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끌레르』 2010.10.본인인터뷰

시네필의 순정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였다. 영화평론가, <키노>를 이끌었던 편집장, 영화제 프로그래머, 그리고 한 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영화감독. 어느 쪽도 크게 무리는 없지만, 결국 '시네필'만큼 이 남자에게 적합한 호칭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성일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키노>가 건재하던 시절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이제 우리는 무언가를 열렬히 탐닉하는 태도가 구식처럼 여겨지는 시공간에 떨어져 있다.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영화나 말랑말랑한 글이 차고 넘치는 통합 엔터테인먼트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 잡고 앉아 세 번쯤 정독해야 간신히 맥을 짐작할 수 있는 치밀한 영화 평론이 인기 상품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다 좋은데, 어쩐지 삶이 점점 더 시시해지는 느낌이다. 흥분할 만한 문화적인 소스는 점점 줄어들고, 짝사랑은 제인 오스틴 소설에나 나오는 개념이며, 심장박동 수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불평들이 속속 접수되고 있으니 인류가 전반적으로 재미없어진 것, 아마 맞을 것이다.

이제 막 두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정성일의 글들이 새삼스러워 보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동안 쌓인 방대한 정성일 아카이브에서 만화가 올드독이 선택한 글을 묶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와 '정성일의 한국 영화 비평 활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필사의 탐독>,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 글도, 처음 읽는 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양쪽 다 생경하게 읽힌다. 여전히 한편 한편의 영화를 필사적으로 보고, 필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풍경 속에서 혼자 고집을 부리고 있는 장인 같은 느낌을 준다. 결국 21세기에 남겨진 정성일이라는 인간형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가 생각하는 영화와 삶의 관계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훌륭한 영화를 보면 삶이 훌륭해지고, 시시한 영화를 보면 삶도 덩달아 시시해진다고 말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에게 영화를 더 잘 보고 싶다는 욕심은 세상을 더 잘 보고 싶은 욕심, 세상을 더 사랑하고 싶은 욕심에 다름 아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이 그럴싸한 말에 홀딱 넘어간 나는 당장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극장 밖으로 걸어 나올 때 갑자기 세상이 다르게 보였던 '영화 첫경험'이 환기되는, 나에게도 참으로 이상한 '사건'이었으니까.

인터뷰어가 아닌 인터뷰이가 촬영 당일의 날씨를 체크해 준 것은 처음이다. 날씨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건 영화를 촬영하면서 얻게 된 습관인가.

영화를 찍을 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조명을 활용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날 해가 뜰지, 뜨지 않을지, 몇 시에 떠서 몇 시에 질지를 확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 매커니즘에서 절대적인 거지.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 춥다, 습하다는 느낌이 남아 있는 영화가 있지 않나. 영화는 대상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공기도 기록하는 것 같다.

영화감독 정성일 인터뷰는 영화 개봉 이후로 미루고, 오늘은 두 권의 책을 낸 평론가 정성일 인터뷰다. 그래도 궁굼하긴 하다. <카페 느와르>는 대체 어떤 영화인가.

일단 상영 시간이 3시간 18분이다. 두 편의 소설을 각색했다. 하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고 또 하나는 <백야>다. 둘 다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작가가 20대에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끌렸다. 20대의 사랑, 20대의 실망, 20대의 불만. 그 공기를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백년 넘도록 버틴 이야기들이니까 무조건 믿고 갈 수 있었고.

서문에서 글을 쓰는 건 생활의 리듬이지만 책을 내는 것은 삶 속의 사건이라 망설여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영화를 만드는 것은 뭐였나.

일단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각을 했고, 음, 너무 10대 소녀 같은 말이긴 한데, 내가 10대가 아니니까 감상이 아닌 울림으로 들어줬으면 좋겠다. 이제 죽어도 괜찮아, 삶이 재밌었어, 이런 생각을 했다. 계속 영화를 찍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 더 좋겠지만 어쨌든 이제 죽어도 괜찮다.

그렇게 좋은데 왜 이제서 찍었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음악은 거장이 천재를 이길 수 없는 장르인 것 같다. 일곱 살짜리가 오페라 쓰고, 피아노 협주곡 스물일곱 곡 작곡하고, 심지어 변주곡도 다 좋고. 대체 어쩌라고(웃음). 그런데 영화는 천재가 거장을 못 이긴다. 영화는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아주 중요하다. 그건 천재적인 직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다. 세상을 살아본 사람이, 거인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것들을 품을 수가 있는 거겠지.

영화를 만들거나 보면서 점점 거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나.

아니, 다만 그런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다는 열망은 점점 강해진다. 이를테면 임권택 감독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이해해야 된다. 그 사람에게 걸맞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영화를 보고 노력하는 과정이 나를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아주 순식간에 큰사람이 되기 때문에 첫 번째 만나고, 두 번째 만날 때 큰 계곡을 건너뛰는 느낌이 든다. 나 같은 범인은 허겁지겁 쫓아갈 수밖에 없지. 하지만 허겁지겁 쫓아가는 노력의 힘을 믿는 부분도 있다. 결국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는 노력밖에 남는 게 없잖아.

2000년대에 20대를 보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이 치열한 방식으로 영화를 봤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세대의 시대정신이 있으니, 나라고 해서 혼자 자유로울 리 없겠지. 내가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미팅을 나가서 취미가 영화 보는 거라고 하면 상대방은 날샜다는 표정이었다(웃음). 당시에 접할 수 있는 영화들은 천박한 수준이었고, 영화는 산업이 아니라 구멍가게 장사였다. 그래서 영화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음란한 상상을 하게 됐지.

