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2.01.30.작품

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부러진 화살’의 과녁

다소 따분하지만 사건의 개요, 혹은 ‘영화 속의’ 사실관계. 김명호 전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교수는 1995년 1월 본고사에 출제된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그에 따른 반사적 불이익으로 승진에서 탈락한 이후 중징계를 받은 데 이어 이듬해 2월 재임용에서 제외됐다.

이민을 떠났다가 2005년 1월 “재임용이 거부된 교원은 교원소청 심사위원회에 재심청구나 법원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개정된 ‘사립학교법 및 교육공무원법’에 따라 귀국해서 3월 교수 지위 확인 소송을 냈다. 그러나 9월 이 소송은 기각됐고, 2007년 1월에는 항소도 기각됐다. 김명호 전 교수는 1월15일 석궁을 들고 이 항소를 기각한 서울고법 민사 2부 박홍우 부장판사를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아파트 앞에서 석궁의 의도적 발사 여부가 영화의 쟁점이다) <부러진 화살>은 2007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다섯 차례 공판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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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 우리는 질문과 마주하게 됐다. 두 개의 길. 여기서 더 나갈 것인가, 아니면 멈출 것인가. 이건 그저 영화일 뿐이야, 그러니 영화 이야기에서 멈추자. 아니 그렇지 않아, 이건 사실을 다룬 이야기야. 이 영화에서 다룬 이야기가 정말 전부인 거야?

나는 영화를 위해서 알리바이를 제공할 생각이 없지만 동시에 <부러진 화살>이 영화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해서 반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김명호의 주장은 알겠어. 그런데 검찰 측의 주장은 어디로 간 거야? 영화는 검찰이 재판정 맞은편에 서 있기는 하지만 변변한 설명의 기회를 단 한 번도 주지 않는다. 혹은 화살을 쏘지 않았다는 김명호의 말에는 그렇게 귀를 기울이면서 화살을 맞은 박홍우 판사를 만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화살을 맞은 다음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단지 피 묻은 와이셔츠로만 존재한다.

말 ‘못하는’ 와이셔츠. <부러진 화살>은 공정하지 않다. 거기 존재한다고 가정된 음모론. 의도적으로 전술적이고 선동적이며 이분법적이고 이미 편을 든 다음 투쟁적이다. 그리고 슬며시 거기에 달콤한 유토피아적인 계기가 있음을 내비친다. 맞다. 이건 정치적인 영화이다. 그걸 왜 부정하겠는가. 그게 뭐 어때서? 이건 영화이다. 야, 이 멍청아, 이건 현실 속의 사건인 걸 잊으면 안돼! 정치라는 셈.

하지만 영화는 점점 김명호를 닮아간다. 아니, 차라리 영화 자체가 김명호를 의인화시킨 것이 아닌 것일까,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영화의 눈과 귀와 혀를 생각해보라. 의심에 가득 찬 시선. 자동인형처럼 보이는 판사의 지루하리만큼 반복적인 반응. 듣고 싶은 말, 듣기 싫은 이야기 사이의 불균형. 검찰의 대사는 믿을 수 없게 단순하다. 그는 아니요, 와 모르겠습니다, 라는 대사 이외에는 어떤 말도 외울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바보. 이 영화의 혀는 누구를 위해서만 말하는가. 우리는 매번 변호 대신 추리소설에 가까운 웅변을 듣는다.

이 판결의 공정 여부를 다루는 것은 내 능력 바깥의 일이다. 나는 반대로 <부러진 화살>의 객관적 공정을 다루고 있는 담론들이 이때 이 영화의 주관적 착각의 논점을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부러진 화살>의 방점은 김명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김명호를 변호하는 박준 변호사를 따라가는 데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박준은 실제로 변론을 맡았던 박훈 변호사가 모델이다. 그는 민주노총 금속연맹 법률센터에서 9년간 상근변호사로 일했다. 2001년 대우차 부평공장 집회 때 인천지법의 판결문을 들고 300명의 해고자 앞에 서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법에 항의하다가 경찰의 물리력 행사 앞에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는 (이 영화와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영화는 공을 들인다. 정지영은 박홍우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지만 박준 변호사에게는 아주 관심이 많다. 영화의 ‘시작’. 박준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얻게 된 다음 알코올 중독이 될 만큼 고통 받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 패배자로 살고 있는 박준은 의뢰인 김명호를 만나고 그와 함께 법정에서 항의를 하고 법과 싸운다. 영화의 ‘끝’. 그 싸움을 통해 자신의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고 마침내 정치적 신념을 되찾게 된다. 영웅의 시련과 극복에 관한 ‘전형적인’ 이야기.

나는 이 얼룩이 이 영화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부러진 화살>은 김명호의 재판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여기서 겨냥하는 것은 김명호에 대한 구명운동(이미 판결은 났고 2011월 1월24일 만기 출소하였다)이나 명예회복이 아니다. (영화는 감옥에서 끝난다) 그렇다면 정지영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물론 ‘정치적인 것’의 회복이다.

여기서 방점은 회복에 있다. 박준 변호사를 우리와 동일화시킨 다음 정지영은 상처를 끌어안는다. 지금 땅에 떨어진 그 무엇.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것. 우리들의 상실. 그걸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믿는 것. 괄호 속의 그 무엇. 정지영은 패배주의를 극복하자고 하소연한다. 미안하지만 김명호는 박준과 괄호 안의 그 무엇 사이의 매개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우리의 질문은 이 매개의 오류를 지적하는 대신 그 무엇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이야 한다. 지금 텅 빈 그 무엇의 정치학. 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김명호를 그냥 감옥에 내버려두고 끝날까.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정지영이 정말 필사적으로 구출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시급한 전투를 하자고 부추기는 영화.

제논의 화살을 잊지 마라. 왜 그 화살은 결국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까.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왜 목표는 화살을 피할 수 없을까. 우리는 두 질문의 블랙홀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야 한다. 대답이라는 매듭. 왜 영화는 항상 세계와 부조화라는 방식으로 자기의 환상을 실현시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