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Db』 2013.08.01.작품

임권택x102; 정성일, 임권택을 새로 쓰다

몽녀 (1968)

(... 전편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은 돌아가서 인터뷰를 먼저 읽기 바란다. <몽녀>에 관한 글은 전편과 후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글은 후편에 해당한다. 나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어서) 1968년 임권택은 입체영화 <몽녀>를 찍었다. 나는 만들었다거나, 연출했다거나, 라고 말하는 대신 찍었다, 라고 썼다. 물론 이 말 사이에 어떤 위계 질서를 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언가 기술적인 측면에 방점을 찍고 싶다. 무엇보다 먼저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의 절차를 차례로 밟아 볼 생각이다. 먼저 신문광고를 보았다. 그때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는 첫 번째 순서는 신문 하단에 실려 있는 개봉 광고를 보는 것이었다. 거기 영화제목 <夢女>만큼 큰 글자로 ‘立體映畵’라는 카피가 자리 잡고 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몽녀>의 마케팅 포인트가 ‘입체 영상’이 아니라 ‘입체 음향’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 아래 ‘한국 최초로 시도되는 4본 츄럭 입체음향’ (물론 ‘츄럭’은 ‘트랙’의 당시 표기이다)이라고 ‘기술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구는 영화광고 지면의 맨 위에도 다른 서체로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이재웅 녹음기사의 이름으로 “관객에게 피로를 주지 않는 선명한 영상에 완벽한 입체화면, 입체 음향. 등골이 오싹하는 장면들이 많은 본격적인 입체음향, 4본 튜럭을 겸한 완전 입체영화이오니 임신부나 심약한 분은 동반하시길...” 이라고 충고하는 카피를 덧붙였다. (아래는 ‘츄럭’이라고 쓰고 바로 위에는 ‘튜럭’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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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이상한 점. 이재웅 녹음기사는 지금이나 그때나 영화 현장에 있는 스텝들 이외에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다. 하긴 그건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설국열차> 혹은 <올드 보이>, <밀양>, <피에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녹음 기사 이름을 들어는 보았는가. 그런데도 <몽녀>는 주연 배우나 감독의 이름 대신 녹음 기사를 내세워서 광고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말 그대로 ‘前無後無’한 일이다. 두 번째, 만일 카피에 내건 이름이 무언가를 보증하는 것이라면 이 문구에는 연출(과 촬영)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냥 녹음 기사의 이름으로 “오싹하는 장면들과 선명한 영상”을 보증하고 있다. 카피의 목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어떤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카피를 전적으로 믿는다면 <몽녀>는 사운드로 연출된 영화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우리는 지금 <몽녀>를 ‘4본 츄럭 (혹은 튜럭)’으로 감상할 수 없다. 현재 보존하고 있는 네가의 손실에 사운드트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판스코프와 장석준 촬영감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 번째 ‘입체영화’를 찍은 임권택에게 돌아오고 싶다. 1968년에 임권택은 네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그런 다음 이듬해에는 6편을, 그리고 70년에는 8편을, 71년에는 7편을 찍었다. 그 자신은 “완성한 영화들이 개봉이 밀려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4년간 25편을 찍은 건 사실이다. 임권택은 창작에 대한 아이디어와 열정에 넘쳐나서 (그의 전 작품 중에)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영화를 이 시기에 찍은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 몸의 피로. 시간의 피로. 지쳐버린 이미지. 무시무시한 속도. 아이디어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도. 막다른 골목. 이어지는 현장. 임권택은 지나간 것에서 나와야했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건 그저 그때 그의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이다. 그 안에 있으면서 임권택은 영화가 무언가에 침범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테크놀로지들. 영화는 테크놀로지가 변하면 문법이 바뀐다. 한국영화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찾고 있었다. 기술의 진보. 기존의 기계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 영화는 미래주의의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이동. 그 와중에 놓인 해. 1968년에 만든 영화들 사이에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단 한 가지. 그건 그 이전과 다른 것을 만드는 것이다. <요화 장희빈>은 이미 임권택이 만들어온 사극이지만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칼라영화이다. 물론 그 새로운 이것임, 이 기술에만 놓여있던 것은 아니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반공영화지만 희미하게 구원이라는 테마가 종교의 말씀에 이끌리고 있다. <돌아온 왼손잡이>는 임권택의 세 번째 ‘다찌마와리’영화지만 여기서 그의 영화 전체를 뒤덮다시피 하는 신체훼손의 테마가 불려 나온다. 만일 이 또 다른 새로운 이것임, 에 대한 새로운 짝이 없었다면 <잡초>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위험한 가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 안에서 느껴지는 영화 자체의 감각에 대한 불안이다. 새로운 시스템. 잘 작동되지 않기 시작하는 영화의 지각 장치들. 그 사이를 에워싼 다음 무언가 닫혀버린 듯한 장치들. 자기 앞에 놓인 영화의 구역이 자기에게 친숙함 속에서 낯설어지는 경험. 임권택은 그것을 익혀야만 했다. 