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2009.09.22.(722호)본인인터뷰

[김혜리가 만난 사람] 영화평론가·영화감독 정성일

아이처럼, 사제처럼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메일 끄트머리에 그렇게 묻곤 한다(물론 이는 상드린 베이세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와 서신과 메일을 주고받아본 사람이라면 정성일이 계절의 기척에 어느 문학소녀보다 더 열렬히 감동하는 사람인지 알 것이다. 나는, 할 수만 있었다면 그가 메일에 단풍잎이나 꽃잎을 동봉해서 보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난 6월 첫 영화 <카페 느와르>의 마무리 작업 중이던 그는 이렇게 적어 보냈다. “세상을 둘러보면서 매일 아침 편집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저는 단 한번도 예술가의 마음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영화를 보러가는 시네필의 마음으로 그렇게 편집실로 향합니다. 이 영화가 좋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김혜리씨는 매일 조금씩 무얼 더 사랑하고 계십니까?” 나는 질문의 답을 얼른 찾지 못해 무척 부끄러웠다. 무례를 감수하고 쓰자면, 내가 아는 정성일은 천진한 사람이다. 존경하면서도 귀여운 어른이라는 인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천진한 사람만이 그토록 엄격한 외골수일 수 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두달 동안 낙타만 그렸던 초등학교 2학년생이, 영화에 영혼을 강탈당했다고 느꼈던 10대 소년이, 중년에 이르러서도 “삶에서 반칙하지 않는 한 영화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여전히 주저없이 말할 때 우리는 그가 대책없는 순정파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1990년대 한국의 영화 평단과 저널리즘은 서구 영화사에서 최초의 비평가들이 등장했던 시기와 유사한 상황을 통과했다. 영화가 현대 세계에서 미학과 윤리를 중재하는 중요한 예술이라는 것, 그리고 영화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마저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하는 시기였다. 정성일은 한국 관객이 이른바 ‘숨은 비디오’를 통해 영화를 재발견한 19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월간지 <로드쇼>를 이끌었고, 예술영화와 조우한 대중이 해석의 참고서를 구하던 1990년대 중반 이후 <키노>를 만들면서 강렬한 지침과 노선을 제공했다. 순정에서 비롯된 비범한 헌신과 능력은 그에게 권위와 카리스마를 부여했다. <키노>의 한 기자는 정성일 편집장이 기자들을 늘 존댓말로 대하며 존중했음에도 그가 휘갈겨쓴 글자의 정체가 뭔지를 차마 직접 되묻지 못해 기자들끼리 둘러서서 의논한 적도 있다고 회상한다. 적잖은 독자들이 <키노>가 잘난 체한다고 공격할 때면 그는 단호했다. “왕가위, 차이밍량, 켄 로치가 잘났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는 영화평을 읽는 이에게 다른 예술비평의 독자만큼의 인내를 정당하게 요구했다.

우리에겐 많은 영화평론가가 있다. 그러나 개별 작품의 비평을 넘어서 영화 매체와 우리 삶의 관계를 고민하고, 나아가 재편하려고 시도하는 비평가는 손꼽는다. 동료 허문영 평론가는 정성일이라는 존재가 영화계에서 갖는 무게의 이유를 이렇게 표현한다. “누군가 정성일의 어떤 하나의 평론보다 더 뛰어난 평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정성일처럼 매순간 모든 영화에 대해서 평론가의 자의식으로 대결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한국에서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정성일의 평론과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는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영화와 현실의 벤다이어그램이다. 그는 숏을 탕진하는 일과 허접한 영화를 보는 일은 인생을 낭비하는 길이라고 여긴다. 심심풀이로 영화를 보는 순간 심심풀이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라고 외친다. 영화는 세계의 표면을 건드리기에 세상의 약속을 불가피하게 끌어들이며 따라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세상의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요컨대 그에게 영화는 세계의 거울이 아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사랑과 존재방식을 포괄한 더 큰 무엇이다.

그리고 그는 쉰이 된 올해 염원해온 첫 번째 영화 <카페 느와르>를 완성했다. <카페 느와르>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기초한 1부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뒤따르는 2부로 이뤄진 3시간17분의 여정이다. 주인공인 교사 영수(신하균)는 학생의 어머니인 미연(문정희)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결국 “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어요”라고 선언한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영수는 동료 교사 미연(김혜나)의 애정을 외면하고 자기를 물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한 남자를 기다리다 지쳐버린 여자 선화(정유미)를 밤의 청계천에서 만나 순간의 희망을 맛본다.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에 서울의 익숙한 풍경이 스며들고 <빨간풍선>부터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까지 많은 영화가 중간중간 고개를 내민다. 죽어가는 시간이 급조된 시간과 싸우고 꿈과 현실, 텍스트와 육체가 팽팽히 겨룬다. 아마 이것은 정성일이 보는 2009년 서울의 표면과 의식을 기록한 지도일 것이다. 그는 두 번째 영화의 한컷을 이미 찍어두었다고 했다. 그 작은 필름 조각을 부적처럼 품에 안고 그는 두 번째 영화의 입구에 이르는 날까지 다시 영화를 보고 읽고 쓸 것이다. 고운 햇살에 무심코 손을 내미는 아이처럼, 매일 믿음을 다잡는 사제처럼.

