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무비』 2011.05.25.시론

[전문가칼럼] 정성일의 영화순정고백담 - 여덟 번째 이야기

[맥스무비=정성일(영화평론가/영화감독)] 바보들이나 비평의 쇠퇴를 애석해한다. 비평의 명맥이 끊어진지 이미 오래인데도 말이다. 비평이란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문제이다. 비평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이 중요한 세계, 특정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 아직도 가능한 세계이다. 그런데 온갖 사물들이 너무 긴박하게 인간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편견 없는’ ‘자유로운’ 시선 같은 것은 거짓말이 되었다. (......) 라고 글을 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발터 벤야민이다. 이 글은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 실려 있는 ‘세놓음’이라는 글의 첫 머리이다 (번역은 조형준의 판본이다) 거의 똑같은 구절을 오늘날 영화비평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복하듯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메아리처럼 문학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는 사태를 극단적으로 표현하였다. 영화비평의 죽음. 이 표현에서는 어딘가 슬픔에 차서 애도를 표한다기보다는 비장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정말 죽었다기보다는 죽어가고 있는 비평을 살려야한다고 호소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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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래된 푸념은 왜 유령처럼 끈질기게 출몰하는 것일까. 그저 이것이 나쁜 상황을 과장하는 것이라고 큰 웃음을 터트리고 말 것인가. 비평을 쓸 때마다 우리를 거북하게 만드는 한숨소리. 이때 나는 반문하고 싶어진다. 아직 영화가 죽음을 선언한 것이 아닌데 왜 비평이 죽어야 하는가. 한밤중에 출몰하는 비평. 영화에 대한 비평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시작하는 것이다. 텅 빈 거리. 혹은 영화가 끝난 다음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써야할 때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누군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 영화에 대한 생각. 영화를 본다. 영화를 쓴다. 우리들의 반복. 같은 영화를 다시 한 번 상영하기. 어디서? 우리들의 뇌 속에서. 반복의 역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영화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현재라고 가정된 시간의 두 개의 흐름 안에서 생겨난 두 개의 가능성. 이미 본 과거의 영화. 이제부터 생각하게 될 미래의 영화. 두 영화 사이의 차이의 틈 안으로 스며들어가서 우리들의 활동이 시작된다. 비평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그 사이의 차이가 사라져버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둘 중 하나이다. 영화가 죽어서 그 틈새의 장소 자체가 소명하였거나, 아니면 당신의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두 개의 시간의 잠재성이 활동을 중단했다는 뜻이다.

작년 여름인가, ‘10 아시아’의 백은하 기자가 나를 인터뷰하다가 문득 “영화에서 비평의 좋은 시절은 모두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좀 어리둥절했다. 그런 다음 금방 우리 둘이 각자 처음 시작했을 때 비평이 대중들에게 받았던 서로 다른 경험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백은하는 씨네 21이 창간할 때 기자였다. 말하자면 1990년대 비평담론의 ‘황금기’에 해당하는 첫 번째 세대였다) 내가 처음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썼을 때 대부분의 글은 리뷰에 가까웠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한 다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게 영화의 줄거리 속의 어떤 인물로 그려졌는지를 설명하고 짧게 영화의 몇 가지 특징을 지적했다. 그러고 나서 이 영화를 주말에 보아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누군가는 그걸 별점으로 대신해서 달아놓았다. 나는 처음부터 그게 역겨웠다. 그건 마치 영화를 경멸하는 짓처럼 보였다. 나는 어떤 문학평론가도 그렇게 자기가 읽은 소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왜 문학에 대해서 생각했을까. 그건 (적어도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비평은 문학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가 몸담은 예술의 형식에 대한 배움과 질문은 각자의 고유한 예술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겠지만 비평이라는 글쓰기의 원래적 성격은 문학에서 우리들이 배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문학비평이 소설, 혹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그때 내가 읽은) 비평들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 어떤 사랑도, 존경도, 호기심도, 하다못해 비판의 올바른 태도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이건 예술에 대한 비평을 쓰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먼저 사랑에 빠져야만 한다. 나는 영화와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그걸 고백하고 싶다. 왜? 영화에 대한 비평은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상대방에 대해서 가장 민감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야만 상대방과 나 사이의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안에서 그 모든 감정을 겪어야만 한다. 열정, 질투, 매혹, 의심, 호소, 설득, 고독, 용기, 절망, 하지만 결국 믿음. (아마도 나는 수많은 감정들을 놓쳤을 것이다) 그때 나타나는 사유의 이미지들, 감정의 기호들, 힘의 활동들, 세상이라는 영화적 가능성. 자기가 만난 상대방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상대방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본 영화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인건 그 영화에 대해서 비평을 쓸 자격이 없다. 자, 여기서 이 말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영화 일반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영화라고 지칭하였다.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다. 한 사람의 영화비평가가 모든 영화를 사랑할 수는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반대로 훌륭한 비평가들의 공통점은 그 자신의 취향을 공공연하게 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사랑의 감정도, 혹은 증오의 심정도, 때로는 배움의 겸손함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건 그 영화가 얼마나 유명한 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비평가는 지금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상대방을 분명하게 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비평은 영화를 보는 기쁨을 어디선가 잊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요구에 따라 이제 그는 자기의 취향을 조금씩 수동적 자발성에 따라 포기하고 한편으로는 악순환 안에서 기계적으로 반복하기 시작한다. 가장 경멸스러운 의미에서의 비평기계. 그때 그 비평은 부서지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시장기계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장에서 살아남았는가.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적어도 당분간은. 하지만 불행히도 그 비평은 아무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자신도 설득을 시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독자를 설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사랑의 관점에서 포르노그래픽한 글쓰기이다.