무언가 그가 여기서 새로운 것을 해냈다기보다는 어쩐지 이 영화들에는 배움의 태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3D 영화 <몽녀>가 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나는 아직도 3D 영화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아바타>에 대해서 일제히 흥분했을 때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단지 영화가 너무 시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이 영화가 보여준 3D에서 어떤 영화적 흥분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공격처럼 느껴질 것이다. 천만의 말씀. 나는 논쟁을 하기 위해 지금 이 말을 꺼내든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반문하고 싶다. 3D는 영화에 무엇을 부여하였는가? 생명? 글쎄. 상상? 천만에. 거기엔 정반대의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당신도 알고 있다. 사유? 어쩌면. 그렇다면 어떤 사유? 여기엔 다시 어떤 관념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대신 무언가를 보여주려들 때 나타나는 그저 물리적 운동들, 드러난 흔적선, 거기서 나는 단지 프레임의 변주를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대신 어디에선가 쇼트가 중단되었음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이 너무 섣부른 것이라면 적어도 영화라는 시간의 멈춤, 거기서 비롯된 모종의 고통, (그렇다) 무언가 멈춰버린 답답한 쇼트 안에서 다소의 피로를 경험하였다. 나는 여전히 3D를 볼 때마다 두리번거린다. 좌표체계들의 질서로 다시 배치된 프레임. 새로운 조건, 이때 내가 여기서 보는 질서는 동시에 (재난이라는 의미에서의) 카오스이다. 새로운 질서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창조를 보는 대신 무언가 떠오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는 어떤 실패를 본다. 나는 아직 이 실패를 설명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때 무엇이 어른거리는가. 새로운 이미지? 아, 이미지. 그런데 어떤 이미지? 공간의 새로운 경험. 그렇게 다시 경험이라는 말이 영화에서 우리들의 중심에 들어섰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기술의 경험이라는 문제는 영화에서 까다로운 질문이다. 만일 누군가 3D 효과의 가장 훌륭한 예를 요구한다면 (3D기술로 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힛치콕의 <현기증>에서의 줌 인 트랙 아웃을 선택할 것이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현재의 생산조건이 예술에서 실현가능한 발전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종종 미학적 가치의 기준과 시장의 교환가치 사이에서 모호한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가능성의 잠재성. 어쩌면 내게 당신은 그 잠재성과의 거리에서 가능성의 상상이라는 능력을 다시 조절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몽녀>를 말하기 위해서 나는 다소 우회하고 싶다. 잠시 멈춰 세운 1968년. 모두가 물어보았다. 21세기 영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D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지만 <아바타> ‘이후’ 만큼 전세계적인 (자본과 그에 얽혀든 노골적인) 구경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를테면 2013년, 할리우드로부터 (겉으로는) 영화 예술을 방어하기위해 예술가들을 위한 파티처럼 ‘골치 아픈 작가’들의 영화를 모아놓는 칸 영화제가 3D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개막작으로 초대하였고, 경쟁하듯이 이어지는 베니스영화제가 역시 3D 영화 <그래비티>를 마찬가지로 개막작으로 발표하였다. 3D영화에는 한 가지 신화가 있는데 그건 지금 막 발표한 ‘아무도 보지 못한’ 새 영화가 이제까지의 어떤 3D 영화도 기술적인 이유로 구현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미지를 경험하게 해줄 것이라는 소문이다. 물론 그건 빈 상자이다. 마치 진짜 선물을 감춰놓은 최후의 상자처럼 사람들은 지치지 않고 열고 또 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이다. 차라리 이미지의 경험이라는 문제를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IMAX에 대해서 아주 관심이 많다. 그건 시네마스코프만큼 생각해볼만한 영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연설명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당신은 내게 냉소적으로 반문할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IMAX를 볼 수 있는 스크린이 없잖아요. 나도 알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당신의 지적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화면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자리에서 IMAX 스크린으로 고정시킨 것이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영화 전체를 IMAX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IMAX 체험이라는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영화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의 물신적 체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는 다소 짓궂은 담론의 교란이 음산하게 떠돈다. 잘못 잡아당긴 재앙의 실. 그때 테크놀로지는 비판적 거리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한 가치와 이윤율의 회전 사이 안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예술에서 기능이라는 문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영화에서 우리를 새로운 환경, 낯선 속도, 무언가 시선이 얽히고설킨 가운데로 데려다 놓는 것처럼 보일 때 거의 동시에 어떤 영화적 능력이 마비되고 있음을 동시에 느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기능이 속도를 갖기 시작하면 다른 능력은 감속하기 시작한다. 나쁜 경우는 그 능력이 제로가 될 것이다. 문제는 21세기 영화에서 오로지 산업적인 이유로 두 가지 테크놀로지가 배급 구조에 따른 (제한된 자본 순환구조 안에서 일반적 이윤율의 하락을 상쇄하는 새로운 제 요소 중의 하나로 강제적으로 결합시키려는) 극장 라인의 요구에 따라 기형적으로 결합하면서 오히려 영화의 모든 잠재성은 하나의 감각으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는 자본의 운동. 3D 영화는 초과잉여가치의 발생인가, 아니면 (관객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제한된 시간 동안 제공하는 자리를 바탕으로 한) 임대업의 상승인가. 그 자리를 차지한 시각적 스펙터클. 말하자면 영화의 입장에서 IMAX 3D는 일종의 스펙터클한 괴물이다.

