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저널』 1995.05.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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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상, 거듭날 방법은 없는가
- 이해관계 개입 의혹 벗어나야


두 개의 영화제를 치뤘다. 하나는 한국영화의 가장 커다란 잔치라는 대종상이고, 또 하나나 헐리우드영화의 한판승부인 아카데미영화상이다.

우선 영화제라는 이데올로기에 관하여. 영화제는 놀랄 만한 ‘발명품’이다. 예술에 관한 모든 페스티발은 자본주의 시대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영화제(또는 영화상)는 상품의 논리를 관철시킨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영화의 상품적 성격은 그 무엇보다도 복제에 있다. 다른 예술들은 ‘원본’을 중요하게 여기지만(모조란 곧 거짓이며, 사기이고, 거의 상품적 가치가 없다), 영화에서는 원본이란 기계적 의미의 필름일 뿐이다. 한 편의 네가를 만들어 수없이 복제하면, 그것은 모두 원본(!)이 되는 것이다.

산술적으로 이야기하면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제작비 차이는 하늘과 땅이지만, 일단 완성된 필름의 복사비용은 서로 ‘동일’하다. 그래서 모든 제작들은 더 많은 영화관, 더 많은 수출국, 더 많은 재개봉을 원한다.

그런데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면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철수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의 수익은 발생하지 않는다. ‘죽은’ 영화를 창고라는 무덤에서 다시 살려낼 수는 없을까?

여기 영화제가 끼어드는 것이다. 지나간 영화를 놓고 다시 소란을 피우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화산업과 매스컴 사이의 공모가 이루어진다. 영화제는 지난 해에 만들어진 영화 중에서 최고 걸작을 가리겠다는 공언을 내걸고, 그때부터 후보작을 발표한다. 사람들은 그 영화들을 봐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히고, 후보에 오른 영화들은 재개봉의 영광을 누리거나 잊혀진 비디오에서 렌틀 차트로 기어이 기어오른다. 어찌 이보다 더 훌륭한 패자 부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영화상 자체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대종상과 아카데미상을 보면서 그 두 가지 영화상의 다른 산업적 프로젝트와 그 수행방식을 지켜보려고 한다.

대종상은 두 가지 목표의 기이한 뒤얽힘 때문에 결코 성공하기 어렵다. 그 하나는 이 영화상이 단일기업(삼성)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고, 또 하나는 영화 내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대종상에 뛰어들어서 얻은 것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영화사업에 끼어든 삼성이 이제는 거꾸로 영화산업에 대한 탐색보다는 후원자라는 이유로 항상 대종상 때마다 의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떠나고 싶어하고, 만일 떠난다면 대종상은 거의 혼자 힘으로 버티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다시 영화진흥공사의 전면 개입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고, 그것은 ‘관’의 개입이라는 또다른 함정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종상을 얽는 또 하나의 위기는 한국영화 관객 자신이다. 이것은 아주 뿌리깊은 것인데, 70년대 이후 오랫동안 대종상이 정부 주도하에 유신 이념을 전파하는 영화 ‘치켜 세우기’로 전락한 이후 불신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래서 대종상을 수상하는 영화는 ‘지루한’ 작품이라는 편견의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대종상은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가?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은 영화의 행사이며, 영화인의 축제이며, 영화관객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의심받아온’ 대종상 심사가 영화인과 영화관객 누구로부터도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얻어내어야 한다. 그래서 아카데미상처럼 수상작에 대한 비판은 있을지언정 ‘혹시 개입되었을지 모르는’ 이해관계 때문에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만일 영화상이 필요악이라면, 우리는 차선책을 선택해야만 한다. 영화상이 자본주의의 논리라면 오히려 더 철저해지는 편이 낫다. 그래서 ‘끔찍할 정도’의 경쟁과 그 과정에서 ‘만인에 의한 만인의’ 적자생존 논리를 ‘투명하게’ 거쳐서 그 어떤 개입없이 선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관객은, 소비자는, 최선의 상품을 선택받을 자격이 있다. 만일 자본주의라면, 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면, 영화도 그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을 따르는 편이 ‘좋은’ 상품을 낳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