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 2010.10.(2호)본인인터뷰

정성일 | 온 마음을 다하다

에디터 > 나하나, 포토 > 김희언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온 마음을 다한 무언가가 있나요? 사랑도 좋고, 일도 좋고, 취미도 좋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 대상을 향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해 일하고, 온 마음을 다해 취미생활을 누리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 쉽지 않은 일을, 그 어렵고도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입니다.

에디터로 사는 동안 저는 왜 정성일 영화평론가를 인터뷰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잭 블랙(Jack Black)과 팀 버튼(Tim Burton), 윤시윤과 김태호 PD는 생각했으면서 왜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금세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공적인 영역, 즉 일 안으로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사적인 영역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안에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그는 제게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손이 그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지요. 그런 그를 만났습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내내 식은땀을 흘렸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는 첫 면접을 보는 사회초년생마냥 버벅거렸지요.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냐구요? ‘1990년대 시네필 문화’를 낳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화전문지 <키노>를 세상에 내놓은 편집장이었다는 말보다, 그가 영화를 만든다면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려고 영화감독들이 제작비를 모을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문제적인 평론가였다는 말보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에서 보여준 영화를 향한 무한한 애정이 멋모르던 한 소년을 영화전문기자로 이끌었다는 말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동료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씨네21>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정성일의 어떤 하나의 평론보다 더 뛰어난 평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정성일처럼 매순간 모든 영화에 대해서 평론가의 자의식으로 대결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한국에서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그를 만났습니다. 영화와의 끈끈한 우정, 열렬한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제 앞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며 ‘순정’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떠올렸습니다. 그냥 순정도 아닌 ‘숭고한 순정’이었지요. 에디터의 ‘과잉 충성’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지금부터 그의 인터뷰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영화평론가라는 단어가 안겨주는 난해함 혹은 까다로움 때문에 그를 쉬이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안에는 쇼트와 프레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있고 사람이 있으니까요.

첫 평론집(<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필사의 탐독>) 책머리에 영화에 대한 우정, 약속이라는 말을 하셨더라구요. 영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의무감이 느껴졌어요.

의무감 같은 건 전혀 아니구요. 의무감이라는 말이 사회적이라는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해야 한다면 지정된 의무감은 있죠. 하나는 영화 그 자체에 관한 나의 의무감, 또 하나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에 관한 의무감, 그리고 거기에 대해 정직한 태도를 가져야된다는, 그런 의무감 정도지요.

감독에 대한 의무감은 어떤 의미인가요?

다른 예술의 경우에는 창작자가 분명하죠. 단 한 명이니까. 소설은 소설가가 쓰고, 그림은 화가, 고전음악의 경우는 작곡자, 이렇게 되겠지만 영화의 경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죠. 똑같은 영화인데 어떤 잡지는 감독을 다루지만 어떤 잡지는 감독은 관심 없어. 배우들이 관심이고 혹은 그 영화가 시장에 나오면 제작자가 관심이 되고, 마케팅이 끼어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죠. 모든 창조가 영화감독 한 사람의 것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감독의 연출을 훨씬 벗어나는 연기자의 훌륭함도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결국 결정이라는 것은 감독이 하는 것이죠. 이 장면을 찍었을 때의 송강호의 이 연기, 전도연의 이 연기가 OK인가 NG인가하는 문제, 이 장면 뒤에 저 장면을 붙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판단이 감독의 판단이라면 내가 영화에서 결국 방어해야할 사람은 감독이구나라는 생각. 감독을 예술가로서 대접해줄 때 비로소 그 영화가 예술로서 이야기되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그런 의미에서의 의무감이죠.

“영화평을 쓸 때 감독 한 사람을 위해서 쓴다”는 평론가님의 말을 뒷받침하는 말 같은데, 사실 평론이라는 건 감독 한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이 보는 글이잖아요.

