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2002.06.04.(355호)리포트

칸이여,

나의 슬픈 열대여!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

칸=정성일/영화평론가


과거는 항상 지나간 다음에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재를 증오한다. 그러니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 <옛 장소> 중의 보이스 오버

그러니까 우리는 나침반을 잃으면 안 된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지금 영화의 질문은 무엇인가? 칸에서, 2002년 5월에, 해변에 젖가슴을 내놓고 누워 있는 여인들 저편의 바다 위에 신기루처럼 떠 있는 유럽 부르주아들의 유람선을 바라보면서, 방금 보고 나온 영화의 제목을 떠올리며, 딱딱한 밀가루 빵 안에 쑤셔넣은 햄과 야채와 마요네즈의 비빔범벅을 먹으면서, 내가 물어보는 것은 여전히 그것이다.

당신들은 칸을 왕오천축국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또는 여기서 모든 사람은 손오공이다. 또는 저팔계이거나 사오정이다. 또는 요물들과 괴수들의 아비규환이다. 나는 현장법사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래봐야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질 자콥 손바닥 안의 놀음이다. 또는 영화를 발명했다는 자부심에 찬 유럽세계 안으로의 참혹한 여행이다. 그저 홀린 채 눈멀어서 아무리 아름다운 찬사를 늘어놓고 미사여구를 바쳐도 숨길 수 없는 사실. 여기는 제국주의가 벌여놓은 파티에로의 초대이다. 그 안에서 영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배우고 인정하고, 그래서 거기서 다시 우리의 질문을 떠올려야 한다. 칸, 여기는 나의 슬픈 열대이다.

중국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또는 자기-오리엔탈리즘

이런 제기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다이 시지에의 <발작과 중국인 재봉사소녀>(Balzac et la Taillleuse Chinoise, 주목할 만한 시선)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칸에서 처음 본 영화였다. 다이 시지에는 1989년 <중국, 나의 고민>으로 데뷔하였고,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14년 만에 본 그의 네 번째 영화는 이미 자기를 잃어버린 영화였다.

1972년 문화혁명 시절 하방된 두 ‘인텔리’ 청년은 거기서 똥지게를 짊어지고 산길을 올라야 하며, 탄광 안에 들어가서 하루종일 돌을 쪼아야 한다. 한 청년은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다른 청년은 치과 인턴수업을 받던 중이었다. 그들은 무서운 마을 촌장을 속이면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곡을 마오쩌둥 수석을 찬양하는 곡이라면서 연주하고, 때로는 몰래 숨겨놓은 발자크의 프랑스 소설을 읽는다. 그런 어느 날 이 마을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할아버지의 손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하방당한 이 산 속에서 첫사랑을 나눈다. 그 소녀는 발자크의 소설을 그들로부터 들으면서 도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소녀는 점점 발자크에 심취한 나머지 도시로 짐을 싸들고 도망친다. 그 이후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와 치과의사는 텔레비전에서 양자강에 댐 공사를 하면서 물에 잠기는 옛 하방된 고장의 풍경을 보면서 추억에 잠긴다. 물이 차오르고 무중력 상태에서 책을 읽고 바이올린을 켜는 두 사람 옆에 앉아 있는 중국인 재봉사 소녀를.