나는 이것을 벤야민의 말을 빌려 와해된 시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와해된 시장에서는 오락만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뿐이다. 기 드보르는 여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덧붙인다. 스펙터클이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되어버린 자본이다. 자본은 미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를 보았다. 멜리에스의 환상적인 타블로 안에서 재현된 3D. 베르너 헤어초크의 <잊혀진 꿈의 동굴>을 보았다. 프랑스 남부 아르데스 협곡 안에 자리 잡은 쇼베 동굴 안에 자리 잡은 3만 2천 년 전의 동굴 벽화들. 그 사이를 외롭게 떠도는 3D 카메라(들). 빔 벤더스의 <피나>를 보았다. 피나 바우쉬의 제자들의 기억과 재현. 종종 무용수들은 2차원을 벗어나듯이 도약한 다음 중력이 잡아당기는 무게에 따라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갔다. 픽사의 <토이 스토리 3>를 보았다. 나는 단지 효과라는 점만 고려한다면 3D는 애니메이션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새로운 차원에 대해서 금방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3D 영화는 실재의 감각을 가져야만 한다는 명제를 여기서 확인한다. 프란시스 포드 콧폴라의 <트윅스트>를 보았다. 이 야심적인 뱀파이어 영화는 다만 부분적으로만 3D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명백히 이 영화는 장 엡스탱의 <어셔가의 몰락>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 엡스탱의 포토제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 그 속에서 창조된 시간. 영화와 물리학은 정말 만날 수 있을까. 이미지의 부피와 표면, 길이와 지속. 그러나 콧폴라는 그렇게 멀리 가는 대신 몇몇 시퀀스에서 꿈을 바라보며 멈추었다. 스필버그의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을 보았다. 무언가 스필버그는 이 새로운 효과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쥬라기 공원>의 3D 트랜스퍼 버전을 보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3D 효과에 심취한 팀 버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흑백 3D <프랑켄위니>. 하지만 나는 팀 버튼이 여기서 정확하게 무얼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 리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았다. 아, 리안. 영리한 리안. 매번 시퀀스마다 새롭게 다시 정의되는 3D의 (프레임 속의) 이미지들. 그는 극장을 마치 갤러리처럼 활용하였다. 연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큐레이팅이라고 부르고 싶은 배치들. 나는 의자에 앉아있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배회를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떠도는 배에 실려 함께 부유하는 스크린의 프레임들. 리안은 거의 영화를 멈추기 직전까지 끌고 간 다음 관(람)객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재빨리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걸 영화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수상쩍게 쳐다보고 있다. 서극의 <용문비갑>을 보았다. 이미지 속의 (이미지 속의 (이미지 속의)) 유희들. 과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동들. 과도할 정도로 배치된 특수한 순간들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선. 비검(飛劍)의 선. 능공허보(凌空虛步)의 선. 마치 공장에 들어온 것 같은 톱니바퀴들의 향연. 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D 영화들이 만들어지면 (그 원래의 의도에 따라) 2D로 볼 수 있는 기회가 함께 제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D로 ‘하여튼’ 본다. 물론 그건 그 영화에 대한 전적인 내 예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즐기기 위해서 극장에 간다. 물론이다. 거기서 무엇을 즐길 것인가. 흥미로운 것들. 영화 안에 있는 영화적인 것들. 우리는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질문은 더 이상 투명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투명하지 않았다. 3D 효과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덧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당신은 영화의 이야기 진행에서 사실상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다고 맞받아치고 싶을 것이다. 물론 미메시스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 영화에는 이상하게도 미메시스로부터 독립적인 그 무엇이 거기에 머물기 시작한다. 거기서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미지들의 수수께끼. 바로크적인 재현들.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종종 재현의 디테일과 만날 때 새로운 경로들과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이 때로 영화의 매너리즘을 재촉할 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논의를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3D 영화를 볼 때 이 효과가 영화의 일부라기보다는 이상하게 3D 라는 효과가 영화에 침입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단지 이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영화 안에 강제적으로 이 효과를 삽입하면서 벌어지는 기계적인 외설적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차례차례로 만나게 된 3D 영화들. 새로운 효과들, 기발한 상황들. 낯선 미장센. 그 안에서 물건들의 이상한 이동. 때로는 동선. 기괴한 카메라의 위치. 이 질문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D 효과는 영화에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효과는 이차원의 착시를 이용한 이제까지의 영화 문법에 대해서 외설적일 뿐만 아니라 난폭한 부름에 우리를 지속적으로 깨어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종종 장르적인 외피 때문에 3D 효과가 환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효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지 이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을 방해하는 외부적인 공간 감각의 재현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이미지가 우리들에게 감각의 방어선을 찢고 외상적 실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3D 영화를 볼 때 보는 자세를 조금만 흐트러트리면 곧장 쓰고 있는 안경과 스크린의 이미지 사이의 시차적 초점이 맞지 않아 화면이 이중으로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3D 영화를 볼 때 (감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은 꼼짝도 하면 안 된다. 