처음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독자들을 계몽해야한다는 생각, 혹은 독자들을 설득해야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있었어요. 곧 그 생각을 버렸어요. 가장 중요한 까닭은 계몽이 자칫하면 어떤 도그마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해 쓰는가, 누구와 대화하기 위해서 쓰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라는 생각을 스스로 던질 수밖에 없죠. 독자라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오늘의 독자가 내일의 독자가 아니고, 내일의 독자가 오늘의 독자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독자라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익명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들을 상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종잡을 수 없는 글을 쓴다는 것과 똑같죠.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이 사람, 고정점이 필요했죠. 고정점을 만들어내기 위한 궁극의 대화 상대는 그 영화의 최종적 결정자인 감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고. 한편으로 내가 그 영화에 대해 갖는 질문을 대답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라면 그 대답을 구하기 위한 대상자, 대화를 하고자하는 사람은 감독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라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결국 저는 독자는 영화에서 감독과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질문이 궁금한 사람은 내 글을 읽는 것이고 내 질문이 궁금하지 않는 사람은 제 글을 읽어야 될 이유가 없죠. 왜냐하면 대한민국 영화평론가가 저 한 사람인 건 아니니까요. 너무나 많은 평론가들이 있고 마치 극장에 와서 영화를 볼 때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과 똑같이 독자들도 어떤 글을 취사선택하는 문제니까. 마치 단 한명의 영화비평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독자들을 끌어들일 듯한 글을 쓸 때 그 목표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생각을 하고 됐고. 제가 대답을 구하는 사람, 제가 순정을 바치는 사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감독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죠.

혹평을 하시잖아요. 마음이 불편하진 않으세요?

전혀. 나쁜 영화는 나쁜 영화라고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을 하구요. 오히려 진짜 마음이 불편할 때에는 나쁜 영화에 대해서 나쁘다고 말하지 못할 때 괴롭죠. 진짜 괴롭죠. 경험적으로 볼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게 이런 경우죠. 우리나라 영화평론가들을 보면 외국영화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쉽게 써요.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못써. 이유는 뻔하죠. 왔다 갔다 하면서 그 감독과 마주치니까 힘들어서 그러는 거거든요. 근데 그 영화가 얼마나 후진지는 영화를 찍은 감독이 잘 알아요. 근데 이 사람한테 후진영화를 찍었는데도 “좋은 영화예요”라고 귀에 즐거운 얘기를 해주잖아요. 그때는 즐겁지만 그 다음부터 이 비평가를 신뢰하지 않아요. 시간이 지난 후 다음 영화를 찍었을 때 이 사람이 또 칭찬해도 감독은 안 믿어요. 오히려 자기 영화가 나쁠 때 나쁘다고 말한 뒤에 칭찬하면 정말 기뻐하죠.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이준익 감독. 제가 기자를 하던 시절에 그는 미술 기자였어요. 오랫동안 본 사이여서 아주 친하죠. <황산벌>이라는 두 번째 영화를 찍었을 때 이런 글을 썼어요. “이 영화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못 만들었다는 거다.” 감독 입장에서는 피를 토할 만한 일이죠. 연락이 당연히 끊기죠. 두 번 다시 안 보려고 하죠. 그리고 몇 년 뒤 <왕의 남자>를 보러 갔는데 <황산벌>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연출력이 는 거예요. 잘 만들었죠. 기자시사회에서 이준익 감독을 마주쳤어요. “(엄지손가락을 들며) 잘했어” 이러고 지나갔어요. 그게 못내 감격에 겨웠던지 인터뷰하는 자리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가 나를 격려하고 가더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한 편의 영화에 대해서 칭찬하느냐, 비판하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어떤 신뢰를 갖느냐죠. 오히려 신뢰의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을 하는 것이 두렵다면 이 직업을 가지면 안 돼요.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의 윤리 같은 것이죠. 비평가라는 이름을 달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열렬하게 지지를 못하는 것만큼, 자기가 격려해야 될 대상에 대해서 격려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영화평을 쓸 때 확신이 있는 상태에서 쓰기 시작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성일 영화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판단을 해야죠. 판단하지 않으면 글을 쓰기 불가능하니까. 필사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한 가지 마음을 항상 갖고 있어야 돼요. 판단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틀린 거야. 그때는 그 견해를 철회할 마음의 준비가 항상 돼있어야죠. 틀렸다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철회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항상 돼있는 게 중요하죠. 필사적으로 판단할 것, 내 견해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것이 틀렸다면 철회할 태도를 가질 것, 그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판단력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건 아니지요.