이건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이다. 그렇다. 첸카이거의 <황토지>와 <아이들의 왕>을 서로 반씩 끌어들여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온통 감상주의와 중국 깊은 심산유곡의 풍경을 무대로 그려낸다. 물론 화면은 아름답고, 이야기는 달콤하다. 또는 다이 시지에 자신의 기억도 일부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는 자신의 자서전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서 역사와 함께 중국의 지금도 증발해버렸다. 행복한 하방? 지금 파리에 산다고 해서 문화혁명이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것은 지아장커를, 왕샤오슈아이를, 허이를, 류쉐창을, 로우예를, 장밍을, 포스트 천안문세대를 능멸하는 짓이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또는 그 역;
아모스 기타이와 엘리아 술레이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학살이 아니다. 중동의 문제는 복잡하고, 나라마다 서로 다르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와 한편으로는 석유문제로 국제적인 관계가 끌려들어오고, 거기에 유대인 문제와 성지순례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겹쳐지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 자체를 놓치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이런 순간들이 가장 절망스럽게 여겨진다. 또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아야 한다. 모든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영화는 이해하기 쉬운 예술이라고? 영화는 대중을 즐겁게 해야 한다고? 영화제는 그런 질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자리이다. 영화 속의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나라의 역사가 그 반대로 우리의 영화가 가진 편협성을 물어볼 것이다. <집으로…>를 보면서 이란의 관객은 얼마나 그 할머니가 낯설게 보이겠는가? 차도르도 두르지 않고, 남편이 거느렸던 다른 아내들과도 헤어진 채 혼자 살다니! <친구>를 보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관객은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로스트 메모리즈>를 보면서 알제리의 관객은 그 이상한 식민지의 역사 앞에서 얼마나 괴이하겠는가? 나는 이스탄불의 영화를 보면서, 아르헨티나의 영화를 보면서, 부르키나파소의 영화를 보면서 부끄러워진다. 헐리우드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영화들로부터 한 걸음만 나가면 문맥을 놓치고야마는 영화들과 수없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세상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올해 경쟁에 온 두편의 영화, 아모스 기타이의 이스라엘영화 <케드마>(Kedma)와 엘리아 술레이만의 팔레스타인영화 <신의 간섭>(Yadon Ilaheyya)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케드마>는 한마디로 전쟁영화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이 더이상 스펙터클이 아니다. 1948년 5월4일 오후 4시 케드마라는 배를 타고 나치 학살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서 약속의 땅을 찾아온다(배 이름인 케드마는 ‘동양으로’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 이민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국 군인들의 총알이며, 그들은 하선하자마자 총을 들고 터키인들과 싸워야 한다. 아모스 기타이는 여기서 전쟁을 무대처럼 다룬다. 카메라는 총알을 뒤따르거나 또는 그 반대로 시체를 애절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 대신 총을 든 이민자들을 따라가면서 이름없이 죽어가는 그들을 무심하게 쳐다본다. 그의 주인공은 계속 옮겨가고, 그 중심에 있던 인물들은 어이없이 죽거나 그 반대로 용기있게 죽는다. 그렇게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쏟아지는 사이를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터키 할아버지는 시장에 가야 한다면서 가로 질러간다. 이민자들은 총을 쏠 줄도 모르면서 전장터를 뛰어다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다. 이들은 정말 신의 축복을 받아 이 땅에 온 것일까?

이 전쟁을 아모스 가타이는 알레고리로서 그려낸다. 그건 영화적으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성서적인 언어의 세계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싸웠던 시대에 대한 신학적 시선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장터의 장면들은 정말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상한 비사실주의가 있다. 그건 과장도 없고, 그렇다고 상징도 없이 그저 벌어지는 전투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도 그 모든 것을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테제로 어떤 영웅주의도 없이 피와 살을 승화시킨다. 브레히트적인 전쟁영화? 자꾸만 다시 생각나는 마지막 장면. 또다른 전선으로 가기 위해 지쳐서 트럭에 몸을 실은 이민자들을 바라보면서 노인은 <탈무드>의 구절을 혼자서 외쳐댄다. 그러나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인도 그저 계시처럼 쉰 목소리로 읊는다. 카메라는 노인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트럭을 따라 수평 트래킹으로 한없이 오간다. 어둠이 내리고, 트럭은 다른 전장터를 향해 떠난다. 아모스 기타이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저 슬픈 시선과 기억을 찾아가는 장면 사이에서 화해는 없다. 그들은 살아본 적이 없는 땅에 와서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쟁이라고 아모스 기타이는 생각한다.

목소리와 이미지, 낭송하는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연애극

<마뇰 올리베이라>는 여전히 위대하다.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영화는 보아야 할 영화가 아니라 들어야 할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이인칭의 서간문체의 우주이기 때문에, 그 영화 속의 질서들이 쉽게 붙들리지 않는다. 화면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이 사람과 저 사람의 관계를 알기 힘들다. 그래서 화면을 지켜보면서 정말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그건 이번 영화 <불확정의 원리>(O Principio da Incerteza, 경쟁부문)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그는 마치 편지를 낭송하듯이 사건을 전개시킨다. 때로는 느리지만, 그러나 화면은 거의 변한 장면이 없는데도 사건 사이의 점핑이 벌어질 때가 있다. 사건은 낭송을 통해서 이미 벌어진 것이고, 화면은 그 결과인 것이다. 사건없이 원인과 결과가 그저 단 하나의 장면으로 이어질 때, 그 안에서 이야기와 인물 사이의 결정 불가능한 바깥이 생겨난다.

그리고 올리베이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심술을 부리기로 작정한 것 같다. 그는 아홉명의 인물을 내세운 다음 그들에게 이름과 별명을 함께 붙이는데, 이제 그 이름과 별명을 뒤섞어서 부른다. 우리는 영화에서 인물의 호명이 의외로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또는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을 대부분 얼굴을 보고 기억할 뿐이며, 이름을 그저 지나친다. 그러나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이름과 인물이, 한 인물에 두개의 이름이 뒤따라가거나 화면과 관계없이 불릴 때, 거기에는 불확정이 가져다주는 고정점의 붕괴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는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들으며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인물을 따라가야 한다. 보이는 것을 무력하게 만들고, 활동사진의 전통에서 축음기의 세상으로 이끄는 올리베이라는 여전히 신기한 영화를 만든다.

