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MDb』 2015.03.12.작품

임권택x102; 정성일, 임권택을 새로 쓰다

십년세도 (1964)

반복한다는 것.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찍는다는 문제는 한국영화에서 종종 제기되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김기영. <하녀>를 1960년에 찍은 다음 거의 같은 이야기로 1971년에 <화녀>를 칼라 버전으로 찍었다. 그런 다음 약간의 변형을 가한 <충녀>를 이듬해에 만들었고 십년 뒤에 다시 <화녀 82>를 찍었다. 마치 하녀 역을 연기할 새로운 여자 배우가 나타나기만 하면 김기영은 언제든지 다시 찍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기영은 이 영화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영화사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세기가 바뀐 다음 같으면서 다른 버전으로 임상수가 2010년에 다시 <하녀>를 찍었다. 이만희가 1966년 <만추>를 만든 다음 김기영은 같은 시나리오로 <육체의 약속>을 1975년에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로 다시 김수용이 <만추>를 1981년에 찍었다. 무대를 미국의 시애틀로 옮긴 다음 김태용은 전면적인 개작을 해서 다시 <만추>를 2010년에 찍었다. 나는 지금 단순하게 리메이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기보다는 그 이야기가 먼저 있고 영화가 거기에 다가갔다는 전도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영화들을 무언가의 중심 안으로 환원시키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들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우리들은 거기서 매번 다시 시작하는 순간을 낚아채야 한다. 그런 다음 사라져 가버린 것들을 놓치면 안 된다. 그것들이야말로 서로 흩어진 이야기들이 그 스스로 차별 지어져 존재하게 만드는 진정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그 이야기들 사이의 매듭을 찾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운동을 모두 발견했을 때에만 비로소 따분한 반복과 사소한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논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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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의 <십년세도>는 같은 반복 안에서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일 년 전에 임권택은 같은 회사인 세기흥업에서 <망부석>을 찍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 영화에 대해서 썼다) 그런 다음 이듬해 <십년세도>를 찍었다.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보면 조선시대에 관한 다소 이상한 연표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두 영화는 서로 비스듬히 겹쳐 있으면서 동시에 같은 이야기에 대해서 서로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어떤 것이 되돌아온다는 문제. 그 안에서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남겨놓아야 할까. 간신히 끝냈다고 생각한 이야기의 어느 지점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 느끼는 망연자실함. 거기에 마치 어떤 진실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되돌아왔음을 발견했을 때 거기서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여기서 임권택은 이미 지나가 버린 자기 영화에 대해서 마치 지금 다르게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한 방법으로 다시 한번 시작하고 있다. 후렴구처럼 반복하고 싶은 말. 다시 한 번 다르게. 임권택은 숙종에서 장희빈을 거쳐(<요화 장희빈>) 경종에서 영조로 이어진 다음 사도세자의 뒤주에서의 죽음을 둘러싼 비화(<망부석>)를 거쳐 그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22대 왕 정조의 즉위와 그의 정치적 투쟁에 관한 이야기(<십년세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여기서 조선왕조실록의 고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는 일이다. 또한 사‘劇’영화에서 관점에 따라 비평적인 질문과 전술적으로 필요한 대답을 위하여 그 이면과 표면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전선을 형성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영화에서는 역사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먼저 환기시키고 싶다.

<망부석>에서 영조 살아생전 그의 아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와 그 무리들의 음모에 빠지고 그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 일시적으로 중단된 다음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인 정조가 아직 즉위를 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된 이후로 건너뛴다. 그런 다음 정조는 여전히 화완옹주의 독살 음모 속에서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정조를 사모하는 여인 꽃봉이의 목숨을 건 희생으로 위기를 벗어나서 왕위에 즉위한 다음 이야기는 끝난다. 여기서 실록에도 등재된 정조의 충신이었던 홍국영(1748년~1781년)은 그저 꽃봉이가 화완옹주의 요구로 독약을 들고 정조의 처소를 찾았을 때 그 음모를 밝히는 인물로 잠시 등장한 다음 사라진다. 그는 완전히 이야기 외곽에 놓여있으며 주의 깊게 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십년세도>의 주인공은 홍국영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 홍성원이 국경수비 대장이자 당시 영조의 신임을 받던 간신 장지항의 음모에 빠져 참수를 당한 다음 간신의 아들이라 하여 과거도 보지 못한 채 저잣거리를 떠도는 홍국영에게서 시작한다. 허나 그의 어머니로부터 큰 꾸지람을 듣고 더 이상 허송세월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 홍국영은 음모를 꾸며 자격을 취득한 이후 장원급제한다. 이미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난 뒤이며 영조는 아직 살아있고 정조는 지금도 화안옹주의 위협적인 음모와 힘겹게 싸우는 중이다.

