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9.07.29.본인인터뷰

[경향과의 만남] 영화평론가서 ‘카페 느와르’로 감독 데뷔 정성일

글 백승찬·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지난 20여년간 그는 열렬한 팬을 확보했으나 그만큼의 적도 만든 영화평론가였다. 2년 전부터는 아시아 신예 감독의 디지털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영화제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고, 50세가 되어서야 영화감독이 되어 공개를 앞두고 있다. 정성일씨 얘기다.

다음달 19~25일 열리는 시네마디지털서울 2009 막바지 준비와 장편 데뷔작 <카페 느와르> 후반작업에 한창인 정성일씨를 만났다. <카페 느와르>는 9월초 열리는 제6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공식 초청됐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단 한 권의 평론집도 내지 않은 그는 올가을 첫 평론집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때 충무로에서는 “정성일이 영화 만들면 내가 평을 쓰겠다”는 영화감독이 10명을 넘는다는 농담이 돌았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써야죠(웃음). 제 동료들이 어떻게 평을 쓸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차승재 싸이더스FNH 전 대표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도 한 번 단두대에 올라가 보세요.’ 저는 영화를 본 사람은 그 영화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감독의 판단입니다. 전 영화평을 쓰면서 항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고, 심지어 충무로에서 길을 걷다가 갑자기 뺨을 맞은 적도 있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한 그의 태도, 그의 인격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나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살면 안됩니까. 왜 굳이 영화를 만들어야 했습니까.

“처음부터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20대일 때에는 영화를 만들려면 5년간의 연출부 생활을 거쳐야 했습니다. 생활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 군대에 다녀와서는 가장이 돼 돈을 벌었습니다. 잡지 키노를 만들었는데, 2년 반 만에 금융위기가 터져 필사적으로 키노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게 20년을 살아왔습니다. 이제 더는 미루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연출하려면 현장에서 육신으로 견뎌야 합니다. 육신으로 버틸 수 있을 때 영화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평론가가 지금까지 평론집을 한 권도 내지 않은 건 의외입니다.

“평론가의 글은 시의성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 버틸 수 있는 건 영화이지, 영화에 대한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내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부분에 대해 조금 관대해졌습니다. 전 지난달에 쓴 글도 안 읽습니다. 붙들려 있으면 새로운 글을 못 쓰니까요. 예전에도 책을 내자는 제의가 많이 왔는데 ‘첫 영화 찍으면 내자’고 했습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던 출판사가 다시 책을 내자고 제의해 이번에 내기로 했습니다.”

-<카페 느와르>는 디지털로 찍었습니다. CinDi도 디지털 영화제입니다. 왜 디지털입니까.

“세상이 디지털이어서 아날로그로 찍으면 세상이 묻어나지 않는다고 할까요. 회화의 역사를 생각해 봅시다. 프레스코화가 캔버스화로 변했습니다. 프레스코화는 장인적인 숙련, 실내 작업이 필요합니다. 캔버스화는 거리에 나와 그릴 수 있고 덧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영화는 매우 적은 스태프로 기동성 있게 찍을 수 있었습니다. 캔버스화의 등장과 함께 인상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영화에 그런 혁명은 오지 않았지만 무언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캔버스화 도입 이후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가 사라졌지만, 프레스코화 시절엔 세잔이 없었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영화에서 존 포드, 장 르누아르, 오즈 야스지로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가를 맞이하는 게 올바른 태도입니다.”

-왜 아시아 영화입니까.

“연대할 수 있으니까요. 서방세계는 너무 멀고, 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는 우리 몸에 스며들지 않습니다. 아시아는 너무나 넓은데 만들어진 영화는 보여질 기회가 적습니다. CinDi가 큰 영화제는 아니지만, 아시아의 친구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왜 신인의 영화를 틉니까. 관객은 공인된 거장의 영화를 보고 싶을 텐데요.