두명의 늙은 형제 다니엘과 토르카토가 나누는 이야기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둘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문제는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번갈아 하니까 이제 영화는 여기서 잘못 기대는 순간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들의 관심은 동갑내기 가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안토니오와 그 집의 하녀의 아들 호세이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카멜리아를 사랑한다. 천사 같은 카멜리아. 그 둘은 한 소녀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면에서는 호세의 갈등만 보여지고, 안토니오의 갈등은 말로 들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갈등에 대한 다니엘과 토르카토의 견해가 다르다. 더 난처한 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성처녀 카멜리아는 남자들의 게임의 규칙 속에서 음란한 연애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그런데 그것도 듣고서 알아야 하며, 영화에서는 만찬의 장면만이 이어진다), 그 희생을 감내하는 대신 교활하게 변해간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다고 말하는 다니엘의 생각일 수도 있다. 또는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계속하던 올리베이라는 마지막에 정반대의 인물이 되어버린 카멜리아를 보여주면서 끝낸다.

여기서 올리베이라는 다시 그의 원래의 무대, 그러니까 <프란치스카>(1980), 혹은 <아브라함의 계곡>(1993)의 수수께끼처럼 얽혀들고 그 안에서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여자들의 선택에 대한 구원없는 진행, 또는 아름다운 부르주아 질서 안으로 초대한다. 그 두 가지는 사실 올리베이라가 보기에는 한 가지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들의 세상에서 사랑은 거래이고, 그 안에서 남자들이 이윤을 남기려 드는 동안 여자들은 종교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정하면서 갖는 그 덧없는 희망이, 거래와 희생이라는 모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올리베이라는 우리 시대에 19세기적인 상상력을 갖고 거슬러올라가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가 종종 산문적이고, 때로는 낭독을 통해서만 숨겨진 질서와 음모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이제 더이상 영화관의 관객이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린 규방문학의 신기한 세상으로 불려온 것이다. 여자들은 항상 진다. 그러나 그 패배 안에서 남자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올리베이라는 불확정의 원리 속의 예정조화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르노에 관한 포르노, 또는 카트린 브레이야의 <아메리카의 밤>

칸은 거의 대부분 엄숙하게 진행된다. 공식 저녁시사는 무조건 정장에 남자들은 나비 넥타이를 매야 하고, 영화관람은 자기가 쥔 카드가 무엇이냐에 따라 입장순서가 바뀐다. 경쟁부문의 감독들은 리무진을 타고 거만하게 나타나서 환호하는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러나 거기서 좀 떨어진 노가힐튼에서 진행되는 감독 주간(Quizainne des Realisateurs)에 가면 갑자기 다른 영화제에 온 것처럼 활기가 넘친다. 감독 주간은 프로그래머도 다르고, 상영관도 서로 다르다. 그래서 감독 주간에 가면 항상 프로그래머가 감독과 올라와서는 한마디 던진다. “여러분들, 여기서는 나비 넥타이도 필요없고, 정장도 필요없어요, 그렇죠?” 그러면 젊은 관객은 일제히 박수와 발을 구르는 환호로 대답을 대신한다. 바로 그 감독 주간의 올해 개막작은 카트린 브레이야의 <섹스는 코미디>(Sex is Comedy)이다. 그녀를 ‘악명높게 만든’ <로망스 X> 이후(<나의 언니에게>를 경유하여) 2년 만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일종의 후일담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 <섹스는 코미디>는 <로망스 X>의 후일담이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든 과정의 후일담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자기 영화의 자서전이다.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한국식으로 말하면 ‘프랑스판’ <빤스벗고 덤벼라>이다.

여자감독(안 파리요)은 지금 신경이 곤두서 있다. 지금 섹스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여자는 신인이라서 가능하면 조금만 벗고 쉽게 끝내고 싶어하고, 남자는 이미 짜증을 내면서 그저 출연료를 받았으니 하면 될 거 아니냐는 투다. 바닷가의 모래 언덕에서 사랑을 느끼는 두 사람을 찍는 한여름 장면이 지금 벌벌 떨면서 한겨울에 진행되는 중이다. 여자감독은 이들을 데리고 세트장으로 들어간다. 소품을 담당하는 스탭이 섹스장면에 사용될 인조 ‘자지’를 다섯 종류로 가져와서 감독의 허락을 받는다(이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높아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 그 반대로 영화에서 여자의 ‘보지’가 나오면 갑자기 심각해지는 남자들의 침묵). 그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걸 남자배우는 팬티처럼 입고 이제 섹스장면을 찍어야 한다. 끊임없는 엔지장면의 연속. 감독과 배우들과의 사이는 야수처럼 으르렁대면서 어르고 달래고 소리지르고 속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든다.

