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TV』 1994.01.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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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고질병


한국영화를 망치는 네 가지 병이 있다. 이건 정말 1994년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고쳐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병세가 너무나 깊어서 이제는 가망이 없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우선 한국영화의 그 뿌리깊은 해외 영화제 콤플렉스이다. 이 증세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해외 영화제에서 무슨 상이라도 하나 받으면 마치 ‘품질 보증서’라도 받은 듯이 온갖 매스컴이 떠들썩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해외 영화제란 일종의 마켓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깐느영화제든, 아카데미상이든 유행에 따라서 돌고 돈다. 그들은 영화라는 상품을 계속 새롭게 포장하기 위해서 영화제를 만들어냈으며, 여기서 유행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그랑프리가 그 해의 최우수 작품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좀더 정확하게 그랑프리란 ‘올해 우리 영화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유행에 민감하고 관객들 입맛에도 잘 맞을 것 같은 영화 중에서 가장 무난한’ 영화를 뽑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제 수상이란 치열한 로비 활동과 영화제 자체의 성격이 서로 얽혀들고 격려해가며 나눠 먹는(!) 것이다. 정말 이 수상은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건 마치 소설에서 노벨상 수상작가들이 바로 문학에서의 정상이 아닌 것과 같다. 실제로 거장 감독들의 걸작들이 생각보다 상복이 없는 것만 봐도 지나치게 해외 영화제에 매달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두 번째, 한국영화는 성공작을 베껴먹고는 전원 몰살당한다. 이건 좀 심한 표현일까? 그렇지 않다. 적어도 이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국영화 기획자들의 이 뻔뻔함과 대담무쌍한 졸속주의에 혀를 내두른다.「장군의 아들」이 성공하면 액션영화 붐이 몰아 닥치고,「서편제」가 성공하면 앞을 다퉈 소리꾼을 모셔다가 카메라 앞에 세워 놓는다.

어디 그뿐인가? 이 베껴먹기는 아무런 기획적 노하우가 축적되지 못하고, 그저 동물적인 본능으로 시장에서 살아남게 만든다. 남이 하면 나도 한다는 무사 안일주의와 아무런 노력도 없이 훔쳐서 한몫 잡으려는 승부정신은 이제 정말 당장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한국영화 자본가들의 섹스에 관한 그 천박한 신념(!)이다. 이상하리 만큼 한국영화는 벗는다. 별 이유도 없이 옷을 벗고, 그래서 화면도 에로티시즘을 느끼게 만들기는커녕 이 사람들 왜 이러자고 당혹스러운 감정만을 불러일으킨다. 위험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그 장르나 작품성, 이야기에 관계없이 무조건 벗는 장면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이 신념을 깨기 위해서는 차라리 포르노를 허용하는 편이 낫다. 정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한국영화는 벗는다. 이유도, 결말도 없다. 기획자들은 그것이 한국영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스펙터클’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네 번째, 또 한편으로 그 심각한 예술 지상주의도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물론 여기서 진지하고 진심으로 삶의 문제를 따져 물으려는 그 본질에 충실코자 하는 예술가들을 단두대에 올려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영화를 난해하고 무슨 소리인지도 알 수 없는 관념적인 대사가 줄을 이어 등장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이 있다. 그건 정말 영화의 진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화가 정말 예술이 되는 것은 그것이 예술을 목표로 했을 때가 아니라 그 반대로 영화가 더욱 더 현실 주의로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 고민하고 반성할 때이다.

그러나 어줍잖게도 매스컴과 비평가들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단어로 포스트모던한 경향, 예술로 승화된 영상시, 빛나는 이미지의 조각이라며 동조하고 지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정말 관객들을 쫓아내는 행위이다. 한국영화가 예술이기 위해서는 예술이 아니라 자신이 서있는 그 현실로 더 깊이, 더 심각하게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