부모님도 영화를 좋아하는 아들을 무척 싫어했겠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마흔 살 무렵 설날에 세배를 드렸더니 요새 뭐 하냐고 물으시더라. <키노>라는 영화 잡지 만들고 영화평도 쓰고 있습니다, 했더니 그러냐, 근데 일은 언제부터 할거냐, 그러시더라고.

만나면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한 영화가 보여 주는 삶의 방식이 있다면, 그걸 해석하는 사람은 정확히 영화를 본 관객의 수만큼일 거다. 영화에 대한 평을 한다는 것이 인생 상담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게 꼭 필요할까? 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평론을 쓰나?

사실, 그 글은 나를 위해서 쓰는 거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쓰는 건 아니다. 영화 보는 게 참 행복하다. 극장에 들어가서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면 살짝 희열도 느껴진다. 그런데 영화가 주는 행복은 대부분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영화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놓았던 정보를 일순간에 어지럽히는 예술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질서라고 믿었던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음으로써, 머릿속에서 세상을 다시 한 번 정리할 기회를 주는 거지. 다시 한 번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남자만 사랑하면 한 종류 사랑 밖에 모르잖나. 그런데 여러 번의 연애를 하다 보면 사랑이란 개념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알게 되지 않나. 근데 문제는 이것만 계속 하다 보면 사람이 바보가 된다. 영화만 주야장천 보면 계속 세상이 뒤집히고 머릿속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그런 것들은 개념화하기 위해서 책을 보고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이름표를 붙여 놓는 작업을 한다. 근데 책만 읽으면 사람이 똑똑해지는 게 아니라 잡다해진다. 읽은 책의 숫자만큼 포스트잇이 붙어 있을 뿐이지 그게 내 머릿속의 서랍을 정리해주는 건 아니거든. 둘을 중재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글을, 내가 글을 쓰는 것. 하나의 글을 끝냈을 때 머릿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한번 더 창조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매일 글만 써서 카피하고 또 카피하는 진부한 느낌이 들 때쯤 다시 한 번 영화를 보고 와서 서랍이 뒤죽박죽이 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책과 영화, 글쓰기 세 가지를 같이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그중에 하나만 빠져도 순환이 되지 않는다.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어찌됐든 그것이 예술의 효용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은 좋아하는 장면이나 마음에 드는 연기를 보고 귀엽하고 표현하지 않나. 정성일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뭔가.

영화도 그렇고,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훌륭하다. 그 사람, 참 훌륭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의 표현이다. 배움을 구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을 계속 찾고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실망하기도 했고,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과정의 반복이겠지. 다만 감사하는 건 나의 경우 지역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는 거지. 홍상수, 왕가위, 지아장커 같은 사람들.

영화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배움을 구했을 것 같나.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박지성에게 축구를 안 했으면 뭘 했는지 묻는 것과 같은 거지.

<카페 느와르> 다음 영화의 한 신을 미리 찍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풍 나오는 장면이 필요해서, 작년에 태풍 왔을 때 찍어놨다. 한편으로는 이미 시작했다는 긴장감을 주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처음으로 고다르의 영화를 보았을 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같은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 그 영화를 보러 달려가는 마음은 늘 같은 것 같다. 그러나 영화관의 의미는 조금 달라졌다. 내가 영화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 영화를 보는 방법은 극장에서 보거나, 텔레비전 <명화극장>에서 보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비디오 매체가 인류 문명에 도착한 건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비디오를 태어났을 때부터 봤던 세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가 너무 좋은 거야. 그럼 계속 보러 간다. 사는 동안 그 영화를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마지막 날 마지막 회를 볼 때는 정말…, 군대 가는 애인은 3년 있다 돌아오기나 하지(웃음).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필사적으로 보게 된다. 영화를 본 다음에 그 장면은 서른두 번째 컷이죠, 하면 사람들은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냐고 하는데, 우리 세대는 다 그렇다. 나만 유난을 떠는 게 아니다. 그렇게 훈련이 된 거지.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영화에 포함되는 거라는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영화 속 장면을 기억하는 능력 자체가 퇴화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에 영화는 기억의 예술이다. 그래서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달음에 달려가야 한다.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가 갖고 있는 감정을 떠받치고 있는 기억의 능력이 활용되는 방식, 그것들이 뇌 속에서 스크리닝되는 방식, 브레인이라는 스크린이 활용되는 방식, 이른바 시네마틱한 체험이라는 건 그런 거지. 그것에 대해서 무슨 게임 체험하듯이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에는 좀 동의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단정지어 말하고 싶다. 그건 이미 영화가 아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를 봤다. 이제는 어떤 영화를 기다리나.

딱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내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영화를 기다린다. 감동을 주는 영화는 두 번째 보면 대부분 가짜다.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영화에 대해서 질문하게 만들고,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던 영화들은 항상 감동이 아닌 쇼크를 줬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런 영화적인 쇼크를 받은 것이 언제인가?

한 달 전이다. 아피찻퐁위라세타쿤의 9분짜리 독립영화 <에메랄드>를 보는 순간, 왜 이걸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더라. 그 영화는 테크닉적으로 복잡한 영화가 아니라, 누구나 카메라만 쥐면 찍을 수 있는 영화다. 근데 영화사 백년 동안 아무도 생각을 못했던 방식인 거다. 보는 순간 사람이 멍해지는 거다. 나의 영화에 대한 기술, 지식, 질문, 전체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항상 그런 순간을 기다린다.

EDITOR 김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