우선 역할(들) 사이의 반복과 차이. 두 영화 모두에 반복해서 나오는 정조를 한번은 김운하가 연기하고(<망부석>) 다른 한번은 이수련이 한다. (<십년세도>) 하지만 임금을 연기했던 김운하가 이번에는 가장 밑바닥의 상놈을 연기하면서 (<망부석>에서) 자신을 모셨던 홍국영에게 (<십년세도>) 그의 누이를 사랑했다는 죄로 고문을 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다. 두 영화 사이의 차이는 고작 일 년이기 때문에 이런 배역 사이의 교환이 기이한 착각의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영조는 최남현에서 김동원으로 바뀌었고, 또한 화완옹주도 도금봉에서 이민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홍국영 역을 신영균으로 바꾸었다. (<망부석>에서 홍국영 역을 한 배우의 이름은 자료에 나와 있지 않다) 나는 볼 때마다 두 영화에서 만일 동일한 배우들이 동일한 배역을 연기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라는 불가능한 상상을 하곤 한다. 두 영화의 차이는 단지 정조로부터 홍국영에로, 임금에서 신하에로, 위에서 아래로 관점을 이동한 데서 멈추지 않는다. <망부석>이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정조가 어른이 된 다음 임금의 자리에 즉위하는 데까지를 다루었다면 <십년세도>는 어른이 된 정조가 영조의 신임을 얻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다음 영조의 가신들(이자 간신들)을 모두 물리치고 진정한 왕위를 수립하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망부석>이 시작된 다음 그 중간에 이르렀을 때 <십년세도>는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두 영화 사이의 시간적 간극은 고작해야 일 년에 불과하다.

두 영화 사이의 동일한 에피소드에 대한 다른 장면. <망부석>에서 화완옹주는 정조를 독살할 계획을 세운 다음 그의 처소에 드나들 수 있는 꽃봉이에게 독약을 탄 보약을 들려 보낸다. 하지만 꽃봉이는 그 보약을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 망부석이 세워진 곳에 감춰놓고 그냥 빈손으로 찾아가 정조를 마지막으로 만난다. 물론 그다음 장면은 대신 꽃봉이가 독약을 탄 보약을 마시고 죽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십년세도>에서도 화완옹주는 정조를 독살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옹주의 가신 중의 한 명이 독약을 품에 넣은 다음 정조의 처소에 몰래 찾아가 그가 늘 즐겨 마시던 술이 담겨있는 호로병에 털어 넣는다. 바로 그 순간 처소에 들른 홍국영은 한눈에 음모를 간파하고 그를 그 자리에서 붙잡은 다음 화완옹주 일파를 척결하기에 이른다. 물론 두 장면을 동일한 에피소드로 보는 대신 동일한 방법을 두 번 사용한 서로 다른 장면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 개의 장면을 놓고 진위를 가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내 관심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망부석>에서 꽃봉이는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인물이지만 그녀가 아니라면 실존했던 인물인 화완옹주의 음모를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가상으로 실재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 영화의 후반부는 꽃봉이의 심리적인 정념에로 옮겨간다. 만일 잠시 동안 등장한 사도세자를 (이제 막 청춘‘스타’가 된) 신성일이 연기하기 때문에 필요했으리라는 상업적인 배려의 짐작이 아니라면 이 영화의 (전반부의) 절반은 다소 어리둥절하게 보인다. 우리는 영화의 대중성에서 스타의 거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신성일이 연기하는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뒤주에서 죽임을 당한 이후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플래시백이 없다. 그런 다음 갑자기 시간을 건너뛰어 정조 주변에서 꽃봉이의 덧없는 사랑의 정념이 어떻게 궁궐 안의 권력 다툼에 착취당하고 교활한 전술에 강요당하는지를 애처롭게 지켜본 다음 그 과정에서 그녀 자신이 내려야 하는 행위의 결정이라는 순간과 마주쳤을 때 결국에는 해야 하는 행동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무능하게 쳐다보게 된다. 이 장면은 <망부석>의 이야기 중심에 놓여있으며 사실상 이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이 에피소드는 이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며 이 장면을 구심력으로 하여 다른 장면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 장면에서 꽃봉이의 행동이 자살에로 이끌리기 때문에 시종일관 거의 모든 제스처,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 무심한 정조에게 바치는 대사의 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음악이 비극의 정조에 휩싸여있다. 마치 그러한 기호들은 그녀를 옭아매는 운명의 사슬처럼 보일 정도이다. 임권택은 이 장면에서 씬들을 할 수 있는 한 길게 늘여놓고 있다. 