고정된 시선만이 당신의 감각을 입체적인 화면 안에 집어던져 넣을 것이다. 그때 당신이 견뎌야하는 자세와 맞바꾸는 것은 <아바타>의 제이크 설리처럼 마음껏 화면을 뛰어다닐 수 있는 환상적인 착시의 자유가 아니라 반대로 화면 사이에서 부딪칠지도 모르는 미장센들 사이의 모서리와 추락할 지도 모르는 가장자리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시뮬레이션의 감각들이다. 점점 더 영화와 나 사이의 동일화는 단지 상상적 자아에 호소하기보다 실재적 감각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싶다.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때 우리는 작품으로부터 심미적인 감흥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이 고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낙천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영화와 당신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 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내가 망연자실해진 것은 올해 여름이다. 지금 무심코 지나가고 있지만 2013년은 어떤 표지판을 갖게 될 것이다. 미학적 논쟁은 프랑스 남쪽 니스 근처의 해안가 칸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LA의 영화제작자들은 그런데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거의 눈부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3D 영화들. 무엇보다도 두 편의 영화. JJ 에이브럼스의 <스타 트렉 다크니스>와 길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은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 그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까지 그저 공간의 깊이와 대상의 근접이라는 문제에 머물렀던 영화들에서 이 영화들은 쇼트의 기형화와 리듬의 왜곡이라는 새로운 영역 안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이 영화들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클리셰들이 머물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엔 <맨 오브 스틸>처럼 끔찍하리만큼 유치한 영화도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두 편의 실패작을 말할 차례이다. <7광구>와 (한국영화 사상 첫 번째 풀 3D라는) <미스터 고>는 영화로서 뿐만 아니라 3D 효과라는 면에서도 재난에 가깝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망설여진다. 영화와 영화의 효과. 그 둘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물론 그들은 기술적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하이테크한 기술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효과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왜 그들은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일까. 누군가는 마케팅 전략에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물론 그럴 지도 모른다. 지난 봄부터 바보 같은 영화들이 차례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므로 <미스터 고>는 실패할 이유가 없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박스오피스에 관심이 없다. 내가 말하는 실패는 그 효과가 왜 대중들의 구경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왜 그 효과들이 영화 화면의 좌표 안에서 선별된 변수들 바깥으로 빠져나와 종종 물리적이거나 단지 역학적인 기능 이외에 달리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영화는 프레임의 집합 안에 머물지 않으면 곧장 영화 자체를 부수기 시작한다. 제임스 캐머론은 <아바타>에서 (종종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시각적 영역을 서사의 범주 안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지닌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서 일종의 방어선 같은 것이 되었다. 물론 종종 바보 같은 영화들이 그걸 뛰어넘어서 화면 바깥 어딘가에서 어른거리고 싶어 했다. 혹은 손에 잡힐듯 한 그 무언가를 신기루처럼 허공에 멈춰 세웠다. 허공에 떠 있는 건 자막만으로 충분하다. 3D 영화들은 프레임으로부터 이미지의 일부를 바깥으로 내 보내는 대신 어디서 멈춰 세워야 할지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영화에서 새로운 영토이자 구역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new Zone’이라고 다시 정의하였다. 새로운 개념의 발명. 이때 핵심은 3D 영화는 스스로에게 어떤 한계를 설정할 것인가, 라는 그 경계의 설정이 미학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악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내가 던진 돌이 거기서 멈출 것입니다, 라는 태도. 혹은 당신을 향해서 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결정. 처음 3D 영화가 나왔을 때 모두들 결국 이 테크놀로지는 스포츠 중계와 포르노로 귀결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적어도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당신은 3D 모니터가 대중화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경고가 담겨있다. 모두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 장르가 둘 다 3D 영화를 이끌지 않은 것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방어선처럼 놓여 있는 둘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는 순간 대중들의 상상은 중단되고 신기루와 같은 효과를 채우는 그 기능이 마비되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D 효과도 사실상 시각적 착시 효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만일 이 착시를 보충하는 상상을 포기하게 되면 반대로 감각은 그것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영화에서 결국 터치(touch)라는 문제가 불려나오게 되었다. 