을 살릴 수 있는, 그런 잡지여야 해요. 저는 맘에 드는 잡지를 발견하면 종이를 만지다가 침도 한번 발라서 넘겨봐요. 그 넘기는 느낌이 참 새롭더라고요.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이게 다 지나간 잡지라서요.
(D+ 출처를 알려주신 김진운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