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보담』 2014.05.(봄.12호)

Walking with a Shot

영화가 제주를 만났을 때

카메라는, 때로는 추억의 편린을 좇아 낯선 땅을 훑듯이 일별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미한 흔적을 더듬으며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마주해 속 깊은 울음을 삼키기도 한다. 지금 당신의 카메라는 제주 어디쯤 있는지, 무얼 찍고 있는지.

글 정성일 영화감독 · 평론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제주도에 얽힌 사연 하나 없는 사람 없을 것이며 마음에 담고있는 추억 하나 없을리가 없습니다. 며칠 전 저녁에 만난 분은 그러던 걸요, 낮에 은갈치 조림이 너무 먹고 싶어서 잠깐 제주도에 다녀왔어요, 오는 길에 커피도 마시니 잠시 옛날 신혼여행 생각도 나더군요. 이 분의 아내가 지금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야겠군요.

제주도는 그런 곳입니다. 무언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가는 곳. 왠지 근사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곳. 다녀오면 기억 속에서 알 수 없는 윤색이 시작된 다음 반짝반짝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면서 문득 다시 그곳에 갔을 때 그 시간을 되찾을 것만 같은 곳.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즐거운 시간을 떠올리는 일은 다른 분에게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영화가 제주도를 찾아갔을 때 대부분은 슬픈 역사를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 듣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땅 다른 풍경

먼저 참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제가 처음 영화에 관한 일을 한 것은 비평이 아니라 시나리오를 쓴 일이었습니다. 막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아직 제주도에 가보지도 못한 채 그저 책만 읽은 다음 ‹애란›이라는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이야기는 일제강점 하에 한 청년학도병이 도망을 쳐서 섬까지 흘러들어온 다음 우연히도 이 섬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조류학자 부부 사이에 끼어들면서 시작합니다. 여기에 아내의 여동생이 찾아오면서 운명이 거미줄처럼 이들 모두를 칭칭 동여매기 시작합니다. 청년은 여기서 죽고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이듬해 일본은 하와이에 공습을 합니다. 모든 것이 파국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제가 하려는 건 영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처음 제주도에 가보았습니다. 그저 사진만 보고 남이 쓴 기행문을 읽으면서 상상만 키워 시나리오를 쓴 것입니다. 처음 본 제주도는 아름답다기 보다는 다소 기기묘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풍경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랄까, 단지 여행을 했다기보다는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 아직 세상이 풍화작용에 마모되기 전의 풍경을 본 것만 같았습니다. 뭍의 풍경이 지나치게 지쳐서 완만해졌다면 섬의 풍경은 세상이 지금 막 생성되기 시작했던 시간대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내가 무언가 크게 잘못 썼구나.

변방에 우짖는 새

제주도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의식적으로 찾아 보았다기 보다는, 1980년대에 한국 소설들은 역사의 부채를 갚아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 산에서 죽어간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조정래의 ‹태백산맥›. 그때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 박광수 선배도 그 즈음 처음 그 책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감독을 하기도 훨씬 전, 남영동에서 방을 구해 영화를 만들겠다고 또래 영화친구들끼리 밤새도록 술 마시면서 비겁한 한국영화를 향해 비분강개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비오는 날 오후 아무도 방에 오지 않던 날 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그냥 무심코 물어보았습니다. 형은 마음에 품고 있는 칼이 있으세요?

그 때 술에 취해 게슴츠레 하던 눈이 갑자기 번쩍이더니 나를 보면서 대답했습니다. “있지, 그거 영화로 만들고 나면 그땐 난 죽어도 괜찮지.” “그게 무언데요?”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다음에 나눈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1999년 이른 봄 날, 제주도를 다시 찾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박광수 선배는 운동권 ‘도바리’(경찰 수배에 쫓겨 다니던 운동권 학생을 부르던 말) 이야기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한국전쟁 시절 섬에서 벌어진 빨갱이 사냥을 다룬 ‹그 섬에 가고 싶다›, 그리고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안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다음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짧은 삶을 담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만든 다음 마침내 제주도에서 ‘변방에 우짖는 새’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이재수의 난› 입니다.

