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ler』 2010.02.(23호)본인인터뷰

서울의 밤을 여행하는 영화감독의 안내서

‘광화문, 남대문, 남산타워 쯤 되겠지, 뭐.’ 영화감독 정성일에게 ‘가장 좋아하는 서울 야경’을 물어보러 가기 전, 난 이미 예상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완전히 새로운 장소를 소개해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여기, 인생을 남들보다 두 배로 사는 남자가 있다. 잡지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영화평론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뒤, 기어코 자신의 꿈인 영화감독이 된 이 남자의 이름은 정성일이다. 그의 데뷔작 <카페 느와르>의 촬영은 100% 서울 강북에서만 이뤄졌다. 어느 영화전문기자는 이 영화를 ‘서울의 지도’라고 일컬었으며 어느 기자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서울시에서 상 줘야 할 만큼 강북의 거리들이 아름답게 담겨있다”고 했다.

강북에서 태어난 정성일은 결혼하기 전까지 줄곧 강북에서만 산 ‘강북토박이’다. 그는 왜 데뷔작을 100% 강북에서만 찍었느냐는 질문에 “첫 영화라 친근감 있는 곳에서 확신을 갖고 찍고 싶었다”고 답했다. 인터뷰 중, 그는 자주 강북의 옛 정경을 그리워했다.

“내가 어릴 적엔 서울시내에 전차가 다녔어요. 삼선교에서 종각까지 가는 전차였는데 그 전차를 타고 보는 서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죠.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죠. 지금 보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라요. 이 영화를 통해 서울 강북의 현재 모습을 재현하고 싶었어요.”

정성일은 지금도 강북을 즐겨 찾는다.

“강북에 오면 우선 사람들이 달라요. 따뜻하고 친근감이 있죠. 게다가 음식 맛도 좋죠. 강북 맛집들은 대부분 상당한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강북에서는 종종 골목에 들어가 길을 잃는 경험을 하는데 그것도 너무 좋아요. 하하하.”

강북예찬에 여념이 없던 그는 “장소만큼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한 뒤, 자신이 꼽는 서울 야경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청계천 시간 여행

앞으론 12월 31일에 보신각 대신 청계천에 가보세요. 밤 11시쯤 청계광장으로 가세요. 매년 마지막 날 그 시간 쯤 청계광장은 화려한 루미나리에luminaries로 가득하죠. 11시 30분쯤부터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걸어보세요. 시시각각 변하는 청계천 풍경에 놀랄 겁니다. 이 코스의 시작은 마치 멜로드라마나 SF 같은데요, 그 마지막은 마치 공포영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든답니다. 청계광장에서 약 1시간 20분쯤 걸어가면 청계8가 근처에 있는 아주 특별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겁니다. 청계문화회관 바로 건너편 건물이죠. 그 건물이 자아내는 야경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고유의 장면입니다. 이 코스를 산책하는 것은 공간의 이동이라기보다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겁니다.

한여름 유람선 여행

이 코스는 꼭 8월 초에 가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8월 초쯤엔 저녁 7시 20분쯤 해가 떨어지는데요, 이 시간에 맞춰 뚝섬에 가세요. 그곳에서 여의도행 유람선을 타세요. 꼭 뚝섬에서 여의도로 가는 배를 타야 합니다. 그래야 물살을 거슬러 다가오는 맞바람을 맞을 수 있거든요. 낮에 데워진 뜨거운 바람과 저녁 무렵 식혀진 시원한 바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데 그 느낌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요.

남산 케이블카 여행

이번에 소개할 코스는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타워에 오르는 겁니다. 이 코스는 꼭 11월 초에, 그것도 정확히 저녁 6시 전후에 가야 합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마법의 시간(Magic Hour)라 부르는 시간이거든요.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대지요. 이 시간대에 남산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강북 풍경은 그야말로 으뜸입니다.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남산에서 바라보는 강북의 풍경을 바라보면 ‘아! 서울에 건물만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되죠.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까지 오르는 데 정확히 3분 25초가 걸리는데 그 시간 동안 ‘서울에서 산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끔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 서랍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때 전 남산 케이블카를 탑니다. 남산 정상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머리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거든요. 여러분에게도 꼭 권하고 싶습니다.

경의선 전철 여행

이번엔 경기도 금촌에서 서울역으로 오는 전철 코스를 소개할게요. 전철 노선인데 모든 코스가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다녀 마치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죠. 밤에 이 40분짜리 코스를 전철로 타고 오면 마치 여행하는 기분이 들 거예요. 특히 서울역에서 내리는 역사가 지하가 아닌 지상 서울역사에 있어 그 전철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고향에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한강 고수부지 달리기 여행

영화를 많이 보던 시절, 허리가 너무 좋지 않아 한의원에 갔더니 달리기를 추천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밤 12시쯤 나가 야밤 달리기를 했죠. 제가 좋아하는 코스 중 하나가 바로 한남대교부터 여의도 방면으로 뛰는 코스죠. 밤에 바라보는 한강 풍경은 정말 아름다워요. 특히 한강철교 아래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압권이죠. 아름다운 조명과 어우러지는 그 풍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니까요. 한강의 달리기 코스에는 늦은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로 붐벼요. 어느 밤, 고글을 끼고 달리는 여자 한 명을 봤어요. 환상적인 몸매에 얼굴 윤곽도 아름다웠죠. 그 밤에 고글을 끼고 달리는 건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죠. 분명 그녀는 얼굴만 보면 알 만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한강의 밤은 야릇한 상상을 하게 만들고 알 수 없는 즐거움을 주죠. 달리다 보면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힘!”하고 주먹을 쥐고 지나쳐요. 저를 격려하는 거죠. 그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져요. 그 늦은 시간에 서울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식이 정말 보기 좋아요. 이젠 저도 반대편에서 힘들게 달려오는 사람을 보고 외치죠. “힘!”

에필로그

정성일은 인터뷰 말미에 “풍경은 구경하는 게 아니라 경험할 때, 즉 관찰자가 아닌 그 풍경의 일부가 될 때, 진정으로 그 장소를 여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결국 서울에 산다는 것 자체가 서울을 여행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