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2008.05.06.(652호)작품

전영객잔

하소연의 숏은 어떻게 출연하는가

● 가오세 나오미의 <너를 보내는 숲>


이상하게도 나는 가와세 나오미에 대해서 쓰기 시작하면 금방 소설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점점 그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도무지 멈출 수가 없게 된다. 그런 다음 이제 이게 비평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는 무아지경 속에서 결국 중얼거린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소설. 지금 나는 문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들을 오래전에 혹은 방금 전에 영화관에서 다시 보았지만 그녀에 대해서 쓰고 있으면 전기를 쓰기 위해서 번번이 도서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사료들로서의 영화. 혹은 고백을 기술하는 기록들. 가와세 나오미에 대해서 쓰기 시작하면 내가 본 것에 대해서 사유하는 자리에서 미끄러져 나와 무언가 그녀에 관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영화를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헛된 시도이다. 하지만 그게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모험을 무릅쓰게 만든다. 유혹?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와세 나오미는 나를 꼬인다.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해, 라고 다짐을 하고 있는데도 자꾸만 아니에요, 그건 너무 매정한 처사예요, 라고 그 누군가가 내 소매를 잡아 이끄는 것만 같다. 감싸 안고 싶은 알 수 없는 동정심. 물론 가와세 나오미가 만들어내는 하소연의 숏이 있다. 정말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감정의 순간.

일본영화에서의 ‘문득’과 ‘불현듯’의 순간

그건 처음부터 그러했다. (그녀의 첫 번째 영화) <수자쿠>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가와세에 대한 어떤 사실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상이 아니라 느낌. 그 부정확한 정감의 순간. 영화의 타하라 코조의 8mm영화가 아니라, 에이스케의 고모를 향한 수줍은 연정이 아니라, 그 에이스케를 향한 미치루의 막연한 호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가와세 자신을 위한 숏이 등장할 때, 아아, 도대체 이건 무엇인가, 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런 다음 가와세의 영화를 거슬러 올라가서 보기 시작했다. 두편의 다큐멘터리 <따뜻한 포옹>과 <달팽이>를 본 다음 이번에는 반대로 좀더 많이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왜 생겨난 것일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부터 가와세가 만든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뒤죽박죽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가와세 자신이 그런 순서로 만들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화가 갖는 물리적 길이에도 개의치 않았으며, 그걸 전달하는 경제적인 방법을 찾지도 않았다. 거의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는 동어반복을 하면서도 가끔씩 진행을 멈춰 세우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과 마주 대하게 되는 극영화 <호타루>와(상영시간 2시간44분), 좀더 진행되었으면 하고 싶을 만큼 그냥 간결하게 사진작가 니시이 가즈오의 임종을 앞둔 마지막 여름을 담은 다큐멘터리 <벚꽃 편지>는(상영시간 1시간5분) 서로 이어져 있다. <사라소주>는 거의 수수께끼에 가까운 이야기를 그냥 엉킨 실타래처럼 내버려둔 채 일상적 삶을 다루듯이 시각적 기호와 청각적 음향들의 순간들로 이어놓았다. 거의 끊어질 것처럼 진행되는 리듬. 그 아슬아슬한 경계. 가와세는 생활 안에서 사건의 지평을 본다. 그때 그녀가 무엇을 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려는 결심이 중요해진다. 그 순간 갑자기 이야기는 멈추고 동선의 블록이 깨지면서 인물들의 상태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무언가를 하소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하소연의 숏을 만나게 되면 어떤 정교한 구조나 내밀한 이야기조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느슨한 삶의 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때 그 느슨함이야말로 일본영화가 발명한 틈이다.

종종 일본영화가 천재적이라고 느낄 때는 이야기의 리듬을 타고 흐르던 영화가 두개의 순간과 마주할 때이다. 하나는 문득, 이라는 순간이고 다른 하나는 불현듯, 의 순간이다. 문득과 불현듯, 이라는 두개의 개입. 시집을 가야 하는 딸은 마지막 여행에서 잠자리에 누워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다(<만춘>). 그때 영화는 아무 상관도 없는 텅 빈 화병을 ‘문득’ 보여준다. 그건 상징도 은유도 아니다. 그냥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한참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 말고 카메라가 ‘불현듯’ 바깥으로 나가자 한밤중에 집 저편 하늘에서 섬광처럼 번개가 칠 때(<번개>) 거의 무아지경으로 보던 그 누구라도 갑자기 멈칫하게 된다. 혹은 산주로가 두 무리로 나뉘어 칼부림을 하는 마을로 들어서자 ‘불현듯’ 바람이 분다(<요짐보>). 구로사와는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때 멈추는 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며 그 순간 우주라는 시간이 흐른다, 라고 설명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혹은 이 중단의 방법을 자유간접화법이라고 말하면 사실상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 결정적 순간을 부른) ‘영화로부터의 해방’을 다시 의미 안으로 수렴시키는 짓이다. 이 순간은 무한소급의 방식으로 의미를 자리잡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문득과 불현듯, 의 비밀은 등장인물 중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계열을 따라 바깥으로 나와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야기 바깥으로 나와서 갑자기 빈칸을 창조해낸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은 어떤 도움도 없이, 이를테면 시점숏을 만드는 클로즈업이나 인물의 동선의 일치, 혹은 대사의 지시없이, 그냥 문득 생각난 것처럼,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 건너뛴다는 것이다. 이걸 횡단이나 점핑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출현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자리가 없는 숏, 이라는 발명. 문득의 숏과 불현듯의 숏은 우리를 표면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끌어낸 다음 그냥 영화와 마주하게 만든다. 계열의 불연속. 그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등장인물의 내면의 리듬을 쫓아가다가 문득의 숏, 혹은 불현듯의 숏과 마주칠 때 영화의 내면을 마주보았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두개의 내면. 등장인물의 내면과 영화의 내면.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도 등장인물의 사건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 사건의 진실, 혹은 거짓을 따져 묻고 난 다음 그 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인물의 마음을 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은 인물이 아니라 영화의 표면이다. 문득의 숏과 불현듯의 숏은 그 표면에 틈을 만들어낸다. 이때 틈은 이야기를 장소로 되돌려 보내고, 등장인물들을 정물의 일부로 만들고, 사건을 세상의 범주들의 관계 속으로 옮겨놓는다. 일본영화는 세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기하학적인 도표의 형상처럼 다룬다. 문제는 그런 다음 다시 이야기에로, 등장인물들의 사건 속으로, 되돌아갈 때 생겨난다. 왜냐하면 운동은 연결되어야 하며, 리듬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모하게 고백하는 가와세 나오미의 방법