1901년 그때 제주도는 프랑스 가톨릭이 무리하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고, 일부 교인들은 외세의 힘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렸으며, 중앙정부에서 보낸 관료는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신이라면서 제주도의 신목(神木)을 자르고 신당(神堂)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더 이상 참지못한 유림이 난을 일으켰고 이에 통인(通人) 이재수가 대장두 (大將頭) 로 나섰습니다.

그들은 교인 칠백 명을 참수하고 중앙정부에 자신들의 분한 심정을 알렸으나 프랑스 신부가 요청한 함대가 중국 상해에서 제주도에 도착했고 이미 중앙정부는 어떤 힘도 없던 구한말이었습니다. 뭍에서 떨어져 멀리 섬에 사는 백성들은 세계의 시간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재수와 민란을 일으킨 백성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 수는 오백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때 이 작은 섬에서 어른 열 명 중에 한 명이 죽은 숫자라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마지막 진군을 찍은 장면은 구좌읍 송당리에 자리잡은 아부오름(前岳)이라고 부르는 분지 형태의 분화구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지표면 위에 만들어진 커다란 원형 안에는 백 년 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분한 마음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지금 세상의 뜻이 정의라 믿고 깃발을 들어 진군을 외칩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목이 매달렸습니다. 뭍의 시간. 섬의 역사.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쩌면 섬에 간다는 것은 시간의 선을 놓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홍상수도 그런 생각으로 제주도에 갔을지 모릅니다. 종종 홍상수는 술자리가 거의 끝날 즈음이면 중얼거리듯이 말했습니다. “난 나중에 사람들 안 만나고 살아도 되면 제주도에 가서 살 거예요. 그래서 매일 바다만 바라볼 거예요.” 그 홍상수가 그렇게 전국을 싸돌아다니면서 영화를 찍는데도 제주도에 간 건 단 한번 뿐이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영화감독 구경남이 제천영화제 심사위원을 마치고 난 다음 특강을 하러 제주도에 가는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산에 둘러싸인 호수 제천 청풍호에서 이야기를 진행한 다음 정반대로 바다에 둘러싸인 섬 제주도에 가서 벌어지는 이야기에서 (홍상수식으로 말해보자면) “서로 반대의 방향으로 둘러싸인 두 개의 기운”을 느껴보는 영화입니다.

제주도에서 구경남은 존경하는 선배인 양천수 화백을 만나고 우연히 그 집에 가서 선배의 아내가 예전에 자기가 마음에 품었던 후배 고순임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백발노인인 선배와 지나치게 젊은 아내. 무슨 까닭인지 고순은 구경남에게 쪽지를 건네주고 이게 은밀한 로맨스라고 생각한 구경남은 기회를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만사가 허사. 심지어 고순을 연모하던 동네 청년에게 매를 맞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 역할에 하정우 씨가 갑자기 나와서 진짜 웃지 않을 수 없는 대사를 합니다. 물론 그건 스포일러이니 비밀입니다.)

구경남과 고순 둘은 해변가에 앉아서 마지막 대화를 나눕니다. 구경남은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선배를 비난하면서 마지막 유혹을 합니다. 그때 고순은 버럭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당신이 알긴 뭘 알아요. 그 사람 훌륭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상대도 안 되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만큼 되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이라도 좀 해 보세요” 홍상수는 그런 다음 물끄러미 그리고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봅니다. 그게 영화의 끝입니다.

한참을 웃다가 멈칫할 정도의 무심함. 이건 어쩌면 뭍사람들에 대해서 섬이 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섬에 대해서 나누는 이야기. 우리들의 막연한 인상, 도착하자마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지는 정보들, 이 섬에 대해서 건드린 모든 이야기는 그저 코끼리를 만져본 다음 봉사들이 늘어놓는 소동인지도 모릅니다. 섬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요.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놀러와서 떠들어 대는 한 무리 뭍촌놈들의 고작해야 일주일 동안의 여행이, 알면 얼마나 알고 하는 이야기인지 참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늘어놓는 말들이겠지요.