마침내 감독으로서 첫 영화 <카페 느와르>를 완성하셨습니다. 오랫동안 간절히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으면서도 좀더 적은 돈과 인력으로 착수 가능한 단편이 아니라 굳이 장편, 그것도 상업적으로 개봉할 장편영화를 고집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그 질문을 정식화하면 제도권 안에서 훈련된 스탭들과 최소한의 상업적 베이스를 가진 예산 규모의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뭐냐는 거겠죠? 그래야만 그러한 제도 안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에 관한 질문에 제가 대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어요. 안에 들어가 실천적으로 답을 얻는 게 중요했어요.

충무로에서 현재 만들어지는 영화에 대해 제대로 사고하기, 제대로 쓰기 위해서란 뜻인가요?

그렇게까지 실용적인 동기는 아니고요. 다만 동시대 감독들과 긴 인터뷰를 하면서 뭔가 충분히 대답을 얻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란 생각을 했어요.

<카페 느와르>의 초기 제목은 <디 라이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습니다. 18세기 독일 소설을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영화에서는 소설에서 베르테르가 잠시나마 로테를 사랑해 행복했던 시기가 완전히 빠져 있는데 영화의 출발점을 어떻게 잡으셨나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하 <베르테르>)은 질풍노도기 낭만주의 소설이지만 핵심은 왕정 귀족사회로부터 자본주의로 건너가는 이행기에 두 계급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죠. 귀족적 시대정신에 대한 관찰이자 그 정신적 몰락을 서술한 서간체 소설입니다. 전 원래 그 이야기의 멜로드라마 자체는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없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베르테르>를 읽었는데 유부녀를 사랑한 이야기라고만 알았지 아무도 그 소설이 권총 자살로 끝날 거라고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어요. 게다가 그 죽음은 한방에 끝나는 게 아니라 피를 낭자하게 흘려가면서 새벽까지 고통을 겪으며 지속되죠. 어린 마음에 큰 쇼크였어요. 이 죽음의 연장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서른이 넘어서 다시 들춰봤을 때 아 이건 계급에 관한 이야기구나. 말하자면 하나의 시대정신이 몰락하는 데서 존재한 고통을 최대한 연장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거죠. 영화의 시작점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또 <베르테르>를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앞 이야기를 생략하고) 거기서 시작해도 상관이 없다고 판단한 거죠.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분할될 때 우리는 두 부분의 관계를 묻게 됩니다. <카페 누아르>는 110분 시점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주 상투적으로는 두 부분은 각기 삶과 죽음입니다. 1부의 원작은 괴테의 18세기 독일 이야기(<베르테르>, 2부의 원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19세기 러시아 이야기(<백야>)예요. 즉, 혁명 전 유럽과 혁명 뒤 러시아죠. 한쪽이 액추얼한 가능성이라면 다른 하나는 버추얼한 가능성이죠. 주인공 영수를 따라가면서 두개의 시대정신이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는가를 보여주는 게 중요했어요. 어느 쪽에 마음을 기댈지는 관객의 선택이에요. 그래서 “부활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는 보는 사람이 선택할 문제”라는 대사를 배우의 입을 통해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졌고요. 저는 우리 시대가 정치나 자본주의에 대해, 자기의 삶에 대해 너무 낭만적인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발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영화 중간에 브레이크를 넣을 수밖에 없었어요.

서울서 살아온 내 기억의 아카이브를 재현

<카페 느와르>는 ‘세계 소년 소녀 교양 문학전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그건 “이 영화를 이렇게 보아주세요”라는 저의 가이드라인입니다. 관객의 태도에 대한. 예를 들어 홍상수 영화를 볼 때는 직관이 필요하고 김기덕의 영화를 볼 때는 믿음이 필요해요. 봉준호의 영화는 아이디어를 보는 것이고요. <카페 느와르>를 볼 때에는 교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교양으로 볼 수 있는 영화도 한편쯤은 한국영화에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했어요.

영화를 보면서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이 떠오르더군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불현듯 사소한 화제로 대화를 시도하고 어떤 가능성이 열리는 풍경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분한 비유네요.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요. 대사 내용은 영화를 위해 쓰고 인용한 것이지만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제가 살아오면서 본 사람들에서 나왔어요. 예를 들어 영화 후반부에 배달된 편지를 카페 테이블에서 불태워버리는 여자가 나오는데 그건 종로2가 맥도날드에서 제가 직접 본 광경이에요. 한 여자가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더니 핸드백에서 성냥을 꺼내 편지를 태우더군요. 매니저가 달려와서 불을 끄고 물론 영화와는 달리 뺨을 때렸어요. 전 제가 상상한 것을 영화로 찍는다면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필사적으로 내 기억 속의 사람들을 끌어모았어요. <카페 느와르>는 말하자면 서울에서 살아온 내 기억의 아카이브이기도 한 것이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장소는 천년 타임캡슐을 묻어놓은 장소입니다. 그리고 세종로 일대, 덕수궁 대한문, 광화문 재건현장, 청계천 등지의 트래블링숏이 이어지죠. 그리고 여러 한국영화의 인용이 끼어듭니다. 이 영화는 서울의 지도라는 점이 명시되다시피 하는 셈인데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서울민국이잖아요. 서울을 정확히 말할 수만 있다면 한국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의 로케이션이 공간이나 장소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거라고 볼 때 <카페 느와르>의 로케이션들은 모두 역사를 내포한 ‘장소’예요. 촬영장소를 찾을 때 둘 중 하나였어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장소와, 내가 어렸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변한 장소. 그래서 그 두 장소를 이어붙이면 몽타주의 간격에 역사가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보면 어딘지 아는 장소를 택했어요. 그래야 그곳에 대한 기억과 정보 지식을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카페 느와르>를 보는 관객이 피부로 제일 먼저 느끼는 특징은 문어체 대사와 그것을 낭송하듯 말하는 연기 스타일일 것입니다. 연기 연출의 원칙이 있었다면요?