가와세 나오미는 그걸 연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녀는 스튜디오 시대의 대가들을 흠모하지도 않으며(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미조구치 겐지, 야마나카 사다오, 시미즈 히로시, 이시다 다미조), 그렇다고 그것을 훈련받지도 못했다(구로사와 아키라, 이마이 다다시, 기노시타 게이스케, 이치가와 곤). 미학적으로 철저하게 따져 묻지도 않는다(마스무라 야스조). 혹은 단호하게 저항하지도 않는다(스즈키 세이준,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그저 다 포기하고 시네필의 길을 택하지도 않았다(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그러므로 가와세는 그걸 연결할 때 방법을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의미를 구하지도 않는다. 혹은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알리바이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냥 그 숏이 부조화하는 대로, 가까스로 흘러가던 리듬 안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키더라도,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라고 문득 중단할 때, 그것이 물론 오즈만큼 미학적으로 굉장한 것은 아니지만(그리고 아직 그것으로 무언가를 해냈다고 말하긴 곤란하지만), 그러나 그 의지만큼은 그만큼 단호한 것이다. 같은 말의 반복. 여기에는 일인칭의 압도라는 의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형식적으로는 당혹(當惑)스러운 숏(plan d’hesitation)인데, 그걸 볼 때는 정감의 숏(plan d’affection)으로 다가온다. 가와세는 그냥 무모하게 고백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불현듯 고백하듯이 문득 멈춰버린다. 그 앞에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하지만 재빨리 다시 등장인물에게로 돌아간다. 나는 <수자쿠>를 보았을 때 그건 아직 가와세가 영화라는 방법에 서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가와 신스케의 네 명의 촬영기사 중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책임진 다음 가와세 나오미의 <수자쿠>를 촬영한) 다무라 마사키가 그것을 감당하고 있다고 멋대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리 영화를 찍어도 그런 식으로 진행하였다. 아무리 불편하고, 종종 아, 이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되는 대목에서조차 그냥 그렇게 틈을 벌려서 하소연의 숏을 출현시킨 다음, 다시 되돌아갔다. <호타루>를 보았을 때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라소주>를 보면서 결국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중단하고서라도, 인물 사이의 구조를 포기하면서까지, 사건을 망치면서, 자기를 고백하는 숏을 문득 공존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예를 본 적이 없다. 그게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때로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와세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가와세는 지금 극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다큐멘터리로 만족했을 것이다. 극영화의 존재 이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세상, 말하자면 던져진 세상. 그런데 그 세상 바깥에 있는 나. 두 세계의 공존의 방법. 가와세는 던져진 세상의 질서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그때 가와세의 방법은 고백이다. 말 그대로 고백은 가와세 나오미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법이다. 그때 이 고백은 가와세의 사건이 아니라 기분이며 마음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가와세는 무언가 자기 안의 은밀한 것을 털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그걸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녀의 영화가 지닌 가장 불가사의한 순간이라고 중얼거리게 되었다. 일인칭의 고백의 숏. 하소연이라는 정감. 그러므로 그 고백의 일인칭 숏을 던져진 세상이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 설명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그 사이를 연결하는 관계를 자꾸만 구원하려 든다. 구원? 누가 누구를? 비평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모한 용기. 책에 의존하지 않은 소설 쓰기. 말 그대로 얘기꾼으로의 후퇴. 이때 베냐민은 내게 유용한 충고를 해준다. 얘기꾼이란 결국 무엇인가. “모든 진정한 얘기는 드러난 형태로든 숨겨진 형태로든 간에 유용한 그 어떤 것을 품고 있는 법이다. 이러한 유용성은 설교 속에 있을 수도 있고(설교로서의 비평?), 실제적 충고에도 있을 수 있고(삶에 관한 충고로서의 비평?), 또 속담이나 생활의 좌우명 속에 있을 수도 있다(속담으로서의 비평?). 아무튼 얘기꾼이란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다.”(얘기꾼과 작가)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 이 말의 역설.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로부터 내가 잃어버린 것은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그 반대로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가 아닐까? 그래서 내가 무언가 가와세 나오미를 빌려서 조언을 하려드는 것은 아닐까? 그런 다음 가와세 나오미와 당신을 내가 중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옳지 않다. 우리는 예술적 관찰을 포기하면 안 된다. 가와세 나오미가 만들어내는 하소연의 숏, 설명을 요구하는 그 틈. 우리는 하소연과 화해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와세가 행위로 이행하는 대신 계속해서 공존의 방식으로 머물려고 할 때 왜 그녀는 매개를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어떤 종합에로의 거부라는 완강한 저항이 있다. 물론 이걸 가장 한심하게 설명하는 것은 가와세 나오미를 신데렐라의 판본으로 읽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헤어진 다음 이 불쌍한 소녀는,… 등등. 좀더 세련되기는 했지만 그것을 뉴에이지 비슷하게 읽거나 혹은 트라우마의 치료라는 식으로 해설하려는 시도에도 동의할 수 없다. 내가 가와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그녀의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결국 성립시키는 그 문득, 이라는 일인칭, 불현듯, 이라는 고백의 숏이다. 이 틈. 영화 안에서 만들어진 신 속의 자기의 숏이라는 일인칭 공간. 다소 비스듬한 인용 (아시다 아키라와 함께 일본에서 들뢰즈-가타리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읽은) 나카자와 신이치가 공간을 ‘空-間’으로 읽을 때, 그래서 공간을 ‘빈-사이’로 다시 쓸 때, 공간이 만들어내는 거리의 의식을 차이의 유토피아로 다시 구상할 때, 세계라는 구조와 세상이라는 이미지 사이의 이항대립의 ‘사이’(間)를 제시할 때(<티벳의 모짤트>), 가와세 나오미는 그 사이(間)의 빈(空) 자리로 재빨리 뛰어든 다음 그 안에서 자기의 영화를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가와세 나오미의 무대는 그러므로 측량할 수 없는 장소이다. 절반쯤은 이쪽에 기대고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저쪽에 기대고 있다. 이때 이쪽과 저쪽의 구별이 처음에는 분명한 것처럼 시작했다가 점점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나간다. 저기서 시작한 다음 이쪽으로 왔다가 저쪽으로 가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반대로 설명할 수도 있다. 가와세는 그것을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해냈다. <너를 보내는 숲>을 처음 보았을 때 막 시작하고 5초 동안 그만 아, 나는 지금 <너를 보내는 숲>을 보러 들어왔는데 상영시간을 착각해서 <수자쿠>를 다시 보게 된 줄 알았다. 두 영화의 첫 장면은 거의 똑같다. 바람에 조용하게 흔들리는 숲. 망원렌즈로 보여주는 그 평면감. 두 영화는 전편과 속편의 관계가 아니다. 두편의 영화 줄거리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두편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11년이나 된다(<수자쿠>는 1997년에 찍었고, <너를 보내는 숲>은 2007년에 찍었다). 그런데도 신기할 정도로 두 영화는 같은 방법으로 시작하고 있다.