이제 3D 영화는 바로 그 거리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다시 결정하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단지 질문만을 붙들고 늘어진다면 우리들의 논의는 왠지 영화와 미술 사이의 친밀성에로 되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이제 제법 많은 목록을 갖게 되었다. 만일 3D IMAX를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토대를 무시하고 그저 순진하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나는 이 테크놀로지가 오히려 인스톨레이션에서 훨씬 더 창조적인 역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 예. 마르셀 뒤샹이 20년 동안 남몰래 제작해 온 <주어진; 1 폭포, 2 점등된 가스등>에서 마치 핍 쇼 공간처럼 옮겨놓은 광경은 우리들에게 뚫린 구멍 너머의 (시각의) 원뿔을 제시하고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도 같은 자리에 불려간 관객. 문 너머의 스펙터클. 그 안에서 뒤샹은 르네상스 원근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구멍 너머에 있는 광경 안의 대상을 우리에게 던져놓은 다음 다시 한 번 시선이라는 원근법의 기하학을 미술관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이때 나의 관심은 새롭게 정의 내려진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개념이다. 차라리 우리는 이 작품을 3D 로 보는 편이 더 뒤샹의 시선 안에 손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두 번째 예. 1966년 댄 그레이엄의 사진 작업 중 <미국을 위한 집; 스콜릿 레벨과 그라운드 레벨, 두 개의 집이 있는 집>을 보고 있으면 이 두 장의 사진은 (뉴저지에서 레디 메이드한 미니멀리즘의 코드를 드러내려는 의도와 상관없이) 얼핏 유사해 보이는 둘 사이에서 서로 겹쳐지지 않는 차이를 통해 단지 건축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상호간의 매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지표 사이의 상호작용을 읽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두 개의 사진을 3D 화면으로 올려놓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든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세 번째 예. 빌 비올라의 비디오 프로젝션은 영화를 빌려온 다음 고스란히 영화에 수 없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1996년 작품인 <교차>. (나는 의도적으로 백남준의 예를 들지 않았다) 비올라의 작품에 대해서는 수많은 다른 이론을 전개할 수도 있다. 명백히 마샬 맥루한의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다음 비올라는 빛과 프로젝션 사이에서 보는 자리를 다시 배치하였다. 물론 비올라는 자신의 작업이 매체에 지나치게 다가가는 것을 경계했다. 여기서 미술 비평가들이 끌어낸 개념은 외상적 숭고란 칸트적 개념이었다. 숭고.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이미 라캉이 물 자체라고 정의 내렸던 그 경험 안으로 지각이 방문할 때 3D 스크린은 우리를 환상과 실재 사이에서 게임을 제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멀리 온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몽녀>를 바라볼 생각이다. 3D 효과의 가능성이라는 질문. 아직 질문이 잠재적인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었을 때 임권택의 선택. 산업 안에서의 선택. 장르 속에서의 선택. 판스코프 촬영으로 찍은 첫 번째 입체영화 <천하장사 임꺽정>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두 영화 사이에서 입체 기술의 효과가 보여주는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혹은 거기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걸 보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임권택도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입체영화는 특수(라고 해야 장난감 안경 수준에 양쪽에 서로 다른 레드와 블루 셀룰로이드를 프레임에 붙인) 안경을 착용해야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만일 개봉당시에 보지 못했다면 관람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3D 영화에 대한 별다른 경험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3D 영화의 전문가들은 3D 효과는 기술적인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험에 대한 데이터의 문제라고 조언한다. 아마도 임권택이 <몽녀>를 만들었을 때 장석준의 조언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때 장석준은 임권택에게 영화에서 이미지의 입체라는 효과에 대해서 무슨 조언을 했을까. 내 질문은 단순하다. 그 말에 따라 임권택이 가정한 효과의 연출이라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이하의 글은 스포일러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지금 리뷰를 쓰는 것이 아니다) <몽녀>는 광고 문구에서 자기 장르를 ‘推理 怪奇 映畵’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다소 장황한 줄거리. 자수성가한 재계의 거물 정 사장은 카바레 라스베가스의 사장이자 밀파간첩인 리나에게 가짜 유언을 녹음하도록 협박을 당한 후 살해당한다. 목소리만 남은 아버지. 그런데 그 목소리에 담긴 가짜 증언.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장례식 날 정 사장이 평소에 아끼던 박민호가 일본에서 급히 귀국하지만 중간에 속임수에 빠져 호텔로 유인당한 후 가짜 박민호에게 역시 살해당한다. 가짜 상속자. 결혼을 위임받은 가짜 사위. 하지만 이 두 개의 씬은 연달아 붙어있고, 어떤 인과관계로 엮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무언가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본 다음 가장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말고 정 사장은 더 이상 영화에 어떤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 영화가 추리일 뿐만 아니라 괴기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아버지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름으로서도(name-of-the father) 사라졌을 때 유령의 존재는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몽녀>는 <햄릿>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을 때 억압은 어디서 귀환해야 하는 것일까. 혹은 유령은 어디서 출현해야 하는 것일까. 실망스럽겠지만 이 영화는 초자연적 현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때 3D(와 입체음향) 효과는 어디에 개입할 수 있을까. 그 효과들은 영화 안에서 어떻게 시청각적 기호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임권택과 장석준은 귀신을 버린 대신 무엇을 얻은 것일까, 혹은 얻으려는 것일까.

