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2005.12.20.(533호)좌담

다시, 잃은 것과 얻은 것에 대해, 좌표와 징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때다. <씨네21>은 지난 한 해 ‘전영객잔’의 의리를 지켜온 세 편집위원에게 2005년 한국영화를 한자리에서 회고해주기를 청했다.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정성일 영화평론가, 허문영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가 공히 2005년의 한국영화로 지명한 작품은 37년 만에 돌아온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다. 그런가 하면 올해의 대중영화라 할 만한 <웰컴 투 동막골>과 <말아톤>에서, 세 평자는 ‘차이’에 눈감은 화해와 영원히 유예된 성장에 매료된 대중의 무의식을 보았다. 홍상수와 김기덕의 ‘고립’에 대한 근심, 박찬욱의 위상과 <친절한 금자씨>가 다다른 지점에 대한 토의, 고대했던 이명세의 <형사 duelist>를 향한 비판 등이 이어졌다.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진행으로 4시간 동안 이뤄진 대화를 간추려 여기 싣는다. 세 편집위원은 2005년 국내외 영화를 통틀어 사적인 비망록에 적어두고 싶은 10편의 작품 목록도 보내왔다.
정리 이숭욱, 김혜리 · 사진 서지형 · 편집 박초로미 · 일러스트레이션 이명헌 · 디자인 권미숙 · 장소협찬 삼청동 TOS

정성일  일단 무엇을 기준으로 지도를 그리는가가 중요할 것 같은데, 나는 올해의 영화가 유령처럼 떠돌다가 마침내 찾아온 이만희의 <휴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세 가지가 궁금하다. 첫 번째는 <휴일>과 이만희라는 이름을 통해 읽을 수 있는 한국영화의 모더니티에 대해서다. 두 번째, <휴일>은 공식적으로 1968년 영화인데 한국영화의 영화언어는 이 영화로부터 얼마나 진화했는가의 문제. 세 번째는 동시대 한국영화가 한국 영화사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선 올해 10년을 맞은 부산이 불쑥 이만희 회고전이란 카드를 내놓은 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 듯한데 허문영 프로그래머가 말씀해달라.

◎ 올해의 영화, 이만희의 <휴일>

허문영  이만희 회고전을 결정한 것은 사실은 3년 전이다. 10회라는 무게에 걸맞은 회고전이 무엇인가 고민한 결과이고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실은 얼마나 애매한 판단 속에서 이뤄졌는지는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한국영화 평자들이 이만희라는 감독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연구서가 없고, 반드시 조명되고 분석돼야 할 것들이 안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만추>가 그의 정점에서 만들어졌고, 소재나 이야기, 당대의 평가도 그렇고 최고작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는데 못 찾았다. 그러다 갑자기 기적처럼 37년 만에 <휴일>이 나타났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래 손꼽힐 만큼 떨리는 시간을 맞았다. 회고전에서 많이 나온 말들이지만 <휴일>을 보고 나면 이만희 영화가 다시 씌어져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다시 토론해야 한다. 김소영 선생이 탈식민지 담론에서 시작해 이만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지만 그의 영화들은 당대의 어떤 주류 이데올로기와도 타협하지 않고 실존적 고민 그 자체에 몰두한 희귀한 작품이다. 이야기에 있어서도 당대 문예영화의 촉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휴일>이 37년 만에 발견됐기 때문이 아니라 당대의 어떤 영화에도 뒤지지 않는 강렬한 동시대성을 지금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의 영화가 될 법하다.

김소영  이만희의 <휴일>로 2005년을 정리하는 게 관객으로서 고맙다. 실은 김기영과 이만희 두 감독을 머릿속으로 비교하면서 이 자리에 왔다. 김기영은 조롱이나 아이러니로 근대를 비판하지 않고 근대를 과잉으로 페티시즘으로 보여줌으로써 비판했다. 반면 이만희는 반골이면서도 목가적 낭만에 가까운 것을 연기를 통해 끌어낸다. 모든 걸 빼앗기고 몸이 다 망가진 사람이 근대적 믿음이 오기 전에 행동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귀로>에서 문정숙이 인천 집을 떠나 서울에 와서 시내를 둘러보는 장면에는 실존적 불안 속에서 다른 어떤 미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담겨 있다. <휴일>에서 신성일과 전지연이 심한 먼지바람 속에 휘감겨 있고 겨울 나뭇가지를 그 프레임 안에 넣은 순간은 가슴을 저미는 명장면이다. 낭만적일 수 있고 여린 감성을 건드리는 것일 수 있는데 반면 그런 낭만을 날카롭게 끊어내는 계급적 인식도 있다. 이만희는 전후 세대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시약 같다. 허문영씨는 그를 밤의 시인이라고 했는데 <휴일>은 정감의 시학이면서 미완이다. 관객에게 정감의 여분을 주지만 텍스트 자체로는 덜 끝난다. 그래서 <만추>처럼 유실된 작품을 더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정성일   고백하자면 이만희라는 이름을 의식했던 건 그의 마지막 영화 <삼포가는 길>을 봤던 고1 때다. 한국영화를 영화로서 비로소 의식하게 된 계기였다.

허문영  80년대 신촌 소극장에서 영화상영회를 가끔 했는데 <삼포가는 길>을 그때 처음 봤다. 개인적으로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왜냐하면 원작을 워낙 좋아했고 황석영이라는 70년대 문학에 매료돼 있었기 때문에 영화가 원작의 정서의 깊이를 좇아가지 못한다고 봤다. 그래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고 한국 영화사에 대해 그릇된 선입견을 갖게 된 측면도 있었다. 이만희를 다시 본 건 최근 3∼4년인데 제일 놀라면서 봤던 건 <쇠사슬을 끊어라>라는 장르영화였다. 오락영화, 상업영화의 외피 안에서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대륙활극의 쾌감을 느꼈다.

정성일   왜 <삼포가는 길>에 매혹됐을까 오랜 시간 고민을 했는데 영화에 대한 책들을 보다가 불현듯 그 매혹은 데드 타임(dead time: 서사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시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후반부에 백화가 남자를 찾아 시장통을 떠도는 장면이 그랬는데 이 데드 타임은 일종의 시네마 타임이 아닐까 싶었다. 이만희에게 가장 가까운 감독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마스무라 야스조를 이야기하는데 둘은 유럽영화와 일본영화에 모더니즘을 가져온 이들이다. 이만희가 60년대에 데드 타임을 끌어안은 것은 이미 한국영화가 세계 영화사와 같은 지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인데 한 작가의 고군분투로 끝난 비통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휴일>의 마지막이 올해 만들어진 <극장전>의 마지막과 유사해 놀랐고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차를 뛰어넘어 마치 같은 해에 만들어진 쌍둥이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이만희가 한국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온 모던한 시네마 타임을 갖고 지금 한국영화가 그로부터 얼마나 진화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소영의 2005 베스트 10 (무순)

<흔들리는 구름> 차이밍량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질문은 역의 영화(Liminal cinema) <하류> 를 보고 난 뒤에 던진 질문이나 그는 또 다른 역의 공간을 찾았다.

<휴일> 1960년대 한 무위의 시간에 관한 부스러질 것 같은 보고서.

<과거가 없는 남자> 기억상실이라는 모더니즘적 모티브에 한니발이라는 이름의 개가 은근슬쩍 끼어드는 포스트 자아성찰 영화.

