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24』 2010.09.24.본인인터뷰

지금, 세상은 영화가 되고 있다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정성일
99권을 끝으로 영화 잡지 <키노>는 끝났지만…

영화 잡지 <키노>는 1995년 처음 등장해 99권을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긴 지면을 할애해, 새로운 감독과 영화를 소개하고, 작가주의 영화를 면밀히 다루고, 독립영화, 컬트영화 등에 있어서도 충실한 가이드가 되어 준 잡지였다. 글ㆍ사진 | 김수영

언제나 태도의 문제가 작용한다.

내가 대상에 대해 허리를 곧추세우기만 해도, 대상은 다른 얼굴로 나를 마주본다. 영화가 누군가에게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허리를 곧추세운 누군가에겐 사랑이고 우정이고 그 너머 삶이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화가 인생보다 중요하다. 이를테면 프랑수아 트뤼포, 혹은 존 카사베테스. p.199) 당신이 영화를 진지하게 마주볼 때, 좀 더 알고자 할 때, 영화 잡지 <키노>, ‘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존재를 알게 될지 모른다. 정성일은 영화 마니아들의 필독서 <키노>의 편집장이었고,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통해 새벽마다 영화의 이름을 불러주며 시네필들과 우정을 쌓아온 평론가다. 그런 그가 이제야, 혹은 드디어 첫 책을 냈다. 영화의 관한 에세이와 인터뷰를 담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와 영화비평집 『필사의 탐독』 두 권이다. 영화를 향한 은밀한 고백이자, 단단한 결의다.

영화 잡지 <키노>는 1995년 처음 등장해 99권을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긴 지면을 할애해, 새로운 감독과 영화를 소개하고, 작가주의 영화를 면밀히 다루고, 독립영화, 컬트영화 등에 있어서도 충실한 가이드가 되어 준 잡지였다.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은 어디서나 영화감독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영화감독을 통해서 영화를 생각하고, 영화를 사랑하고 비판할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던 문구가, 영화감독만을 위해서 글을 쓴다던 정성일의 목소리와 겹친다. 지금도 영화잡지를 통해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고, 알리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면, 잡지 <키노>는 그쳤지만, 그때처럼 영화를 사랑하고, 우정을 쌓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키노>가 영화 잡지가 아니라 ‘그냥 영화’가 되고자 한 것처럼, 아마도 두 권에 실린 글들 역시 비평에 머무는 글이 아니라 영화가 되고자 하는 글일 테다.

시간 밖으로 끄집어내는 순간,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비평이라는 글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나요? 단지 출판사와의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전부라고 할 순 없겠죠. 저는 인터넷으로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책, 원고지로 시작한 사람이라서, 어떤 물적으로 만져지는 것에 대한 존경심, 경외감이 있어요. 책은 한편으로 두려운 것이었죠. 그렇지만 제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영화를 한편 찍고 나면 책의 무게를 견딜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었죠. 미뤄졌던 영화 작업이 작년에 완성이 되어서, 이제는 책과 한번 만나보자, 하게 된 셈이죠.”

편집자와 올드독이 선별해낸 글을 묶은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써온 많은 글들을 스스로 정리해보고 싶진 않았나요?

“(그런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글을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본 적이 없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라도 한번쯤, 제법 이번 글은 잘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 있기도 하는데, 그런 글도 지나가면 돌아보지 않아요. 써낸 글은 지나간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선생님의 사고방식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은 언제나 시간입니다.

“처음으로 지각된 것은 공간이었는데, 문득 이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라는 선인들의 책을 본 이후, 시간이 제 삶의 중요한 화두와 배움이 되었어요. 시간 속에서 어떻게 견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되었어요. 모든 것에 해당하는 문제예요. 아주 큰 결정을 할 때, 어떤 태도를 가다듬어야 할 때도 생각하는 문제죠.”

영화 역시 정해진 러닝타임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봐야 영화이지, 중간에 끊어서 보거나 되돌리는 건 영화를 봤다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화에 관해서 들뢰즈가 쓴 두 권의 책을 발견했을 때, 기뻐서 불어, 일본어, 영어 등등의 여러 판본을 구했어요. 무슨 영화책인데 스틸 사진이 한 장도 없어! 그 책 속에서 많은 배우들과 개념들을 알게 될 수 있었지만, 그 책이 제게 준 가장 큰 교훈은 책 안에 한 장의 스틸 사진도 없다는 거였어요. 즉, 영화는 멈춰 세우면, 시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순간 영화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들뢰즈의 책 제목도 『시네마1:운동-이미지』와 『시네마2:시간-이미지』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철학자의 혜안이죠.”