그런 다음 자살의 장면을 향해서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그때 우리들은 꽃봉이를 따라가면서 그녀의 삶에 관한 작은 희망의 기호를 찾아내기 위해 예민해진다. 하지만 물론 그 과정은 좌절의 심화에 다름 아니다. <십년세도>에서 동일한 에피소드는 홍국영의 지혜롭고 영민하며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정조의 처소 안에서 벌어진 현장에서 행위에로 즉각 옮겨가면서 화완옹주의 음모를 막아낼 뿐만 아니라 이를 기회로 삼아 그들을 일거에 섬멸하는 계기가 된다. 나는 이런 사건이 정말 있었는지, 그래서 이를 기회로 삼아 화완옹주 일파에게 그 죄를 물어 멸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비교적 단순하게 찍혔고, 그런 다음 이 사건은 영화 안에서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의 차이는 자명해 보인다. <십년세도>는 홍국영의 영웅적인 행위를 위한 사건으로 다루어지지만 <망부석>은 꽃봉이의 비극적인 선택으로 인한 자살에로 이끌린다. 둘 다 국면의 전환을 가져오지만 이야기를 이끌고 가던 주인공의 운명에는 정반대의 결과로 다가온다. 나는 그 결과에 대해서 좌절한 운명의 실패인지 아니면 반대로 성공적인 기회를 만든 사건인지, 라는 방식으로 그 둘을 나누고 싶지 않다.

두 편의 영화를 일 년 사이에 연달아 찍은 임권택이 두 개의 장면이 같은 에피소드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마치 임권택은 <망부석>을 찍은 적이 없다는 듯이 <십년세도>를 찍었다. 하나의 사건. 두 개의 장면. 서로 다른 배치. 이 둘 사이에는 좀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바보 같은 설명도 가능하다. 세기흥업은 <망부석>의 흥행에 성공했고 그들은 같은 영화를 다시 한 번 더 찍고 싶었으며 그래서 주인공을 달리하여 이번에는 스타 신영균을 주연으로 하여 만들자고 임권택에게 제안해서 <십년세도>를 찍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게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사극은 돈이 많이 들고 성공적인 흥행은 그것을 시장에서 다시 한 번 손쉽게 반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을 했을 것이다. 그 둘은 같은 이야기이고 그러므로 같은 에피소드를 다룬 장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산업적 설명이다. 좋다. 하지만 우리는 좀 다른 관점에로 옮겨서 질문을 더 밀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임권택의 난처한 곤경이 숨어있다. 임권택은 에피소드를 반복하고 있지만 의미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때 이것을 인물(들) 사이에 놓인 구성의 차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다소 까다로운 반문이 기다리고 있다. 반복이 다른 반복의 깊이를 가져오는 대신 반복 안에서 잠재적인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섰을 때, 그래서 그 반복으로 하여금 동일한 시대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을 때, 그로 인해 세계의 정념이 바뀌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태인 것일까. (적어도 1964년의) 임권택에게 세계는 주어진 것이어서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삶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질서가 아니라 관점에 따라 주관적인 이동을 통해 재구성되는 일종의 원근법적 도착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여기에는 두 개의 조선시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두 개의 정조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내 질문의 시작은 여기에 있다. 임권택은 세계 안에 살고 있다기보다는 나와 세계 사이의 매개의 문제라는 방식으로 이 질문에 접근한다. 물론 <십년세도>가 이 문제에 정교하게 대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망부석>과 <십년세도>가 기괴할 정도로 동일한 구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두 편의 공통점은 단지 정조를 다루었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정조를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다. 심지어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준익이 송강호를 주연으로 ‘아마도’ 정확하게 같은 시기, 영조에서 정조에로 왕권이 이행되는 과정을 다룬 <사도>를 찍고 있다. 방송드라마를 포함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내 말은 대중들에게 영조와 정조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사에서 매우 친숙하다는 뜻이다) 두 편의 영화가 절반을 진행한 다음 갑자기 중단되고 나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망부석>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다음 갑자기 십 년 세월을 건너뛴 다음 마치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영화가 시작한다. 두 번의 시작.

