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008.03.에세이

03. 그 삶이 내게로 왔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동병상련의 ‘그들’에게 보내는 작은 응원

“영화,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깨달음의 순간은 없었지만…

맨 처음 이 글의 청탁서를 받았을 때 난 그냥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 나는 영화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제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나는 또래의 동료들처럼 유학을 갔다 오지 못했다. (좀 신기한 일이긴 한데 내가 대학교 다닐 때 만나서 함께 스터디를 했던 동료들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유학을 갔다 왔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종의 소년가장이 되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잘 알려진 세 가지 거짓말. 늙으면 죽어야지, 노처녀 시집 안 가겠다, 그리고 돈 벌어서 유학가야지. 게다가 난 영화과를 나오지도 않았다. 영화에 대해서 나는 그냥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금도 그렇게 배워 나가고 있다. 영화에 대해서 나는 단 한 번도 어떤 결정적 깨달음의 순간을 얻지 못했다. 그냥 나의 배움에 대해서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혹은 최선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더 크다.

나는 사실 이런 종류의 글을 읽을 대마다 좀 역겹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마치 굉장한 깨달음이라도 어디서 배운 것처럼 말할 때 나는 거의 즉각적으로 정말?, 이라고 반문을 하게 된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글을 이십대에 읽으면서 그런 것을 얻기 갈망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게 일종의 허장성세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그런 척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나와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무슨 코미디 프로그램 보는 심정이 된다. 물론 실제로 그런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을 얻은 분들의 그의 삶의 궤적이 그것을 온 몸으로 증명을 해낸다. 하지만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삶과 혀가 서로 따로 논다. 대부분은 그걸 베끼면서 그런 척한다. 나는 그런 글을 읽으면 때로 그 사람의 글을 읽다가도 그 다음부터 더 이상 읽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은 있다.

거절의 메일을 보내려고 마음먹은 그날은 막 새해가 시작하고 있었다. 무언가 공기는 스산했고, 세상은 점점 시시해져가고 있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랜 벗들과 ‘쎄게’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내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차여차한 글을 청탁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절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중의 한 친구가 약간 항의하듯이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쩌면 나처럼 제도의 혜택을 받으면서 좋은 스승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응원의 글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약간 충고하듯이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 말에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맞아, 적어도 그런 말을 할 정도의 용기는 필요해.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고 싶어졌다. 말하자면 이 글은 내가 어떤 굉장한 깨달음을 얻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인생이 다 공부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 사람을 약간 고개를 튼 다음 비스듬히 바라본다. 그런 다음 물어보고 싶어진다. 올해 무얼 배우셨습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 고 계십니까? 그것들은 그저 말의 수사학이다. 인생을 사는 것은 대부분 자기가 공부한 것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인생에서 삶을 배운다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안토니오 그람시나 신영복 선생님의 자리에서나 감히(!)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여기 그 명단을 더 추가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기에 지금 이 지면은 적절한 자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지식인들이 자기 지식을 뽐내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자기 삶을 뽐낼 때는 웃음을 참기 힘들어진다.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는 심금을 울리는 명대사가 나온다. “너나 잘 하세요.”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하는 말은 그냥 작은 배움의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통해 이렇게 견디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응원 같은 것이다. 굉장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놀면 된다. 하지만 그저 평범하게 사는 우리들에게도 작은 위로 같은 순간들이 필요하지 않은가? 나는 그 허접함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삶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향해 홀로 걷다

누군가 나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책을 읽는 것뿐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어떤 순서로 책을 읽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는 영화에 대한 책이 거의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영어로 읽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서강대학교 도서실에는 영화에 관련된 책이 정말 많았다. 나는 닥치는 대로 복사를 했고, 두서없이 읽어 나갔다. 영화이론은 구조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구조주의에 대한 책은 거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읽은 구조주의에 대한 책은 대부분 일본어로 된 번역본이었다. 특히『현대사상(現代思想)과』과『유리이카(ユリイカ)』라는 잡지는 거의 정기구독을 했고, 내가 관심 있는 특집을 다룬 과월호는 따로 주문하였다. 불어를 공부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인용된 문장들이 도대체 원래 어떻게 쓰여 있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마존(Amazon.com)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유학 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내 부탁이 성가실지라도 내치는 법이 없었다. 때로는 잡지에 실린 글도 도서실에 가서 기꺼이 복사해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면 무언가 머릿속에는 많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이 잡다해진다.