그렇다면 그 러닝타임 속에서 선생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영화에 영화적인 질문, 시네마틱한 질문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시작이자 끝입니다. 모든 영화가 시네마인 건 아니거든요. 영화를 보았을 때, 얼마나 훌륭한가, 나쁜가 하는 문제는 제 관심사가 아니에요. 나쁜 영화도 흥미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그 영화가 그렇게 부서졌을 수도 있는 거죠.”

영화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상과 영화의 관계가, 영화를 대하는 많은 태도를 설명해주기도 하는데요.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영화가 되었는지 잘 알고 있어요. 911 테러사건이 TV로 방송되었을 때 사람들이 중얼거렸죠. ‘아, 영화 같다.’ 영화가 그만큼 세상과 가까이 있었던 셈이죠.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잊는 사실 중 하나는, 영화가 만드는 쪽과 보는 쪽 둘 만 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만드는 쪽과 보는 쪽, 그리고 관객이라는 문제가 삼각관계로 놓여있는 거죠. 그리고 여기서 관객, 대중이라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세상이라는 문제로 치환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19세기가 산문의 방식이었다면, 우리의 세기는 영화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미래의 세상은 게임이 될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볼 때, 우리의 뇌가 스크린처럼 작동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들뢰즈에게 빌린 이 말 속에서 세상과 영화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은 거죠.”

‘영화의 완성도보다 창작자의 태도를 중시한다’는 말 역시, 영화와 세상의 관계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 같아요. 창작자의 태도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결국 관객이 보게 되는 영화는, 창작자의 선택이 이뤄낸 결과가 아닌가요?

“어떤 장면을 볼 때, 그것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겠냐는 거죠. 오랜 생각 끝에 개념화시키고, 하나의 문장으로 뽑아낸 시의 글귀 같은 건 아니잖아요. 영화의 장면이라면, 그날이 밝은지 비가 오는지, 여름인지 겨울인지에 따라 다른 장면이 찍힐 거예요. 과정의 일부를 잘라서 선택하고, 그것을 연결시켜 의미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작동시켜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 미술품이나 조각처럼 최종적인 결과물은 아닌 거죠.

어떤 장면도 100퍼센트 감독이 만족할만한 장면은 존재하지 않아요. 연기가 좋아도 원치 않는 빛이나 바람이 들어와 있을 수도 있죠. 감독의 선택이 개입하겠죠. 그때 감독이 사고하는 과정을 보자는 거죠. 저게 왜 좋다고 생각했을까? 왜 저 사람에게는 OK인 것일까? 이것이 세상에 대한 감독의 애티튜드인 거죠. 여러 가지 우는 연기를 시키고, 어떤 것에만 ‘바로 그거야!’하고 외쳐요. 우는 것에 대한 일종의 태도가 드러나죠.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관객의 애티튜드도 묻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영화를 보는 당신에게 영화가 어떤 순간에 훅을 걸 겁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른 훅을 걸게 됩니다. 그 훅의 순간에 대해 정직해 질 것. 그런 다음 거기에 질문을 던질 것. 영화에서 좋은 비평이란, 좋은 결론보다 좋은 질문을 하는 쪽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대답을 얻는 데 실패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대답을 구하기 위해 예술을 향유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향유하는 것은 그런 좋은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평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최근 <씨네21>에서 연재하는 ‘씨네 산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 중 허문영, 김영진, 이동진, 김혜리 평론가와 함께 ‘영화비평가는 무엇에 쓰이는가?’라는 주제로 나눈 대담이 흥미로웠고요. 비평이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과연 비평의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었어요. 일전에 평론가님은 자신의 비평은 오직 감독만을 위해서 쓴다고 하셨는데요.