그런데 더 이상한 쪽은 <십년세도>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망부석>이 절반을 나눈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미 두 영화가 비스듬히 겹쳐있다고 말했다. 물론 방점이 홍국영에게 놓여있기 때문에 그가 궁궐에 들어가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다룬 이야기가 앞에 놓여있지만 이미 사도세자는 죽은 지 한참 전이고 정조는 혜경궁 홍씨와 함께 궁궐 바깥으로 내쳐졌다가 다시 영조의 부름으로 들어온 그 시기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 다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 홍국영의 어린 시절로 불현듯 되돌아간 장면(flash_back)에서 어린 홍국영은 아버지 홍성원이 간신으로 몰려 참수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홍국영의 아버지는 홍성원이 아니라 홍낙춘이며 그는 간신으로 몰리지도 않았으며 참수를 당하지도 않았다) 물론 이 장면은 누구라도 어린 정조가 영조의 명에 의해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장면과 어떤 공명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어린 정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장면이 준 충격이 홍국영에게도 동일한 충격의 외상으로 남아있으며 (실재적 아버지의 죽음?) 그들은 동일한 오이디푸스적 결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친화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의 아버지들은 동일하게 영조의 명에 따라 죽임을 당했으며 동시에 그들은 영조에 의해 그들 각자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임권택은 재빨리 어른 홍국영에로 돌아온 다음 그가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하여 정조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는 장면에로 넘어간다. 그리고 화완옹주의 독살음모를 밝혀내고 그들 일파를 모두 멸한 다음 정조를 안전하게 왕위에 즉위시킨다. <망부석>은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십년세도>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마치 여기서 일부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시작한 지 48분이 되는 대목에서) 이야기를 중단시킨 다음 다시 시작한다. 그걸 마치 알리기라도 하듯이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와 똑같은 장면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무효가 되어버린 절반. 이 반복은 몹시 불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십년세도>의 시작 장면은 지금 임금인 영조가 치세를 잘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탐관오리들에게 수탈 당하는 모습을 연달아 이어지는 쇼트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봉건체제에서 할 수 있는 가능한 해결은 다음 임금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기대가 <망부석>의 마지막 장면에 담겨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중간에서 동일하게 다시 반복할 때 그것은 단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정조의 치세가 실패했음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영조를 정조 위에 겹쳐놓기. 여기서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순간적으로 마치 앞에 이미 본 쇼트들이 무언가 잘못 편집되어서 다시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반복되는 동일한 장면들. 이때 <망부석>에서 외관상 보이는 해피엔딩은 사실상 그 ‘이후’의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실패에 대한 즐거운 위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십년세도>는 정확하게 <망부석>의 그 자리를 겨냥한다. 그래서 <십년세도>는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기보다는 마치 이미 한 이야기의 오류를 수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복에 대한 우울한 악순환의 반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회귀의 필연성. 한없는 반복. 그러므로 나쁜 시간은 되돌아온다. 임권택은 부지불식간에 역사에서 결정적인 한 번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고 만다. 결정적인 한 번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사회에 대한 단절.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로의 도약.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임권택은 영화에서 단 한 번도 그런 희망에 이끌려본 적이 없다.