악당들의 목표이자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는 정 사장의 금괴. 가짜 박민호는 장례식에 참석한 후 가짜 유언에 따라 사업을 물려받고 정 사장의 딸 인숙과 결혼을 준비한다. 가짜 박민호는 인숙의 호의를 사면서 집에 입주하마자마 한편으로 매일 밤 (정 사장이) 금괴를 숨겨놓은 지하실을 뒤진다. 아, 지하실. 언제나 지하실. <사이코> 이후에 언제나 비밀은 그곳에 있다.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경계선으로서의 계단. 이때 이 거대한 저택에서 지하실은 이상하게도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장소처럼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 차 있고 종종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이 상황은 장르적인 약속이다. 박찬욱의 <스토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넓은 일층. 그 자체로 완전하리만큼 충족된 장소.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지나치게 좁고 작은 인디아 스토커의 방에 도착한다. 상자들로 가득 찬 그녀만의 세계. 그리고 마치 다른 집에 온 것만 같은 온통 먼지에 가득 찬 채 전깃불도 제한적으로 들어오는 이상한 지하실. 영화에서 지하실이라는 공간의 역사. 가짜 박민호는 지하실에 금괴를 숨겨놓았다고 확신하고 매일 밤 지하실로 내려간다. 물론 우리도 같이 내려가야 한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현재의 (탈색현상으로 이미지의 정보 손실이 크고, 사운드 코팅이 벗겨져 심지어 대사조차 불분명하며, 일부 쇼트가 사라졌고, 권수가 뒤바뀐) 프린트 판본으로는 지하실의 미장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지하실에 내려갔을 때 가짜 박민호가 마주치는 장르의 두 가지 컨벤션은 말해야겠다. 하나는 고양이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저택의 식모이다. 아마도 도둑고양이. 인숙은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그 집 주인이 기르지 않는 동물을 누가 그 저택에서 기를 수 있을까. 마치 금괴를 지키기 위해 지하실에 머무는 듯한 고양이. 거의 말이 없는 여주댁. 그녀는 밤늦은 시간 불도 켜지지 않는 지하실에 왜 내려온 것일까. 가짜 박민호는 이 집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야만 했다. 지금 이 게임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 겉보기에는 가짜 박민호와 리나가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들은 금괴라는 유혹에 이끌려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볼 수 없는’ 이상한 집에 끌려 들어온 것이다. 잉여지식으로서의 지하실. 그때 우리는 원근법을 잃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원근법. 새롭게 세워져야 할 타블로. 임권택(과 장석준)이 3D 효과를 전시하기 위해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지하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때 임권택(과 장석준)은 지하실 세트를 설계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지하실이 과도하리만큼 직선으로 이어진 수직선의 공간이며 이 선을 따라 카메라는 트랙 위에 올려져서 안정적으로 후진하거나 전진한다. 이동이라는 깊이. 인물은 그 선을 따라 동선을 연결하고, 카메라의 렌즈는 인물과 소실점 사이에서 이동할 것이다. 이 직선을 따라서 여러 개의 방이 양쪽 좌우로 늘어서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지하실은 불가능하다. 이때 이 설계가 소실점을 가정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점과 선으로 이어진 공간. 이 공간을 찢고 등장하는 고양이의 무규칙한 동선과 지하실로 내려오는 계단이 놓인 문이 몇 개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여주댁의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의 출몰. 누가 누구를 홀리는 중일까. 임권택의 쇼트는 여기서 이상하리만큼 길어지고 있다. 아니, 감각적으로 늘어지고 있다. 나는 이 늘어짐, 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마치 카메라의 이동이 요청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늘어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야기가 계속 지하실에서 진행될 수는 없다. 가짜 박민호가 지하실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밤사이에 잠깐 뿐이다. 인숙은 자꾸만 지하실로 내려가는 가짜 박민호을 의심한다. 물론 이 의심의 외설적 판본은 명백하다. 왜 당신은 이렇게 예쁜 나를 내버려두고 밤마다 지하실에 내려가는 것인가요? <몽녀>에서 임무와 욕망 사이의 교차는 이상하게 서로 뒤엉키고 있다. 가짜 박민호는 리나가 인숙을 없애버리자고 제안할 때 망설이면서 두 번이나 전혀 예상치 않은 답변을 한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지, 불쌍하더군, 그 애만은...” 임권택은 이 감정을 더 발전시키지 않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인숙은 처음부터 가짜 박민호에게 호의를 갖지 않았으며, 계속 의심하고, 그런 다음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의 비서였던 성우의 품에 안기면서 “무서워요, 절 좀 지켜주세요, 그 사람을 집안에 끌어들인 것도 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기 위해서였어요. 성우씨”라고 간절하게 고백한다. 이때 이상할 정도로 3D 효과는 완전히 작동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임권택(과 장석준)은 3D 효과가 감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물론 이건 지금도 3D 영화들의 고민이다. 이야기의 진행 때문에 할 수 없이 3D 효과를 멈춰야하는 순간과 마주칠 때 3D 영화들은 단지 이미지뿐만 아니라 리듬 자체의 변주를 경험하게 된다. 베르너 헤어조크와 빔 벤더스는 소재의 힘을 빌려 이 순간을 피하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를 불균형하게 만들었다. <위대한 갯츠비>는 그런 의미에서 거의 효과의 재난에 가깝다.