나는 그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영화를 해야 한다고 돌아왔다. 하지만 남들처럼 연출부를 할 수 없었다. (지금도 큰 차이는 없지만) 그때 연출부를 한다는 것은 직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제제도에 가까운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감독 밑에 들어가서 연출을 배우고(라고는 말하지만 사실은 그냥 온갖 잡일을 하면서) 그걸 이력 삼아서 데뷔를 준비했다. 지금은 단편영화를 만들어서 제작자들의 눈에 들거나 혹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저예산영화 기금을 받아서 데뷔작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게다가 디지털도 있다) 그때는 예외 없이 그렇게 준비를 해야 했다. 연출부를 하면 보통 짧으면 6개월, 길면 일 년 가까이 그 영화에 매달려야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고작해야 차비 수준이었다. 그래서 연출부를 하려면 그걸 해서 돈을 벌기는커녕 집에서 용돈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도 막내로 시작해서 조감독이 되기까지 운이 좋으면 3년, 보통은 5년씩 그렇게 보냈다. 불행히도 나는 부모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호화로운’ 처지가 아니었다. 영화의 근처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하여튼 돈을 벌어야 했다. 나는 영화와 관련 없는 직장에 있으면 결국 영화를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무 대책이 없었다. 막 가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27살 때의 일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갑자기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만든 영화감독) 박광수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때 광수형은 프랑스에서 돌아와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를 하고 있었다. 그냥 만나자고 했다. 종로 3가에 있던 영화사에서 만난 다음 나를 데리고 근처 골목에 있는 중국집에 갔다. 그리고 자장면을 한 그릇씩 먹었다. “요즘 뭐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냥 놀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러면 책을 한 권 기획 편집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장호 감독이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돈을 벌었는데 그 돈의 일부로 한국 영화감독 총서를 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을 만드는 일이 내 인생에서 어떤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이장호 감독님을 만났다. 학교 다닐 때 인사를 드린 적이 있기 때문에 초면은 아니었다. 이장호 감독님은 <바보선언>을 만들었을 때 대학생들의 감상을 듣고 싶어 했고 그때 그 자리에 갔었다. 모두들 영화를 본 다음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약간 수줍게 말했다. “영화는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살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면 그걸 만드는 사람이 예술적으로 부서질 텐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다음 영화를 견딜 수 있습니까?” 약간 심술궂은 이 말은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장호 감독님은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너 참 지독한 놈이구나”라고 그냥 한마디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이 사람과의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났을 때 이장호 감독님은 그 자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이 일을 꼭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냥 간단하게 대답하셨다. 그럼 잘해 봐라. 나는 그 말이 고마웠다. 이런 일을 맡길 때 가진 자들은 대부분 갑자기 인생을 가르치려 든다. 배움을 청한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으스댈 때 상황은 매우 지루해진다. 나는 그런 자리가 항상 따분하다고 생각한다. 이장호 감독님은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그냥 나를 믿었다.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만났던 순간