<스파이더>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두사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랄프 파인즈의 강도 높은 영화.

<카페 뤼미에르> 역사의 흔적 찾기와 모호한 미래

<외출> 올해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영화 중 하나. 상가를 찾아가는 길에 펼쳐진 빈 들녘에 아직도 마음이 간다.

<여자, 정혜> 김지수의 정혜, 잊기 어렵다.

<사랑니> 흥미로운 구조다. 김정은의 연기는 대단히 유려하다.

<쿵푸허슬> 한동안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질투했다.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세상에 남겨둔 사람들이니까.

<칠검> 중국의 변방, 홍콩에서 출생한 대륙 판타지 무협극. 마이너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메이저 프로덕션이라는 리들리 스콧류의 패러독스를 가지고 있다.

허문영  이만희의 중요한 파트너로 반드시 병기돼야 할 인물인 백결 선생이 전해준 <휴일>의 후일담이 있다. 당시의 검열관이 <휴일>을 보고 주인공이 너무 퇴페적이고 비윤리적이니까 통과 못 시키겠다며 주인공 머리를 깎고 입대시키면 통과시켜주겠다고 했는데 감독이 단 한마디로 거부했다고 한다. 만약 검열의 요구대로 머리 깎고 군에 들어가는 것으로 <휴일>이 마무리됐다면, 이야기 전체가 입대라는 결론을 위한 인과관계에 불과해지므로 영화가 쓰레기가 돼버렸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역시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이 <휴일>이 아닌가 싶었던 것도 정성일 선배가 말씀한 점 때문이다. 문예영화 전통이 지배하던 그 시절에 이야기를 멈추고 인물이 속한 공간의 공기 외 톤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영화적 성취가 있다고 보고, <휴일>이 그 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휴일>과 반드시 얘기해야 할 영화 중 하나가 탄광매몰사건을 그린 60여분짜리 <생명>인데, 처음에 다큐멘터리라고 자막이 뜨지만 실은 극영화다. 60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이다. 광부는 매몰돼 있고 밖에서는 소란스럽게 어떡할까 논의하지만 전혀 긴박하지 않다. 카메라는 매몰된 광부가 꾸는 꿈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고 총포 소리, 비명, 탄광 밖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누구도 영웅적이거나 인간적이지 않고, 막상 구출 장면 5분은 거의 무성의하다. 결국 감독이 <생명>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전부는 매몰된 광부가 누워 있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처럼 멈춰진 시간, 벗어날 수 없는 강박과 구속, 기억에 관한 영화을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이만희는 당대 세계의 위대한 모더니스트 거장들과 함께 논의될 자격이 있는 것 같다.

정성일   한국 영화사를 연구하고 계신 김소영씨는 이만희로부터 한국영화가 뭘 배웠다고 생각하나.

김소영   두분 말씀을 듣고 연결점을 생각해보니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이 떠오른다. <별들의 고향>의 전반부는 무척 래디컬하게 시각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이 분리돼 있다. “한 소녀가 울고 있네”라고 이장희가 노래하는 동안 경아는 누워 낙태수술을 받는다.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음악이 들어가 마땅한 신파적인 장면인데 아주 다른 음악이 흐른 것이다. 누벨바그에서 고다르가 강조했던 시각과 청각의 분리를 상기시킨다는 면에서, 모던 시네마에 관한 열망이 이어지는 것 같다. 또, 연세대 국문과 신형기 교수가 지적한 점인데, 영화의 마지막은 문호가 사관생도처럼 경아의 죽음을 딛고 일을 나가는 장면이 차지한다. 어찌 보면 이만희 감독이 군사문화가 요구하는 남성 주체를 거부하며 끝낸 지점에서 이장호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시대적 압력도 있었겠지만, 1970년대 이장호 영화부터는 베스트셀러라는 점이 중요했던 것이다. 즉, 대중문화가 팽창하며 장 자체가 커지고 ‘데드 타임’, 노동시장 진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자본주의 대중문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라졌던 이 전통이 홍상수 감독에 이르러 다시 귀환한 것 같다.

정성일   그렇다면 일종의 유실된 전통인 셈인가.

◎ <웰컴 투 동막골>과 <말아톤>의 성공이 드러낸 징후

정성일   유령처럼 돌아온 올해의 영화가 <휴일>이라면 흥행이라는 객관적 좌표에 의한 대중영화로서 올해의 영화는 <말아톤>과 <웰컴 투 동막골>이 아닐까.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까지 세편이 한국영화 올 타임 박스오피스 10을 바꾼 영화가 아닌가 싶다. 매년 역대 흥행 톱 10을 경신하는 영화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국영화 시장이 정말 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마치 1980년대 할리우드 박스오피스나 1990년대 홍콩 박스오피스를 보는 것 같다. <말아톤>과 <웰컴 투 동막골>을 묶어서 얘기하면 어떨까.

김소영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같이 묶일 점은 많지 않은 듯하다.

정성일   <말아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웰컴 투 동막골>은 픽션이며 시대적 배경도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은 봤다. 두편 모두 지적으로 보통보다 ‘미숙한’ 인물- 초원과 여일- 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두 인물은 “나는 누구인가”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며 영화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배제한다. 이는 자아에 대해 묻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던져진 상황을 질문하지 않기 위해서 설정됐다. 대중에게 호소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대중이 그런 순진함이 존재한다고 믿은 것은 집단적 퇴행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둘째, 두편 다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인 공동체주의가 있다. “이것이 유토피아인가?”라는 질문과도 전혀 다르고, 화합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처럼 보였다. 사이비 화해는 더 큰 성공을 거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명백했다. 상이한 수준의 총체적 모순에 눈감는 전체적인 화해라는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불현듯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소년성’ 논의도 다시 떠올랐다. 한편 올해 한국영화의 두명의 스타는 조승우와 문근영이다. <말아톤>의 조승우는 나이들어도 소년으로 멈출 수밖에 없고 <댄서의 순정>의 문근영은 정지된 소녀성이란 호소력으로 스타성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대중에게 ‘거기 제발 머물러달라’는 호소가 있는 것 같다.

김소영  다른 말로 바꾸면 관객이 소년이나 소년, 아니 그보다 어린 유아의 자리에 놓인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강혜정이 처음 인민군에 얘기를 거는 장면부터, 거기 맞춰서 영화를 봐야 가장 재미있게 진행될 거라고 약속을 하는 거다. <댄서의 순정>이나 <웰컴 투 동막골>은 정 선배의 분석에 적극 동의한다. 그런데 <말아톤>은 좀 다르게 본다. 초원이 모방을 통해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성장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초원이 “백만불짜리 다리”라는 엄마의 언어를 정확히 가져가면서, <댄서의 순정>이나 <웰컴 투 동막골>의 가짜 눈물과 가짜 성장과는 다른 지점으로 도약한다. 터무니없는 인간승리가 아니라 엄마의 언어를 가져가며 손을 놓는 모방 과정을 통해 성장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또, 놀란 것은 초원이 어머니의 설정이다. 아마 한국에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은 다 그 엄마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이를 위해 희생하지만 아이없이 자기 삶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 말이다. 그런데 <말아톤>에서 코치와 아버지가 등장해 어머니가 아이를 망치는 것처럼 지적하면서 이야기는 관객 입장에서 훨씬 신빙성이 있는 사회적 상식의 이야기가 된다. 그들의 입장이 자폐아와 어머니의 삶과 등가적 긴장을 만들어내고 거의 스릴러처럼 흥미로운, 반목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들었다.