카트린 브레이야는 영화에서 단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벌이는 심리적인 포르노를 만들어낸다, 영화감독은 배우들이 옷을 벗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벗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을 벗지 않기 위해 배우들은 버티는 것이다. 그걸 영화감독은 끈질기게 설득하고 영화 속의 인물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기 위해 말 그대로 쥐어짠다. 영화현장을 찍는 영화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영화 속의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건 심리적 한계선을 넘는 섬광 같은 선물이다. 그리고 <섹스는 코미디>의 마지막 순간 마침내 섹스를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여배우의 얼굴에서, 그 눈물에서, 그 치밀어오르는 울음소리에서, 영화 속의 감독이 기어이 그걸 얻어내는 순간 카트린 브레이야도 바로 그 마법의 순간을 얻어내고야 만다. 브라보! 이 영화는 카트린 브레이야의 의심할 바 없는 최선의 ‘내면적’ 포르노이다.

칸의 2002년의 질문(1); 디지털

도그마의 시대? 물론 라스 폰 트리어와 그의 ‘디지털’ 친구들은 올해 칸를 찾지 않았다(토머스 빈터베르그의 신작이 다시 한번 크로와제트를 밟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오지 않았다). 그 대신 경쟁부문에 네편의 디지털영화가 차례로 등장하였다. 마이클 윈터보텀의 <24시간 파티 피플>과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10>, 그리고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와 지아장커의 <알지 못했던 기쁨-(중국어제목)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이 떠돌며(任逍遙)>이다. 이 네편의 영화들은 네개의 서로 다른 주제와 네 가지 다른 스타일을 갖고 우리에게 네개의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었다.

마이클 윈터보텀의 맨체스터 뉴웨이브록의 ‘디지털’ 연대기

섹스 피스톨 따위는 신경 쓰지마! 여기 조이 디비전이 있잖아, 라고 노래부르며 마이클 윈터보텀은 <24시간 파티 피플>을 레이브 파티 열듯이 광란에 차서 펼친다(이 영화의 제목을 번역하려고 애쓰지 마실 것. 그룹 해피 먼데이의 노래 제목이다). 우선 마이클 윈터보텀의 영화이기 때문에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 영화는 <쥬드>나 <사라예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의 데뷔작인 <버터플라이 키스>와 (U2의 노래에서 가져온) <당신이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의 사이 그 어딘가에 놓인다. 게다가 촬영이 (빔 벤더스의 오랜 동료인) 로비 뮐러이다!(어때, 갑자기 보고 싶지?)

영화의 주인공은 토니 윌슨. 케임브리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다음 일찌감치 공부는 작파하고(!), 맨체스터의 그라나다 텔리비전방송사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이자(영국 펑크 인디 레이블로 그 유명한,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드럭’ 레이블쯤 되는) 드림팩토리 레코드사의 대표가 되었던 토니 윌슨의 20년간의 기록이다. 첫 장면. 마치 오래된 필름으로 보듯이 토니 윌슨은 행글라이더를 타고 날아오르려고 하지만 계속해서 처박힐 뿐이다. 그는 투덜대며 돌아간다. 마치 예고된 이카루스의 운명과도 같은 시작. 그러니까 시대적으로 이 영화는 그램록의 연대기였던 <벨벳 골드마인>의 속편이다! 1976년 7월4일 맨체스터에서 14명을 앞에 앉혀놓고 섹스 피스톨즈가 첫 공연을 한다(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면). 그리고 버즈 콕스의 공연이 펼쳐진다.