판단이라는 건 두 가지의 산물이겠죠. 하나는 직관이죠. 이를 테면 우리가 여기서 사진을 찍는데 사진을 찍을만한 공간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때는 막 따져보는 게 아니라 딱 보고 직관적으로 찍을만하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거잖아요. 그 다음에 이건 없었으면 좋겠어. 여기 컵 하나 놓으면 안 될까. 논리적으로 공간을 짜 맞추기 시작하죠. 비평도 마찬가지에요. 딱 보고 즉각적으로 몸이 반응을 하는 거죠. 정말 굉장한 거구나, 너무 후진 거구나 판단을 하죠. 직관적인 판단이 한 손에 있다면 또 한 손에 있는 건 경험이죠. 끊임없는 시행착오. 정말 정말 직관이 훌륭한 사람들이 있죠. 우리가 인류 역사상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직관을 가진 사람. 이를 테면 ‘세잔(Paul Cezanne)’. 그러니까 사과만 갖고도 회화의 역사를 바꾼 거잖아요. 작은 직관만 갖고 있는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경험의 시행착오가 너무나 필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직관은 때로 너무 나를 잘 속여. (웃음)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너무 후진거야. 그런 게 경험이 돼서 데이터가 작동되기 시작하죠. 두 가지, 직관과 경험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한다고나 할까.

평론가님의 글을 보면 가끔 영화에 대한 사랑, 진지함을 넘어 비장함이 느껴지기까지 해요. 영화에 대한 이런 자세, 마음가짐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가요?

그건 글을 읽은 사람의 판단이니까. 제 스스로 “네. 사실 비장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우스꽝스러울 거 같고, 다만 이런 건 있죠. 제가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사회적으로 영화라는 게 경멸할 만한 대상이었어요. 대학생 때 미팅에 나가면 처음 하는 대사가 뻔하잖아요.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라는 유치찬란한 대사부터 시작해서 “어떤 취미를 갖고 계세요?”라고 하는데 그때 “영화”라고 말하면 바로 ‘잘못 걸렸구나’라는 상대의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지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방어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게 몸에 배었던 거 같아요. 여전히 위협받고 있고, 이를 테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우르르 나왔어요. 관객들 반응을 귀 기울여 듣죠. “영화 좋아? 싫어?” 그런 얘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관객들 중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면서 나와요. 너무나 근심스럽게 “아, 이번 영화 100만이 안 될 거 같아.” 그걸 왜 자기가 걱정해. 자기가 무슨 투자자도 아닌데. (웃음) 말하자면 영화에 대해서 그게 평가의 기준인거예요. 심미적 판단을 하지 않는 거예요. 영화라는 건 장사야, 영화라는 건 돈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를 어떻게 방어해야 될 것인가,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그런

태도와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이 있었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 싸우는 과정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읽혔을 수 있죠.

얼마 전 TV에 나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인생을 시시하게 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시시한 영화만 골라서 보러 다니면 됩니다.” 어떤 생각에서 비롯된 말인가요?

사람에게 하루는 24시간 밖에 없잖아요. 저도 그렇고, 나하나님도 그렇고, 이건희 회장도 그렇죠. 누구나 다 24시간 밖에 없죠. 문제는 24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죠. 저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위대한 삶, 소중한 삶,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살아봤더니 그래요. 훌륭한 삶, 충만한 삶이라는 건 매 순간 충만해야하는 것이더라구요. 작은 충만함이 모여서 커다란 충만함, 커다란 훌륭함이 되는 것이더라구요. 휴일이 되면 따분해서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만 고민하고 낮잠 잤다, 뒹굴다가 하루를 보내는 거죠. 저는 그게 그날 하루 자살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냐는 거예요. 그렇게 하루가 사라진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루하루가 자기를 떠나가는 거거든요. 매일 시시한 영화만 골라서 보러 다니면, 그게 차곡차곡 쌓여 그만큼 시시하게 산 것이 되는 거죠. 거지같은 음악만 골라서 들으면 거지같이 사는 거예요. 삶 자체가 거지같은 거예요. 아무리 맛있는 걸 먹고 좋은 옷을 입어봤자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고 있는 거예요. 꼭 그것이 영화가 아니더라고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해요. 영화를 보러 갈 것인가, 음악을 들을 것인가. 영화를 보러 간다면 무슨 영화를 보러 갈 것인가, 그 영화를 본 다음에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이걸 하면 저걸 못해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순 없단 말이에요. 그럴 때 매 순간 자신의 삶의 충만함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영화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단지 소비의 대상일 뿐이죠. 이 시대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뭘까요?