그 다음. 종종 영화비평의 애독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 영화비평이 지루한 것은 싸움을 피하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힐난하는 목소리가 있다. 물론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비평의 목표가 아닐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태도도 아니다. 말하자면 그건 영화비평이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비참해지는 것을 각오하고 벌여야하는 슬픈 자해에 가까워진다. 왜? 거기엔 사랑도 없고 상상도 없으며 더더구나 배움 따위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와 적대적 관계를 가진 다음 비판을 선택하면 여기에는 어떤 비평가든지 일단 시작하는 순간 배수의 진을 쳐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때 나는 영화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문제는 영화에 대해서 수술실에 들어간 것처럼 부검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상이 없어진 대신 비판의 요점이 수학의 증명에 가까운 태도를 지니며 영화의 단위들은 전술의 배치에 따라 새로운 정렬을 하게 된다. 읽는 쪽의 기분은 알 수 없지만 이걸 비판해야 하는 쪽은 이 과정 자체가 매우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 비평적 수술의 특징은 수술의 역설을 그대로 따른다. 아, 수술은 성공적이었어요, 다만 환자가 죽어버렸군요. 미안해요. 나는 어떤 영화에 대해서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글을 쓸 때 그 영화를 만든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 혐오스러워진다. 내가 어떤 영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비평을 쓰는 것은 단지 이 영화가 실패했기 때문은 아니다. 종종 어떤 영화는 실패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훨씬 흥미로워질 수도 있다. 비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은 거기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누가보아도 실패하거나 유치한 영화, 혹은 따분한 영화에 대해서 비판을 시작하는 영화비평은 치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걸 다시 확인해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말하자면 하나마나한 안전한 일. 모두의 힐난에 편승하는 짓. 영화비평이 비판을 시작할 때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그걸 쓰는 비평가의 세계관이 걸려있어야 한다. 그때에만 비판은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만일 그 비평가의 세계관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지지하는 영화가 아니라 비판하는 영화의 이유를 들어보는 쪽이 그를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을 줄 것이다. 비판은 이때 이 영화들은 내게 어떤 질병이거나 혹은 사기, 속임수, 이데올로기적 역겨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윤리적 타락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 영화들의 태도에 맞서는 것만이 영화를 지키는 일이라는 나의 의무라는 데서 시작한 것이다. 의무? 그렇다. 좀 더 정확하게 비판은 (두 개의 영화를 잘 구별해서 읽어주기 바란다) 그 영화가 영화를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방어하기 위해서 그 영화의 영화에 대한 사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모든 영화는 시행착오의 권리를 갖고 있다.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요점은 우리들의 비판은 그 영화의 영화에 대한 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비평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며, 어쩌면 그건 필자의 숫자만큼 다양한 문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만큼의 다양한 미적 판단과 정치적 입장, 혹은 그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은 바보짓이다. 대신 영화비평에 대해서 요구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내 생각에) 하나는 발견이고 다른 하나는 방어이다. 우선 발견. 내가 다른 사람의 영화비평을 읽을 때에는 오로지 이 이유 때문에 읽는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내가 보지 못한 무엇을 그 사람은 보았을까. 말하자면 배움에 대한 요청. 내가 알지 못하는 쇼트의 활동, 혹은 능력. 미처 보지 못한 움직임. 그것이 만들어내는 동선의 세계. 무엇이 표현되었는가. 우리들 각자의 눈과 귀는 다른 세계로 열려있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놀라움을 경험하고, 같은 사유의 지평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영화비평에 대한 가장 바보 같은 반론은 자기가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우리는 영화비평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더 배워야 한다. 때로는 영화의 문턱에 이르기 위해서, 혹은 세상과 영화 사이의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 아니면 지표를 부여하기 위해서, 종종 자기의 생각을 비약시키기 위해서, 그런 다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그 안의 관계를 기술하고, 그러면서 그 사이에 놓여있는 불연속의 장면들 안에서 창조의 힘을 찾아내야만 한다.

