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캐스트』 2009.08.21.본인인터뷰

[영화인] 가장 행복한 영화광 - 영화평론가 정성일

영화 월간지 <스크린>이 영화평론가, 저널리스트 등과 함께 선정한 '우리 시대, 우리 영화인'. 1980년대 말부터 20년 가까이 영화평론가로서 한국 영화평론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고, 지금은 영화감독으로서 첫 영화를 내놓은 '영화인' 정성일을 만난다.

첫 영화적 경험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와 인터뷰를 시작하며 먼저 세 개의 첫 경험을 물었다. 첫 번째 질문. 그의 기억 속에 처음으로 ‘영화’로 남아 있는 영화는 무엇일까. “어머니 손 잡고 대한극장에서 봤던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 영화 보고 와서 6개월 동안 낙타만 그렸어요.(웃음) 기억 속에 사막과 낙타만 남았던 모양이에요.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으니까요. 어머니 말씀으론 [카사블랑카]도 극장에서 봤다고 하시는데, 제 기억엔 없어요. 아무튼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나선, 신문 영화광고의 그림을 보면서 ‘이 영화 보여줘’ 그랬다고 해요.”

어머니 손을 잡고 시작된 영화 편력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작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처음으로 친구들끼리 찾은 극장. 지금은 없어진 미아리극장이었고, 그곳에선 중국 무협영화의 ‘사나이들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고, 몇몇 인터뷰에서 고백하듯 그는 그때부터 군에 입대하기까지 한국에서 개봉된 모든 중국 무협 액션 영화를, 한중 합작영화까지 포함해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다 보았다. 무협영화에 대한 매혹은 무협지에 대한 탐독으로 이어졌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직접 무협지를 습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영화와 함께 그를 매혹시킨 것은 록 음악이었다. 한때 록 기타리스트를 꿈꾸며 기타 학원을 전전하기도 했으며, 흑백 텔레비전으로 AFKN에서 본 색채영화 [이지 라이더]는, 그 리듬에 흠뻑 취했던 중학교 시절의 잊지 못할 영화 경험 중 하나였다. 당시 AFKN으로 경험했던 또 하나의 걸작은 캐롤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 그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영화가 빛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던 작품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접한 프랑스 문화원은 그에겐 하나의 사건이었다. 라디오의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종종 흘러나왔던 ‘로망스’가 주제가였던 [금지된 장난]이 정말로 보고 싶었던 시절. 어느 날 신문 한 구석에서 [금지된 장난]을 프랑스 문화원에서 상영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달려갔지만, 상영시간을 잘못 알았고 대신 그는 장 뤼크 고다르(장 뤽 고다르)의 [기관총 부대]라는 영화를 보게 된다. 자막 없이 상영되는 터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는 그때 놀라운 경험을 한다. <씨네21>에서 정윤철 감독이 정성일에게 물었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 영화를 보고 내가 쇼크를 받았던 이유는, 나는 이게 스스로 너무 자랑스러운데(웃음), 영화를 ‘카메라로 찍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거다. 화면에서 카메라를 본 거다. 그때까지는 주인공과 이야기만 쫓아갔었다. 그런데 (중략) 카메라라는 존재를 알게 된 거다. 그땐 정확하게 몰랐지만 영화를 보는 내 태도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야기에 몰두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주인공을 쫓아가지 않았다. 영화라는 것은 카메라를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고다르는 그에게 정말 중요한 존재가 된다. 시사월간지 <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치광이 피에로]. 고 1때 프랑스 문화원에서 본 이후로 이 영화를 1백 번도 더 봤어요. 왠지는 잘 모르는데 그때 제가 느낀 건, ‘아, 영화는 위대하구나’ 하는 것이었고요. 대학 가서 찾은 말이기는 하지만, 제가 거기서 시대 정신을 읽은 거죠. 영화가 액션이나 감동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쁜 시절의 영화보기. 짧았던 화양연화

일찍 시작된 ‘영화광 시대’는, 하지만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청소년기과 청년기였던 1960~1970년대에 한국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시네필들에겐) 불행한 시대였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선도 교사에게 걸리면 즉시 정학이었으니까요. 영화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당길 것 같은, 늘 감시 당하는 느낌. 제가 한 편의 영화에 대해 가장 글을 많이 쓴 게 [바보들의 행진]이에요. (영화 보다가 걸려서) 반성문을 100번 썼거든요.(웃음)”