허문영  <말아톤>은 다른 요소들이 많이 개입해 있고 더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웰컴 투 동막골>은 기본적으로 정 선배에게 동의한다. <웰컴 투 동막골>은 대중영화로서 장점이 많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부한 대사나 진부한 장면의 연쇄에 비하면 <웰컴 투 동막골>은 훨씬 다양한 캐릭터, 귀여운 에피소드, 생동감 있는 연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감동적 대목으로 알려진 영화의 결말에서 미군 공격을 딴 방향으로 유도해놓고 남북한 병사들이 원하는 건 결국 성장을 멈추고 영원히 청년의 몸으로 유폐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왜 포탄을 유도한 뒤 도망가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것도 아니고 동막골이라는 살기좋은 마을도 있는데, 왜 거기서 죽음을 맞는지 의아했다. 그들은 팝콘을 연상시키는 폭탄을 행복한 표정으로 맞이하는데 그 장면은 역사적 시간성에 대한 정면 거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이 이야기 밖으로 나가지 않겠으며 아름다운 청년의 죽음을 맞이하고 이전, 이후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다는 고백 같았다. 이러한 거의 자살에 가까운 극단적 마조히즘이야말로 최근 몇년간 한국영화가 가진 소년성의 또 다른 정체가 아닌가 싶다.

◎ 홍상수와 김기덕의 고립

정성일   청룡상은 <웰컴 투 동막골>을 많은 부문에 걸쳐 후보로 올렸고, 대한민국 영화상은 <웰컴 투 동막골>에 상을 몰아줬다. 대중이 이 영화를 지지하는 것과 더불어 영화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 영화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뭘까. 의아스러웠다.

김소영  큰 의문 중 하나다. <씨네21>이 영화과 학생을 비롯한 젊은 시네필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비평적 인지도와 시장에서의 인지도가 꽤 거리가 있었는데 이젠 그것이 사라지는 것 같다.

허문영  영화상들이 언제부턴가 공히 대중투표를 선정 단계에 도입하고 있다. 청룡상은 온라인투표와 전문가를 절충해 후보를 선정하고, 대한민국상은 본심 투표자 1천명을 전문가와 관객 500명씩으로 나누고 있다. 놀라운 건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선정하는) 영평상이 후보작 10편을 온라인투표로 뽑았다는 사실이다. 부분적으로는 대종상이 오랫동안 공정성 시비에 휘말렸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의도도 작용했겠지만 비평적 권위의 추락, 전문가들의 전문성에 대한 폄하, 더불어 영화에서 대중성이라는 요소가 평가절상되고 있는 추세가 골고루 반영된 게 아닐까. 홍상수와 김기덕의 영화가 세 영화상의 어떤 후보작에도 포함돼 있지 않다는 사실은 굉장히 놀랍다. <극장전>에 대해서는 정 선배와 함께 긴 평을 썼고 여러 매체에서 한 작품의 몫으로는 충분한 양의 평이 제출됐으니 외면당했다고 보긴 힘들다. 문제는 영화상들이 외면했다는 점인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얼마 전 <씨네21>이 진행한 젊은 시네필의 설문 결과 영화아카데미를 제외하고는 홍상수와 김기덕의 이름이 기대보다 저평가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 생각에는 영화형식에 관한 관심의 문제 같다. 예컨대 분단을 비롯해 시대를 끌어안거나 전통적 휴머니즘에 근거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영화형식 자체에 대한 미학적 탐구를 보여주는 영화와 감독들을 향한 관심이 옅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김소영  영화과 학생들은 영화만들기를 직업으로 생각한다. 시장에서도 성공하고 인지도도 얻는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고 그것이 기준이 됐다. 확대해서 보면 대중 역시 금융자본의 엄청난 투기성 속에서 살고 있고 뻥튀기가 되지 않는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먹고살 뿐 아니라 웰빙을 할 수 있는 감독과 작품을 지향한다. 직업으로서의 영화감독, 이것이 시대적 코드인 상황에서 이를테면 김기덕식의 사투와 생활은 예술가로서 존경스러울지언정 라이프 스타일로는 끌리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보스로서의 영화감독’ 같은 코드가 강하다. 작품의 형식, 역사인식, 작가적 태도, 궁핍한 재료를 갖고 풍요한 것을 만드는 능력은 차치하고, 달콤한 인생으로서의 영화감독이 중요한 것 같다. 조금 비약하자면 루카스나 스필버그는 보보스의 대표격이다. 대자본을 동원하고 그것을 증식시킬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보유하면서 삶은 히피 스타일로 사는 것, 이것이 뉴 할리우드를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예컨대 김지운이나 박찬욱 감독이 자기식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갈 수 있는 인물로 조명된다.

정성일의 2005 베스트 10 (무순)

<휴일>, <스파이더>, <과거가 없는 남자>, <극장전>, <카페 뤼미에르>, <밀리언달러 베이비>, <활>, <에로스>의 에피소드 중 왕가위의 ‘그녀의 손길’, <브로큰 플라워>, 전주영화제 2005 디지털 삼인삼색 중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속적 욕망들>

정성일   독자들을 대신해 질문하자면 허문영씨는 <극장전>이 홍상수의 과거 5편 영화에서 무엇이 더 나아갔다고 생각하나.

허문영  시간이 갈수록 <극장전>의 성취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게 느껴진다. 하나는 줌인과 줌아웃의 카메라 기법을 통해 개별 프레임의 안정성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극장전>은 고의적으로 미장센의 안정을 무너뜨리고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중요한 변화다. 루이스 브뉘엘 감독이 지녔던 고도의 자기 부정성과 연관지어 생각되기도 한다. 둘째로 <극장전> 이전의 영화가 홍상수 방식으로 보여주는 데 치중했다면 <극장전>은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인가, 망상인가, 실재인가, 소망인가?”라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정성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까지는 영화마다 반드시 아름다운 숏이 있었다. <극장전>이 명백한 성숙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아름다운 신은 있으나 아름다운 숏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제 영화가 보여지는 방식이 아니라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아름다움을 끌어낼 수 있는 홍상수가 새로운 수준으로 도약했다는 인상이 있었다. 한편 우려도 있다. <극장전>은 이를테면 두번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영화라고 느꼈다. 이제까지의 영화는 신이 붙어 있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해석을 불러일으켰다면 <극장전>은 보는 사람이 구조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구조가 이뤄내는 협주를 볼 방법이 없는 영화다. 수많은 몽타주가 아니라 구조가 아름다움을 빚어냄으로써, 아리아가 들리지 않는 영화다. 그래서 허문영씨의 ‘합주’라는 표현이 굉장히 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홍 감독은 우리가 들어가기 힘든 영화를 만들어 스스로 고립되는 느낌이다. 김소영씨가 그것을 “점점 똬리를 튼다”고 표현했지만 이젠 <생활의 발견>에서 틀었던 똬리가 이젠 똬리를 넘어 뫼비우스의 띠 같은 모양이 됐다. 실재와 영화를 연이어 붙여놓고 어느 쪽을 볼 것이냐고 묻는 것 같다. 그런데 그가 만든 배열(constellation)을 보지 못하는 관객은 흩어져 있는 조각만으로 볼 수밖에 없다. 김기덕의 <활>에서도 자초한 고립이 느껴졌다. <빈 집>의 침묵은 이제 할아버지와 소녀의 귓속말로만 전해지고 우리에겐 들릴 생각이 없다. 바다에서 한번도 뭍으로 가지 않고 동서남북을 알 수 없게 표류하는 배 위에서만 이야기를 진행함으로써 이제 “내 배에 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물어보는 듯하다.