둘째, 내가 말하려는 핵심은 여기서 좀 더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 절반에 이르기까지 두 영화의 차이는 하나가 완전히 비극으로 이끌리는 데 반해서 다른 하나는 영웅적인 승리에로 이끌린다는 것이다. 그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정감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사건 속에서 서로 정반대의 인물에 의해 그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역사의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허구적인 인물과 실존했던 인물. 멜로드라마와 전기. 그런데 이 절반을 나누는 시퀀스를 보여준 다음 홍국영은 이제까지 자신이 어떤 정치적 이상을 가지고 행동했던 것과 반대로 마치 자신의 자리에서 가졌던 이상이 강요된 선택이었던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명분은 탐관오리들의 배후세력이자 사리사욕에 눈이 먼 수비대장 장지항이 선왕의 신임을 받고 유언에 따라 정조가 그의 부정을 우유부단하게 눈 감는 것에 대신하여 그 스스로 엄벌을 내리기 위해 세력을 확장하고 왕권을 배후에 얻을 수 있는 권력을 얻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그 순간 그의 정의는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서 정치적 게임이 된다. 여기에는 동일한 주체가 겪어야 하는 분열의 고통이 뒤따라온다. 정의의 주체는 자신이 세계와 거리를 유지할 때에는 투명해 보이지만 일단 세계 안으로 끼어들어 가서 갑자기 결정에 관한 선택을 하는 순간 선택이 정의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이때 정의는 그 개념과 목표 아이에서 그 둘이 서로 자기의 편에 두기 위해 잡아당기면서 찢겨져 나가기 시작한다. 홍국영은 결정적인 시험에 든다. 그는 내빈과 금슬의 정을 나누지 못하는 정조에게 자신의 여동생 홍봉희를 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홍봉희는 오빠의 결정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왜냐하면 아직 그의 오빠가 과거 급제하기 전 몰락한 가문의 과년한 처녀로 지내던 시절 영수와 정분을 나누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적 서사의 되풀이. 오래된 궁정연애의 장치들. 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이상한 내기를 시작한다. 몰락했다곤 하지만 홍봉희는 양반 가문의 자식이었고 영수는 상놈 출신이어서 그의 아버지는 엄중한 목소리로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충고한다. 이 장면은 영화 앞부분에 놓여있어서 이미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그래서 홍국영이 과거 급제했을 때 영수는 그녀의 집을 찾아와 절망적인 목소리로 오빠의 소식을 알려준다. 홍봉희가 오빠 홍국영을 따라 입궐한 다음 그리움에 지친 영수는 담장을 넘어 홍봉희를 찾아와 그녀에게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함께 떠나자고 조른다. 이 말은 예전 홍봉희가 영수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 둘은 급히 짐을 꾸리지만 우연하게 내당을 지나던 집사의 눈에 띄고 만다. 홍국영은 한걸음에 내달려 그 자리에서 영수를 포박한 다음 무자비하게 매질을 하면서 이는 나라의 법에 따른 것이며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 이라고 울며 매달리는 여동생 홍봉희에게 매정하게 대꾸한다. 여기까지는 이미 예정된 이야기의 수순을 따라간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들은 단지 이것을 역사적 배경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비애를 한껏 과장하고자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이 수순은 <십년세도>가 오히려 다른 사극의 유형을 그대로 베끼듯이 뒤따라가는 것이다. 이제 서로 길이 갈라지는 것은 홍봉희의 선택에 달려있게 된다. 여기서 홍봉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빠의 뜻을 따를 테니 영수를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거래. 님을 위한 희생. 하지만 영수는 그 희생을 고마워할까. 홍국영의 나라를 위한 가혹한 정의의 집행과정. 그러나 반대로 영수의 자리에서 상실한 정의는 어디서 거래가 되어야 할까. 임권택은 여기서 영수를 괄호 친다. 홍국영은 집사에게 영수를 다시는 뭍에 오르지 못하게 제주도로 보내라고 명한다. 이 장면 이후 우리는 영수를 영화에서 다시는 보지 못한다. 혹은 그의 생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오빠와의 약속에 따라 홍봉희는 정조의 원자아기 씨를 받기 위한 원빈 홍씨가 된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사극의 이름으로 비애의 장르가 자기의 법칙을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임권택이 상황을 만든 다음 거짓말을 이용하여 진실을 설명하는 정의의 오작동 방식은 멈춰 서서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임권택은 진실을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온통 거짓말로 가득 차 있는 <길소뜸>의 절반 이후를 떠올리고 있다. 혹은 <서편제>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빠 동호와 여동생 송화가 만난 다음 나누는 거짓말을 떠올려보라. 이때 거짓말과 진실은 둘 사이의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삼자 관계로 이루어진 긴장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나머지 하나란 무엇인가. 거짓말을 통과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진실 안의 내밀한 진실. 영수를 가운데 앉혀놓고 홍국영과 홍봉희는 서로 거짓말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홍국영은 영수를 포박하여 주리를 틀며 매질을 하는 것이 상놈에게 자신의 누이를 빼앗긴 것에 대한 상실감이 안겨준 모욕 때문이기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면서 홍봉희에게 양자택일의 길, 그러니까 사랑하는 남자를 희생시킨 다음 자기의 뜻을 거절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희생하고 오빠의 뜻을 따르는 대신 저 남자 영수를 살릴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내기의 상연을 한다. 