알다시피 그 대사들은 원작에서 꾸어온 것들이에요. 저는 그 텍스트를, 일상에서 할 리가 없는 그런 말들을, 육신이 어떻게 견디는지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가능하면 원작을 읽지 말라고 했어요. 연기자가 그 대사를 하기 위해선 하여간 자기 육신 안에 끌어들여 억양을 넣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경험화해요. 요컨대 전 모든 배우들이 대사를 자기 방식으로 오독을 하길 원했어요. 그러면 같은 괴테의 텍스트라도 대사들이 다성적(polyphonic)이 되잖아요? 그 느낌을 영화에서 얻고자 했던 거예요. 텍스트 리얼리즘은 정확히 그런 의미예요. 사실적이라는 말은 다양한 뜻이 있는데, 18세기 소설을 제가 사실적으로 찍을 순 없죠. 그렇다고 각색은 안되니, 그대로 말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머지않아 첫 번째 평론집도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두권의 인터뷰집 등 여러 책을 엮거나 공저했지만 단독 평론집은 처음인데요.

제가 이제까지 쓴 글 중 일부에 대한 독후감을 만화가 올드독 정우열씨가 그리는 책입니다. 온전히 그 책만을 위한 두편의 새로운 글을 실을 거예요. 하나는 ‘나는 왜 올드독과 작업하는가’에 관한 글, 또 하나는 ‘영화를 연출한 이후 영화비평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글입니다. 영화를 만든 다음 쓰는 첫 글이라는 점에서 제 글쓰기의 새로운 0도라고 할 수 있겠죠.

흔히 나오는 평론집들과 어떤 구분을 짓기 위해 그런 포맷의 책을 택하신 것 같습니다. 영화평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늘 새로 씌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나요.

“이것이 이 사람의 생각이다. 진수다”라고 정의되기 싫었어요. 책을 낼 때 가장 큰 두려움은 그로 인해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무르는 일이거든요. 실은 정말 쓰고 싶은 책이 두권 있습니다. 한권은 영화용어집이에요. 예컨대 ‘슬로모션’ 이라면 눈에 보이는 슬로모션 대신 영화에서 감정의 슬로모션이란 무엇인가, 정상적으로 화면은 지나가는데 슬로모션처럼 느껴지는 순간 영화에서의 지각과 오성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영화들의 장면 예를 갖고 기술하는 책이죠. 11개 정도의 개념을 뽑아놓았어요. 또 다른 책은 영화를 찍으면서 계속 읽었던 영화에 관한 글 열편에 대한 주석이에요. 원글보다 훨씬 긴 주석이 될 거예요.

떠난 친구와 영화 노트의 추억

오랜 지인이나 동료에게도 개인적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시는 걸로 압니다.

그냥 불편해서요. 응석부리는 것 같고.

집안의 장남이시고, 아들의 영화 취미에 대해 아버님이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읽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도 인정은 안 하시죠. <키노>를 창간한 이듬해에 세배를 드렸는데 문득 요즘 뭐하고 사니 물으셨어요. 영화잡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런데 넌 언제부터 일을 하고 살 거냐”고 하시더군요. 말하자면 취미로 인생을 사는 건달처럼 보였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 교실 안이나 밖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나요?

친구와 영화를 같이 보러다닌 건 중학교 2학년이 마지막이었어요. 그중 가깝던 한 친구가 청소를 안 하고 갔다는 이유로 담임교사에게 뺨을 맞고 되받아쳤어요. 그 일로 친구는 학교를 떠났고 이후로는 이상하게 다른 아이들과도 소원해졌어요.

영화가 선배의 제일 오래된 친구군요.

삶의 중간중간 끼어든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영화는 줄곧 제 곁에 있었던 유일한 친구인 셈이죠. 친구들과는 실망, 배신, 이별이 있었지만 영화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요.

선배가 10대였던 1970년대 초 서울 성북구의 극장 풍경은 어땠나요?

미도, 미아리, 명륜, 대지, 수유 극장 등 8곳 정도가 초등학생 때 제 영역이었고 중학생 이후로는 더 멀리까지 갔죠. 그맘때 극장이라면 항상 위험한 장소였어요. 걸핏하면 형 또래 남자아이들이 주머니를 털어서 늘 딱 극장값만 들고 다녔어요. 물론 돈이 없으면 맞지만 어린 마음에 돈을 뺏기면 다음 영화를 못 보니 차라리 맞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용돈을 모으고 점심을 사먹겠다고 도시락 대신 돈을 받아 서너끼 모으면 영화를 볼 수 있었죠. 옆자리에서 더듬던 그 많던 아저씨들은 지금은 다 어디 가셨나 궁금해요. (웃음)

듣고 보니 영화만 일찍 좋아한 게 아니라 돈이 뭔지 폭력이 뭔지 또 어른 세계의 어둠이 뭔지 다 영화관에서 처음 체험하셨군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홉살 때 영화관에서 다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웃음)

중학생 때 꼭 봐야 할 영화 500편의 리스트를 작성하셨다는데, 당시는 구할 수 있는 정보량도 미미했을 텐데 어떤 자료에 기대어 목록을 작성했나요?