불안감보다 큰 건 죄의식이었다. 부모님에게 영화 보는 데 돈을 썼다고 이야기하는 게 송구스러웠다. 대학생이 되면 조금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죄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못했다. “영화를 보러 다니면 의식도 없고, 프티부르주아적이며, 반실천적인 사람으로 몰렸으니까요. 어린 시절엔 제도로부터의 죄의식, 대학생 때는 역사에 대한 죄의식.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그런 것에 시달리는 시간을 길게 보내니까, 한편으로는 나에게 계속 질문하게 됐어요. 영화를 보는 행위가 나에겐 어떤 것인가, 나는 왜 영화에 이렇게 끌리는가.” 영화에 대한 실존적 질문이라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일 수도 있었겠지만, 매번 영화를 볼 때마다 그런 고통과 마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독일 문화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영화를 보고 공부했던 ‘동서영화연구회’ 시절은, 그에겐 젊은 날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각자 흩어져 있던 시네필들을 만나는 게 너무 그리웠던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만나 보고 싶었고요. 그러다가 독일 문화원에서 그 친구들을 봤을 때, 마치 형제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나와 영혼을 나눈 사람들이 여기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게토였지만 그땐 코뮌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떤 이해관계나 다니는 학교나 가정 환경 같은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당시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수호지]의 양산박 같았던” 그곳.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짧았다. 1980년 5월에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면서, 독일 문화원의 헤겔 연구반과 카프카 연구반이 광주와 아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고, 문화원의 모든 서클이 중단되었던 것.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이어졌던 ‘짧았던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독일 문화원이 남산에 있는데, 그때 저희에게 내준 방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풍경이 참 좋았어요. 그곳에서 낮부터 스터디를 하고, 밤에 내려와 자장면 먹고서 헤어졌던 시절. 그 시절이 저에겐 화양연화였죠. 아마 그 친구들도 그럴 거예요.”

<로드쑈>와 <키노>. 그리고 ‘정은임의 영화음악’

그에게 던진 두 번째 질문. 그에게 ‘대중을 위한 영화 글 쓰기’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 때 교지에 썼던 글이 있어요. ‘현대영화의 흐름’이라는 글이었는데, 장 뤼크 고다르, 페데리코 펠리니, 잉마르 베리만(잉그마르 베르히만)같은 모더니즘 감독들에 대한 글이었죠. 그땐 고다르 영화만 본 상태였고, 다른 감독들은 글 자료만 보고 썼죠. 대학교 땐 <프레임 1/24>이나 <열린 영화> 같은 계간지에서 활동했고…. 원고료를 받고 썼던 첫 글은, 대학교 3학년 때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에 대한 글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시 그의 꿈은 영화평론가나 영화잡지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는 영화감독을 꿈꾸었을 터. 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1989년엔 영화월간지 <로드쇼>의 편집차장이 된다. <로드쇼>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책 속의 책’ 컨셉트였던 ‘도시에르’(dossier). 독일 문화원 시절부터 그와 친분이 있었던 선배이자 시네필이었던 김홍준 감독이 여러 개의 필명을 동원해 채워나간 지면은, 당시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이자 지식이었다(그때 그 글들은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영화잡지 시절은, 일단 (의외로 빨리) 막을 내린다. 그는 <오늘 예감>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소프트웨어 결정권을 장악하면 경영권에 구애 받지 않고 상당 부분 건강한 문화적 발언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고, 다신 영화잡지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로드쇼>를 그만 둔 1992년, 그는 이후 15년 동안 이어질 시사월간지 <말>의 영화평과, MBC FM의 ‘정은임의 영화음악’ 게스트가 된다. 그리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한겨레 신문>에 매주 영화평을 쓰면서 본격적인 평론 활동을 한다.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에 ‘영화 마니아’라는 존재가 대학가와 시네마테크를 통해 서서히 문화적 파장력을 지녔던 때. 고아와도 같았던 젊은 시네필들은 그의 글을 스크랩하고 그의 방송을 녹음하면서 어떤 갈증을 채웠다. 한국의 영화평론가들 중, 당시의 정성일처럼 열렬한 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평론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땐 영화를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좋은 영화를 볼 수 있게 하려면, 내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남들이 보지 못한 영화를 보고 미리 나서서 호들갑을 떤다는 건데, 그건 저에게 중요한 전략이었어요. 왜냐하면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으니까. 누군가가 ‘죽이는 영화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직접 확인하고 싶을 거고, 그래서 수요가 생기면 공급되는 거잖아요. 1990년대엔 그게 저에게 필요했어요.”

