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에 뒤 시네마 - 영화비평의 길을 열다』 2013.05.01.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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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카이에 뒤 시네마》를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면서 내 눈으로 처음 본 것은 그때 남산에 자리한 영화진흥공사(지금의 영화진흥위원회) 도서실에서였다. 하루 종일 텅 빈 도서실. 그해 겨울 내내 나와 도서실 사서가 전부였다. 이따금 누군가 시나리오를 뒤적여보기 위해 찾아왔지만 그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찾고 나면 재빨리 복사를 하고 그 장소를 떠났다. 그때 거기서 《카이에》를 처음 보았다. 1979년 1월 호인 296호였다(지금 이 잡지는 2013년 4월 호가 688호이다). 표지는 오즈 야스지로의 마지막 영화인 〈꽁치의 맛〉(불어제목은 〈사케의 맛〉이다). 컬러 영화인 이 영화를 흑백사진으로 실었다. 책임편집진으로 장피에르 보비알라, 세르주 다네, 장 나르보니, 세르주 투비아나가 있었던 시절. 여기에 스테프로 알랭 베르갈라, 장클로드 비에트, 파스칼 보니체, 파스칼 카네, 장루이 코몰리, 장폴 파르지에, 장피에르 우다르가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 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특집은 장루이 셰페르를 세르주 다네와 장피에르 우다르가 12페이지에 걸쳐서 인터뷰를 하였다. 나는 그때 막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거의 읽을 수 없는 문장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세르주 다네가 얼마나 위대한 비평가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이 잡지가 1968년 5월 전후로 해서 구조주의와 기호학, 정신분석학과 심각한 불장난에 빠져들었으며, 그런 다음 모택동주의와 얼마나 깊은 연애를 했으며, 내가 처음 읽은 그때 편집진 내부에서 심각한 내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때 그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앙드레 바쟁과 《카이에》, 그리고 누벨바그 세대와 《카이에》의 관계애 대한 피상적인 정보가 전부였다. 좀더 솔직하게 이 잡지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고작 70여 페이지에 불과한 잡지. 단 한장의 컬러사진도 없었던 잡지. 하지만 나는 항상 이 잡지가 궁금했다. 거기엔 무엇이 실려 있을까. 그들은 거기서 어떤 우정을 나누었을까. 거기엔 영화의 어떤 사랑이 담겨 있을까. 그날, 이 잡지를 처음 보면서 《카이에》는 다른 영화잡지들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저 한번 슬쩍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나는 이 잡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카이에》만을 읽은 것은 아니다. 《카이에》와 대결하고 있었던 《포지티프》는 프랑스 문화원에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국문화원에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매달 도착했고, 미국문화원에는 《필름 쿼털리》와 《필름 커멘츠》가 최신 호는 물론이고 영인본까지 쌓여 있었다. 하지만 《카이에》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무엇보다 이 잡지는 전투적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이들은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들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화제에서 성공한 영화들을 칭송하는 바보짓도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 정신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작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를 받고 한국에서는 명작 대접을 받는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에 대해서 거의 일치단결한 것처럼 별 넷 만점에 (현재 《카이에》의 편집장인) 스테판 들로름 별 한 개, 장 필리프 테세 꽝, 조아킴 르파스티에 별 한 개, 뱅상 말로자 별 한 개, 니콜라 아젤베르 꽝을 던지고 있다. 이런 순간과 마주치면 약간 멍한 기분이 든다. 물론 나는 이들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종 어떤 영화에 대해서 이들의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항상 영화를 생각하는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카이에》를 사용하는 나의 첫 번째 방법.

도대체 《카이에》는 어떻게 이런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 말하자면 이 잡지는 시네필들의 입장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도 《카이에》는 편집장이 줄기차게 바뀌어갔지만 단 하나의 질문을 각자의 방식으로 던졌다. 영화의 존재론. 내가 이 잡지를 읽으면서 배운 것은 그것을 질문하는 방법이었으며, 태도였고, 그 실천이었다. 언제나 《카이에》는 자신들의 임무를 '발견'이라고 생각했다. 저주받은 걸작의 발견. 이미 잊어버린 감독의 (재)발견. 혹은 놓쳐버린 감독의 발견.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명장면의 발견. 《카이에》의 두 번째 사용법. 일시적으로 이들의 영화 이론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과도하게 매혹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크리스티앙 메츠의 기호학에서 정신분석학에 이르는 여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지만 (깜짝 놀랄 만큼 시네필이라는 것을 보여준) 푸코나 들뢰즈의 글을 위해서 언제든지 지면을 비워두었다. 심지어 푸코는 자신이 쓴 책 『나, 피에르 리비에르』를 르네 알리오가 연출할 때 판사로 직접 출연했으며(이 얼마나 푸코다운 배역인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는 《카이에》의 편집진인 세르주 투비아나와 파스칼 보니체가 참여했다. 롤랑 바르트는 특집호의 편집장이 되어서 한 권의 《카이에》를 만들었다. 바르트느 고다르가 〈알파빌〉에 출연을 제안했을 때는 거절했지만 앙드레 테시네의 〈브론테 자매〉에는 출연했다.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자크 랑시에르는 《카이에》에 영화사에 대한 글을 연재했다. 그들은 아카데미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 만큼 반대로 영화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다. 《카이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감독들의 현장에 가서 자세한 보고서를 쓰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지금도 그 영화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1951년 4월 호로 첫 창간을 한 《카이에》는 시종일관 단 한 가지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 영화잡지는 시네필들의 진지이다. 종종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그런 다음 때로 대부분의 대중들과 맞서는 견해를 내세워야 할 때, 혹은 심지어 내 동료들과 싸워야 할 때, 그게 두렵지는 않지만 외로운 기분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때 《카이에》는 이게 내 임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런 다음 마치 내게 위로를 하듯이 응, 우리도 마찬가지 일을 하고 있어, 라고 말하듯이 맹렬하게 싸우는 그들의 전투를 내게 펼쳐 보인다. 우정. 말하자면 《카이에》의 세 번째 사용법.

자, 나는 다소 장황하게 썼다. 에밀리 비커턴은 무려 668권에 이르는 53년간의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를 날렵하고 재빠르게 요약하고 있다. 이 귀여운 책(영어 판본은 손바닥만 한 사이즈에 본문이 150페이지밖에 안 된다)은 놀라울 정도로 당신이 이 잡지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대목만을 재빨리 뽑아낸 다음 순식간에 그 일을 해치우고 있다. 먼저 경고. 만일 당신이 누벨바그 '이후'의 영화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거나 거의 관심이 없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과 영화 제목들은 당신의 독서를 방해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만일 그런 독자라면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혹은 말리고 싶다). 말하자면 이 책은 서로 알지 못하지만 종종 시네마테크에서 마주치면서 저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하던 사람들과 극장 어딘가에서 함께 읽고 싶다는 기쁨을 느끼게 해줄 텔레파시와도 같은 종류의 책이다. 아마도 당신은 이 책을 순식간에 읽어치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 이 책을 당신 서가의 맨 앞줄에 놓을 것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음미하고 싶은 인용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종종 전투적이 될 때 그게 당신만이 외롭게 고군분투해야 하는 전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어줄 친구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당신과 똑같은 태도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그 기나긴 《카이에》의 역사의 행간 속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충고는 간단하다. 너무 빨리 읽지 말 것. 그런 다음 이 책에서 정보를 구하지 말 것. 그 대신 혼자서 영화에 대한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마다 음미하면서 한 줄씩 천천히 읽을 것. 당신은 이렇게 신나는 연애의 역사에 대한 책을 그렇게 항상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