노트 한권 가득이었으니 500편 넘었을 거예요. 중학교 1학년 2학기에 명동의 외국 잡지 가게에서 일본의 <스크린>과 <에이가노토모>를 샀어요. 표지 보고 샀다가 답답해서 겨울방학 동안 한자와 가타가나를 조합해 독학으로 읽기 시작했죠. 팬진(fanzine, 스타의 팬을 타깃으로 한 영화잡지)이지만 일부 페이지는 전문적인 잡지여서 매월 누벨바그 베스트5, 고다르 베스트5 등 다양한 베스트5를 뽑는 코너가 있었어요. 일본 잡지를 통해 영화 정보를 구하기 시작한 거죠. 신기한 건, 노트에 영화 제목을 쓰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염원하면 어떻게든 기적처럼 볼 기회가 생기는 거예요. 응답이 와요. 영화를 보면 하나씩 노트의 제목을 지워나가는 즐거움이 너무나 컸어요. 나중에 <데쓰노트>를 보면서 내 아이디어를 도둑맞은 게 아닐까 했다니까요. (폭소)

대학 재학 중에 만들었던 8mm, 16mm영화들은 어떤 영화였는지 궁금해요.

말이 안되는 영화들이요. 영화책을 읽으면 하지 말라는 것들 있잖아요? 그걸 다 해봤어요. 180도 상상선을 지키지 않으면 숏이 안 붙는다고 써 있기에 진짜 붙여봤다니 문제가 반드시 생기더라고요. 시행착오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는 걸 알았죠. 어떤 장면은 고다르 영화와 똑같이 콘티를 짜고 되나 안되나 해봤어요. 그 감흥이 없어요. 단지 연기자의 차이도 아니고 원본과 복제의 문제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가 찾은 단어가 매직이에요. 어떤 매직이 그 순간에 필요한 거죠.

그 영화들만이 품은 ‘매직’

한국영화에 관해 영화사적 관심을 갖고 꼼꼼히 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어려서는 한국영화를 ‘도리없이’ 봤어요. 외화를 보려고 갔다가 동시상영으로 봤죠. <홍살문> <열녀문> 등, 그 문 시리즈들. 정말 싫었어요. (웃음)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을 봤어요. ‘매직’이었어요. 영화에서 문숙이 백일섭, 김진규와 헤어진 다음 시장통을 헤매는 시퀀스에서 뭔가 굉장한 걸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영화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한국영화를 찾아봤죠. 그러나 대다수가 절 실망시켰고 마침내 <삼포가는 길>은 예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했어요. 이후 임권택 감독의 <족보>를 만난 것이 1979년이었으니 긴 시간이 걸렸죠. 그리고 당시엔 민족문학 논쟁과 모더니즘 논쟁이 격렬했어요. 한국적인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문학이 던졌고 우리 새내기 대학생들도 어떤 식으로든 그 답을 맹렬히 찾고 있었거든요. 저는,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그 대답을 나름의 방식대로 구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문득 <족보>를 보는 순간 끈이 잡혔어요. 이만희 영화가 유럽영화의 사촌 같은 느낌이었다면 임권택 영화는 한국영화를 발견했다는 느낌마저 있었어요.

사회적 상황이 엄혹한 80년대 초였으니 대학생이 영화에 열정을 쏟는다는 사실에 대해 죄의식이나 부채의식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스스로 갈등을 중재했습니까?

영화는 친구들이 볼 때는 역겨운 취미였고 한심한 여가생활이었죠. 정치적이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을 취미로 삼는 것보다 저급하게 여겨졌어요. 그러나 저는 영화를 그냥 운명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하루는 종로서적에 갔는데 저 멀리서 <고다르 전집>이 ‘줌 인’으로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헉 해서 달려갔더니… <타고르 전집>이었어요. (좌중 폭소) 군대에서 제 첫사랑에게 받은 이별 통보의 마지막 구절은 “성일씨는 제가 아니어도 영화를 사랑하면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많이 행복하세요”였어요.

유학 갈 형편이 못 되어서 취직을 하셨는데, 첫 직장이 여성잡지였어요. 어차피 영화를 못하는 상황에서 굳이 그 직업을 고른 이유는 뭔가요?

3대 거짓말 있잖아요. 늙으면 죽어야지 나 시집 안 갈 거다, 돈 벌어서 유학 갈래요. 그중 세 번째 경우죠. 당시 잡지사는 삼성보다 초봉이 더 많았거든요. 더불어 글쓰는 일을 놓고 싶지 않았어요.

감독을 위해 영화평 쓴다

영화잡지를 만드신 시대로 넘어갈까요. 선배가 영화잡지를 만든 목적은 독자로서 제가 이해하기로는 계몽과 연대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를 더한다면 기록의 의미 정도?

