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 2010.08.24.본인인터뷰

영화 통해 우정 쌓고 사유하며 세상 본다 - 영화평론가 정성일

'시네필'의 원조… 에세이 <언젠가 세상은…> 첫 평론집 <필사의 탐독> 출간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
사진=임재범 기자 happyyjb@hk.co.kr

사람마다 타인을 기억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경우, 필자는 대부분 눈빛과 목소리, 사소한 행동과 말투로 그 사람을 기억한다.

미술을 전공한 한 지인은 눈, 코, 입은 물론 귀와 턱 선까지 얼굴의 개별적 생김새와 그 조합의 이미지로 사람을 기억한다고 했다.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기억의 방식이 바뀌기도 한다. 어떤 배우의 모습이 눈앞에서 그려진다면, 어떤 작가의 이미지는 몇몇 단어로 각인된다.

사전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찾다보면, 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와 대화를 나누며 받은 인상이 뒤섞여 하나의 뚜렷한 형상을 만들어 낸다. 말하는 이건, 듣는 이건, 모두가 초대 손님을 알고 있고, 각자의 머릿속에 제 나름의 아이덴티티를 그리며 그를 기다릴 때, 그리하여 진부한 몇몇 수사만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방식은 요긴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이미지보다 단어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를 언어로 전달하는 사람이다. 조금만 더 웃어 달라는 사진기자의 주문에 그가 말했다.

"제가 원빈은 아니지 않습니까?" 때문에 다시,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만난 후 사전을 펼쳤다.

평론: 사물의 가치, 우열 따위를 평가하여 논함

알다시피 그의 직업은 영화평론가다. 90년대 중반, 영화잡지 <키노>를 이끌며 영화비평의 흐름을 바꾸었고, 지금도 회고되는 <정영음>(정은임의 FM영화음악)에 출연해 긴 호흡의 문어체 화법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수많은 비평과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를 '쇼트'로 봐야 한다고 반복했다. '쇼트 바이 쇼트(shot by shot)'. 그는 쇼트와 쇼트가 만드는 균열, 균열이 만드는 파장을 읽어내고 언어로 전달한다.

정성일 평론가의 글을 읽을 때, 영화와 문학의 차이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평론을 읽다 보면 영화는 쇼트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반복하죠. 그리고 평론은 대개 그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렇다면 같은 방식으로 시와 소설을 볼 때, 그 사이 공간 그러니까 시에서는 연과 행, 소설에는 문장과 문단 사이의 균열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똑같은 얘기 한 사람이 있어요. 고다르. 영화는 접속사의 예술이고, 앤드의 예술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똑같은 이유로."

수 없이 질문 받았겠지만, 질문 안 드릴 수 없네요. 정성일 평론가가 영화 볼 때 기준은 뭔가요?

"영화를 읽지 말고 보라는 거죠. 저는 최상의 예술을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붙잡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음파를 통해서 음계를 전하고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는. 경험적으로 영화는 예술 중에서 가장 유치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면 다 보이잖아요. 영화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이는가가 질문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자주 인용하는 말 중 하나는 '영화는 바람을 찍지 못한다. 대신 호수의 흔들리는 물결을 찍을 수 있다.' 그것을 찍을 때 실제적으로 담긴 의도, 태도, 형상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이 영화 보기의 시작이에요."

이전 한 인터뷰에서 '영화의 완성도보다 영화에 깔려 있는 창작자의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셨지요. 다른 예술분야에서 신인을 평할 때도 종종 '진정성'을 말하곤 하죠. 그럴 때마다 묻고 싶었어요. 의도가 결과를 담보할 수 있다고 보는지.

"영화에서 태도를 보는 문제는 문학과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커피숍을 찍는단 말이죠. 감독이 현장에 도착하면 태도를 결정해요. 두 종류의 감독이 있어요. 첫째, '내 컷에 안 맞으니까 이 사람들 다 나가라고 그래, 배우 밑으로 조명 좀 떨어뜨려'하는 감독. 두 번째 '아무 것도 건들지마, 주인공이 외로운지 안 외로운지 옆 사람이 무슨 관심이 있어? 배경음악은 카페 음악 그대로 가'라고 하는 감독.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태도가 세상에 대한 태도인 것이죠. 문학에서 봐야 하는 것은 결정이지만, 영화에서 봐야 하는 것은 과정인 것이죠. 영화에서 대개 결과만을 말할 때 빈곤한 경우가 많아요. 근데 과정에 눈을 돌리는 순간부터 풍부해지기 시작해요. 이 세상이라는 기호들이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는지 보고 싶은 거죠. 영화 비평 쓰는 사람이 태도를 본다는 건 다른 의미로 영화 매체가 갖는 특수한 성질, 매체적인 징후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의 물질성과 만나고 있느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죠."

숭고미: 경이, 외경, 위대함 따위

그가 편애하는 감독과 작품에 미뤄 짐작컨대, 그가 영화에서 보려는 건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 알 수 없는 경이, 외경, 위대함 따위'를 언어로 드러내기 위해 그는 각종 문예사조와 철학의 계보를 읊는다. 그러니 난해하면서도 중독성 강한 문체는 의도가 아니라, 결과다.

그 마성의 문체는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PC통신 같은 시대적 대세, 영화 붐이란 한국적 상황과 합쳐져 하나의 전설이 됐다. 영화가 미학과 윤리를 중재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이 발견된 시기, 영화를 통해 세상을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진 시기, 정성일은 행복하게 시네필과 만났다.