김소영  허문영씨가 말한 프레임의 불안정성은 <극장전>을 풍요롭게 다시 보도록 하는 힌트 같다. 정성일씨의 말대로 <극장전>이 초대받은 사람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진 건 확실하다. 어찌 보면 지금의 영화시장, 영화문화 안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더 걱정스러운 건 <생활의 발견>에서는 ‘똬리’가 욕망을 향해 가고 있었다면 <극장전>에는 전작에 강하게 드러났던 실패하고야 말 성적 관계에 대한 욕망이 없어지고 매우 희화화돼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강원도의 힘>에서는 무력한 남자와 히스테리컬한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있었는데, <극장전>에서는 히스테리컬한 여자가 전작들 속 남자의 대사를 다 하고 떠나버린다. (웃음) 사실 남자는 별 욕망도 없이 좌절도 없이, 자기 희화화로 간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그러나 허문영씨가 언급한 형식적 불안정성은 그것을 상쇄할 것 같다. 불안정한 에너지는 곧 똬리 속에 남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낳기 때문이다. <활>은 <빈 집>에서는 더 나아가진 않은 듯하지만, <빈 집> 같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제자리걸음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냐는 주변의 의견도 있더라. (웃음) 압박을 견디며 감독들이 자기 세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평론과 전문저널이 필요하다. 홍상수나 김기덕 같은 감독들이 희귀종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이 필요하다. 벤처 캐피털이 쏟아져 들어오고 증자하고 상장하는 문화 속에서 그런 쪽으로 예술적 재능을 소모하지 않는 감독에 대한 독려가 필요할 것 같다.

정성일   가장 슬픈 얘기는 부산에서 만난 김기덕 감독이 앞으로 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는다, 내 영화 보고 싶으면 외국에서 출시된 비디오를 사서 봐야 할 거다, 아니면 누군가 내 영화를 수입해야만 볼 수 있을 거라고, 국내 개봉 자체를 포기한 마음을 들려줬을 때였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실상 한국영화 속에서 유령이 돼버린 느낌을 받아 무척 슬펐다.

김소영  아모스 기타이 감독도 이스라엘에서 정치적 이유에서 쫓겨나 프랑스에서 머물다가 다시 돌아가 이스라엘의 대표적 감독이 됐지 않나. 물론 그래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감독에게 유랑, 유폐, 추방의 경험은 굉장히 좋은 자산이 될 수도 있다.

◎ 대중이 가장 궁금해한 감독 박찬욱

정성일   <친절한 금자씨>도 올해의 화두라면 화두다. 놀라운 건 375만명이 봤다는 사실이다. 이영애의 변신, 최민식의 악역, 이야기가 재밌다는 입소문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박찬욱의 생각이 궁금해서 온 이 숫자를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대중이 감독의 생각을 궁금히 여기는 유일한 감독이다. 나는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 3부작이라는 카테고리 속의 앞선 두편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고 본다. 불편하긴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는 하나의 성숙의 징표로 보였다. 박찬욱이 처음으로 자기 영화 안에서 포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 진행되다가 영화를 중단해놓고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 포기를 선택한 건데, 박찬욱은 여기서 더 밀고 나가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훨씬 대중적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포기를 선택한 것이 성숙의 징표처럼 보인다. <올드보이>가 아버지의 이야기라면 <친절한 금자씨>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동시대 영화들이 고아 같은 느낌을 주는, 혹은 아들, 딸 되기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과 달리 박찬욱만이 부모의 자리를 다룬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의 아버지는 부서질 때까지 (복수를) 실현하지만 금자씨는 (복수를) 포기한다. 박찬욱식으로 표현하면, 아버지들은 하는 게 즐거운데 어머니는 보는 게 즐겁다. 하는 것보다 보는 게 즐거운 영화로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이 있다. <올드보이> 이후 북미 지역의 영화지들이 왕가위보다 더 중요하게 박찬욱을 다루는 건 어떤 사회도 금지하는 근친상간을 건드리고 파헤쳐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동시에 즐겁게 만들어서가 아닐까. <올드보이>가 음란한 자리에 관객을 밀어넣고 즐겁게 했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음란성의 방점을 바꾼 게 아닌가 싶다. 그 음란성을 방어하는 환상을 기술하는 게 박찬욱 영화의 스타일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해야 할 일은 방어에서 환상을 제거해 마주보게 해주는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언뜻 도덕적 질문을 하는 듯하면서 우리에게 윤리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영화적 장치를 작동시킨다.

김소영  끝까지 가서 망가지는 대신 배심원 제도를 도입하는 건 미국식 멜로드라마의 근간을 떠올리게 한다. 린다 윌리엄스가 미국의 배심원 제도와 멜로드라마에 대해 기술했는데, 미국은 배심원 제도를 만들어내고 이와 유사한 멜로드라마를 만들었다. 마치 O. J. 심슨 같은 사건의 과정을 보게 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굉장히 형식주의적이다. 이전 복수극과 달리 개인적 영웅이 아닌 배심원 제도로 서사를 치환하면서 세계시장 속으로 들어간다. 여성의 복수극은 타란티노의 포뮬라이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설득력 있는 이야기인데 <친절한 금자씨>는 윤리적 고뇌보다는 내러티브를 유니버설하게 바꿨다는 점에서 형식적이다. 그 전에는 오이티푸스라는 심리적 서사였다면.

허문영  동시대 아시아 감독 중에서 미주와 유럽에서 동시에 지지자를 거느린 감독은 그가 첫 번째가 아닌가 싶다. 언젠가 글로 썼지만, 박찬욱의 매혹은 장르영화를 만들면서 리얼리즘의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서술하면서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올드보이>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에서 출발하고 <친절한 금자씨>는 유괴범이 옥중에 들어가서 생활하고 나오면서 시작한다. 장르 영화적 관습 아래서 현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해 장르적 쾌감을 경유하는 게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이런 이야기 전개방식은 동시대에는 별로 없다. 장르영화에 능한 미국에서도. 박찬욱의 이런 방식은 장르영화가 가진 페티시즘 혹은 손상된 육체의 매혹, 윤리적 금기 위반 등의 요소가 지닌 자극을 잘 활용할 수 있다. <할리우드 리포트> 발행인이 올해 5월 방한해 <올드보이>가 한국만의 고유한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타란티노적인 분위기가 있다고 봤음에도 그가 한국적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건 이런 점 때문인 것 같다. 문제는 박찬욱의 이런 서사 방식이 대중영화의 층위에서 새로움을 말할 수는 있으나 영화의 새로운 서사인가에는 의문이라는 거다.

정성일   허문영씨는 박찬욱 영화의 서사가 불편하다고 여러 번 말해왔는데 어떤 점이 그랬나.