홍봉희도 홍국영이 하는 퍼포먼스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홍봉희가 오빠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홍국영은 마치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라도 한 것처럼 영수에 대한 매질을 멈춘 다음 그를 홍봉희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라는 명을 내린다. 물론 매질은 홍봉희의 대답을 재촉하기 위한 일종의 효과이다. 이때 홍봉희가 홍국영에게 하는 약속은 이중적이다. 그녀가 오빠의 말을 따르겠다는 것은 정조의 내빈이 되기 위해 입궐하겠다는 뜻이지 마음을 바꾸어 영수를 포기하고 정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홍봉희의 대답은 절반만 진실이고 나머지 절반은 거짓말이다. 그걸 홍국영도 알고 있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핵심은 이 나머지 절반이 정조에게는 전체를 거짓말로 만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홍국영은 정조에게 거짓말의 행위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이때 여기서 사라진 장면이 있다. 홍봉희의 진술을 들은 다음 홍국영은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어떤 설득도 하지 않으며, 또한 임권택도 그런 장면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설혹 설득에 실패할지라도 해야 하는 (그래서 적어도 내 생각에는 있어야 하는) 그런 장면이 없다. 그때 홍국영이 수행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가장 쉬운 대답은 홍국영이 정의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거짓말이 불가피하다고 따분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대답을 금방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정의는 어디에 있나요? 지금 홍국영의 행위는 정의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중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정의를 위해서 언제든지 진실을 희생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때 거짓말은 진실을 대신해서 정의를 수행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홍봉희가 오빠의 명령을 따른다면 홍국영은 정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국영도 자신이 희생자라는 관점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제 이 희생의 논리는 일종의 도미노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는 희생의 교환으로 약속한 오빠의 명령에 따라 내빈이 되는 홍봉희의 행위를 사랑이라고 착각한 정조도 그런 의미에서 거짓말의 희생자인 동시에 정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이때 정의가 진실보다 상위 개념에 놓여있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홍국영의 행위는 무조건 정의라는 매우 주관적이고 허약한 가설을 밑바탕에 깔고 버티는 중이다. 논점을 피하려고 현실에서의 정의의 실행을 위해서 우리는 좀 더 관대하고 유연하게 진실에 관한 예외의 규정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때 누군가는 즉각적인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 예외가 누군가의 진실에 침해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영수를 셈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은 영수가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홍봉희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그저 그녀를 겁탈하기 위해서 담을 넘었을 뿐이에요. 홍봉희는 그 대답을 듣고 마음을 돌려 자발적으로 오빠의 명에 따라 입궐하여 정조의 곁으로 갔을 것이며 어쩌면 진심으로 보필했을지도 모른다. 홍국영은 구태여 누이에게 거짓된 행동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며 또한 그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얻기까지 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잔인한 해결방법이다. 영수는 모두의 진실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 이 게임에서 자신을 삭제하는 일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간단하게 거짓말과 진실의 게임이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선택을 오작동시키는 척하면서 진정으로 이들 사이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은 영수의 고백이 홍봉희를 위한 거짓말인 경우이다. 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그 거짓말을 홍봉희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홍국영도 그것을 알고 영수가 진정으로 자기의 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런 경우의 수를 선택하지 않고 그 전에 멈추었다. 영수는 여기서 침묵을 지키면서 마치 각자의 선택을 지켜보는 것이 자기의 할 일이라는 듯 그들을 쳐다본다. 이때 희생은 홍봉희에게로 모아진다. 영수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긴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상놈인 그가 한성에 있으나 제주도에 있으나 사실상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영수가 한성에 남아있을지라도 상놈인 그에게는 어떤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담을 뛰어넘은 영수의 행위는 홍국영의 선택에 덧셈이 되었을 뿐이다. 만일 영수가 아니었다면 홍봉희를 그의 명에 이렇게 쉽게 굴복시킬 수 있었을까. 이 장면은 희생의 논리에 대한 검토를 요구한다. 진실과 거짓말 사이를 매개하는 고리가 희생될 때 진실은 이중의 무게를 견뎌야만 한다. 하나는 물론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여기서 정의가 다시 되돌아온다.