거기 하나 더 있죠. 발견. 영화잡지는 제게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영화의 즐거움을 미리 맛본 자로서, 내가 10대 시절 영화정보를 찾아다니며 너무 힘들었으니까 뒷세대는 그걸 반복하게 만들어선 안된다는 시네필로서의 의무이자 사회적 의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인가요? (웃음)

제 이메일 아이디가 헤르메스(hermes. 전령의 신)잖아요. 하하.

잡지를 만들면서 제작자, 감독, 배우, 작가들은 비평에 무관심한 척하지만 실은 신경을 쓴다는 걸 느꼈던 경험이 있으세요?

<한겨레>에 영화평 쓸 때부터 느꼈죠. 제작자인 친구에게 새벽에 욕하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고 길을 걷다 맞은 적도 있어요. 글을 쓰면서 전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심각하게 읽을 줄 몰랐어요. 그들은 자신의 영화를 만들었으니 자부심이 있고 최선을 다했을 거잖아요. 저는 무수한 관객 중 한 사람의 견해를 쓴 것일 뿐이죠. 그런데 그걸 마치 재판의 부당함을 지적하듯 말할 때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어요.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에서 어떤 영화를 평했을 때는 제작자가 직원들과 함께 저희 집에 쳐들어온 적도 있고 따지는 걸 너머 손해배상 청구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영화평을 쓸 때 1차적으로 염두에 두는 독자가 관객인가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가요?

감독 딱 한 사람입니다. 나머지는 관심이 있으면 읽는 것이고요.

하지만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관객에게 글로 알려서 수요를 만들어내려는 의도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글은 비평이 아니라 선동이었죠.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라온다는 자본주의 법칙이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제 글에 대해 저만 어떤 영화를 보고 잘난 척한다고 오해하는데, 그런 글의 목표는 딱 하나였어요. 이 영화 정말 죽이거든? 당신들이 보고 싶다고 소문을 내서 그 목소리가 수입, 배급업자 귀에 들어가면 그들이 소원을 들어줄 거야. 만드는 사람을 염두에 둔다고 해서 글로써 그들의 영화에 변화를 일으킬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들과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죠. 그의 다음 영화가 어떤 형식으로든 대답을 포함하고 있겠죠.

1989년부터 일하신 <로드쇼>에서도 1995년 창간한 <키노>에서도 편집장의 글을 마치 격문 같은 문체로 쓰셨어요. 늘 “지금 영화는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하셨고 영화 세계를 싸움터로 파악하는 글이어서 독자에게 흡사 레지스탕스가 된 기분을 불러일으키셨죠. 일부러 그런 문체를 장기간 구사한 데에는 에디토리얼의 역할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아닌가요?

한국사회가 영화에 대해 가진 편견과 폄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경멸, 그들과 연대하고 말겠다는 절박함이 있었고 한국에서 영화가 지나치게 자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현실을 아무도 방어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비평을 비평이라고 볼 수 없는 짜고 치는 고스톱의 풍토, 말도 안되는 호의들이 있었고요. 그 와중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단결하도록 각성시키려는 내 방식의 싸움이었다고 생각해요.

<로드쇼>에는 ‘도씨에’라는 꼭지가 있었습니다. 전문성이 높아 애독자가 많았는데, 이 꼭지의 기획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당시 영화잡지는 오직 브로마이드 때문에 팔리는 하이틴 대상 잡지였어요. 그 안에서 영화를 진지하게 다룰 페이지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았고 처음에는 거의 불가능했죠.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전엔 그런 발언권을 가질 수 없었어요. 고맙게도 <로드쇼> 창간 이후 1년 동안 판매율 95%를 달성하자 사장이 제게 전적으로 편집 재량권을 맡겼죠.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키노>를 만들 순 없었어요. 기자들도 관성이 있었으니까요. 그때 김홍준 선배가 무작정 미국에서 귀국을 했고 ‘잡지 안의 잡지’를 기획해서 원고를 의뢰한 것이죠.

<로드쇼> 막바지에는 다시는 영화잡지를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편집권 침해가 있었나요?

2년 반쯤 지나서 제가 좀 막 나가기 시작했어요. (웃음) ‘도씨에’의 성격이 잡지의 다른 면으로 확산된 거죠. 칸영화제 특집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든가 하면서 사장과 부딪히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92년 7월에 제가 결혼휴가를 쓰고 회사로 돌아왔더니 사장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로드쇼> 표지가 되지 못할 이유가 있는지 설명해보라는 거예요. 결혼했으니 꼼짝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그래서 물론 안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제가 편집장을 계속할 이유도 없다고 말하고 사직했어요.

강호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들이 있어요. 언젠가 <로드쇼>에서 기자들에게 다 손 떼라고 하고 혼자서 월간지 한권을 다 쓰신 적이 있다면서요. 방금 말씀하신 개편 초 과도기의 일인가요?

2/3를 쓴 적이 있지요. 그냥 웃으면서 “이달에는 여러분이 쉬는 게 좋은 것 같다. 내가 열심히 하겠다. 특집호다”라고 말했어요. 프리랜서 2명이 취재 기사를 썼고, 제가 원고지로 2천매 좀 넘게 썼는데 나중엔 팔이 아프더라고요. 기자 중 일부는 그 메시지를 나름대로 해석해 떠나기도 했어요.