“1989년 왕자웨이(王家衛)의 <열혈남아>가 개봉했을 때 전 그가 반드시 뜬다고 생각하고, 그를 형제처럼 생각하고 방어했습니다. 그는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으로 커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 왕자웨이와 20년째 살아가고 있습니다. 올해 영화제에는 관객과 동년배인 감독이 많을 것입니다. 전 관객이 평생 같이 갈 영화친구가 누구일지 선택했으면 합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판돈을 거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싶은 겁니다. 후배 평론가에게 얘기하곤 합니다. ‘신인을 지지할 때는 정신 바짝 차려라.’ 데뷔작을 지지했는데 두번째 영화가 가짜면, 결국 평론가도 가짜인 겁니다.”

-정성일씨의 글이 어렵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렵게 쓰기 위해 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제일 경멸하는 건 별점, 그 다음은 20자평입니다. 아도르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철학은 광고 카피가 되고 있다. 중요한 건 우리에게 더 이상 요약될 수 없는 철학이다.’ 오늘날 영화는 패션, 소비재가 되고 있습니다. 영화들이 소비되는 속도를 잠시라도 멈추고 그 영화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확보해보자는 겁니다. 제 글에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제가 쓴 글을 읽기 위해 멈춰서서 그 영화를 생각한다면 제 목표는 이뤄진 것입니다.”

-최근 한국영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놀라운 건 한국영화 제작비가 100억원이 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산업구조가 됐다는 겁니다. 영화 시장의 규모가 커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100억원 넘는 영화, 10억원 안 되는 영화로 나뉘어 중간 크기의 영화가 사라졌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죠. 큰 영화에 수많은 스태프가 결집돼 다른 영화는 스태프를 구하기 힘듭니다. 지금은 한국영화 제작구조가 바뀌는 이행기 국면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유독 영화를 좋아하는 듯합니다.

“‘88만원 세대’로 남아있는 한, 이들이 갈 곳은 극장밖에 없습니다. 유럽에는 여름에 극장에서 젊은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나기 때문이죠. 대한민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착취당하고 차도 없고 돈도 없는 젊은이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갈 곳이 어디겠습니까. 맥도널드에서 시간 때우다가 상영시간이 되면 영화를 보는 거죠. 영화산업 종사자에겐 희소식이겠지만, 젊은이들을 사랑한다면 이는 정말 비참한 겁니다.”

-영화의 매력이 사라진 겁니까.

“2000년대 초반 통계를 봤습니다. 10명 중 7명이 극장에 와서야 영화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는 테마파크에 와서 무얼 타고 놀지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보는 이유가 단지 테마파크에 가는 것보다 싸기 때문이라면 영화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인터넷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수많은 영화평이 기존 평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영화가 아직 힘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예술은 박물관에 가는 순간 끝납니다. 소설을 읽거나 고전음악을 듣고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평가하나 먼저 찾아봅니다. 하지만 영화는 보고 나오면 바로 입을 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영화에 대해 단 한 줄이라도 쉽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영화가 동시대의 예술이고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동시대 최고의 감독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허우샤오시엔(侯孝賢)입니다. 전 그에게서 배움을 가장 많이 구하고, 항상 신작을 기다리고,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놀라운 건 그가 매번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깊이를 얻는 것은 당연하지만, 새로워진다는 것은 이전 자신의 성취를 밟고 뛰어넘어간다는 뜻이니까요.”

-진보적 월간지 ‘말’에 1988년 11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연재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래 쓰게 됐습니까.

“‘말’은 굉장히 원고료가 적었던 저널입니다. 그러나 저를 필자로 써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전 그쪽에서 저를 자르기 전에는 반드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준비를 위해 연재를 중단해야 했을 때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저희 세대에 ‘말’은 특별합니다. ‘말’에 글을 쓰는 건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성일씨는 누구

그는 초등학교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6개월동안 낙타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이후 무협영화에 빠져 한국에서 개봉한 ‘모든’ 무협영화를 봤다. 중3때 <금지된 장난>을 보기 위해 프랑스 문화원에 갔다가, 우연히 장 뤽 고다르의 <기관총 부대>를 보고 ‘카메라의 존재’를 느꼈다. 월간 로드쇼 편집장을 거쳐 1995년 월간 키노를 창간했다. 2003년 99호를 끝으로 폐간될 때까지 키노는 진지한 영화 담론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데뷔작 <카페 느와르>로 갓 7세가 된 아이에게 아빠를 기억할 수 있는 기념품처럼 남겨주고 싶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