가와세가 오가와에게 배운 것

우선 두 가지 사실의 환기. 나는 가와세 나오미가 일본영화의 바깥에 있지만 그러나 오가와 신스케의 ‘마기노-이후’(牧野-以後) 세대라는 자리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단지 가와세 나오미가 야마가타영화제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가와세의 영화에는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이행한 다음 그 안에서 두 가지 계열의 공존에 관한 수수께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질문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대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그리고 어쩌면 가와세 나오미는 처음부터 대답을 미루는 방식으로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두 가지 계열 중 하나는 내면의 불-균형과 비-평형이고 다른 하나는 풍경의 고정이다. 첫 번째 계열, 내면의 불-균형과 비-평형의 선은 계속해서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끌어당긴다. 처음 다큐멘터리를 시작할 때도 그러했고(<따뜻한 포옹>), 그런 다음 극영화를 만들 때도 그러했다(<수자쿠>). 다섯살 때 가와세를 버리고 떠나간 아버지. 그런 다음 떠나간 어머니. 가와세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그녀는 성인의 날에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가와세의 영화는 부모를 찾아가는 길에서 자기를 찾는다. 대부분 가와세 나오미를 이야기할 때 이것만을 반복해서 말한다. 물론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너를 보내는 숲>에 관한 인터뷰를 하면서(<NHK> TV) 가와세는 이 영화의 의미는 두 가지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저를 보살피고 저와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가 치매(認知症)를 앓기 시작했을 때 이 문제와 마주친 것입니다. 나는 갑자기 이 병이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 병에 걸린 할머니가 아니라 이 병 자체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와 마주친 셈이지요. 나는 이 병의 사회적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병은 가족 중의 누군가라는 모습으로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현대가족 중에서 이 문제를 안고 있지 않은 집이란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치매라는 병은 일본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와 함께 비로소 할머니가 이제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떠난다는 문제. 죽음이라는 질문. 그렇다면 할머니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린 시절, 어제까지 건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오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너무 두려워서 할머니에게 질문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대답을 할머니에게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그 대답을 내가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곁을 떠나간 사람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나는 <너를 보내는 숲>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와세는 나라현의 감독, 나라현은 가와세의 우주