허문영  난 타란티노의 스타일, 속도감, 과격하고 자극적인 표현을 좋아하는데 박찬욱이 불편한 건 근본적으로 윤리적 태도를 끊임없이 주문처럼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선 무정부주의적 휴머니즘, <올드보이>에선 가족주의, <친절한 금자씨>에선 모성이라는, 역시 가족주의를 말한다. 이런 윤리적 기호들, 장치들이 고도의 윤리적 금기를 위반하는 데서 오는 음란성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현실적 요소를 끌어들여 장르적 음란성, 페티시즘을 좀더 자극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정성일   오히려 문제는 윤리적 주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정념적 주체들만 존재해서 이들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징적 법에 기대어 문제를 처리하면서 마치 그게 윤리인 양 위장하니까 불편한 게 아닐까.

허문영  나도 그것을 위장이라고 본다. 윤리적 강박증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핑계라는 점에서.

김소영  타란티노는 도착적 자극을 다루지만 윤리를 다루지는 않는다. 브루노 뒤몽은 관객에게 사회적 쾌락을 주지만 극도의 성찰력, 비판력을 안기는 영화적 시각을 견디게 한다. 관객에게 극도로 많은 걸 요구하는 거다. 타란티노는 금기와 쾌락의 동시적 생산과 발생이라는 기제를 잘 알고 있고 그 안에서 흥분을 일어나게 만드는데 관객에게 요구하는 게 많지는 않다. 박찬욱은 그 중도의 노선이다. 그래서 대중 친화적이고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일으킨다. 타란티노 영화에서는 배심원 제도로 가기를 기대하기 힘들고 브루노 뒤몽에게선 배심원을 배제하기 힘든데 <친절한 금자씨>에서 배심원을 가져온 건 말하자면 미국식 대중민주주의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형식으로 보면 성숙이라기보다 협상인 것 같다.

허문영  개인적 집행이 일종의 배심원적 집행으로 바뀐 것을 진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친절한 금자씨>의 배심원들은 피해자들인데 이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나약함 혹은 비겁함 혹은 잔인함들을 보여줌으로써 집행과정이 두 전작에 비해 훨씬 냉혹하고 냉소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전작들의 집행은 폭발적인 감정의 행위로 이뤄진 반면 여기선 카메라가 냉소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영화세계가 좀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나 전략의 수정으로 볼 수 있는 진전인지는 아직 의문이다.

정성일   테마의 문제를 제외해놓고 보면, 박찬욱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감독들이 다룰 수 있는 영화적 표현영역이 좁아지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2.35 대 1의 시네마스코프를 박찬욱이 잘 사용하면서 이제 한국영화에서 시네마스코프는 박찬욱 사이즈처럼 돼버렸다. 또 장도리신에 이어 골목신의 수평 트랙킹신은, 왕가위의 스텝 프린팅처럼, 수평 트랙킹을 자기 언어화했다. 또 사람을 정면으로 앉혀놓고 그 뒤에 배경을 배치하는 머그 숏은 김기덕과 더불어 박찬욱이 가장 잘 쓰고 있다. 특정 프레임, 숏, 스타일을 그는 아주 빠르게 자기 브랜드화하고 있고, 새로운 영화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더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허문영의 2005 베스트 10 (무순)

<휴일> 2005년에 만난 최고의 모던 시네마,  <극장전>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  <연애> 나이듦의 자의식이 빚어낸 처연한 통속극,  <깃> 디지털 시네마의 진경,  <거칠마루> 무협이 불가능한 시대의 무협극,  <아내는 고백한다> 마스무라 야스조/아주 강한 영화,  <우주전쟁> 할리우드의 자기갱신 능력을 입증한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더 이상 슬프거나 아름답지 않고 쓰라린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 따뜻한 영화적 근본주의자의 시선.  <열대병> 여기선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다

허문영  박찬욱이 굉장히 뛰어난 점은 캐릭터 묘사에 있지 않나 싶다. 최근 많은 대중영화들이 그렇게 부조리한 캐릭터를 그려내는 데 성공한 경우가 없다. 지금의 많은 대중영화는 60년대의 뛰어난 영화보다 더 평면적인 인간에 의존한다. 반면 박찬욱은 어떤 윤리적 정체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부조리극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것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스타일이나 사운드에서 박찬욱을 충실히 흉내내더라도 인물을 비슷한 수준으로 그려내기는 힘들 듯싶다.

정성일   첨언하자면, 시네마스코프를 쓰면서 그만큼 캐릭터와 카메라의 초점거리를 짧게 선정한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캐릭터와의 거리를 짧게 다가가서 만드는 게 캐릭터를 뒤틀고 기형적으로 만들고 관객과 가깝게 붙어서 말하는 방식이 아닌가.

허문영  일본영화에서 정면 응시 숏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게 오즈 야스지로부터 기타노 다케시까지 다양한데 시네마스코프에서 그렇게 짧은 거리로 잡는 건 확실히 독특하다.

◎ 불운을 겪은 '풍속화'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

정성일   올해 불우한 운명(오프닝 삭제 사태, 씨네21 515호 기획 ‘타이틀 시퀀스 베스트 10’ 참조)을 겪은 <그때 그 사람들>을 이야기해보자. 영화만 놓고 보면 박정희가 총을 맞는 절반까지만 재밌었다. 사실상 이 영화의 질문은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여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그 지점에서 끝나버리고 남은 자들이 맞이한 실체는 <한겨레> 임범 문화부장이다. (폭소) (*<한겨레> 임범 기자가 전두환 역으로 잠깐 출연했다.) 이 질문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영화가 풍속화- 허문영씨는 평에서 긍정적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로 끝난 것 같다. 나는 <그때 그 사람들>이 정치영화라기보다 웰메이드 액션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만일 3년 전에 이회창이 대통령에 당선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면 몰라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지금의 현실에서는 액션영화의 맥락에 놓인 것 같다. 또, 영화 속 박정희는 무섭고 끔찍하고 냉혹한 아이콘 독재자가 아니라 늙고 추레하고 거의 모든 힘이 빠져버린 듯한 영감님으로 나옴으로써 ‘괴물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박근혜가 다시 돌아오는 지금,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바람난 가족>의 불어제목이 <한국 여자>였다. 그래서 나는 <바람난 가족>은 한국에서나 문제가 되는 얘기였지, 여성 문제에 대한 전면적 질문이라기보다 한국 여자 아줌마의 풍속화라는 느낌을 받게 됐다. 허문영씨가 말한 ‘풍속화’에서 가져온 개념인데, 임상수는 <바람난 가족>부터 실상 점점 더 한국감독이 되어가고 있다. <그때 그 사람들>, 1980년대 쫓기는 운동권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다음 영화 <오래된 정원>까지 점점 더 한국적 소재와 주제에 이끌리고 있다.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임상수는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동세대 감독 속에서 임권택의 적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바람난 가족>부터 세 작품의 면면을 보며 사실 임상수의 관심은 가족 문제이고, 가족 문제를 다룰 때 핵심은 아버지이며, 이 아버지는 나약한 아버지이며 근대의 아버지들은 왜 자기 역할을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는 점에서 남성성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영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므로 <바람난 가족>의 이야기를 나는 호정이 아닌 영작에 방점을 두고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김소영  <그때 그 사람들> 당시, 그러니까 <PD수첩>과 황우석 논란 이전에 한국사회에서 말하지 못하는 주제는 없어진 듯했다. 문제는 금지됐던 걸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것이었고 소재보다 시선, 시각의 영역을 재구성해서 역사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보지 못했던 것, 청와대나 계엄령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자정 이후의 서울거리 등을 재구성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보면, 정치적 역사적 정보가 이미 있고 박근혜가 부활하는 걸 보는 마당에, 박정희를 그리는 건 비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 말해지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있기 때문에 영화가 사료를 통해 그려낸 것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게 아닐까. 단적으로 말해 <그때 그사람들>은 충분히 세지 않았다.