토니 윌슨은 중얼거린다. “이건 역사적이야!” 그 앞에 이안 커티스가 나타나고, 그는 조이 디비전을 만들어 펑크-뉴웨이브록의 새로운 장을 연다(참고로 나의 열광을 참아주실 것. 나는 조이 디비전의 열혈팬 중 한 사람이다. 룰라랄라 신나라!).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이안 커티스는 미국 공연을 앞두고 그만 자살한다(나는 영화가 여기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아직도 52분이 남았다). 토니 윌슨은 카메라를 보고 “이제 여기서 제 인생의 일부가 끝났죠”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준다. 그리고 조이 디비전 멤버들이 뉴오더를 결성하고 뉴웨이브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면서 달려간다. 마지막 장면은 1992년 하시엔다 클럽이 문을 닫으면서 이제 공연과 연주의 시대는 끝나고 레이브-테크노의 춤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면서 막을 내린다.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와 MTV와 인터뷰와 라이브와 (펠리니를 연상케 하는) 상징적인 엑스페리먼털 바로크 이미지 사이를 넘나들면서(으잉!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일단 믿으시라. 보면 안다) 로비 뮐러의 카메라는 거의 신들린 것처럼 토니 윌슨의 기행을 쫓아가고, 실제 다큐멘터리와 영화장면을 디지털 촬영의 화질을 이용해서 절묘하게 서로 합성한다. 게다가 대사의 유머들은 거의 펑크 가사 수준이다. 심지어 나중에 등장인물들이 몰리고 시간은 부족하자 토니 윌슨은 카메라를 향해 한마디 한다. “이 사람들도 모두 찍어놓았으니, 그 부분은 DVD에서 보세요.”

그러나 마이클 윈터보텀이 진짜 놓치지 않은 것은 토니 윌슨이 진심으로 펑크와 뉴웨이브의 지지자였으며, 그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이 조이 디비전을 통해서 마치 조지 마틴이 비틀스의 역사에서 했던 역할을 하고 싶어했다는 그 속마음을 찍으려고 달려든다. 그는 매우 무모하고 자기 생활이 무너진 채 섹스와 마약 속에서 살아갔지만, 그러나 그가 음악에 대해서 갖고 있는 사랑과 감식안은 거의 본능적이다. 그가 버즈 콕스의 음악을 듣고 오는 날 친구의 방에 걸려 있는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의 대형 브로마이드를 찢어버리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상한 감동이 있다. 아직은 1976년의 일이다!

<트레인스포팅>보다 훨씬 유쾌하고, <벨벳 골드마인>보다 좀더 홍익대 앞 세대들을 흥분시킬 만한 ‘원샷’! 하지만 당신이 맨체스터 뉴웨이브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펫 숍 보이즈의 팬이거나 U2의 세대라면 피하실 것. 정중한 나의 충고이다. 그런데 참 나 영화평론가 맞아?

<마이클 무어의 사우스 ‘화염병’ 파크 칸은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항상 일정한 거리를 지켜왔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의 <컬럼바인을 위한 볼링>(Bowling for Columbine, 경쟁부문)이 경쟁에 온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건 46년 만의 일이기 때문이다(그런데 그해 56년에 이브 귀스토와 루이 말이 만든 다큐멘터리 <침묵의 세계>는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게다가 9월11일 ‘이후’ 세계화가 흉흉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금 마이클 무어의 영화는 칸에 온 화염병이다. 부시는 국회에서 국방비를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고, 그 덕에 무기장사꾼들은 떼돈을 벌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미 <로저와 나>에서 제너럴 모터스 회장과 한판 승부를 한 마이클 무어는 여기서 콜로라도주의 덴버에 있는 컬럼바인학교에서 벌어진 1999년 4월20일 총기난사사건을 찾아간다. 학교에 총기를 들고 와 무고한 12명의 친구들과 선생님을 그냥 재미로 쏴죽인 이 사건은 마이클 무어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마이클 무어의 질문은 항상 단순명쾌하다. 시작하자마자 미국의 단순-무식-과격한 폭력의 무감각함을 편집해서 보여준 도입부는 이번 칸에서 가장 웃긴 5분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모든 나라가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텔레비전을 보는데 왜 미국에서만 이렇게 총기사건이 나는 것일까? 미국인들은 정말 총에 미친 인간들일까?”