예술에서 공평성이란 성립 불가능

1995년 창간해 2003년 폐간한 영화전문지 <키노>에서 7년간 편집장으로 일하셨습니다. <키노>의 지독한 노동조건은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키노> 출신 동료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힘든 환경에서도 편집부를 지탱한 힘의 큰 부분은 정성일 편집장의 카리스마와 영화적 교양에 대한 존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례로 선배에게 기자들이 편집 과정의 프로세스를 감히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키노> 말기에 마감이 자꾸 늦어지는 상황에서도 선배는 이달에 어떤 원고가 빠지고 어떤 원고가 들어가는지 우선적으로 마감할 원고를 기자에게 말해주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린 기자 시절 그런 방식으로 훈련받았습니다. 요령을 배우면 교활해지더라고요. 그러면 글쓰기가 그저 일밖에 안돼요.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걸 배우는 거예요. 당신이 훌륭한 기사를 쓴다면 발행일을 늦춰서라도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이 컸어요. 제 경험상 영화를 생각할 때 그 생각의 끝까지 악착같이 가보는 순간 사다리 한칸을 올라가게 돼요. 그런데 원고가 들어갈까 안 들어갈까 재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빙빙 돌게 돼요. 잡지의 가장 힘든 점은 더 강한 인간을 못 만들고 그를 소진해버리는 것이거든요. 제겐 기자들이 <키노>에 있는 동안 책 한권이 나올 때마다 나아졌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했어요.

<키노> 하면 가장 단순하게는 ‘작가주의의 옹호’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의 개념에 약간 혼선이 있는 것 같아요. 비단 영화에서 감독 한 사람의 이름에 집중한다기보다 영화가 예술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다르게 표현한 것 아니었나 싶은데요.

감독이 갖는 텍스트의 대표성이죠. <키노>는 감독 외에 예를 들어 김우형 촬영기사, 송강호 배우, 차승재 제작자도 작가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말하자면 작가란 어떤 서명(signature)라는 뜻이지 1950년대 작가주의 논쟁에서와 같은 고전적 개념을 적용한 건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영화 안에서는 영화가 가져야 할 예술로서의 조건, 상황, 그것의 용례, 실천적 의미를 유포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그 말이 필요했어요.

프랑스 영화잡지 <포지티프>가 한번 만신전에 올린 감독의 작품은 객관적 평가보다 주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을 듣는데요. 마찬가지로 <키노>에 대해서도 그런 인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거장, 노장의 영화는 태작이라도 굉장히 중히 다루고, 그렇지 못한 감독의 영화는 가혹하게 읽는다는 거죠. 즉 작품보다 감독을 따라간다는 평판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씨네21>에도 명단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키노>보다 더 단단한 리스트가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그런데 그건 영화잡지들의 태도, 전략, 정체성과 연관지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요. 또한 예술에서 공평성이란 성립 불가능한 모순 어법이죠. 극단적 예지만, 모차르트의 가장 나쁜 곡조차 살리에리의 명곡보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영화에서 보고 싶은 것은 ‘시네마틱 센스’

한 영화에 대한 평가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는 예도 있었나요?

물론 있어요. 그 연출자의 이후 작품을 보면서 문득 내가 놓친 것과 오해를 깨닫죠. 비평적 오류를 인정하는 건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기꺼이 영화에 사과하고 수정해야죠. 반대로 한 영화에 대해 열정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른 뒤 내 열정이 속임수에 넘어갔음을 깨닫고 바뀌는 경우가 있죠. 단적인 예가 빔 벤더스입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고 의심스러워졌고 <세상 끝까지>를 보고 지지를 완전히 철회했죠.

<키노>는 부정적으로 본 영화에 대해선 자세히 비판하기보다 침묵하는 편이었습니다. 그건 좋은 것에 대해 말할 시간과 지면도 부족하다고 판단해서였나요?

나쁜 영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내 생각이 망가지기 시작한다는 두려움이 있어요. 제 경험상 나쁜 영화에 대해 비판적 글을 쓰고 나면 재활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웃음) 정말 좋은 영화를 일주일 정도 봐줘야 해요. 영화를 참 잘 보던 좋은 필자가, 어느 날 나쁜 영화에 대한 비판적 글을 논쟁적으로 쓰기 시작하고 그 글들이 환호와 관심을 모음에 따라 그도 더욱 그런 글을 찾아 쓰고, 그러다 좋은 영화에 대해 갑자기 눈먼 소리를 쓰는 걸 볼 때가 있어요. 감히 조언은 못하지만 지켜보면 가슴이 아파요. 좋은 연주를 듣다보면 나쁜 연주를 금방 판별하지만 이것저것 잡다하게 들으면 좋은 연주를 들어도 모르죠. 그림도, 음식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영화를 너무도 쉽게 보는 젊은 관객이 영화는 재미있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순간 가슴이 아파요. 본인의 감식안이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니까요.

가끔 선배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써야 할까. 같은 의미도 다르게 전달할 수 있을 텐데 상처주기를 무릅쓰고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한 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유일한 특징은 못 만들었다는 것이다”라는 표현이나 두 번째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아무개 감독은 점점 시시해지고 있다.”고 쓴다거나.