허문영  풍속화라는 건 성화와 대비해서 한 말이다. 한국영화에서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소재를 다루는 보편적 방식은 역사적 시간을 악몽으로 기록하는 거다. 그 순간 범접할 수 없는, 교정 안 되는 거대한 신의 영역이 된다. 지금까지의 한국영화에서 역사적 사건의 실체, 주도자들이 신의 영역에 있었다면 <그때 그 사람들>은 성화에서 뛰어놀던 인간과 사건들을 인간의 땅 위에 그것도 너무나 익숙한 광화문 거리로 끌어와서 아주 비루한 풍속화로 그려냈다. 이건 중대한 성취다. 소설이건 드라마건 영화건 권력자들의 파워게임을 다루면서 이만큼 냉정한 시선의 풍속화로 그려낸 건 드문 일이다. 이 영화가 공격하는 대상은 당대의 권력자가 아니라 그 시대에 대한 우리의 기억 혹은 강박증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선 굉장히 계몽적 영화라는 생각도 한다. <효자동 이발사>처럼 피해자의 위치에서 자기를 정립하는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건 작가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그때 그 사람들>은 그것이 실은 신들이 아니라 비루한 인간이라고 하는 폭로 자체만으로도, 한국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서사를 만드는 이들에 대한 중대한 문제제기다. 역사가 한편으로 엔터테인먼트가 되고 한편으로는 헤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기억되는 작금의 갖가지 난무하는 서사에 대한 문제 제기인 것이다. 이 영화의 사명은 거기서 끝나면 되는 게 아닐까. 아버지를 죽이고 난 이후의 오이디푸스의 궤적은 이 영화의 관심사 밖인 것 같다.

◎ 미묘한 서사, 정지우의 <사랑니>

정성일   <그때 그 사람들>이 그나마 인구에 회자되었다면, 올해 가장 불행한 영화는 정지우의 <사랑니>다.

허문영  올해 홍상수와 김기덕이 여전히 자기 길을 걷고 있음을 보여줬다면 정지우는 데뷔작 이후 6년 만에 첫 영화의 경지를 완전히 뛰어넘는 새로움을 보여줬다. 올해의 또 다른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스타일이나 장르성에 기대지 않고 순전히 인물과 이야기가 요구하는 공간과 톤, 움직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가 비로소 작가적 자질을 지닌 감독임을 입증한 작품이라고 본다.

김소영  생각할수록 까다롭고 치밀하게 계산된 형식의 영화다. 의문은 이것이 누구의 판타지도 아니라는 데 있다. 특정의 누구에게 겨냥되지 않은 판타지를 최대한의 형식으로 구성해낸 재능은 놀라우나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뭘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서른살 인영의 캐릭터는 학원 강사로 요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비정규직, 불완전 고용인데 그가 열일곱 남자를 욕망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안 잡힌다. 판타지의 애매함, 구분할 수 없음을 얘기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영화의 형식도 연기도 기막힐 정도로 대단했지만 어느 한순간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없었다. 김정은의 연기는 대단했다. 마치 노련한 프랑스 여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 같았다.

정성일   이자벨 위페르? (일동 웃으며 동의) 보면서 기이하게 <러브레터>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두편의 영화가 함께 떠올랐는데 <사랑니>에선 환상과 실재가 이상한 방식으로 중첩된다. 플래시백인 줄 알았더니 동시에 진행된다. 두 시점이 한데 만나는 순간을 보여줄 때, 트릭의 영화구나 하고 실망스러웠는데 그 다음 두명의 이석이 마주하는 순간, 이건 필연적 구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신은 결국 트릭이 트릭을 불러오며 전체적으로 트릭에 자기가 말려든 게 아닌가 싶었다.

허문영  <사랑니>에는 밀도가 다른 두 시간대가 있는데 감독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지만 인영의 시간대의 무게에 비해 어린 인영의 시간대는 왜소화됐다. 그런 문제점이 있지만 개별 장면들을 찍어낼 때 요즘 남용되는 무협영화적인 아름다움, 리듬감을 이 영화만큼 강하게 느끼게 해준 게 별로 없다. <극장전> 정도다. 한 프레임 안에서 인물이 어떻게 움직여야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소영  인영이 뭔가 다른 걸 욕망했다면 형식과 연기가 다른 걸 보여주지 않았을까.

정성일   서른살 인영의 마지막 선택과 관련해 그것을 단지 사랑이라는 알레고리로 바꿔쳐서 영화가 형식으로만 끝난 것 같다.

허문영  선택을 보여주려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이미 첫 장면부터 인영은 이석에게 매혹돼 있었고 영화는 그 감정의 구조를, 혹은 감정의 추상화된 무늬를 보여준다.

김소영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신민아를 욕망하는 시선은 가능한 코드인데 여기서 인영이 이석을 바라볼 때 그게 뭔지 진짜 잘 모르겠다. 미국에선 30대 여자와 10대 제자와의 사랑이 뉴스로 터지곤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욕망의 영역이 아니어서 그런 걸 만들어낸 걸까. 여성주의적 영화인데 왜 굳이 열일곱살 남자여야 했는지 영화 안에서도 잘 설명이 안 되고. 이해가능한 감정의 자원이 있어야 한다.

◎ 올해 가장 실망스런 귀환, 이명세의 <형사 duelist>

정성일   <사랑니>는 우리가 길게 얘기할수록 영화의 이야기하는 능력에 대한 토론을 진전시킬 수 있는 텍스트다. 반면 <형사 duelist>는 이야기 능력의 상실을 보여준다. 6년 만에 돌아온 이명세의 <형사 duelist>는 올해 본 귀환 중 가장 실망스런 귀환이었다.

김소영  “액션영화인 줄 알고 보러 갔더니 뮤직비디오더라”라는 신윤동욱씨의 평에 공감한다. 아무리 포스트 모던 액션이라도 기본적인 게임의 규칙이 있다. 단검이 상대 어깨를 스치면 더 겨룰 필요가 없는 것인데 그러고도 몇 십분을 더 가니까 매우 지루했다. 이 영화가 ‘시네마틱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색감 선택부터 미장센까지 조야하다고 느꼈다.

정성일   <첫사랑> 이후 이명세 감독은 계속 나빠지고 있는 느낌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이명세가 뭔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행착오를 한, 자신만을 위한 실험영화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이명세는 심지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반복하고 심지어 남순의 캐릭터조차 우 형사와 똑같은 여장남자에 가까웠다. <형사 duelist>에서 ‘시네마틱(영화적인 것)’을 말하는 건 담론의 미학적 자포자기 같다. 번쩍번쩍하며 나를 눈멀게 만드는 것에 매달리면서, 보는 것을 사유하고 개념을 끌어내고 성찰하는 과정은 완전히 생략되는 것이다. 흔히들 거론한 무성영화, 활동사진적인 영화적 흥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에 영화담론이 찬사를 보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한국영화의 이야기 능력 부재가, 보는 능력의 부재와 일정한 지점에서 만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혐의를 일으켰다.