두 번째 방어. 이것은 사실상 비평가의 임무이다. 오늘날 다른 모든 예술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영화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시장의 위기에 떨어져있다. 좀 더 정확하게 영화는 시장 바깥에서 존재해본 적이 없다. 이례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1920년대 ‘이후’ 소비에트 영화들과 동구 영화들, 1970년대의 일부 라틴 아메리카 영화들이 시장 바깥의 영역에서 제작되었지만 곧 21세기가 되자 이제 그런 가능성은 제로가 되었다. 이때 시장담론의 주도권을 쥔 것은 비평이 아니라 스튜디오이며 그것을 전략적으로 실행한 것은 마케팅에 의해서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비평은 정확하게 말하면 미학적으로 마케팅의 담론과 싸우는 형국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나 저널의 영화담론은 마케팅에 투항한 지 오래이고 비평은 고군분투하는 대신에 눈치를 보고 있다. 만일 우리들이 비평의 위기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바로 그런 이중의 상실에서 온 것이다. 태도의 상실. 자리의 상실. 이때 과잉생산의 시대라는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절대적 법칙에서 예외가 아닌 영화도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피할 수 없는 회전율에 따라 마치 버려지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순환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속도가 지금 너무 빨라서 미처 비평이 영화를 음미할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때 영화비평가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가 지지하는 영화를 방어해야 한다. 물론 당신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임무와 마주하는 순간 매우 까다로운 질문과 마주해야만 한다. 내가 지지하는 이 영화는 정말 시간을 견뎌내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인가. 나는 혹시 지금 무언가 속은 것은 아닐까. 이때 영화비평가의 내기는 자기 존재 전부가 걸려있는 지지일 수밖에 없다. 잠시만 멈춘 다음 그 영화가 막 개봉했을 때 당신이 지지했던 영화가 지금 시간을 견뎌 냈는지에 대해서 돌아보라. 만일 그 영화들이 그저 일시적인 흥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지금 다시 꺼내들 만큼의 영화 스스로의 자기 보존의 힘과 그 스스로를 존속시키는 형식의 존재가 아니라면 그건 전적으로 영화를 보는 당신의 예술적 직관이 그 만큼 빈곤하다는 뜻이다. 혹은 마케팅의 담론에 당신의 예술적 판단을 떠넘겼다는 증거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어떤 예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글은 누구보다도 나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하소연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점점 더 영화비평의 영화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희미해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매우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어디서 되찾아야 하는가. 나는 영화에 대한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는 대신 우리들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지금 정말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한 가지 예를 들고 싶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 연인이 걸어가고 있다. 문학은 그것을 느껴보기 위해서 쓸 것이다. 하지만 그날 연인의 육체가 느끼는 차가움과 눈 속의 곤란함, 종종 눈보라가 몰아치다가도 멈추기도 하면서 그렇게 쏟아 붇는 것 같은 날씨를 묘사하는데 인색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날씨는 변덕스럽고 육체는 지금 뜨거운 동시에 차갑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것을 찍기 위해서 눈을 기다린 다음 연인들과 함께 눈을 맞으면서 그 모든 것을 거기서 함께 느껴야만 그 장면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질문할 수 있다. 그렇게 눈이 내리고 있는 데도 이 연인들이 구태여 거길 걸어가면서 확인하고 싶은 사랑의 작동방식. 그들이 붙잡은 손.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여기서 시작한다. (영화순정고백 여덟 번째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