그러나 다른 하나가 있다. 두 번째 계열, 풍경의 고정. 이것은 가와세 나오미가 서로 전혀 연대하지 않는 그녀의 ‘오빠’ 세대인 아오야마 신지와 스와 노부히로와 공유하는 정서이다. 그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혹은 돌아왔다. 아오야마 신지는 규슈(九州)지방 근처에서 지속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스와 노부히로는 히로시마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만일 히로시마에서 더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으면 차라리 파리에 간다(<퍼펙트 커플>). 그래서 그들의 영화는 일본영화라기보다는 왠지 규슈영화, 혹은 히로시마영화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다. 가와세 나오미는 어찌되었건 나라(奈良)현에서 영화를 진행한다. 그녀는 일본을 횡단하거나 혹은 도쿄에 갈 생각이 없다. 아니, 차라리 현대 일본영화에 합류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가와세는 나라현 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 안에서 생활하고, 영화를 만들고, 아이를 기르면서, 할머니를 생각한다. 아마도 가와세는 그것을 오가와 신스케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공식적인 배움이 아니다. 가와세는 오가와를 매우 사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가와를 추모하면서(1993년 10월 나고야 시네마테크) 오가와 신스케는 뇌와 손으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가와는 그 장소에 가서 일기예보를 알아보고 날씨를 측정하고 기후를 분석한 다음 도표를 만들고 (오가와는 자기가 조사한 것을 항상 도표로 만든 다음 그것을 담아나가면서) 영화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손으로 대지와 접촉한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찍으려는 대상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오가와는 자기가 찍으려는 대상을 만져보고 그런 다음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배움의 과정을 찍는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오가와 신스케는 영화를 경작(耕作)한다. 대부분 ‘이후 세대’들은 오가와에게서 그것을 배운다. 그러나 가와세는 오가와에게서 장소의 감각을 받아들였다. 오가와가 마기노에 가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면서 그 장소의 리듬을 경작한다면 가와세는 나라현에서 태어나서 거기 머물면서 그 장소의 리듬에 순종한다. 그곳은 그녀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배움이 필요없었다. 그 대신 나라현에서 살아가면서 익힌 우주의 법칙을 따른다. 언제 비가 내리고, 어디서 바람이 불며, 그때 축제가 벌어지고,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따라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녀의 등장인물들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 아무리 슬퍼도 그날이 오면 축제가 벌어지고, 결국 헤어져도 그때는 맑을 것이며, 울고 싶지 않아도 그 순간 비가 내릴 것이다. 가와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종종 그 지방에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기후의 리듬에 대한 순종이라는 방식의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가 나라현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다. 만일 가와세가 나라현을 떠난다면 그녀의 영화는 리듬을 상실할 것이다. 가와세 나오미는 일본 감독이 아니라 나라현의 감독이며, 나라현은 가와세의 우주이다. 그녀는 그 안에서 자기의 영토를 만들어나간다.

가와세는 그런 다음 자기의 풍경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계절은 항상 고정된다. 나는 그것을 처음에는 무심코 보았지만 곧 그 계절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가와세의 하소연을 잡아 끌어당기는(attraction) 액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액션? 그렇다. 오로지 계절로서의 풍경만이 가와세 영화 속의 액션이다(그런데 그 역은 아니다). 여름이라는 액션. 가와세는 여름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일단 여름이 고정되면 그 안에서 무언가 호소하기 시작한다. 항상 짙푸른 숲. 벌레들의 울음소리. 자꾸만 무언가를 건드리는 바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문득 쏟아지는 비의 액션. 그런데도 쨍쨍 비치는 햇살의 기호들. <수자쿠>에서 산길을 걸어갈 때 문득 내리는 비의 액션. 쨍쨍 비치는 햇살의 정감. <호타루>에서 집에서 뛰쳐나온 아야코를 뒤쫓아 다이지가 따라갈 때 골목길에서 문득 내리는 비의 액션. 쨍쨍 비치는 햇살의 장소. <사라소주>에서 바사리 축제를 할 때 문득 쏟아지는 비의 액션. 쨍쨍 비치는 햇살의 악센트. <너를 보내는 숲>에서 숲에서 마치코와 시게키가 길을 잃었을 때 문득 쏟아지는 비의 액션. 매번 문득 쏟아지는 비. 쨍쨍 비치는 햇살의 시선. 그건 가와세가 나라현에서 살면서 생활하는 날씨의 리듬이다. 방문객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비밀. 그러나 가와세의 영화에서 계절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마치 여름이 끝나기 전에, 가을이 오기 전에, 영화를 끝내야 한다고 결심을 한 것처럼, 재빨리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계절을 순환하는 <호타루>는 예외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정월 초하루 하쓰모데 행사를 제외하면 이 영화도 대부분 여름에 진행된다.