허문영  사실 이명세는 불운했던 감독이다. <개그맨>이 완전히 외면당함으로써 불행한 초기를 보내다가 90년대 영화광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고 여전히 큰 기대를 모았는데 <형사 duelist>는 실망스런 영화였다. 이명세의 초기작들이 갖고 있는 어떤 아름다움, 음악성과 <형사 duelist>의 그것은 좀 다른 측면이 있다. <첫사랑>이 지닌 인물 동선의 아름다움이 <형사 duelist>에서는 속도감과 빠른 편집으로 대체됐을 뿐 사라졌다. 두 주연이 칼을 휘두르고 움직일 때 그 동선들은 어떤 감흥을 전해주지 못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뮤직비디오 홍수 속에서 영화가 동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면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움직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새로운 차원에 이르는데 <형사 duelist>는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 이야기의 무능력 문제는 감독 스스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선언했고, 개별 프레임 안에서의 동선의 아름다움이 지속됐다면 문제되지 않았을 측면이다. 그러나 <형사 duelist>는 뮤직비디오, CF와 또 다른, 모션 픽처 본연의 움직임을 창안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움직임을 모방했다.

김소영  이야기에 관해서는 사실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이 이명세 감독과 비슷한 말을 했다. “내 영화는 거꾸로 돌려도 마찬가지다”라고. 그러나 폰 스턴버그에게 중요한 것은 대신 ‘데드 스페이스’(Dead Space)를 없애는 거였다. 그는 한 시퀀스에서 이야기는 흐르지 않아도 공간을 가득 채운 기호적인 의미가 통역돼 나오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형사 duelist>는 그런 긴장이 없는 ‘콜라주‘다. 소품 등 시각적 요소가 이야기를 멈추고 꼼꼼히 들여다볼 것이 없다.

정성일   나는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감독이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숏과 숏이 붙는 순간 이미 이야기다. 사진이 아니니까. 그러나 <형사 duelist>에서는 에디팅이 있을 뿐 몽타주를 보지 못했다. 나는 반문하고 싶다. 거기 이야기가 없다면 타르코스프스키의 <노스탤지어>에서 촛불 들고 가는 장면이 왜 중요하겠는가?

◎ 올해의 발견 <용서받지 못한 자> <러브토크>

정성일   올해의 발견을 이야기해보자.

김소영  일단 저예산 독립장편극영화의 스타들이 등장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징후를 느낀다. 이윤기 감독도 그래서 이미 오래된 감독처럼 느껴진다.

허문영  이윤기 감독에 대해서는 <러브 토크>가 <여자, 정혜>보다 진전한 영화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자, 정혜>는 결말부에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보여줌으로써 영화가 지닌 풍부한 의미가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러브 토크>는 강한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모임과 흩어짐에 초점을 맞춰 개별 프레임 안에서 이윤기라는 새로운 감독이 얼마나 높은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연출력을 증명했다. 앞으로도 좋은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용서받지 못한자>의 윤종빈 감독은 기술적인 어떤 몇몇 결함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민속지에 그치지 않고 한국 근대사에 대한 중대한 알레고리를 호소력 높은 이야기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줬다.

정성일   <용서받지 못한 자>가 보여주는 긴급성, 호소하는 바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영화적 미덕은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이 작품이 선댄스나 칸의 관심을 받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대한 풍속화로서는 흥미로울지라도, 미학적 쇼크가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윤종빈이라는 연출자가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 생생한 자기체험을 DV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좀 이상한 비유지만 프랑코 모레티가 “괴테는 유감스럽게 적절한 표현매체를 만나지 못했다. <파우스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는 라디오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생각을 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상영시간이 3시간인) <좋은 배우>가 보여준 건 DV라는 매체가, 가능한 소재, 가능한 길이, 매체를 다룰 수 있는 나이를 바꾸어놓았다는 것이다. 독립영화가 필름으로만 찍던 시절에는 세 시간짜리 영화도 불가능했고 막 제대한 사람이 영화를 찍는 것도 불가능했다. 흔히 하는 말로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얘기의 3위가 축구 이야기, 2위가 군대 이야기, 1위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나. 바꿔 말해 관객의 절반 이상인 여성들이 싫어하는 군대 얘기가 상업영화의 소재로 채택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또, 감독들이 막상 뜻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경력이 됐을 무렵엔 군대 경험은 이미 망각의 회로에 들어가기 쉽다. 그런데 DV의 힘으로 26살에 대학 졸업작품으로 생생한 군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우리 시대의 가능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허문영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 자>의 이야기가 가진 잠재력과 가치는 좀더 깊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는 스트레이트한 미스터리가 분명 아니다. 이상한 멈칫거리는 숏들이 끼어들고 그들이 이야기를 지체시키면서 불러오는 환기효과가 크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보통 군대에 대한 생생한 증언, 민족지적 가치로 많이 얘기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좀더 큰 알레고리를 제공한다고 본다.

정성일   물론 휴가를 나와 군대를 플래시백 형식을 빌려 떨어뜨려놓고, 기억과 경험의 정치학을 통해 말하는 것이 보인다. 첫째 군대 장면과 여관 장면이 다른 사람이 찍은 것처럼 다른데, 여관 장면은 홍상수나 장선우 영화에서 봤던 신이다. 군대 장면은 공간 분할이 다른 사람이 찍은 듯 서툴러 보인다. 그것을 극복한 건 인물의 생생함이다. 윤종빈은 장르적 구조를 집어넣고 생생한 체험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도록 거리를 떼어놓는 작업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시나리오 구조를 떠나 영화 속 형상으로 만드는 데에는 미숙했다고 본다. 그래서 다소 폄하처럼 들릴지 몰라도 이 영화를 ‘올해의 걸작’처럼 말하는 것은 과장된 평가 같다.

허문영  과대평가나 과잉평가에 대한 문제는 이 영화 하나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나치게 많은 그다지 좋지 않은 영화에 너무 많은 훌륭한 수사들이 뒤따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 점에 있어서 <용서받지 못한 자>가 상대적으로 더 혜택을 누린다고 보긴 힘들다.

정성일   독립영화, 대학 졸업작품 혹은 단편들이 지나치게 보호되고 있지 않은지 이제는 질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이를테면 <씨네21>에 실린 별점을 보고 있노라면 두편의 영화에 과연 동일한 기준으로 별점을 주는지 의아할 때가 있는데 <용서받지 못한 자>는 별 넷,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는 별 셋을 받기도 했다. 그럼 <용서받지 못한 자>가 <과거가 없는 남자>보다 1/4만큼 더 위대한 영화인지 묻고 싶다. 물론 열악하고 보호받아야 할 지점에 놓여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전도돼 미학적 우월성으로, 정치적 전술적 우월성으로 뒤집혀 얘기되는 과장법은 지금 위험한 수위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허문영  그러고보면 <스파이더>도 그렇고, 올해 묻혀 지나간 외화가 많았다.