그런 문장의 경우 애초에는 열에 아홉은 몇번이고 고쳐 쓴 문장일 것이고 그 아래로 서너매의 부연이 달려 있었을 거예요. 그러다가 스스로 구차해 보이고 이건 내 원칙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문장은 지금부터 간단히 얘기하겠다는 선언이고 단락 바꾸기와 같은 효과입니다. 빙빙 돌려서도 핵심에 도달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요.

한때 선배는 “디지털의 도래와 함께, 내가 살아 있는 시대에 영화의 죽음을 목격하게 될 것 같다. 프레스코화가 캔버스화에 의해 대체된 것처럼”이라고 썼습니다. 한편 최근에는 “영화가 필름과 디지털 둘로 갈라지면서 단순한 물성에서 벗어나 개념으로서 확장된 덕분에 비로소 예술로서 질문을 감당할 있는 자리에 이른 것 같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두 생각은 지금도 공존해요. 시네마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다른 예술과 뒤섞이고 있어요. 말하자면 어디까지가 시네마이고 어디서부터가 미술인지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죠. 예를 들어 지난해 시네마 디지털서울영화제에서 왕빙의 <원유>를 인스톨레이션(설치) 형식으로밖에 상영할 수 없었을 때 생각보다 빨리 영화가 미술의 하위개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확장인지 서로의 재전유인지는 아직 불분명해요. 사실상 어떤 예술이 영원히 존속하라는 법은 없죠. 한 예술의 개념적 토대가 사라지는 순간 창조의 가능성을 도둑질당하고 근거 말소되는 일은 예술사에 있었으니까요. 가능성과 위기를 같이 놓고 봐요. 제가 미디어 예언가는 아니니까 두 힘의 긴장 속에서 영화를 사유하는 시대를 견디고 있는 거죠.

디지털로 인해 영화가 잃고 얻는 것의 저울질은 계속 어려워져요. 가난한 감독들의 도전적 시도를 도울 줄 알았던 디지털 미디어 기술과 환경이, 거대예산 영화가 감정을 더 영리하게 조작하는 데에 이용되기도 하고요.

시네마와 게임의 경계는 더 흐려지고 있죠. 언젠가는 영화가 게임을 즐기기 위한 하이퍼테제(hypothesis)로서, 게임의 디스플레이 목적으로 극장에서 상영될지도 몰라요. 매뉴얼을 책으로 보기 귀찮으니까 캐릭터와 규칙을 익히는 예제로 쓰이는 거죠. 그래서 예술적 가능성을 가진 영화가 박물관으로 갈 때가 온다면 그것이 시네마의 죽음이 아닐까 반문할 수밖에 없죠.

정성일 선배가 지금까지 집행위원장 프로그래머 등으로 인연을 맺어온 영화제는 서울단편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그리고 시네마디지털서울입니다. 선배가 떠난 뒤에도 전주영화제의 ‘대안영화’ 기조는 유지되고 있고 디지털에 대한 관심은 시네마디지털서울이 이어가고 있죠. 서울단편영화제와 시네마디지털서울은 영화의 거래보다 창작을 지원한다는 점이 상통하고요.

세 영화제에 각기 다른 컨셉을 갖고 접근한 건 아닙니다. 제게 영화제는 발견, 응원, 그리고 그를 통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단기간이나마 코뮌을 형성하는 자리입니다. 무엇보다 영화제에 가면 나랑 같은 영혼을 가진 인간들이 있구나, 외로움을 거두고 우정을 나누게 되죠. ???? 가 하는 다른 작업이 일의 개념을 50% 포함한다면 영화제는 절대적으로 100% 순정으로 하는 작업이에요. 앙드레 바쟁이 이런 말을 했어요. 영화제에 간다는 것은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침밥을 같은 시간에 먹고 첫 미사를 기다리듯 첫 영화를 기다려서 보고, 그 다음 경건하게 견해를 교환하고, 내일 미사를 기다리며 잠든다. 말하자면 미사를 제가 기획하는 셈인데 그보다 행복한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언제가 사석에서 영화의 완성도보다 영화에 깔려 있는 창작자의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용기가 영화의 좋음을 보장하는지 여쭤봤고요.

왜냐하면 영화는 다큐멘터리조차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가능성이니까요. 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의 태도란 세상의 가능성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죠. 너무도 흔한 파스칼의 말. 사람은 연한 갈대이지만 연한 갈대가 의미있는 까닭은 단 하나, 인간이란 존재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해서입니다. 영화가 가치가 있다면 오로지 세상의 가능성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냐는 거죠.

그 말씀은 예를 들어 세상과 끝까지 싸우겠다거나 구원을 말하는 서사를 가진 영화만 훌륭하다는 뜻은 아닐 텐데요.

서사가 보고 싶었다면 문학에 사랑을 바쳤을 거예요. 또한 영화의 시간은 서사를 하기에 충분치 않아요. 서사에 매달리는 순간 영화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바쳐야 하고 그런 영화들은 대개 빈곤해지죠. 제가 영화에서 보고 싶은 것은 시네마틱 센스(cinematic sense)입니다. 뜻(meaning)이 아니라 센스(sense), 감각과 의미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죠. 영화가 찍을 수 있는 건 세상의 표면뿐이므로 그 표면을 시네마가 어떻게 건드리느냐는 결국 ‘태도’의 문제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태도와 센스를 묻는 것이 영화의 서사를 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2005년 10월 <말>에 기고했던 ‘이야기가 빈곤한 한국영화, 파국의 징조인가’라는 글이 생각나네요. 거기서 ‘이야기’의 의미를 다시 규정해주신다면요.