나는 논점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런 우여곡절에도 뒤이어 장지항을 바로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지 못한다. 여전히 홍국영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결심을 내리지 못한다. 바로 이때 홀연 원빈 홍씨가 오빠의 말에 대한 메아리처럼 나타나 홍국영의 말에 뒤이어 백 년 사직을 위해 용단을 내리셔야 한다고 웅변하듯이 말하면서 정조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다. 이 장면에서 임권택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자기를 원망하면서 지낼 줄 알았던 여동생이 마치 자신의 충언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나타나 자기편을 들면서 임금을 설득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의혹과 기쁨 사이에서 짓는 표정(insert_shot)의 변화이다. 이때 원빈 홍씨의 말은 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태도에 있다. 임권택은 대사를 할 때 그 사람을 바라보거나(point_of_view_shot) 그 사람을 바라보는 상대방을 바라보기는(point_of_view_reaction_shot)하지만 대사를 하는 상대방의 대사 사이를 파고 들어가면서 바라보는 쇼트는 거의 없다. 만일 이 장면을 (적어도) <잡초> 이후에 마주쳤다면 원빈 홍씨가 대사를 하는 동안 그냥 홍국영의 표정을 찍었을 것이다. 내가 하려는 설명은 임권택의 영화 언어가 점점 더 단순해지면서 내적으로는 비가시적이 되어가는 진화에 대한 (어쩌면 과도한) 추측이 아니다. 여기서 임권택의 카메라가 멈춘 것은 원빈 홍씨의 태도가 뜻밖이라는 듯한 홍국영의 표정이다. 이때 홍국영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반대의 표정을 지었다면 여기는 홍국영이 자신의 대의를 누이인 원빈 홍씨가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서서 오빠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망쳐버린 누이의 사랑과 (더 나아가) 삶에 대해서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고문에 가까운 감정적인 투쟁을 정의라는 이름의 베일 저편으로 감춰놓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오해라는 환상의 장막. 거의 물신이 되어버린 정의. 거기서 진실이 거의 질식해서 죽어가는 중이다. 우리는 홍봉희의 자리에서 오빠 홍국영이 괴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 홍국영이 누이에게 정조의 내빈의 자리에 가라고 말했을 때 그녀가 보인 저항을 생각해보라. 왕실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에 대한 단호한 거절. 그런 다음 영수가 담을 넘어 그녀 곁에 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난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낯선 장소에로 함께 도망칠 결심을 했었다. 홍봉희는 쇠락한 양반 집안에서 영수와 아무런 허물없이 지내면서 상놈들과 거의 같은 수준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도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자, 홍국영의 대의는 잘 알겠다. 그런데 홍봉희에게 오빠 홍국영의 대의는 지켜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홍국영의 표정으로 되돌아오고 싶다. 그가 원빈 홍씨의 도움에 의혹과 기쁨을 느끼며 바라보는 까닭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행동이 의외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만큼의 고마움의 표현이다. 여기서 홍국영의 세 개의 표정의 쇼트는 정확하게 정의가 구현되고 있는 만큼 거짓말이 실현됨으로써 도덕법칙이 파괴되고 있는 증거이다. 내가 여기서 멈춘 것은 임권택이 자신의 영화 전체에서 내내 마주치게 될 거짓말과 도덕 사이의 대결을 이야기 속에서 끌어내 상황을 만든 다음 하여튼 다시 시네마틱 센스로 각색하려 드는 순간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이 문제가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엇이 무엇 위로 가야 하는가. 그는 이 문제를 개념적으로 다가가는 대신 한국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상황, 그 상황 중에서도 조선에서 일제 강점하를 지나 해방 직후와 거기에 마치 꼽추의 혹처럼 달려있는 한국전쟁을 거친 다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역사 속 일회적인 존재방식을 쳐다본다. 만일 단 한 번이라는 개념이 임권택에게 던져진다면 그것은 삶 그 자체이다.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안에서의 개념들의 위계질서의 내기.