서둘러 끝난 매장과 지금도 진행 중인 우울증

그러나 <너를 보내는 숲>이 <수자쿠>와 똑같이 시작하면서도 이제까지의 가와세의 영화와 다른 점은 이야기 사이에 시간적인 점핑의 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수자쿠>도, <호타루>도, <사라소주>도 영화가 시작되면 누군가와의 이별이나 누군가의 실종이 있고, 그런 다음 갑자기 시간을 건너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로 그 시간은 너무 길어서 영화 전체가 종종 짧은 프롤로그의 후일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가와세는 그 시간의 간격을 일종의 미스터리처럼 다루었다. 그러나 <너를 보내는 숲>에는 간격이 만들어내는 어떤 미스터리도 없다. 숲이 흔들리고 나면 누군가의 장례식이 보여진다. 저 멀리 이어지는 행렬. 영화를 다 본 다음 종종 이 장면이 롱테이크로 찍힌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착시이다. 이 장면은 아주 짧게 찍혔다. 이 행렬은 두개의 숏으로 나눠서 찍혔는데 그 사이에 나무를 베고, 그것을 잘라서 장례 행렬에 필요한 소품을 만드는 일련의 행위가 이어진다. 이걸 만드는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고, 그런 다음 장례식 행렬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좁은 오솔길로 장례 행렬이 고개를 넘어간다. 말하자면 상(喪)이 진행 중이다. 한밤중의 숲이 보이고, 텅 빈 숲속의 장소들을 보여준다(그런데 이 숏들은 나중에 시게키와 마치코가 숲속에서 마침내 도착한 장소들이다). 거의 6분에 이르는 긴 서두를 꺼낸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마치 상복을 입은 것처럼 검은 화면에 하얀 글자로 제목이 뜬다. <모가리의 숲>(殯の森), 우리말 제목은 <너를 보내는 숲>, 영어 제목은 <애도하는 숲>(The Mourning Forest)이다.

첫 번째 질문. 그런데 이게 누구의 장례식일까? 누구의 상이 진행 중인가? <너를 보내는 숲>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보는 등장인물은 마치코가 아니라 시게키이다. 시게키는 마루의 기둥에 기대어 거의 넋이 나간 것처럼 앉아 있다. 무엇이 그의 넋이 나가게 만들었는가? 물론 33년 전에 그의 곁을 떠난 마코의 죽음이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째 보았을 때 모든 장면을 예외없이 카메라를 들고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처음 보았을 때는 카메라를 세워놓고 찍은 장면과 들고 찍은 장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마치코와 시게키가 맨 마지막에 도착하는 숲을 보여줄 때 카메라는 이동하지만 그 움직임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마치코가 요양원에서 간사와 처음 인사할 때 카메라는 갑자기 ‘흔들린다’. 두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마치 두 사람의 움직임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흔들린다. 두 번째 질문. 무엇이 카메라를 이렇게 흔드는 걸일까? 이 두개의 분리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와세의 인용. <너를 보내는 숲>은 기억에 관한 두개의 방식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치매와 죽음. 상(喪)은 이미 끝났지만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무 서둘러 끝난 매장과 지금도 진행 중인 우울증. 그때 무엇이 도래하는가? 어떻게 대상을 통과하게 할 것인가? 그런데 이미 상실해버린 대상을 통과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는 이상한 질문

애도 작업의 곤란함을 잘 설명하는 것은 마치코의 애도 행위와 그 회상이다. 이 두개의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코를 수상쩍게 보게 만든다. 만일 마치코가 그저 아이를 상실한 어머니라기보다는 어머니를 상실한 여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첫 번째 애도의 행위. 마치코가 요양원에서 보낸 첫날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마치코를 그냥 무심하게 보여준다(S#1). 집 앞에 자전거를 세운다(S#2). 방 안에서 액자에 담긴 어린아이의 사진을 보여준다. 옆에는 큰 초가 있다. 그 초에 불을 붙인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그 아이가 마치코의 아들이며,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숏는 사진에서 시작해서 초에 불을 붙인 다음 향불(香火)을 따라 이동한다. 그래서 이 숏의 마지막에 가서야 마치코의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이 장면이 이상한 것은 마치코가 아들(의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길을 내리깔고 향에 붙은 불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왜 마치코는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는 것일까? 그가 애도하는 것은 아들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일까? 나는 이 신의 다음 숏이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마치코는 향불을 보고 있는데 컷을 해서 다음 숏으로 아들의 영정사진의 액자를 보여준다. 이때 이 숏은 마치코가 필사적으로 그 사진을 보려들지 않는 것을 구태여 그 사진 앞으로 시선을 옮겨놓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진행은 여기서 끝난다.