저는 예술이 아무 역할도 안했으면 좋겠어요. 역할을 하려고 나서는 순간부터 프로파간다가 되니까요. 1980년대 정치의 계절을 통과하면서 제가 경험했던 거였어요. 그때 그 예술이 너무 후진거야. 예술은 할 수만 있다면 그 역할이 제로가 될 때까지 정말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오로지 그 영화, 음악, 소설, 그림을 대하는 사람한테 심미적 기쁨만 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건 그렇지 않게 되어 있지요. 그 작품에서 정치적 입장이나 윤리적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종종 심미적 판단보다 윤리적 판단이 우위에 서거나 정치적 입장이 훨씬 더 중요해지기도 하죠. 정치와 미학과 윤리라는 삼각관계. 음악이건, 영화건 예외 없죠. DJ DOC의 새 음반이 나오면 비평가로서 심미적 판단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과 윤리적 기준에도 잣대를 대어보고 싶어지지요. 밥 딜런(Robert Allen Zimmerman)의 신보, 아니면 엠아이에이(Mathangi Arulpragasam)의 신보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싶어지죠. 정치와 윤리가 예술과 만나는 순간에는 다소 복잡한 긴장관계에 놓인다고 할까요.

그렇다면 이 시대의 평론의 역할이라는 건 뭔가요?

그 예술 장르의 친구죠. 가장 친한 친구, 모든 걸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친구, 그 친구가 잘못되었을 때 그 친구에게 격렬하게 비판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가 부당하게 대접받고 있을 때 그 친구를 위해서 방어하고 끝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 친구, 이를 테면 저런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죠. 영화가 주목받고 있을 때 벌떼처럼 몰려들었던 평론가들, 영화가 주목을 잃자 광속으로 떠나는 사람들. 한때 대중음악이 중심권에 들어섰을 때 차고 넘치는 게 음악평론가들이었었어요. 그런데 대중음악이 관심을 잃자 정말 광속으로 다들 떠나버렸어요. 그런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죠.

영화를 살아가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하면서 “미처 기다리지 못한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셨어요. 기다리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영화죠. 각각의 영화. 저는 10편의 영화가 있다면 10개의 강인한 세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딱 하나 존재하는 거잖아요. 근데 이 세상이라는 게 세상1도 될 수 있었고, 세상2도 될 수 있었고, 세상3도 될 수 있었고, 세상n도 될 수 있었잖아요. 이를 테면 나하나님이 철수랑 연애를 해요. 그런데 영철이랑도 연애할 수 있는 거잖아요. 철수를 영철이보다 먼저 만났을 뿐이고, 먼저 연애를 했을 뿐이죠. 아니면 철수와 영철이를 동시에 만났을 수도 있어요. 다양한 경우의 가능성이 있죠. 하나를 선택할 때 다른 것은 선택하지 못해요. 확정된 하나의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가능한 수많은 세상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펼쳐질 수 있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올해에 한정지어 얘기를 해보자면 하나의 세상을 놓고 가능한 세상1 이창동의 <시>, 가능한 세상2 홍상수의 <하하하>, 가능한 세상3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 불가능한 세상들이 아니에요. 다 가능한 세상들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되지 않은 세상일 뿐이죠. 그런 세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잠재성을 펼쳐 보이는 역할을 하는 게 영화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걸 소설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예술의 역할이 그런 것이죠. 가능한 세상에 가능한 경우의 수만큼을 열어 보이는 거죠.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들의 문화가 풍요롭다고 얘기할 때, 그 문화라는 말에는 단지 성찬이 아니라 문화가 갖고 있는 원래의 의미, 컬티베이트(Cultivate), ‘경작하다’, ‘씨를 뿌려서 꽃 피운다’라는 뜻이 있잖아요. 즉, 하나의 땅이 있는데 씨가 뿌려져서 수많은 꽃이 핌으로써 수많은 가능성들이 열리는 것 같은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잖아요. <하하하>를 보면 세상이 유쾌하면서도 우울해지고,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 세상이 그만큼 황폐해지죠. 그런 점에서 단지 영화를 구경거리로 본다면 정말 시간낭비라는 생각이에요. 영화를 통해 이 세상이 안고 있었던, 이 세상에 잠재했었던 가능성을 만난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세상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열리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 거지요.