나는 첫 번째 책의 주인공으로 임권택 감독님을 모시고 싶었다. 사실 그건 그때 남들이 보기에 좀 이상한 경정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임권택 감독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만다라>와 <길소뜸>을 만들었지만 그냥 모두들 충무로의 장인감독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1960년대 내내 ‘다찌마와리’ 영화(충무로에서는 액션영화를 이렇게 부른다)와 사극영화, 전쟁영화를 만들었으며, 1970년대에는 반공기 영화와 새마을 영화 ‘전문’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냥 그가 너무 많은 영화를 만들다 보니 그중 좋은 영화도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충무로 안에서도 임권택 감독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책을 만들고 싶어 한 이유는 무슨 큰 깨달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훗날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하는 감독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도 아니다. 나는 돗자리를 깐 게 아니다. 그리고 난 그런 일에 별 관심이 없다. 누가 어디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 영화에 대한 나의 평가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주말의 영화를 미친 듯이 보았고, 프랑스 문화원과 독일 문화원을 거의 등교하다시피 했다. 일본 문화원은 부정기적으로 영화를 소개했다. 비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두려움으로 거의 외울 듯이 보고 또 보았다. 내가 영화를 본 다음 장면들을 거의 복기하는 것은 이때 배운 습관이다. 아직 지구상에 비디오라는 기계는 발명되지 않았으며, 컴퓨터는 SF영화에서나 나오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인터넷은 그로부터 십 년 후에 막 시작되었다. 그때 내가 읽은 대부분의 책들은 할리우드영화의 문법을 소개하였고, 예술을 논할 때 유럽영화의 감독들을 예로 들었다. 나는 이 책들을 그냥 외웠다. 그것이 내가 교육받은 방식이다. 이해를 통해서 배움을 청한다는 고상한 방법도 있지만 그러나 일정한 수준까지는 결국 암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이를테면 역사의 어떤 선을 긋기 위해서 연표를 외우는 것이 필요하다. 시를 느끼기 위해서 그냥 입에 붙을 만큼 외우는 것은 한 가지 방법이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에도 무심코 내 마음대로 인용할 만큼이 될 때 어느 순간 문득 그 시가 이해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내가 외운 대로 영화를 보았다. 한국영화는 정말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 쇼트는 성립되지 않았으며, 도대체 그걸 서로 붙이는 방식은 책에서 절대로 하지 말라는 방식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는 더 나빴으며, 연기자들은 대사를 카메라 앞에서 그냥 외우고 있었다. 그게 무슨 미학도 아니었고, 음악은 거의 돌려막기를 하듯이 여기서 쓴 선율이 저 영화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개봉작의 대부분을 (그 당시에) 동시상영을 하는 재개봉관에서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수많은 한국영화를 보아야 했다. 그 영화들은 나를 한국영화로부터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국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간 다음이다. 그건 문학의 영향이다. 그때 내가 읽었던 계간지들은 근대화가 거의 황폐하리만치 때려 부수고 있는 ‘한국적인 것’을 찾고 있었다. 나는 문학의 자리에 영화를 놓고 그 글들을 다시 읽었다. 그런 다음 의식적으로 한국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임권택 감독의 <족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1979년의 일이다.

아름다운 영화 <족보>, 그리고 임권택 ‘監督’

영화 <족보>는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믿을 수 없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족보>는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영화적 문법과 다른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게 이상할 정도로 어떤 감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한국 가옥 안에 들어가서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라고 말하면서 정작 할리우드영화의 문법으로 진행되는 영화들을 보면 뼛속 깊이 식민지가 되었구나, 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그걸 보면서 한국영화의 벗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장님이 따로 없구나, 라고 탄식하게 된다. <족보>는 그런 영화들과 차원이 달랐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화면이 아니라 그 쇼트의 진행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우아함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내가 이제까지 읽은 책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가 너무 신기해서 그 자리에서 두 번을 보고 나왔다. 그런 다음 영화관을 나서면서 감독의 이름을 보았다. 포스터에는 ‘監督 林權澤’ 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때에는 포스터에 모두들 한자로 이름을 썼다.