가끔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고 줄거리를 A4 10장으로 써내라고 해요. 그럼 다 다른 이야기를 써와요. 영화가 서사에 서툰 매체고, 줄거리란 관객이 주관적으로 재조립한 것임을 보여주는 예죠. 영화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즉, 조립의 방식과 그 태도예요. 영화 탄생 이후 단 하나 변함없는 것은 선형적 진행, 즉 A숏 다음에 B, C숏이 따라 나온다는 사실이에요. 여기 들어 있는 것이 태도이고 센스이고 그 안에서 서사방식을 질문해야 비로소 영화의 이야기를 질문하는 것이지 영화를 본 뒤에 줄거리를 요약한 건 그 영화의 이야기, 화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서툴고 빈곤해졌다고 <말>에 지적한 것은 화법으로서의 이야기인 거죠.

영화, 그건, 지구에 있어야만 해요

25년 동안 영화평을 써오셨습니다. 쓰기를 멈추고 영화 속에 침잠해 들어가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다음 지금까지 쓴 것으로부터 도약하고 싶다는 꿈을 품은 적은 없으신가요?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죠. 제일 괴로운 순간은 영화에 대해 사고하고 글을 쓸 때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예요. 그러나 영화가 주는 행복은 영화를 보는 시간과 영화를 생각하는 시간이 만나는 순간에 있어요.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면서 계속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구하는 그 시간이 영화 보는 시간만큼 즐거워요. <카페 느와르>를 찍으면서 맹세한 것이 있어요. 매일 촬영이 끝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일기를 쓴다는 거였어요. 단 1회차도 빠짐없이 썼어요. 시네필 중에는 쓰거나 하지 않고 계속 시네마데크에서 영화만 보는 사람도 있어요. 이야기를 나눠보면 바보예요. 중의적 의미의 바보죠. 반면 어떤 학생은 줄창 책만 읽어서 모르는 이론가가 없어요. 하지만 영화 한편을 같이 보고 대화해보면 머리가 뒤죽박죽이에요. 결국 저는 보기, 읽기, 쓰기의 삼위일체가 계속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때는 만들기, 읽기, 쓰기가 같이 가야 하고요. 쓰는 것을 멈추는 순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서랍처럼 느껴져요.

영화사에는 비평가 출신의 감독이 많은데 그의 궤적이나 태도가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느낀 경우는 없나요?

없습니다. 다만 한없이 흠모하는 고다르의 패턴을 흉내는 내볼 수 있지 않을까 정도? 그는 비평을 영화 만들 듯이 썼고 영화를 비평을 쓰듯 찍었어요. 그의 영화는 늘 비평이었고 그가 쓰는 비평은 앤서니 만은 이렇게 영화를 찍었어야 했다, 빈센트 미넬리는 그렇게 영화를 찍었어야 했다는 것을 보여줬어요. 창조적인 비평이었죠.

A라는 영화가 B였어야 했다고 쓰는 건 위험하지 않은가요?

굉장히 위험하고 대부분 실패하죠. 고다르처럼 쓸 수 있다면 하는 말입니다. 고다르가 더글러스 서크에 대해 쓴 글을 경유해 파솔리니가 자기 영화의 방향을 찾아냈고 아오야마 신지나 구로자와 기요시도 그의 글에서 자기가 해야 할 영화를 발견했어요. 비평가로서 최상의 행복이죠.

마지막 질문은 <카페 느와르>의 인용입니다. 지구를 떠날 때 무엇을 가져가고 싶으세요?

딱 한 가지만 안 가져가겠어요. 영화. 그건, 지구에 있어야만 해요. 지구에서만 가능한, 지구의 시간을 담는 유일한 예술이니까. 지구를 떠나는 순간 무의미해질 테니까요.

追伸 이날 인터뷰 장소는 알고 보니 <카페 느와르>의 한 장면을 촬영한 광화문의 한 카페 맞은편이었다. 이 사소한 우연은 우리를 살짝 흥분시켰다. 게다가 노천 테이블에서 우리가 <카페 느와르>를 이야기하는 동안 영화에 등장했던 정지혜 배우가 예고없이 나타났다. 그녀는 지하 극장에 영화를 보러온 길이었다. 어둠이 내리자 우리는 못다 한 인터뷰를 위해 <카페 느와르>의 카메라가 달렸던 청계천쪽으로 길을 건넜다. 마주앉은 곳은 스탭들이 늘 집합했던 24시간 커피숍이었다. 정성일은 요즘 생각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누가 부르기라도 하듯 한밤중에 택시를 타고 청계천으로 달려와 그 회색 낭하 같은 길을 따라 걷는다고 말했다. 그때 영화 속에서 그리움에 홀려 그 길을 하염없이 맴돌던 소녀로 분했던 배우 정유미가 어디선가 작은 새처럼 날아왔다. 그리고 감독의 옆자리에서 가만히 귀기울였다. 영화와 현실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윤무를 춘 멋진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