영화를 좋아했던 10~20대 시절에는 영화의 존재가 지금과는 달랐을 것 같아요.

그때가 더 좋았죠. 왜냐하면 그때는 정말 어떤 이해관계도 없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걸로 밥을 먹어야 하니까. 그것이 직업이 되면서 산업 안으로 깊이 끌려 들어오고, 산업 안에서 내가 예전 같으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고, 알아야 하고, 판단해야 되고, 행동해야 되고, 어떤 입장을 표명해야 될 때 괴롭죠.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서 행동을 하고, 결정을 하고, 표명을 하는 순간은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건 저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일지라도 직업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달라지죠. 그 글이 사람들의 호응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음악 산업 안에서 목소리가 커질수록 힘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까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죠. 이 일은 맛이 가는 게 순간이에요. 나이와 관계없는 거 같아요.

10~20대 시절 영화가 좋았던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만약 이유가 있었다면 제가 이만큼 좋아하지 않았을 거 같아요. 친구들과 함께 국민학교 4학년 때 영화를 보러가서 완전히 홀린 이후 혼자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게 너무 좋았고, 그때에는 내가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할만한 준비가 안 되어 있었지요. 나이가 들어서 이런 유사한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영화산업 쪽에 이미 많이 들어와 있었고,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적절치 않은 자리까지 와버렸었구요. 제 자신이 내린 대답은 특별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에요. 이를 테면 그런 것과 똑같잖아요. 연애할 때 상대방이 어떤 이유 때문에 좋으면 금방 싫증나잖아요. 그런데 그냥 좋은 거야. 그러면 정말 오래가잖아요. 이 남자의 목소리 너무 좋아 이러면 6개월을 못 넘겨요. (웃음)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했던 1970~80년대에는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저와 비슷한 세대의 동료들의 한계인데 197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는 문화가 폭발하는 시대였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 시대를 살아갔다는 건 너무 너무 너무 황폐하게 살았단 뜻이에요. 모든 정보로부터 차단당한 시대의 창백함. 영화들도 정말 빈곤하기 짝이 없었구요. 근데 이런 게 있었죠. 1년에 개봉하는 영화의 편수가 30편 정도였어요. 30편을 보면 한 해 동안 개봉한 영화를 다 본 거였지요. 그게 아니면 TV <명화극장> 밖에 없었고. 아직 인류 문명에는 비디오가 도착하지 않았어요. 새로운 창구는 문화원이었어요. 프랑스문화원, 독일문화원. 근데 문제는 문화원은 자국영화 이외에는 보여줄 이유가 없으니까 과도하게 독일영화와 프랑스영화 쪽에 교양이 넘쳐나게 되는 거죠. 편식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점도 있었던 거 같아요. 요즘엔 다운 받아서 영화를 원하는 대로 볼 수 있잖아요. 문제는 그렇게 영화를 보면 산만할 수밖에 없어요. 10분 보다가 바로 “이 영화는 반전 영화라며?” 하면서 엔딩을 봐. 중간은 무슨 얘긴지 몰라. 그런 예술적 체험의 방식이 오늘날에는 산만하게 경험된다면, 그 당시에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 소중한 거야. 이게. 한편으로는 빈곤한 체험이었지만 내 몸속에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일 수밖에 없었죠. 누군가 비유를 적절하게 들었는데. 오늘날 우리 시대의 작곡가들은 모차르트보다 음악을 훨씬 많이 들었을 텐데 왜 모차르트만한 작곡을 못할까? 21세기 대중 음악가들은 1960년대 음악가들보다 훨씬 많은 음악을 들었을 텐데 왜 비틀즈만한 음악을 못 만들까? 말하자면 문화적 유산의 상대적 경험이 꼭 절대적 이유에 쓰이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건 뭘까요?