나는 그 이름을 찾아서 계속 영화를 보았다. 임권택 ‘監督’ 영화들은 계속 만들어졌다. 어떤 영화는 훌륭했고(<짝코>, <깃발 없는 기수>, <만다라>, <안개마을>, <불의 딸>, <길소뜸>, <티켓>) 어떤 영화들은 너무 나빴다(<아벤고 공수군단>, <오염된 자식들>, <나비 품에서 울었다>), 임권택 ‘監督’ 의 영화에는 한국영화의 나쁜 점과 한국여화라고 믿을 수 없게 훌륭한 면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여화들을 본 다음 질문하고 싶어졌다. 임권택,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임권택 ‘監督’의 영화들을 이해하면 한국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하자면 그것이 내가 이 책을 만들고 싶은 거의 유일한 이유였다. 내가 이 책을 준비할 때 임권택 감독님은 83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84번째 영화 <씨받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장난 아닌’ 인터뷰를 시작하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11월 둘째 주 화요일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지금은 그 모습만 남아 있는) 영화진흥공사 건물 옆 난다랑 커피숍에서였다. 그날은 매우 화창했지만 바람은 몹시 차가웠다. 시간에 맞춰 나갔지만 감독님은 이미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 옆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자리였다.

지름도 눌변이시긴 하지만 그때는 상대방이 여간해서는 알아듣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감독님을 만나기 전에 연출부를 했던 관지균 감독님이 내게 충고하듯이 말해주었다. “만나서 인터뷰를 하려면 그냥 부처님 시중들듯이 알아서 해야 할 거예요.” 만나자마자 무슨 말인지 알았다. 감독님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더니 그냥 한마디 툭 던졌다. “나에 대해서 뭐 물어볼 말이 있어요?” 나는 장황하게 이 책의 의미를 설명했고, 내가 얼마나 관심 깊게 감독님의 영화를 거의 지난 십 년간 보았는지를 다소 호들갑스럽게 늘어놓았다. 감독님은 근야 쳐다보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말에는 너처럼 어린 애가 내 삶을 이해할 수 있겠니,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냥 영화나 분석하면서 책이나 보지 너처럼 어린 애하고 내가 삶을 돌아보면서 영화를 논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하셨던 같다. 물론 맞는 말이다! 나는 그때 아직 너무 어렸다. 하지만 나는 정말 알고 싶었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은 나의 질문을 수락하셨다. 아니, 차라리 내 열정과 호기심을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인터뷰는 다소 전투적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거의 밤을 새워가면서 질문을 준비했고, 그런 다음 아침에 만나서 저녁까지 진행되었다. 한번 시작되면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매일 하는 것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지치면 그 대답이 짧고 단순해지기 때문에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격일로 진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감독님은 그때 다음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많은 시간을 훔칠 수 없었다. 이 인터뷰가 처음부터 화기애애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서로 긴장을 했고,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감독님의 신뢰가 생기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두 번의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 감독님은 그냥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 참, 장난이 아니네.” 나는 그 말이 최대의 찬사로 들렸다. 하지만 종종 질문과 대답은 어긋났고, 서구 영화문법을 책으로 배운 나는 현장에서 오로지 영화를 배우면서 영화를 깨달아간 감독님에게 같은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단어를 골라야만 했다.

무엇을 위한 빈 화면인가?

<길소뜸>의 한 장면을 설명해야 할 대목이었다. 이야기는 다소 복잡하다. 해방 직후 소녀 화영의 가족은 부친의 친구인 소년 동진의 집에서 살게 된다. 그러다가 역병으로 화영의 가족이 죽고 그런 다음 화영은 동진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다가 동진과 화영은 서로 사랑에 빠지고 화영은 임신을 하게 된다. 둘을 남매처럼 키우던 동진의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고 게다가 아직 고등학생인 두 사람을 생각해서 화영을 친척집에 보낸다. 둘이 헤어진 사이에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그만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진다. 그런 다음 서로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는 동안 동진은 피난길에 도움을 얻은 이의 은혜를 갚고자 그의 눈먼 딸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의 삶을 산다. 동진과 화영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다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벌인 여의도 만남의 광장에서이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절반이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강원도 춘천에 가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다.