그런 다음 예기치 않은 장면이 그 뒤에 기다리고 있다. 정조는 원빈 홍씨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수비대장 장지항을 불러 파직하고 재산 전체를 몰수하자 그 자리에 홍국영이 나타나 자신의 승리를 마음껏 즐긴다. 하지만 뒤이어 원빈 홍씨는 하얀 한복을 입고 (그래서 흑백화면으로는 마치 소복처럼 보이며) 미루어 짐작건대 독약이 들었을 법한 사발을 들고 그녀의 마지막 대사를 한다. “오빠, 이제 소원대로 되었사오이다. 이젠 소녀도 소녀의 길을 가야 할 때가 왔사옵니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 저승에 가서야 이루어보겠습니다. 저승에 또한 오빠 같은 분이 계셔서 뜻을 이루지 못하오면 그땐 상놈의 딸로 다시 태어나렵니다. 오빠, 굽이 살펴주시어요” 원빈 홍씨의 자살은 그 행위 때문이 아니라 시점 때문에 기이한 질문이 된다. 무자비한 대꾸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감상적인 연인들의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을 수없이 보았다. 그러므로 원빈 홍씨의 자살이 우리를 놀라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기라도 하듯 자살을 하는 대신 그에 앞서 홍국영이 장지항의 파직을 간청할 때 그 곁에 나타나 오빠를 위해, 자기의 사랑을 망쳐놓고, 자기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매질로 주리를 틀면서 자기에게 굴복을 요구한 다음 그것을 이루자 제주도로 쫓아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을 한다. 아뇨, 그건 사실이 아니던가요. 장지항은 부패한 지방 관료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을 보호한 파렴치한 간신이 맞지 않던가요. 물론이다. 그 말의 내용은 사실일 것이다. 나는 홍국영의 간청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빈 홍씨는 여기서 오로지 오빠의 정의를 위하여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일뿐이다. 여기서 그 말의 내용을 중심으로 놓는 대신 약간 그림을 비튼 다음 그 측면도법에 따른 왜상효과(anamorphosis)처럼 그 말의 그림자를 원상복구 시켜보자. 이때 원빈 홍씨의 진실은 정확하게 오빠의 대의와 대립하는 것이다. 홍국영은 조선이라는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가족, 자신의 누이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이때 우리를 역겹게 만드는 것은 홍국영이 홍봉희를 자신의 대의를 위한 도구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만일 원빈 홍씨가 홍봉희의 자리로 돌아가 자살하는 장면이 없었다면 그 둘 사이의 상호교환이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빈 홍씨가 오빠 홍국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 모든 진실, 자신이 왜 당신 곁에 있는 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좀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홍국영이 간청할 때 그저 침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우리들이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로 홍봉희는 대의를 위해서 (몹시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자신의 복수를 배신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무엇을 얻었는가. 쟁점은 그렇게 함으로써 홍봉희는 자신이 자살할 명분을 얻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대의를 위하여 필요한 그녀의 몫을 모두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빈 홍씨가 홍국영의 편을 들어 정조에게 간하는 것과 그녀의 자살은 과정안의 서로 대립덫염甦ㅐ?아니다. 임권택이 여기서 노리는 것은 무대에 오른 이 모든 개념들의 변덕이다. 그런 다음 그는 영화 속에 역설적인 상황을 반복해서 만들어나가면서 실망하고 또 실망한다. 마치 실망이 자신의 목표이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놀랍게도 지치지 않고 그것을 매번 다시 시도한다.

<십년세도>가 걸작은 아니지만 비로소 임권택이 임권택이 된 첫 번째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영화에는 비로소 임권택에게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마주치게 될 질문의 도래가 있다. 그걸 임권택 자신이 <망부석>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오류를 수정하듯이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느린 걸음. 그것도 아주 느린 걸음.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때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방법의 발견. 이때 임권택은 <망부석>을 수정하면서 마치 <십년세도>에서 양보할 수 없는 전도를 시도하고 있다. 핵심은 전도라는 그 관점의 이동 자체에 숨어있다. 말하자면 임권택의 반복은 한편으로는 오류를 수정하는 척하면서 변덕의 심연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절망적인 행위이다. 매번의 예외. 이때 임권택이 수수께끼처럼 생각하는 것은 변덕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실이 지켜지느냐에 있다. 물론 그사이에 운명처럼 끼어든 다음 덧없이 사라지는 매개의 희생이 아니라면 이 진실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진실은 가냘프고 애처로운 것이다. 때로는 완전히 부서지고(<길소뜸>) 가끔은 그 파편들이 남아서 가까스로 자기의 존재를 남겨놓기도 하며(<티켓>) 거의 불투명 속에 머물면서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만다라>) 너무 때늦게 도착해서 거의 놓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짝코>, 아마도 <서편제> 혹은 <하류인생>) 그래도 여전히 남겨져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축제>, 그리고 <천년학>) 나는 멀리서부터 임권택이 왜 갑작스러이 인본주의(人本主義)라는 말에 이끌렸는지를 생각하는 중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어디에 놓여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실험이라는 말처럼 내게 읽힌다. 그러므로 그사이에는 희생을 무릎 쓰고 횡단해야만 하는 환상이 있다. 물론 그 횡단의 순간에 종종 점핑이 실패로 끝나버려 추락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