그 두 번째, 그 회상. 그러나 이 신이 끝나자마자 요양원의 그 어딘가의 문이 보인다. 입구에는 ‘뻐꾸기’라는 히라가나가 쓰여 있다(이 요양원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때 마치 사진 속의 아이의 꾸지람처럼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들린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의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런 다음 장면에서 이 질문이 시게키가 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시게키가 마치코가 아니라 스님에게 하는 질문이다. 가와세는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인물의 숏에서 선행해서 장소를 소개하는 인서트숏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소리의 주인을 앞의 숏에 연결시켜 그 질문은 마치 저세상에서 건너온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런 다음 재빨리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가고 있다. 먼저 목소리와 육체를 분리시키고, 그런 다음 목소리가 육체를 찾아간다. 우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을 오인한 다음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로 수정한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습니까”는 너무 이상한 질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거의 사용할 수 없는 대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와세는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성립시키기 위해서 매우 복잡하게 이 질문의 주변을 배치하고 있다. 난데없는 질문.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대. 그때 나는 가와세가 목소리의 주인을 수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오해하는 것이 원래의 목표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편집이 수상하게 보인다. 시게키의 아내의 이름은 우연의 일치로 마코(眞子)이다. 그래서 마치코(眞千子)에서 ‘치’(千)를 지우면 시게키의 아내의 이름이 된다. 시게키는 한지에 서예연습을 하는 시간에 마치코의 이름을 보자마자 ‘치’를 검은 먹으로 지워서 마코라고 다시 쓴다. 나는 이 이름의 애너그램을 그 앞의 보이스 오버 장면, 그러니까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고 말한 그 숏, 그래서 시게키와 (마치코의) 아들 사이를 혼란시킨 인서트숏과 연결시키고 싶다. 불교의 환생, 혹은 순환. 그런데 마치코가 마코의 환생일까, 아니면 시게키가 마코 앞에 나타난 아들의 환생일까? 시간적으로는 마치코가 마코의 환생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영화는 시게키가 마코의 아들의 환생처럼 다룬다.

시게키의 질문에 스님은 대답한다. “살아 있다, 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죠. 첫 번째는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밥은 잘 드십니까? 잘 드시는군요. 반찬도요? 다행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왠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나요?(시게키가 “내 삶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건 먹고사는 것과 다른 얘기입니다. 밥은 잘 드시냐니까 그렇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느낌이 안 들 때가 있습니다. 그건 위(謂)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지요. 마음이 비었기 때문입니다. 없는 게 아니라 비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지 살아 있지 않은지를 잘 모르겠다는 건 두 번째 경우란 소리지요. 마치코씨, 그분 손을 잡아주세요. 따뜻한가요? 마치코씨의 에너지가 전해지나요? 그게 살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살아 있다는 건 실감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약간의 대화가 더 이어진다.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살아 있다는 건 실감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살아있다는 건 실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실감한다는 것. 그런 다음 스님은 시게키의 아내가 죽은 지 33년이 지났다는 말을 듣고 “마코씨는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33년이 되면 부처님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두번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라고 일러준다. 이 말을 듣고 요양원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죽으면 가야 하는 저세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부터 숏의 이미지와 말은 다시 서로 완전히 분리된다. 혹은 이 신의 이전 단계로 돌아가서 시게키가 한 말이 그의 육체를 떠나 마치 마치코의 아들의 목소리로 오인된 것처럼 목소리가 주인의 몸을 떠나 숏의 이미지에 달라붙는다. 이때 목소리는 나무숲에 붙었다가(S#1) 다시 두명의 노인을 따라간 다음(S#2) 아무 말도 안 하는 노인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그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나오다가(S#3) 손을 잡자(S#4) 그 장면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로 이어지고(S#5) 시냇가를 나는 작은 새에서(S#6) 햇살이 비치는 나무숲을 바라보는 것으로 연결된다(S#7). 요양원 실내에 두명의 노인이 앉아 있고(S#8) 부채질 하는 요양원 간사가 보인 다음(S#9) 카메라는 노인들이 한지에 써놓은 이름을 보여준다(S#10). 이름들. 자기의 이름, 혹은 이미 자기 주변을 떠나간 사람의 이름. 치매에 걸린 시게키는 아내의 이름을 쓰고, 반대로 남을 돌보면서 간병을 하는 마치코는 자기 이름을 쓴다. 누구라도 여기서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왜 마치코는 자기 이름을 쓴 것일까? 반대로 시게키는 자기 아내의 이름을 쓴 것일까? 왜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애도하지 않는가? 혹은 왜 그 반대가 아닌가? 마치코와 시게키에게 상(喪)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행 중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애도는 동일한 행위가 아니다. 가와세는 그것을 한편은 보여주고 다른 한편은 보여주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마치코가 과거에 사로잡혀서 자꾸만 저 시간에 붙들려가는 동안 시게키는 치매에 걸려 자꾸만 지워져가는 저 시간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음을 다룬다. 그래서 마치코의 플래시백은 있지만 시게키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다. 그러나 마치코의 플래시백은 그녀의 과거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매우 의심스럽게 다루어진다. 노인들이 한지에 써놓은 이름들을 보여준 다음 숏는 아무런 주의도 환기하지 않고 마치코를 보여준다. 왼쪽 창문 바깥에 나무들이 보이고, 마치코는 그냥 무심하게 앉아 있다. 그건 앞의 장면들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시게키의 질문이 그의 육신에 선행하는 방식으로 마치코의 남편의 질문이 그의 육신에 선행한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마치코의 태도는 우리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날, 왜 (아들) 유세이의 손을 놓았지? 왜 그랬어? 어째서 나는 살고, 유세이는 죽은 거지?” 왜 그녀는 아이를 잡지 않았을까? 왜 자기의 아이를 구하지 않았을까? 왜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야단을 맞아야 할까? 남편이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흘리며 따져 물을 때, 꽃으로 그녀의 뺨을 후려칠 때 피하지 않고 맞으면서, 왜 마치코는 그저 담담하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을까? 왜 이 부부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지 않을까? 한쪽은 슬픈데 왜 다른 한쪽은 죄송한 것일까? 왜 그녀는 슬퍼하지 않을까? 너무 슬퍼서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마치코는 왜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사과를 하는 것일까? 만일 정말 마치코가 고의적으로 아이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말하자면 마치코가 메디아 이야기의 반복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황금 양모를 구하기 위해 이아손이 콜키스에 왔을 때 그에게 한눈에 사랑에 빠진 여자. 그래서 황금양모를 훔쳐 달아나는 이아손을 돕기 위해 쫓아오는 동생을 갈가리 찢어죽인 다음 거의 다 쫓아온 아버지 앞에 던져 그 시체를 줍도록 만들고 이아손과 함께 도망친 딸. 그런 다음 함께 도망친 이아손이 코린트 국왕의 딸을 아내로 삼으려 하자 자기와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을 불속에 집어던진 그 여자. 마치코가 잊으려는 것이 자기 아이가 아니라 자기의 행위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상하게도 이 회상장면에서 단 한번도 마치코와 그 남편을 동시에 잡은 투숏은 없다. 시종일관 카메라를 들고 찍었으며, 거의 대부분 투숏으로 찍힌 이 영화에서 구태여 이 대목만 두 사람을 나눠 찍었다. 숏을 나누는 것은 앞의 숏에 대한 상대 숏의 반응을 보려는 것이다(그래서 상대 숏를 ‘reaction shot’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마치코는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아니, 바라보지도 않는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남편에게 눈 돌리게 만드는가? 그러나 가와세는 이 질문을 더이상 진행시키지 않고 중단한다.