<몽녀>가 기괴해지는 것은 그 다음부터이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상한 법칙들의 적용. 한쪽이 기울기 시작한 진행. 균형을 잃을 때 보게 되뇩오鵑贊?위치의 시선. 낯선 반응. 영화는 환상에 이끌리는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정신을 잃는다. 그 다음의 진행. 인숙이 의심을 품자 가짜 박민호와 리나는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면서 한편으로 정신병을 유발하는 약을 먹여 최면 상태에 빠져서 금괴를 숨겨놓은 곳을 자백하도록 유도한다. 그때 리나는 정 사장의 목소리를 가짜랜옇링榕底?인숙에게 전화한다. 전화로 정 사장은 인숙에게 “나다, 아버지야, 애비 소릴 몰라, 감춰둔 금괴 말이다, 나쁜 놈들이 그걸 노리구 있어, 그걸 빼앗기면 안 된다, 아무래도 그 장소는 마음에 걸리거든, 장소를 옮겨서 다른 곳에 숨겨두라구, 알았지” 라고 말한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뒤집힌 햄릿의 버전. 죽은 아버지가 돌아와서 인숙에게 말해준다. 나쁜 놈들이 금괴를 노리고 있으며, 그들이 네 곁에 있다는 사실. 가짜 박민호와 리나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상 아버지의 진짜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중이다. 인숙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인숙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경유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더 나아가 목표마저 고백하고 있는 중이다. 죽음에 머물지 않고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 딸이 염려되어서 돌아온 아버지. 그때 음모를 진행하던 리나는 이상한 대사를 한다. “프로이드 정신분석이 없었다면 이런 약을 만들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나는 거기서 멈춰 섰다. 물론 나도 안다. 이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진지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인숙에게 사용된 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다. 프로이드는 장 마르탱 샤르코의 최면술에서 영감을 받긴 했지만 곧 버리고 자유연상법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가짜 박민호는 이때 인숙에게 착각을 심어주기 위해서 정 사장이 살아생전 아끼던 꽃병이 놓인 책상 다리를 미리 자른 다음 인숙이 지나가자마자 쓰러져 깨지게 만들고 인삼차를 타려는 그녀보다 앞서 부엌에 들어가서 설탕과 소금을 바꿔친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는 인삼차에 소금을 탄 다음 자기의 실수를 발견하자 흐느끼면서 “이러다 미친 여자가 되고 말 거예요, 광인이 돼버릴 거란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마치 리나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인숙은 자신의 증세를 스스로 진단을 내린 다음 그 증세 안으로 자기를 밀어 넣기 시작한다. 텔레파시와도 같은 조응. 여기서 이상하게도 나는 임권택이 영화에서 3D 효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건 단지 눈속임이 아니다. 이미지의 새로운 유형.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임권택은 그걸 영화의 정신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이미지의 알리바이. 하지만 임권택은 그런 다음 두 번 다시 입체영화, 혹은 3D 영화를 찍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가정을 더 밀고 나갈 수 없다.

만일 <몽녀>가 복원된다면 나는 오로지 그 다음 장면, 그러니까 인숙이 대낮에 마치 홀린 듯이 길거리로 나간 다음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걸어가는 시퀀스 때문에 (불편한 입체 안경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시적으로 찍혔다. 한산한 초여름의 서울 시내. 넋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인숙. 초점 없는 산책. 육교 위를 수평으로 걸어갈 때 다소 기울어진 수직으로 보이는 차선. 수평의 동선과 수직의 운동. 인숙이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방향에서 다가와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동선들. 서로 다른 속도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할 때 만들어지는 화음. 그녀가 한적한 길로 접어들자 뒤쫓아 오던 리나가 그녀 곁에 차를 대고 “아니, 인숙씨 아니세요, 타세요,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셔다 드릴께요” 라고 호의를 베푼다. 서울 외곽으로 이어지는 풍경들. 1968년 서울의 3D 풍경. 리나는 인숙에게 친절한 척 가장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신경쇠약이라고 들었는데 하루 속히 고쳐야죠, 잘못하면 정신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무서운 병이죠” 인숙은 그저 앞만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고치지 않겠어요. 고칠 수가 없어요” 리나는 인숙을 끌고 부평 기찻길까지 데려간 다음 인숙에게 말한다. “기적소리를 들으면 이상한 충동을 느끼곤 하죠. 가령 기차를 향해 뛰어들고 싶다든가” 그러자 인숙이 터널을 바라보면서 대답한다. “그렇군요,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함께 기찻길을 따라서 걸어가던 리니는 갑자기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기차에 인숙을 밀어 넣는다. 인숙의 죽음.

