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잡지의 세계
전 편집장, 편집위원의 영화잡지 제작 시절 회고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건 좋은 일이니까요
정성일/ 전 <키노> 편집장 · 영화평론가 hermes59@hanmail.net
<키노>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나는 이 잡지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내 기억으로 그때는 문화의 백화제방이라고 부를 만한 시대였다. 그토록 짧았던 희망. 바보같이 모두들 그런 시대가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본가들도 문화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고 문화의 담론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 시내에서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7만 명의 관객이 보았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블루>를 15만 명이 보았다.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를 50만 명이 보았다. 보들리야르와 푸코의 철학이 어디서건 이야기되었다. 전투적 페미니즘의 담론이 퍼져나갔다. 그 즈음 커밍아웃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백가쟁명. 정확하게 그만큼 더 이상 레닌과 라틴아메리카의 종속이론을 사람들은 읽지 않았다. 주사파에 대한 팸플릿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하 여가(何如歌)’가 실려 있는 그의 두 번째 앨범을 막 냈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내가 만들고자 하는 잡지에 대해서 한참을 들은 다음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대부분 고개를 저었다. 물론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돈을 은행에 넣어놓으면 당신이 지금 주장하는 이익보다 연말에 많은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법에 관한 충고까지 들었다. 나는 거의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대선주조의 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좀 복잡했지만 일단 만나기로 결정되자 중간 단계의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바로 대면할 수 있는 미팅이 결정되었다. 나는 하도 여러 차례 브리핑을 했기 때문에 거의 외울 것만 같은 자료를 들고 자리에 들어갔다. 그 사람은 첫인상이 매우 쾌활했고 지나칠 정도로 힘이 넘쳐 보였다. 보자마자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설명해보세요!” 나는 자료와 표를 펼쳐놓고 열심히 설득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속으로 아, 이번에도 내가 헛수고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게 물었다.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이거 돈이 됩니까?” 약간 짜증이 나서 그냥 나도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안 되는데요” 그러자 약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반문했다. “그런데 이걸 왜 내가 해야 합니까?”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건 좋은 일이니까요” 날 쳐다보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 사람 재밌네” 그러더니 “검토해보고 일주일 후에 연락 줄게요”라고 말했다. 나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 일주일 후에 나는 <키노>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미팅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키노>가 왜 이 사람에게 좋은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런 다음 10개월 후에 나는 <키노>를 창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