<너를 보내는 숲>과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

그런 다음 1시간37분인 이 영화에서 35분 만에 이야기를 중단하고 갑자기 시게키와 마치코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서 나머지 전체를 숲속의 그 어떤 장소를 찾아가는 데 할애한다. 길을 인도하는 사람은 치매에 걸린 시게키이고, 마치코는 그를 쫓아간다. <너를 보내는 숲>은 거의 직접적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를 따라간다. 아니, 두편의 이야기는 거의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아마도 가와세 나오미는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가와세 나오미는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좋아하는 감독의 명단에 타르코프스키를 다르덴 형제, 빅토르 에리세와 함께 뽑았다. www.kawasenaomi.com.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너를 보내는 숲>은 <스토커>의 ‘형이상학적’ 장소에 가서 다르덴 형제처럼 카메라를 들고 물리적으로 찍은 영화이다. 물론 유머이다). 두편의 이야기의 간단한 환기. 먼저 <스토커>. 과학자와 소설가는 그곳에 이르면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구역(the Zone)에 가기 위해서 그곳으로 안내하는 스토커를 찾아간다. 그 구역은 국가에 의해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게다가 시시각각 그곳을 찾아온 사람의 마음의 변화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변화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곳이다. 스토커는 두 사람을 인도하여 그곳에 간다. 전체 2시간41분 중 거의 2시간15분을 여기서 보낸다. 그런 다음 그곳에 도착한다. 그 다음 <너를 보내는 숲>. 아이를 잃은 마치코는 요양원에 일을 하기 위해 온다. 거기서 치매에 걸린 노인 시게키를 만난다. 시게키는 죽은 아내의 33주기를 맞아 마코의 무덤에 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다. 마치코는 그를 데리고 무덤에 간다. 그 무덤은 길 잃은 숲에 있다. 그런 다음 그곳에 도착한다. 숲은 일종의 구역(the Zone)이다. 그 스스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길을 열어주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그래서 길을 찾아가면서 동시에 길을 잃는다. 차라리 길을 잃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들이 바라는 곳을 향해서 올바르게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버릴 때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는다. 물론 옛 선사들의 화두처럼 진부하게 보이는 이 권고가 하지만 말이 아니라 그들의 간절한 행동이 될 때 이 무모한 모험은 갑자기 어떤 하소연이 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곳에 도착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종종 이것을 정신적인 의미의 획득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거기서 만나는 것은 사실상 빈-사이(空-間)이다. 무언가를 얻었다고 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타르코프스키도, 가와세도 거기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간절한 소망을 안고 한참을 간 다음 문득 저기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이다. 핵심은 저 문턱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걸 넘어서면 갑자기 모든 것이 제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기. <스토커>에서 세 사람이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방이다. 방이란 동시에 감옥이다. 그것을 안에서 열면 방이지만 바깥에서 열 수 있으면 감옥이 된다. 그때 이 방에는 문이 없다. 그저 문의 프레임이 있을 뿐이다. 소망이란 내가 쉴 수 있는 방인가, 아니면 나를 가두는 감옥인가? 그때 타르코프스키는 문지방을 끝내 넘지 않고 그 대신 문지방 이편에서 저편을 정말 간절하게 쳐다본다. 그 간절함이 거의 사무칠 정도이다. 갑자기 이 방 저편과 이편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비가 내리고, 이들의 여행은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 더 갈 수 있지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 말하자면 더 갈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출 때에만 비로소 기적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너를 보내는 숲>에서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길이 멈추는 곳이다. 시게키는 그곳이 마코가 이편에서 저편으로 떠나간 경계라고 믿는다. 그들은 더 갈 수가 없다.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젖은 몸을 말리며 하룻밤을 보내면서 마치코는 질문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거지요?” 시게키가 대답한다. “살아 있어, 살아 있고 말고.” 이때 마치코가 질문하고 시게키가 대답한다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그 역이 아니다. 다음날 새벽 시게키는 아내 마코의 유령을 본다. 그리고 (스님과의 대화가 끝난 다음 한 할머니가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죽으면 말이야”라고 묻자 다른 할머니가 “춤을 추듯 훨훨 날아서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더라고”라고 대답한 것처럼) 마코와 시게키는 훨훨 춤을 춘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문지방. 그런 다음 시게키와 마치코는 다시 계속 걷는다. 그들 앞에 마주한 것은 감당할 수 없게 커다란 죽은 고목이다. 거기서 처음으로 마치코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여기서 길이 끝난다. 그 앞에서 시게키는 마코의 기억을 담은 일기장을 꺼내든다. 곁에서 마치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오르골을 연주하는 것뿐이다. 그때 마코의 영혼이 떠나가는 것처럼 멀리 헬리콥터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더 다가갈 수 없다. 타르코프스키와 가와세 나오미를 가르는 것은 욕망의 포기와 애도의 무능력이다.