마이클 무어의 화염병 혹은 <컬럼바인을 위한 볼링>

마이클 무어는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그래서 우선 동네 학교부터 뒤진다. 학생들은 학교에 총기를 가방이나 셔츠에 넣고 등교하고,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등교할 때 정문에서 검색하지만, 학생들은 어떻게 옷을 입으면 무사통과하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한 귀엽게 생긴 고등학생은 옷에서 12정의 총기를 꺼내 보이며 자랑스럽게 웃는다. 그는 마지막에 거의 M60 수준의 무반동 총기까지 꺼내든다. 그래서 총기 가게에 가서 시치미 뚝 떼고 총기를 구입해보니 아무 문제도 없다. 미국인들은 이게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일년 동안 같은 영어를 쓰는 영국에서 68건, 캐나다에서 165건의 사건이 벌어진 동안 미국에서는 1만1127건의 총기사건이 벌어졌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는 미국과 호수 하나만 넘으면 마주 보는 캐나다의 마을을 찾아간다. 또는 독일과 일본의 사례를 비교한다. 그는 닥치는 대로 찾아간다. 그리고 컬럼바인 총기사건 이후 텔레비전 앞에 나온 미국의 ‘꼴통’ 보수들의 인터뷰를 모아본다. 그들은 할리우드와 로큰롤, 그리고 인터넷이 문제라고 한탄한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인더스트리얼 록의 괴인 마릴린 맨슨을 지목하며, 오늘날 십대들이 이 모양이 된 게 저놈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는 마릴린 맨슨을 찾아가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마릴린 맨슨은 가죽바지에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쪽 눈에 개눈을 한 그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점잖게(?) 한마디한다. “누군가 공격하기 쉬운 사람을 찾아야 했겠죠. 아니면 자기들이 그 이유의 대상이 될 테니 눈에 보이는 이유를 대야 한 거죠.”

그래서 마이클 무어는 전국라이플연맹(NRA)의 회장인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을 찾아가기로 작정한다(나중에 인터뷰에 의하면 이런 ‘대단하신 분’이 설마 자기를 만나줄까, 하고 그냥 밑져야 본전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찰턴 헤스턴이 연맹에서 총기업자들과 보수 우익세력들을 앞에 놓고 미국의 정신은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는 라이플에서 온 것이라고 연설하는 동안 바깥에서 총기난동사건으로 죽은 아이들의 반대시위를 마이클 무어는 교차편집을 통해서 마치 권투선수의 펀치가 오가는 것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찰턴 헤스턴을 만난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 화가 난 마이클 무어는 컬럼바인에서 죽은 소녀의 사진을 꺼내들고 이 소녀의 얼굴을 마주보라고 외친다. 말을 더듬는 찰턴 헤스턴은 주춤 뒷걸음질치다가 결국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집안으로 슬그머니 추한 뒷모습을 보이면서 도망친다. 마이클 무어는 그걸 끝까지 지켜보다가 그의 집 앞에 소녀의 사진을 두고 나온다. 이 장면은 정말 가슴이 미어진다. 또는 내 비디오 라이브러리에 있는 <벤허>의 비디오를 집에 돌아가자마자 망치로 두들겨 부술 거라고 수십번을 맹세하게 만든다. 마이클 무어는 여전하고, 이 영화는 그의 진심이 담긴 영화이다.

안 잊혀지는 시퀀스. 이 영화에서는 미국은 이렇게 살아온 나라입니다, 라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함께 이민의 역사를 보여준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인디언들이 친절하게 손을 내밀자 백인들은 아이, 무서워(!)라고 외치며 일제히 총을 들고 나와 모조리 쏴죽이고, 일손이 부족하자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총을 들고 무더기로 잡아오고, 그게 금지되자 두건 뒤집어쓰고 죽이고, 그저 비명을 지른 다음 바로 총을 든다. 이 역사를 마이클 무어는 <사우스파크> 팀에게 맡겼고, 그들은 10분 분량의 올해 가장 정치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정말 이건 무진장 웃기지만, 그러나 웃기에는 너무 잔인하다.

시사실의 풍경. 이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 기자들은 정말 마음놓고 웃는다. 그가 모아놓은 무서운 장면들 위에 마이클 무어의 보이스 오버는 배꼽을 잡게 만드는 유머를 줄창 섞어놓기 때문이다. 그건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일본의 난징 학살사건 기록필름에서조차 그러했다. 그러나 뒤이어 프랑스, 라는 자막과 함께 알제리에서의 학살이 보여지는 순간 시사실은 멈칫 했다. 나는 알제리 학살의 기록필름은 처음 보았는데 그건 마치 광주 같았다. 저 잔인한 학살의 역사.