“역사에는 감정이 있어, 그걸 찍어야 해.”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이건 그 모두가 그저 제주도를 방문한 자들의 낯선 시선이었습니다. 언제나 제주는 역사의 알레고리가 되거나 잃어버린 시간의 무언가 애틋한 흔적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여기를 살아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멸은 한국영화에서 특별한 이름입니다. 물론 오멸이 첫 번째 제주도 감독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태어난 이들은 대부분 감독이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오멸은 처음에는 거기서 연극을 했고 뒤늦게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처음 본 오멸의 영화 ‹어이그 저 귓것›은 섬을 무대로 제주도 방언이 난무하는 것 말고는 거의 볼 것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영화를 너무 못 만들었습니다. 이건 그의 두 번째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빨리 영화를 배워나갔습니다. 그런 다음 두 편을 더 만들고 나서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의 동네 어른들에게서 들었다는 1948년 11월 그해 겨울 이야기 ‹지슬›을 찍었습니다.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 라는 뜻입니다. 배경은 약간 복잡합니다. 1948년 제주도는 해방 이후 일본군이 물러갔지만 일제하에 부역 경찰들이 다시 미군정하에 군정 경찰이 되었고 이때만 해도 미군은 제주도를 (일본의 오키나와 대신) 아시아 군사 방어체계의 요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도 부족한 섬에서 콜레라가 돌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민심을 얻고 있었고 우익 단체와 경찰은 이들과 종종 충돌을 빚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하여 우익 토벌대 대원을 중심으로 경찰과 그들의 가족에 이르기까지 (신고 된 숫자만) 14,028명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미군 지휘 아래 진압이 시작되었고 설상가상 1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제주도 비상 계엄령이 내려지면서 강경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토벌 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를 불 질렀고 그 숫자가 무려 39,285동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갈 곳을 잃고 쫓기게 된 주민 2만명이 산에 들어가 무장대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자 토벌대는 가족 중 단 한 명만 없어도 좌익으로 분류하여 가족 전원을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 작전을 폈습니다.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으로 사살했고 북촌마을 사건으로 알려진 북촌에서는 남녀노소 400명을 몰살했으며 100명 이상이 희생당한 마을이 마흔다섯 군데가 넘었다고 합니다.

여기는 섬입니다. 도망칠 곳도 없는 여기서 토끼 몰 듯이 그렇게 한라산을 둘러싸고 사살하면서 산 정상으로 몰고 갔습니다. 일시적으로 1949년에 사면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예비 검속을 하여 산에 올라간 전적이 있는 이는 무조건 체포한 뒤 연좌제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대학살을 벌였습니다. 이른바 이것이 4.3 항쟁 혹은 4.3 사건이라 불리는 제주도의 근대사입니다.

오멸은 이 이야기를 ‹지슬›에 담았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 한 집 건너 죽은 자의 제사를 매년 지내는 친척들의 이야기. 오멸은 그걸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라고 불렀습니다. 영화는 제사를 지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흑백으로 찍은 이 영화는 추운 겨울 날 단 한 장면도 아름다운 순간 없이 무자비하고 참혹하게 진행됩니다. 동굴 속에서 사람들은 ‘지슬’을 나눠 먹으며 벌벌 떨면서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합니다.

이때 모든 대사는 제주도 방언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뭍에 사는 당신은 자막으로 그걸 읽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비로소 영화는 바깥으로 나갑니다. 거기서 펼쳐진 풍경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합니다. 화면 위 검은 색은 피로 젖은 시체들이고 흰색은 그 위를 덮으면서 내리는 눈입니다. 아직도 학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 역사를 알지 못한다 해도 보는 내내 치를 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는 제주도입니다.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은 섬. 그러니 부디 이번 여름에 제주도에 가시게 되면 슬픔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어딘가 구덩이를 파면 누군가의 시신 일부가 나오곤 한다는 땅. 그날 박광수 선배가 안개 자욱한 아부보름에서 현장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에는 감정이 있어, 그걸 찍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