“저에게 비평의 목적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그 영화에 관한 좋은 질문을 만들어내는 쪽에 있어요. 그 질문을 영화가 잘 견뎌내고 있는지 보는 거죠. 영화 비평을 쓰면서 독자들과 게임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잡지를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대중이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글을 쓰는 일은, 수신할 수 없는 편지를 쓰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제 글이 어렵지 않느냐는 말 또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글들이 있잖아요. 문학에 관한 블랑쇼, 푸코, 데리다의 글. 어떤 글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두고 글을 읽었을 때, 그 글의 어려움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그들의 글을 읽을 때 질문을 만들고 대답하려고 노력을 했을 뿐이지, 글이 어렵구나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책에서도 최종적인 비평은 없다, 결론적인 비평은 없다고 누누이 언급하셨는데, 이 역시 영화와 마찬가지로 과정을 염두에 둔 말인 듯합니다. 평을 고착화시킨다는 점에서 별점 매기는 일을 그렇게 반대하시는 건가요?

“‘정성일이 영화 <괴물>에 대해 뭐래?’ ‘이렇대.’ 제 글이 이렇게 요약되는 순간이 가장 끔찍합니다. 영화 비평은 광고카피가 아닙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에 굴복해 20자평을 쓰고, 심지어 별점을 던지고 있죠. 별점을 매기는 순간, 별점은 고스란히 자기한테 돌아오는 겁니다. 그 영화에 대한 자기의 안목이라는 겁니다. 별점을 매기는 순간, 그 영화에 대한 심리적 평가를 수량화, 계량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사고가 거기서 멈춘다는 겁니다.

그 영화를 계속 생각하는 한 그 영화는 살아있습니다. 별 둘, 별 셋 하는 순간 영화는 죽는 셈이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행위는 사실 죽어있는 행위가 아닙니까? 잠자는 시간도 아닌데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으니 말이죠. 만약 그 순간, 영화에 대해 사고하지 않는다면 두 시간동안 살아있는 시체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화평론이 어떻게 쓰이길 바랍니까?

“도구상자처럼 쓰였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비평을 허용하는 데에 능수능란해져서, 필요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꺼내 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비평가의 별점에 맹종하고, 스무자 평에 매달리는 것은 비평가와 관객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로 치환하는 행위입니다. 이건 전적으로 관객의 선택, 의지, 활용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이 책에 있는 ‘영화 비평가가 가져야 하는 세 가지 태도’라는 글이 평론가님의 이런 ‘비평적 애티튜드’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절반쯤 농담으로, 하지만 절반쯤 진담으로 말한다. ‘영화평론가가 되는 세 단계가 있어. 첫 번째 단계는 박스오피스 결과를 무시하는 거지. 두 번째 단계는 칸영화제 수상 결과를 무시하는 거지. 세 번째 단계는 동료들의 별점을 무시하는 거지.’(…) 왜냐하면 비평적 견해란 그 영화에 대한 그, 그녀의 직관이 궁금한 것이지 해결, 담합, 입장, 약간 우스꽝스럽게 말하자면 개념의 서비스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27)

“공통점은 ‘무시’입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은 일시적인 거거든요. 비평은 절대적으로 자신을 믿고 하는 일입니다. 자기 판단, 기준을 세우는 일은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나의 글을 읽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인 거죠.”

평론가님이 영화비평을 쓰는 과정이 궁금했습니다. 이 책속에서, 비평을 쓴다고 해서 영화를 반복해보는 일은 거의 드물다고 했는데, 『필사의 탐독』을 보면 장면의 정보가 꼼꼼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그건 동세대와의 차이일 수 있어요. 제가 비디오 매체를 만난 건 24살 때입니다. 그 전에는 인류 문명에 비디오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어요. 극장에서 상영이 끝나면 두 번 다시 그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얘깁니다. 그 영화를 소장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기억에 담아두는 거죠. 잊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보는 거예요. 아마 저 뿐만이 아니라 제 동료들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 거예요.

수업 중에 느끼는 생각인데, 영화가 비디오나 DVD, 파일화 되면서, 언제든지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가져온 결과는, 기억력의 퇴화입니다. 일주일도 아니고 10분 전에 본 영화의 씬과 장면도 떠올리지 못해요.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안심 때문입니다. 영화는 결국 기억의 예술이거든요. 그런 기억의 기능이 퇴화는 한편, 영화를 보는 능력의 퇴화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영화는 문제를 푸는 과정

<까페 느와르>라는 영화를 찍었습니다. 정성일 평론가가 찍는다는 사실 만으로, ‘얼마나 잘 찍나 보자’는 식으로 이 영화에 대한 기대도 많고, 말도 많았는데요. 중압감이나 부담은 없었나요?