그런 건 없어요. 각자의 시대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거예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런 생각을 해요. 당신은 운이 나쁜 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정말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시대에 도착하기도 해요. 정치적인 성향의 친구들이 있어요. 운 좋게 1980년대에 도착했어요. 구호 외치고, 시위하고 너무 행복하지. 이 사람은 그런 게 너무 싫어. 혼자 생각하는 게 너무 좋아. 친구들이 매일 전화하고 너 왜 이탈 하냐. 너무 괴롭잖아요. 어떤 시대를 살았을 때 그 시대에 도착한 것이 그 사람에게 천국인가, 지옥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요. 하지만 질문에 대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각자 살아남아라”예요.

20년 넘게 영화평을 쓰고 계신데 매너리즘에 빠질 때는 없으세요?

항상 그게 제일 무섭죠. 글을 쓰면서 남들은 못 느껴도 그 자리를 뱅뱅 돈다는 느낌이 들 때 진짜 괴롭죠. 내가 쓰면서 재미가 없을 때 ‘내가 쓰면서 이렇게 재미없는데 독자들이 재미있을 리가 없잖아’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때마다 저를 구원했었던 것은 감독들과의 인터뷰, 현장 방문이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되었어요.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허우 샤오시엔(Hsiao-hsien Hou), 아피차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감독과의 인터뷰, 혹은 제작자와의 인터뷰, 매번 인터뷰를 하려면 준비를 해야 하고,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 과정이 한편으로는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는 과정이 되죠. 그 과정을 통해서 제가 빠져들지도 모르는, 빠져있을 지도 모르는 매너리즘을 계속 경계하고 새로워지려고 노력하죠.

제가 세운 원칙 중 하나는 제가 쓴 글을 다시 안 읽어요. 솔직히 10번을 쓰면 한 번 정도는 병살타, 사진기자까지 같이 망하고, 2~3개 운이 나쁘면 4개까지 아웃처리 되는 거잖아요. 물론 그런 글은 끔찍하니까 정말 안 돌아보죠. 하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진정 이 글을 내가 썼단 말인가’ 그런 느낌이 들 때도 있잖아요. 그런 게 없으면 어떻게 이 일을 견디겠어요. 그럴 때 경계해야하는 건 잘 썼다는 글을 다시 읽는 것. 두 번 다시 읽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잡지를 만들 때 기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어요. 오로지 데이터를 찾기 위한 거라면 당연히 찾아봐야 되지만 혹시나 네가 네 글이 만족스러워서 다시 그 페이지를 들추고 싶은 거라면 그 욕망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더 좋은 글을 못 쓸 것이다. 근데 들추게 돼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글을 쓰는데 예전에 내가 잘 썼다고 생각했던 글의 패턴을 쓰고 있다는 걸 문득 느낀 거예요. 내용이 아니라 패턴을. 그게 매너리즘이거든요. 내용을 카피하는 건 매너리즘이 아니에요. 게으른 거지. 패턴을 반복하면 그 순간 즉각적으로 매너리즘이 되는 거예요.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세요?

정직함. 남에게 정직한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정직한. 내 감각에 대해서, 내 정성에 대해서, 내 판단에 대해서 정직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신을 속이잖아요. 자기의 감정, 자기의 감각, 자기의 판단을 속이죠. 그때 사람이 껍데기만 남는 거예요.

바라는 것이 있으신가요?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결국 몸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몸이 부서지면 생각의 윤곽이 부서져요. 몸이 늘 아픈 사람은 점점 나쁜 생각을 하게 돼요. 나쁜 생각이 관여하기가 쉽죠. 나쁜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을 증오하기 시작하고, 질투하기 시작해요. 안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려면 자신의 에너지를 다 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프게 되는 거죠. 생각의 윤곽이 부서지지 않으려면 건강한 게 중요해요. 연애 상담을 해오는 친구들이 “상대방의 뭘 보면 좋겠냐”고 물어요.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돼요. 둘 중 하나가 건강하지 않다면 그 연애는 말리고 싶어요. 물론 할까, 말까 망설이는 연애에만 한정지어진 거죠. 무조건 가고 있는 연애에는 “열심히 하세요. 최선을 다해서 하세요” 그러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