지하에 숨어 있던 ‘영화 친구’들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느낌.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 당시 그는 시네필들에게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문화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업계와 결탁된 ‘짜고 치는 고스톱’ 식의 평론이 공공연히 자행되던 풍토에서 그는 작은 변화를 꿈꾼다. “문학에 비교하면, 영화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고 있었나요. 그들만큼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문학평론은 (어려워도) 참고 읽으면서 영화평론은 (조금만 어려워도) 못 참겠다는 그 문화가 저는 견딜 수 없었어요. 내가 읽은 많은 영화평들은 문학평만큼 우아했고 충분히 사색적이었고 통찰력이 있었는데…. 물론 내가 그 수준으로 쓸 수는 없지만, 흉내라도 내는 누군가가 하나라도 있으면 언젠가는 진짜로 그런 글을 쓰는 인간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장에서 살아남는 데 좋은 방법은 아니고, 그러다 버림받을 수도 있는 방식이었지만, 누군가 시작은 해야 한다는 생각. 그 시작 지점이 저에겐 중요했죠.”

‘영화 1백주년’을 맞이한 1995년, 그는 <키노>를 창간한다. 9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지만,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때는 “좋은 동료들과 좋은 책을 만들어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로드쇼>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잡지는 만든다는 것은 자본과의 싸움이었고, 그것은 창간 때부터 끝까지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99번의 마감을 통해 나온 책은 동시대 영화에 대한 꼼꼼한 기록이었고, 그것은 지금 그때의 <키노>를 읽어보아도 느낄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영화를 직접 찍는 것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주는 건 없다"

그에게 던진 세 번째 질문. 처음으로 영화현장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경험은 언제일까. “대학교 1~2학년 때 단편을 찍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영화들이었죠(웃음).” 한국에 번역된 영화 서적이라는 것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 영화과가 있는 학교에 청강도 가 보고(하지만 항상 휴강이었다), 영어 원서를 구해 장님 문고리 잡듯 영화의 메커니즘을 익히며 만든 영화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동반했다.

그는 그렇게 친구들과 네 편의 8mm 영화와 두 편의 16mm 영화를 완성했다.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영화감독이 될 재능이 나에겐 전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던” 경험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때 배운 건, 영화 한 편 찍는 게 영화 책 100권 읽는 것보다 더 많은 걸 가르쳐준다는 것이었어요. 시행착오가 굉장히 많았지만, 찍어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건 없다는 거죠.”

이후 1980년대 중반, 그는 극장 기획실에서 일하면서 네 편의 시나리오를 썼고 그 중 한 편은 이황림 감독에 의해 [애란](1989)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어린 마음에, 제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화된다니까 기대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 사라졌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했던 장면만 다 모아서 전혀 다른 엔딩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제주도에서 펼쳐지는 에로티시즘 영화였던 [애란]은, ([천년학](2007)에 ‘기획’으로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카페 느와르] 이전에 그가 유일하게 충무로에서 작업했던 영화다.

사실 그는 평론보다는 영화를 직접 만드는 것에 대한 꿈을 먼저 품었다. 하지만 그 꿈은 꽤 긴 시간을 돌아서 [카페 느와르]라는 이름으로 성취되었다. 1998년에 <페이퍼>의 황경신과 인터뷰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매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최선의 노력은 했어요. 왜냐하면 최선의 선택은 저 혼자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주어진 조건들, 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을 포함한 선택이란 건 최선의 선택일 수가 없잖아요. 냉정한 사람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죠. 만약 제가 아주 이기적인 선택을 했으면, 전 지금 영화감독을 하고 있었겠죠. 근데 저는 그때 그 기회를 놓쳤어요.”

사실 그가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7~8년 전부터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궁금했다. 호러 장르라는 얘기도 있었고, 다큐멘터리가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있었다. 현재 데뷔작을 막 마친 ‘영화감독 정성일’. 가제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던 [카페 느와르]는, 현재 충무로 상업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최저 제작비로 완성되었다. “한국영화가 궁금했어요. 그 제도적인 메커니즘이 어떤 건지 알고 싶었고, 그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고 어떤 문제에 부딪히는지 알고 싶었어요. ‘과정으로서의 영화’를 알고 싶었고, 저에게 그건 굉장히 중요했어요.”