“촬영 전부터 그런 얘길 들었어요. 걱정 안 되냐고.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거예요.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을 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꿈에서라도 <시민케인>을 찍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제 방식으로 영화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과정이었죠.”

영화 현장을 견학하고, 수많은 감독들과 인터뷰를 하셨는데요. 실제로 영화를 찍는데 도움이 되었나요? 연출의 팁은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인터뷰 하면서 얻었던 배움이 영화를 찍을 때 큰 도움이 되었죠. 종종 난관에 부딪치고,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졌죠. ‘왕가위라면, 지아장커라면, 홍상수라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의 영화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들의 방식, 메소드를 흉내 내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죠. 그게 답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도 해줬어요.”

영화를 찍고 나서, 영화라는 메커니즘을 경험하고 나서 글쓰기나 영화보기에 변화가 생긴 점은 없었나요?

“현장을 견학하고, 감독과 인터뷰를 하고, 이렇게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많은 감독들이 제게 알려 준 교훈은 딱 하나. 첫 번째 영화에 쌓아올린 경험이 두 번째 영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두 번째 영화에는 두 번째 고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다음 영화의 문제와 첫 번째 영화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모든 영화는 문제를 푸는 과정입니다.”

책 속에 실린 인터뷰 중, 평론가님이 박찬욱 감독에게 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모범이 되는 예술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비평가로 살면서, 긴 시간동안 마음에 담을 사람은 블랑쇼입니다. 비평도 하고 소설도 썼어요. 비평가이자 그 자신이 창작자였죠. 그의 비평은 오로지 작품에만 귀를 기울였지 세상의 소란스러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거든요. 정치적인 참여 역시 예술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참여였고요. 무엇보다 그가 소설을 통해 쓴 글은, 철학자들이 철학의 개념을 가다듬는데 도움을 받을 만큼이나 밀어붙인 사고의 활동이었어요. 배우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훔치고 싶죠. 배우긴 이제 틀린 것 같고.(웃음)”

정성일 평론가를 이야기하면서 임권택 감독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집도 내셨지만, 최근에 <씨네21>을 통해 다시 인터뷰를 하셨죠. 굉장히 각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적 아버지 같은 존재죠. 영화감독 인터뷰는 대개 영화에 관한 얘기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삶 자체, 특정한 추억, 시간, 역사로 확장되기 마련입니다. 임권택 감독의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끊임없이 반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화, 해방, 좌우 이념의 대립… 충무로에 도착했지만, 연좌제에 걸려 자유롭지 못했던 한 사람의 삶, 열여덟에 알코올 중독, 수전증에 걸렸던 한 사람의 삶, 매일 촬영이 끝나고 소주병 하나 들고 하숙방에 들어가, ‘내가 이러다 객사하지’하며 잠든 한 사람의 삶,

그럼에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끊임없이 자기를 향한 질문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어느 날 문득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왜 저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당시 아버지와 긴 불화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이들의 냉정함, 단호함, 어떤 자기중심적인 사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던 삶. 이것은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책과 지식의 연대기가 아니라, 아버지 세대의 뼈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하는 과정이었어요. 그 순간 굉장히 오랫동안 나를 붙잡아왔던 질문의 대답을 얻었지요. 한국 영화란 무엇인가.

판소리가 나오거나 기왓장이 나온다고 해서 한국영화는 아니라는 거죠. 한국 영화에만 성립하는 쇼트와 씬. 한국영화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제스처. 영화 <족보>(1979)의 한 장면에서 일본인 주인공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한 토호를 만나러 옵니다. ‘집주인 뵈러왔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이런 대화 다음에는 인물이 앉아서 기다리는 컷을 보여주면 되죠. 그런데 카메라가 마당을 가로지르고, 방을 가로지르고, 그 다음에 안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이어지는 거예요. 명백히 네 컷은 쇼트의 경제성에 의하면 필요 없는 컷인 셈이죠. 물어봤더니, 그가 오히려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하더군요.

“그게 한국 사람이 나이 많은 어른을 대하는 태도인거야.”

영국인 히치콕이라면, 미국인 존 포드라면, 프랑스의 장 르누아르라면 절대 그렇게 찍지 않았을 커트. 한국인 임권택에게만 성립하는 커트죠.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영화나 미국 영화를 볼 때, 프랑스, 미국에만 가능한 커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확장되었죠. 즉, 영화가 하나의 세상이라는 문제는 바로 그런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