◎ 2006년, 여전히 궁금한 그들의 신작

허문영  2006년을 내다보자면 전망은 잘 못하겠고, 궁금한 영화가 매우 많다. 임권택의 100번째 영화,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의 신작을 기다리는 한해가 될 것 같다. 또한 봉준호가 한국 대중영화의 신경지를 개척할 지 매우 궁금하다. 이하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 스타 단편감독의 장편 데뷔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프로젝트를 선보인 박은영의 데뷔작, 장편 데뷔를 오래 준비해온 정성일, 김소영의 작품을 볼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소영  첫째, <연애의 목적>에서 본 노골적 언어로 점철하는 성 유희 코메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튀게 될 지 궁금하다. 둘째, 작가로서는 <활>로 제자리 뛰기를 한 김기덕 감독의 신작이 궁금하고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이 <서편제>를 어떻게 다시 쓸 것인지 기대가 크다. 내년엔 <태풍태양>의 정재은 감독이 돌풍을 일으킬 무엇인가를 준비할 수 있기를 빈다. 셋째, 장르의 측면으로 볼 때 <분홍신>,<첼로> 등 공포 영화가 다수 만들어지나 공포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괴물>이 그 역할을 해낼까? 올해는 <거칠마루>,<주먹이 운다> 등 액션 영화들이 비교적 호의적인 평을 끌어냈다. 70년대 액션 영화의 맥을 잇는 액션 영화들을 보고 싶다. 넷째, <태풍>,<청연>,<야수>의 흥행 결과에 따라 블록버스터들의 행방이 달라질 것이다. 흥행 결과야 어떻게 되건 <태풍>은 믿을 수 없이 경직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아시아 다국적 스탭들을 매끈하게 꾸렸고 기술력은 훌륭하다. 이것이 앞으로 보다 사려깊은 범 아시아 대작 영화를 만들어내는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정성일   나는 아직 신기가 오르지 않아 내년을 내다볼 만큼 작두 탈 솜씨가 되지는 못한다. 다만 내년에 꼭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임권택의 일백 번째 영화 <천년학>은 항상 궁금하다.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 김기덕의 열 세 번 째 영화(어쩌면 열네 번째까지!)는 그들이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 지 궁금하다. 물론 봉준호의 <괴물>은 모두가 기다린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이다. 내년 영화의 경향? 아마도 영웅전 시리즈가 되지 않을까. 구국의 영웅을 향한 맹목적인 지지와 어떤 의문도 잠재울 무조건적인 찬양, 여기에 더해 그 분을 위해 희생도 불사해야 한다는 맹렬한 충성심. 이보다 더 고마운 관객들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그런 영화를 발 빠른 누군가 만들어낸다면 관객운동과 더불어 한 번 더 보기 촛불시위가 단군 이래 최초 이벤트로 시도되지 않을까? 그러나 여름을 휘저을 것은 월드컵이다. 여름 내내 사람들은 영화관에 있는 대신 거리로 뛰쳐나올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겨울에는 대선 후보경쟁 레이스에 돌입할 것이다. 내년에는 구경거리가 많다. 그러한 구경거리들보다 한국 대중영화는 더 재미있을 자신이 있는가? 벌써 크리스마스이다.

◎ 2005년 한국영화 총평

괜찮은 만찬이나, 새로운 요리는 없었다

김소영  전반적으로 괜찮은 만찬이나 감각을 사로잡는 이채로운 요리는 없는 한정식 집에 다녀온 기분이다. 김기덕의 <활>과 홍상수의 <극장전> 등 역작을 만들어온 감독들의 영화가 돌아왔으나 제한된 상영에 그쳤다. 반면 저예산 장편 극영화 <다섯은 너무 많아> <용서받지 못한 자> 등을 지난해 <마이 제너레이션> 등에 이어 극장에서 만났다. 희망의 기운이 여전히 보이는 영화 문화다. <주먹이 운다> <달콤한 인생> <혈의 누>와 같은 장르영화들도 선방했다. <말아톤> <너는 내 운명>처럼 모진 시련 속의 착함을 견지하는 영화가 승격된 휴머니즘으로 많은 관객들과 만났다. 제작비가 100억원을 넘어서는 <태풍> <청연> <야수>에 대한 소문이 돌출되는 사이, <나의 결혼 원정기> <오로라 공주> 등 중저 예산에 사회문제를 의식하면서 대중친화력을 가지려는 영화가 극장에 비교적 오래 머물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반면 <무영검>과 같은 무협액션 영화가 장르적·윤리적 반칙을 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기용(매영옥)이 군화평(신현준)을 보호하려 둘 사이에 서 있다가 연소하(윤소이)에게 배에 칼이 찔린 뒤 다시 군화평이 그녀의 배를 관통해 연소하를 찌르는 장면은 무협 영화의 최소한의 ‘의’도 지키지 못하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으로 관객들에게 용인될 클라이맥스 코드라고 생각하는 점이 놀랍다. 사회적으로 소재 제한에 대한 터부는 없어졌으니 보다 자기 성찰적인 재현 윤리를 생각할 때다.

정성일   물론 올해의 영화는 이만희의 <휴일>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발견은 사건이다. 이 영화는 유령의 시간을 건너뛰어 우리 앞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동시대 시네아스트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영화가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순간이다. 그는 우리를 회고에 잠기게 하기는커녕 그의 영화를 본 다음 동시대 한국영화를 보고 있으면 반대로 시사회 현장이 시네마테크에 와서 앉아 있는 것 같은 거의 절대적인 영화적 체험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 한 편으로 올해 한국영화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나는 모든 영화제, 혹은 영화상에서 주는 상은 선물이며 그 영화의 평가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러나 올 한 해 예외 없이 모든 국내의 영화상에서 홍상수의 <극장전>과 김기덕의 <활>이 후보에조차 언급되지 않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고립되면서 점점 더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이 되어가고 있다. 당신들의 무관심은 매우 슬프게도 훗날 당신들의 무능력으로 이야기되어질 것이다. 예술품이 눈앞에 있는데 왜 그것을 보지 않는가, 혹은 보지 못하는가? <씨네21>은 지난호에서 2005년 한국영화에 대한 네 가지 화두가 ‘이야기하기의 무능력-아버지의 부재-전시성-노인+코미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화두가 정확하게 대중들뿐만 아니라 비평적 담론도 (대부분) 침묵한 4편의 영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 것은 상황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 <사랑니>는 이야기하기의 새로운 화법을 찾아냈으며, <여자, 정혜>는 아버지의 부재는커녕 가족 전체가 너무 무거워서 문제가 된다. 전시성에 대해 홍상수의 <극장전>은 절대적 포기를 통해 그가 완전하게 새로운 자신만의 구조로 이루어진 세상의 형상을 만들어냈음을 보여주었으며, 노인을 내세운 코미디가 웃음을 끌어낼 때 김기덕은 <활>에서 소년 소녀를 위해 그 노인의 자살적 몸짓과 새롭게 태어나기를 통해 비극을 긍정한다. 문제는 화두에 대한 대답이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답을 한국영화의 담론 바깥, 질문에 대한 외재성의 자리에 위치시켜놓음으로써 대답의 부재 자체를 안심하면서 즐기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문제는 왜 대답이 부재하느냐가 아니라 왜 그 대답을 피해야만 대중적·비평적으로 성공하느냐는 것이다.

허문영  충무로에선 중견이건 신인이건 장르에 몰두하는 영화들은 주춤거리고 있는 반면, 사적인 비전의 영화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기쁨을 주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정지우의 <사랑니>와 임상수의 <그때 그사람들>이다. 충무로의 대작 장르영화들은 다수가 퇴보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반면 독립영화인 <용서받지 못한 자>와 <거칠마루>와 <다섯은 너무 많아>는 장르를 원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성과다. 충무로의 새로운 수혈이 필요한 단계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