위대한 크로넨버그! <스파이더>

<스파이더>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여기서 결판이 난 것 같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Spider, 경쟁부문)를 보는 순간 나는 중얼거렸다. 아마도 (심사위원장의 자리에 앉은) ‘데이비드’는 (경쟁부문에 초대된) 또 한명의 ‘데이비드’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우선 오해하지 말 것. 이 영화는 크로넨버그의 생체실험이 아니며, 더더구나 하드고어나 SF 장르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크로넨버그의 ‘엽기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팬클럽들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거의 멈춘 듯이 조용하고 더듬거리는 중얼거림 이외에는 다른 대사도 없이, 마치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정지한 것처럼 진행된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거미-인간에 대한 임상관찰이다. 그건 프로이트의 쥐-인간에 관한 보고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만일 좀더 정확한 비유가 필요하다면 한스 소년의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영화에는 크로넨버그의 강박관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시 한번 여기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나’에게서 ‘그것’에게로 넘어가는 불행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또는 결국 아버지와의 싸움 속에서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카프카의 갑각류 상상력의 세상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그러니까 <스파이더>는 <플라이>를 거쳐 <벌거벗은 점심>을 넘어서서, 이제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해 던져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유배의 땅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크로넨버그는 <크래쉬>에서 J. G. 발라드의 소설에 대한 독후감으로 원작을 다시 구성한 것처럼, 패트릭 맥그레이스의 컬트 원작소설을 갈가리 찢어놓은 다음 다시 퍼즐처럼 맞춰나간다(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패트릭 맥그레이스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같이 썼다). 패트릭 맥그레이스의 부언설명. “시나리오가 끝나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마치 내 소설에서 생긴 일이 무언지를 내가 모르게 되었습니다.” <크래쉬>에서 열정적인 순간들은 모두 사라지고 금속성으로 가득 찬 차가운 분석과 가까스로 유지되는 형살들만 남은 것처럼 여기서 다시 크로넨버그는 충분히 피와 살이 고기가 되고,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신중하게 피해간다. 그렇다. 이건 정말 라캉이 말한 ‘실패한 가족소설’의 세계, 깨어진 거울의 단계, 정신분열에로 뛰어드는 산책이다.

아주 신중하게 처리된 첫 장면. 기차가 도착하고 나면 사람들이 내린다. 사람들은 앞질러 카메라 앞으로 지나가고, 거미-인간 스파이더(랠프 파인즈)는 맨 마지막에 내린다. 벌벌 떨면서, 느린 걸음으로, 말을 더듬으면서 걸어오는 스파이더는 그 걸음으로 재활병원을 찾아간다. 주의할 점. 이 대목부터 거리에는 시종일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거리가 나오지만, 모든 집의 창문은 꽁꽁 닫혀 있고, 스파이더가 머무는 병원의 간호사와 몇명의 병자들 이외에는 영화에 더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런던의 거리에서 촬영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거리 전체를 마치 세트장처럼 사용하여 스파이더의 마음속의 풍경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실재가 표현주의영화의 폐쇄공포증에 질린 것처럼 보여진다. 시대를 알 수 없는 런던의 풍경은 마치 공습경보가 걸린 것처럼 황량할 뿐이다. 그 안에서 스파이더는 이따금 밤이면 거리 바깥을 산책하면서 남의 집을 기웃거리다가 창문 너머 집안을 보면서 슬그머니 자신의 과거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어슬렁거린다. 그러나 그는 온전하게 과거로 들어오지 못하고 한 화면 안에 어린 스파이더와 현재의 스파이더가 동거한다. 스파이더는 소년 스파이더의 말을 반복하기도 하고, 때로 그를 앞질러 대답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건지, 누가 누구를 훔치는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어린 스파이더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버지가 술집에서 만난 천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그 여자와 시도때도 없이 놀아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창고에서 섹스를 벌이기도 한다. 그런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는 술집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마침내 그 광경을 보고야 만다. 그런 어머니와 마주친 아버지는 삽으로 어머니를 때려죽인 그 더러운 여자와 함께 낄낄대며 땅에 묻어버린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 술집여자를 어머니의 자리에 앉힌다. 이제 스파이더는 그 여자를 죽일 생각에 몰두하면서 자기 방에서 실뭉치를 풀고 마치 거미처럼 이리저리 칭칭 묶여가면서 온 방안을 거미둥지로 만든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한 가지 더. 어린 스파이더의 어머니와 술집여자를 미란다 리처드슨이 일인이역을 한다(또는 좀더 정확하게는 일인삼역). 크로넨버그는 이걸 숨길 생각이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인이역으로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무대극처럼 영화를 진행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퍼즐은 반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자리에 놓여 있다. <스파이더>는 <크래쉬>를 반대로 사유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현실의 질서 속에서 점점 더 카오스 이론의 판타지로 유혹당한 주인공들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어떻게든지 스파이더를 판타지로부터 실재의 사막에 끌어내기 위해 크로넨버그는 안감힘을 쓴다. 그러니까 여기서 크로넨버그는 자기 영화 전체에 대한 성칠을 시도한다. 판타지의 세계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경이와 쾌락, 날카롭게 베인 상상의 속살, 바로크적 뒤틀림, 끈적거리는 분비물들. 그리고 육신의 자유자재의 변형모델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크로넨버그는 그런 것들과 싸운다. 당신이 믿지 못하겠지만, <스파이더>를 보면서 연상하게 되는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돈>이다. 저 간결함과 잔인함, <리베라시옹>의 표현. "위대한" 크로넨버그!