내가 질문을 한 대목은 만남의 광장에서 화영을 만나고 난 다음 집에 돌아와서 눈먼 아내 곁에 동진이 눕는 장면이다. 이 대목을 임권택 감독님은 4분 30초의 롱 테이크(한 장면을 편집하지 않고 길게 찍는 촬영)로 찍었다. 동진이 집에 와서 잠자리에 눕자 옆에 있던 눈먼 아내가 다짜고짜 묻는다. “그 여자 만났죠?” 다른 여자를 만났을 때 남편의 마음을 세상에서 제일 예민하게 알아채는 여자는 물론 아내이다. 동진은 대답한다. “누구?” 그러자 아내가 대답한다.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어디 나도 그 여자 한번 만나 봅시다.” 이 대목을 찍으면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인 마음을 따라가기 위해서 편집하지 않고 롱테이크로 촬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말을 하면서 아내는 화면의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남편 동진은 고개를 돌리고 누워서 등으로 대답하게 동선을 연결시킨 것이다. 그때 화면은 사실 영화적으로 텅 빈 것이다. 그저 대사만 들리게 찍힌 이 장면은 인물을 놓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건 달리는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라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액션을 찍은 것이다. 움직이라고 해봐야 이 작은 동작을 놓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실수이다. 게다가 이 장면은 매우 공들여 찍혔다. 나는 이미 영화에서 많은 롱테이크 장면을 보았으며 그에 관련된 많은 글을 읽은 다음이었지만, 그러나 이 장면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보기 위해서 이 빈 화면을 찍었는가?

“그게 한국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오”

나는 예의를 갖추긴 했지만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질문할 때 단호해진다. 그런데 질문을 던지자 임권택 감독님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오히려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냥 한마디로 대답했다. “그게 한국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오.” 나는 이 이상한 대답 앞에서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반문했다. 그러자 감독님이 말씀을 덧붙였다. “그게 염치요. 아무리 겉으로는 아닌 척하려고 해도 자기와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아온 아내를 곁에 두고 마음속에 품어온 여자를 만나고 온 다음 집에 돌아왔을 때 그걸 아내가 물어보자 그게 속으로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을 게요. 하지만 그 남자는 그대로 그 여자를 만났을 거요. 그러니 그 속내를 어찌 이해를 못하겠소만, 그래도 그 처지에 놓인 남자의 얼굴을 내가 어떻게 똑바로 바로 본단 말이오, 그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은 얼굴을. 그게 한국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인 거요. 그게 영화적으로 어떻게 보인다 할지라도,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영화가 그걸 만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땅의 삶의 예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러니 그걸 어떻게 빤히 들여다본다 말이오?”

나는 그 대답을 들은 다음에 멍해졌다. 더 이상 그날은 인터뷰를 진행할 자신이 사라져버렸다. 거기서 인터뷰를 끝냈다. 감독님에게는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여기까지만 하면 좋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런 다음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비유법이 아니라 정말 눈물이 났다. 너무 부끄러워서 거의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이제까지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도대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쇼트의 활동, 카메라의 자리, 인물의 동선, 신의 구성, 시간의 지속이라는 문제는 삶의 기호의 한 표현이라는 비밀을 나는 알지 못했던 거시다. 물론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구체적인 순간 앞에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시청각적 체험을 기꺼이 삶 안의 세계에 복종시킨다는 문제. 비로소 내가 알고 있던 영화의 개념들과 삶의 기호들이 서로 함께 껴안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차라리 좀더 나아가서 영화를 한다는 문제가 결국은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와 완전하게 동일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에게 영화에서 그 장면을 찍는가, 마는가, 라는 문제는 그 세상이 거기 있는가, 없는가, 의 질문이 되었다. 다소 단호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영화는 이 대답의 이전과 이후가 있다.

종종 내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그건 제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