촬영의 80퍼센트가 거리에서 이루어진 [카페 느와르] 현장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줄타기와도 같았다. “끊임없는 문제 속에서 촬영을 접어야 할지, 계속 진행해야 할지 매 촬영마다 고민해야 했어요. (그 분들만큼 해냈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이 순간에 임권택 감독님이라면,호우샤오셴(허우 샤오시엔)이라면, 지아장커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제 마음 속에 있는 그들에게 물어봤고 매번 그 결정을 따랐어요.” 첫 영화이기에 시행착오도 많고 고생도 많았다. 그럼에도 굳이 그가 영화를 만든 것은 “그 어려움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영화에 대해 글을 썼을 때 그 영화의 감독이 사석에서 그러잖아요.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냐고. 그래서 ‘그래 얼마나 고생하는데?’ 직접 겪고 싶었던 거예요. 그 정체가 도대체 뭔지, 정말 겪고 싶었어요. 그 목적은 온몸으로 달성했죠.(웃음)”

"영화제 일을 하는 건, 영화에 대한 순정"

세 번째 질문까지 끝냈으니 더 이상 그에 대해 할 얘기가 없을 것 같지만, 그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가 1990년대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서울단편영화제 일을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잘 쓰는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년 동안 서울단편영화제의 집행위원을 맡았던 그는, 2000년엔 1회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2007년부터 현재까지 박기용 감독과 함께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의 집행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단편영화제 일을 했던 4년 동안 ‘한국영화는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재능을 발견해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그것은 제도적인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기회를 주는 방식이어야 했고요. 저는 현실적인 이유로 연출부 생활을 할 수 없었고 그러기에 감독이 될 기회를 잡지 못했던 셈이죠. 하지만 후배들도 그래야 한다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거든요.”

당시 영화사업에 뛰어들었던 삼성영상사업단에 의해 시작되었던 서울단편영화제는, IMF가 찾아오면서 4회 만에 막을 내렸지만 임순례, 곽경택, 정지우, 정윤철, 윤종찬, 송일곤, 문승욱 등의 감독을 소개하는 창구가 되었다. “단번에 그들을 스타로 만들어주고, 장편영화를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한 사람의 비평가와 시네필로서, 나쁜 시절에 나쁜 환경 때문에 꿈을 버려야 했던 것을, 후배들에게 반복하지 않게 했다는 면에서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나쁜 선배는 아니었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요.(웃음) 굉장히 열심히 했던 일이었어요.”

영화제 내부의 마찰 때문에 1회에 그치긴 했지만, 그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든 ‘디지털 3인3색’은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는 전주국제영화제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섹션. 그리고 지금 그는 시네마디지털서울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금방 눈치채셨겠지만, 시네마디지털서울은 서울단편영화제를 지금의 현실에 맞게 버전업한 거예요. 단편이 장편이 되고, 한국이 아시아가 됐죠. 세 편 이하를 찍은 신인과 만나는 자리이고요. 그 감독들에게 상영 기회를 한 번 더 주어서, 그들을 지지할 수 있는 시네필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들이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최대한의 지지를 끌어내는 자리이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는 영화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순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영화제 일이 직업이 되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해요. 그건 정말 더 이상 시네필도 아니고, 비즈니스의 세계로 들어와 거래를 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영화제는 저에게 영화에 대한 순정 같은 거예요. 그 순정을 지켜낼 수 없다면, 더 이상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일이고요. ‘일’이라기 보다는 ‘의무’에 훨씬 더 가까워요.” 그러면서 올해 프로그램의 퀄리티가 “향후 10년 안에 이렇게 좋은 영화를 못 모을 것 같은” 수준이라며, 가능하다면 전작을 다 만나 보기를 ‘강추’한다. 두 차례에 걸쳐 시네마디지털베이징이 있었고, 올해 5월엔 시네마디지털도쿄도 있었다. 시네마디지털타이페이와 시네마디지털마닐라도 논의 중이다. “언젠가는 인터넷으로 글로벌하게 모여서 시네마디지털아시아를 한 번 해봤으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고요. 우리가 원조라는 식으로 우선권을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카자흐스탄이나 중동 지역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우리 행사가 10회쯤 되면 가능하리라 봐요.”

영화가 좋았고, 그래서 영화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고, 이젠 영화감독이 되었으며, 영화제를 통해 수많은 감독들과 만나는 시네필 정성일. 현실이라는 이름 앞에서 힘겨운 시절도 있었지만, 그는 아마도 ‘가장 행복한 영화광’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농담처럼 정의한 ‘영화광의 네 번째 단계’인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꿈도 이루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글 김형석
고려대 서양사학과와 동국대 영화과 대학원을 마쳤다. 시네마테크 문화학교서울<현 서울시네마테크>에서 영화 일을 시작했으며 2000년 <스크린>에 입사한 후 부터 영화 저널리스트로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