김홍준 선배와의 전망과 심야잡담

나는 칸에서 김홍준 선배와 같은 방을 썼다. (참고할 만한 충고. 영화제에 가면 누구와 함께 방을 쓰느냐는 아주 중요하다. 재수없으면 술 마시는 일로 밤을 지새우기 딱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일로 온 것이기 때문에 낮에는 서로 다른 영화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서울에서 아침 8시쯤 되는 시간이면 다시 만난다. 영화제가 시작하고 닷새째 되는 날의 대화 내용 중의 일부 채록.

“나는 이번 칸의 퍼즐은 자아-반영(self-reflexivity)인 것 같아. 뭐랄까, 다시 한번 작가주의를 생각해보자는 제안 같은 거. 그러니까 이번 칸에는 유난히 거장들을 부른 거 아닐까. 그렇잖아. 사실 이번 칸의 경쟁부문에서 발견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이름이 없잖아. 구태여 꼽아야 한다면 지아장커와 가스파르 노에. 하지만 가스파르 노에는 이미 내가 돌아다닌 판타스틱영화제들 사이에서는 열혈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거든. 만나는 프로그래머들마다 정말 대단한, 그리고 새로운, 하지만 두번 보고 싶지는 않은, 이라는 평가가 이구동성이거든. 물론 거기 나도 포함되지(웃음) 지아장커는 성일이도 알다시피 이미 포스트(後)화어권영화에서 그 중심에 있는 주인공인 셈이고. 이 명단을 통해서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건 영화를 다시 창조하는 사람들의 손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믿음의 부활 같은 거라고 생각해. 포스트모더니즘이 영화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난자질하면서 그 안에서 패스티시와 시뮬라크라들만이 날뛰고 있다고 비웃을 때, 거기에 평론가라는 인간들이 동조해서 같이 영화를 능멸하고 있을 때, 사실 위대한 작가들은 그런 담론 바깥으로 나와서 고립되어가고 있었잖아. 아트 하우스 영화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휘말려들 때 칸가 그 유행에 일정 부분 공공연하게 거래한 건 사실이거든.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 손을 들어주고, 그 이후의 명단을 보면 영화는 그저 세상의 표면에 반사하는 사물의 거짓말쟁이처럼 둔갑했잖아. 그 12년간에 대한 칸의 반성과도 같은 명단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영화를 창조의 기쁨으로 되돌려주는 거. 어쩌면 훗날 작가주의의 두 번째 물결은 2002년 5월 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지도 모르지. 지금 우리가 그 현장에 와 있는 거라구.” (웃음)

그렇다. 다시 영화에서 진정성이 문제가 된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정말 그렇게 되기를 나는 간절하게 소망한다. 영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다시 지구/지역의 담론과 모더니즘이 우리를 두리번거리게 만들고 있을 때, 소문자 타자들이 날뛸 때, 속도의 미디어가 영화의 예술성에 침묵을 강요할 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칸에서 영화적 경험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시간, 그 불안의 의식, 말하자면 그 존재론을 근거하게 만드는 작가들의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작가주의는 죽었다. 새로운 작가들이여, 영원하소서. 이야기를 끝내고 창문을 닫을 때 새벽 3시24분의 밤하늘의 별들은 새로운 성좌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년들의’ 그 사회주의!

벨기에에서 온 다른 한편의 영화 <하늘, 한 점>(Une part de ciel 주목할 만한 시선, 황금카메라 경쟁부문)은 복지국가에서도 투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빨갱이’영화이다. 또는 푸코가 살아 생전에 보았다면 기꺼이 지지했을 것이다. 베네딕트 리에나르는 그의 데뷔작을 만들기 위해서 5년 동안 감옥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인터뷰를 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6편의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든 그의 관심은 여기서도 여전하다. 감옥에 수감된 여자들은 매일 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여기서 여자들은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여자들과 만나게 되고, 질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죄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이 체불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노동은 국가에서 착취하도록 방치함으로써 우리의 감옥 안에서의 인권은 도둑맞는 것이 아닌가? 죄수 여인과 노동자 여인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고, 동지로서 서로 손을 마주잡고 싸우자고 끌어안는 과정을 때로는 흥분하면서, 하지만 하나씩 따져 물어보면서 일보 전진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물론 이제 시작이라는 다짐으로 끝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아직도 이런 영화가 좋다. 이런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이 부끄러워지지 않는다.(계속, 독자 여러분에게. 아직 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다음주에 칸에서 본 영화들의 '부문을 막론하고 독단과 편견으로' 10 베스트영화들을 뽑아볼 참이니 기대하실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