이 글을 모아, 최근 그는 두 권의 책을 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와 <필사의 탐독>. 전자는 그가 영화를 통해 자신의 주변부 이야기를 엮은 에세이다. 비유컨대 '정성일 식 영화 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후자는 영화평에 관한 글을 주로 묶은 평론집이다. 그는 "첫 평론집이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는 세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책 서문에 미리 썼다. 어느 날 편집자에게 첫 영화를 찍고 나서 내기로 말해버렸다고. 그는 작년 첫 영화 <카페 느와르>를 상영했다.

정성일 평론가 글을 좋아하는 분도 많지만, 반면 너무 난해하다는 말도 많아요. 어렵다는 평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려운 영화는 어렵게 쓰는 게 맞거든요. 후진 영화는 후지게 써야 하고.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가 없구나' 생각할 때는 '쉬운 글이 좋은 글이에요'라고 할 때에요. 제가 읽은 좋은 글을 쉽지만은 않았거든요. 벤야민. 롤랑 바르트, 들뢰즈의 비평이 쉬운 글이 아니에요. 물론 제가 그 정도의 글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저는 제 글이 요약되길 원치 않아요. "

저는 문학보다 영화가 21세기에 각광받는 이유가 친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자본을 설득해서 창작자의 뜻을 예술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장르 같아요. 그래서 정성일 평론가가 상업영화를 만들려고 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는데요. 그런 프로세스를 경험한 다음 영화를 볼 때, 이전 평론만 쓸 때와는 달라졌나요?

"그전에도 창작하는 곳을 끊임없이 방문했고, 사실 본다는 것에서 크게 차이가 있진 않아요. 글쎄, 비로소 첫 번째 영화를 찍으면서 부채의식을 덜었다고 할까요? 이를테면 내가 썼던 영화에 대한 개념들, 선언적 명제들이 거꾸로 나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통해서 부채의식을 덜었던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영화가 만들어진 다음 베니스영화제 시작해서 12개 영화제를 돌아다녔어요. 해외 배급팀에서 그 영화제 평들을 보내줬는데, 영화비평들의 컨텍스트를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영화제마다 감독에게 묻는 질문도 달랐고요. 같은 영화를 보지만, 지구라는 큰 행성에서 살고 있구나.(웃음)"

비평가로 볼 때 재능이 뛰어난 작품, 인문학적 사고가 들어가 작품, 어느 쪽을 선호하세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김기덕이 이창동보다 훨씬 더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교육을 받아서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예술일 수 있겠어요?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학생 중에 버클리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친구가 있었어요. 걔 보다 한국의 '듣보대' 나온 애가 더 잘 찍어요. 심지어 그 박사 친구는 데리다한테 2년 동안 지도를 받은 친구에요. 근데 그 친구가 영화에서 숭고미를 끌어내는가, 아니더라는 거죠."

영화: 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 예술

그에 관해 찾은 마지막 단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영화보다 평론에 방점을 찍게 만든 사람이다. 그가 사랑한 건 영화지만, 대중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영화를 보는 그의 안목, 정확히 안목이 남긴 기록물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영화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이러저러한 평을 쓰지 않겠지만, 대중은 그가 무엇에 대해 썼든 관여하지 않았을 게다. 대중이 원한 것 그를 통한 세상보기였으니까.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제목을 들뢰즈 표현에서 따왔다고 하셨는데, 비평을 보면 이 외에도 철학자, 평론가들의 차용이 많이 나오거든요. 사유의 돌파구가 된 사람은 누구였나요?

"마음 속에 항상 들어있는 사람은 두 명이에요. 벤야민과 모리스 블랑쇼. 두 사람이 쓴 책은 20대 때 읽기 시작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죠. 지금도 첫 구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때, 왼손에는 벤야민, 오른 손에는 블랑쇼를 들어요. 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긴 합니다만, 동세대 중에는 들뢰즈 보다 바르트에 더 손이 가고요."

정성일 평론가 글은, 특히 90년대 학번에서 전설처럼 기억되죠. 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영화붐 같은 환경과 글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이 들었고요. 당시 전폭적 지지를 받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끔찍하죠. 제가 원한 건 영화에 대해 토론할 친구, 우정을 나눌 사람을 찾고 싶었는데, 그 과정에서 영화가 이야기 되었으면 했는데 이야기하는 방식이 중심에 오게 될 때 한편으로 당황한 측면이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비평의 세기는 갔다'고 하는 지금이 더 편하시겠네요.

"훨씬 더.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자기의 지적 계보를 갖고 있고, 어떤 자리에 가도 제가 귀 기울이고 배움을 받을 수 있죠. 서로 다른 시야를 얘기할 때 재미있잖아요."

서울디지털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시죠? 이 영화제 초청작은, 평론가의 취향이 반영된 건가요?

"영화제 일을 할 때 원칙은 직업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직업으로 할 때 비즈니스가 되요. 정말 좋은 영화는 모으지 않고. 영화에 대한 제 믿음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취미이고요, 선정 기준은 어떤 방식이든지 나에게 쇼크를 주는 영화. 그것을 통해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법을 일깨워주고 있으니까요. 그런 영화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그 쇼크를 내 친구들에게 알지 못하는 영화의 친구, 시네필들, 가상의 공동체에게 함께 보여주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시네필 cinephile: 영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

2004년 국립국어원에 등록된 이 신조어의 원조는 아마도 그일 것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우정을 쌓고, 영화를 통해 사유하며,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러므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란 그 선언은 수사가 아니다. 그의 세계 안에서.

대중이 그의 글을 통해 보고 공유하고 싶었던 건 이 순정한 마음일 터다.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그 방법이다.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들뢰즈의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사랑에는 어떤 숭고한 면이 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55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