이때 인숙은 두 번 몽녀가 된다. 한번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아버지의 유령에 시달리면서 빠져들 때이고 (꿈꾸는 여자), 두 번째는 그녀 자신이 죽은 다음 가짜 박민호 앞에 잠옷을 입고 나타날 때이다. (꿈으로서의 여자) 인숙이 죽은 다음 유령이 되어 다시 찾아올 때 그녀를 보는 것은 그녀를 살해한 리나가 아니라 그녀를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설득하던 가짜 박민호이다. 심지어 고양이가 달려들 때 가짜 박민호는 해골을 본다. 만일 <몽녀>에서 의학적으로 정신이상에 빠진 인물이 있다면 그건 가짜 박민호이다. 이 이상한 증후의 인과관계. 물론 죽은 (흉내를 내고 있는) 인숙은 리나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리나 송, 내 목을, 내 목을, 리나 송, 내 목을”이라고 반복해서 읊조린다. 두려움에 질린 리나는 가짜 박민호에게 말한다. “우린 신경쇠약에 걸렸나 봐” 리나는 인숙에게 뒤집어씌우려던 증세가 자신들을 덮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자 가짜 박민호는 이상하게 대답한다. “일 년 육 개월의 남반부 생활이 그렇게 만든 거야” 가짜 박민호는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을 재빨리 인정한 다음 그 원인을 남반부 생활에 돌린다. 나는 약간 웃음을 참아가며 이 대사를 따져들고 싶다. 그들의 신경쇠약은 자신들이 살해한 정 사장이나 혹은 그의 딸 인숙때문이 아니다. 또는 제한된 일정 안에 찾아서 북에서 온 공작원에게 넘겨야 했던 금괴 때문이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그들의 임무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신분을 숨겨야하는 긴장에서 온 것도 아니다. (마지막 시퀀스까지 그들의 정체를 간첩과 연결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대공수사본부의 감시와 평행 편집될 뿐이다) 그들은 북한에서는 (적어도 신경질환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들을 억압하는 건 ‘남반부의 생활’이다. 휴전선 이남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들 신경증 환자이다. 그러므로 환자들의 일상 안에서 사는 건 가짜 박민호와 리나에게는 그들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령을 마주하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삶이다. 아, 가련한 남반부의 삶이여.

물론 그 다음은 예정된 수순을 따라간다. 리나를 인숙의 유령으로 착각한 가짜 박민호는 그녀를 살해한 다음 혼자 빠져나와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과 접선한다. 하지만 이미 대공수사본부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고 가짜 박민호는 급히 차를 몰고 달아나다 그만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죽는다. 간단한 에필로그. 인숙과 성우는 정보계장을 만난다. 두 사람에게 정보계장이 그들의 공고를 치하하자 성우는 “모든 것이 인숙씨의 기지로 성공 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정보계장은 인숙에게 “아닌 게 아니라 어제 밤 유령노릇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라고 덧붙인다. 인숙은 “반납하겠어요, 이십세기 유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보계장에게 청첩장을 주고 함께 떠난다. 끝.

임권택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교훈? 물론 임권택이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적 환경에 대해 적대적이 된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5년 뒤에 <증언>에서는 한강 철교 폭파를 일본 스텝진의 도움으로 미니어처 촬영을 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특수촬영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춘향뎐>과 <취화선>에서 사용된 CG 효과. 끝내 미루기는 했지만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디지털로 촬영했다. 영화에서 테크놀로지는 까다로운 문제이다. 새로운 기술들은 가까스로 만들어진 미학적 규칙 안에서 어떤 훼손들 사이의 긴장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종종 진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때로 미학적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임권택은 여기서 3D 효과라는 것이 영화 안의 형식적 용법들을 거의 중단시킬 뿐만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인물들이 효과의 감옥에 갇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나는 현장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몽녀>를 보고 있으면 어떤 순간에는 필요 이상으로 효과 앞에서 연출의 방법이 평면화되거나 때로 제한적으로 멈추는 것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지나치게 테크놀로지가 압도하게 될 때 이상하게도 이미지에서 아방가르드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나는 이미 장 엡스탱의 포토제니를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영혼을 거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이미지라는 반대 방향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때 이미지는 테크놀로지로 영혼을 물화시키고 더 나아가 종종 우스꽝스러운 형식의 기형으로 말미암아 영화의 감각 전체가 마비되기 시작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임권택은 거기서 잠재적인 가능성 대신 위기를 본 것 같다. 혹은 무언가를 판단하기에 1968년은 너무 이른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몽녀>는 자문자답하고 있다. 영화에서 새로운 기술적 진화는 무엇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가. 임권택의 대답. (어떤 영화적) 효과가 멈추었을 때 (이미지의 어떤) 효과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영화를 기능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차라리 이런 표현을 쓰고 싶다. 영화는 이미지의 도구가 된다. 그때 영화의 윤곽이 부서질 지 새로운 구성이 시작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새로운 문턱을 넘어섰고 대부분의 영화들은 절망적으로 부서져버렸다. 그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는 영화에서 3D 효과에 대한 질문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의심한다. 과도할 정도로 많은 질문들이 3D 효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던져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3D 효과가 무엇을 하는 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몽녀>는 거기서 멈추었다. 좀 더 공평하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몽녀>에서 더 나아간 것은 촬영감독이었던 장석준이 직접 연출하고 김상희가 촬영한 <지지하루의 태양>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몽녀>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다시 3D 영화가 진행 중인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아마도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 이후의 3D 영화들은 이제까지의 많은 논의들에 대해서 다시 수정을 요구할 것이다. 게다가 <아바타 2>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진행중인 질문을 그냥 여기서 잠시 멈춘 다음 그대로 남겨 놓을 것이다. 그 대신 예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다. 고다르가 첫 번째 3D 영화 <아듀, 언어에게 작별인사>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보지 못한 이 영화에 대해서 나는 예고편으로 대신할 생각이다. 이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계속 질문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