전생의 반복 혹은 환생의 예행연습

무엇이 가와세를 애도의 무능력에로 이끄는가? 타르코프스키와 가와세를 나누는 것은 그들이 기대고 있는 종교적 열망이다. 그 두 사람이 종교에서 어떤 대답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러나 그 둘은 기독교와 불교의 거리만큼 서로 멀리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성서적 비전을 믿는 것처럼 가와세 나오미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간다. 가와세 나오미는 자기의 영화 안에 줄기차게 불교의 기호들을 끌어들였다. <수자쿠>에서 종종 툇마루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저 멀리 산을 볼 때 문득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소리를 듣거나 혹은 멀리서 종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 집에는 풍경이 없다. 혹은 절에 가지 않는다.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정말 그 소리는 할머니의 고막을 건드리는 것일까? 이때 절에서 존재하는 불교의 청각적 기호는 마치 어디선가 들린다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다루어진다. 그건 단지 절에 가고 싶다기보다는 서방정토에서 부르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울린다. 정월 초하루 하쓰모데로 시작하(고 난 다음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동일한 날자 동일한 장소에서 끝나)는 <호타루>의 첫 장면은 마치 커다란 불덩어리가 나라현 대흥사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것처럼 시작한다. 그런 다음 이 장면의 (찍지 않은 나머지) 첫 절반은, 그러니까 불을 붙이고 절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은, 마지막에 보충된다. 절에서 시작해서 절에서 끝내기. 뒤로부터 앞으로. 혹은 원(圓)의 순환. 가와세의 세 번째 극영화 <사라소주>는 ‘紗羅雙樹’를 일본말의 발음대로 읽은 것이다. ‘사라쌍수’는 부처가 열반에 든 숲속 나무가 동서남북으로 2개씩 서 있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너를 보내는 숲>에서 “나는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주는 사람은 스님이다. 그래서 <스토커>는 세 사람이 소망을 이루는 방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끝나지 않고 기적을 보는 것이 중요한 만큼, <너를 보내는 숲>에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수난 대신 수행이라는 생각. 그 대신 그 앞에서 시게키와 마치코는 서로가 서로의 대상에 대한 분신과 환생이 된다. 시게키는 땅을 판 다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작은 구덩이에 몸을 웅크리고 눕는다. 그 말은 시게키가 마코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마코가 시게키의 몸을 빌려 하는 말인가? 그때 시게키의 그 모습은 자궁 속에 들어간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그 말은 아들 유세이가 시게키의 몸을 빌려 마치코에게 하는 말인가? 그때 마치코는 마치 마코처럼 말한다. “이제 됐어요, 이제 됐어요.” 그건 마코의 자리에서 마치코가 시게키에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마치코가 시게키의 자리에 온 유세이에게 하는 말인가? 그런 다음 그 둘은 서로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고마움은 무엇에 대한 고마움인가? 나의 행동이 나라는 생각. 그때 나는 누구인가? 이편과 저편 사이(間)의 빈(空)자리. 말하자면 무아지경의 깨달음. 그렇지 않다면 그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다음 왜 마치코는 더이상 울지 않고 결국 웃는가? 가와세 나오미가 빈자리와 함께 세상 안에 머무는 방법. 그때 그 자리를 채우는 기술은 자기가 상대방의 빈자리를 연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것이 이 긴 수행의 대답이다. 분신과 환생의 역할 분담. 그런 다음 영화는 불현듯 끝난다. 그때 카메라는 문득 하늘로 날아오른다.

<너를 보내는 숲>의 마지막 자막은 이렇다. “모가리(殯).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또는 그 장소라는 뜻. 어원은 ‘모(喪)아가리(あがり)’로 상(喪)이 끝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두 가지로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제목.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 또는 장소로서의 숲. 그것이 이 영화의 프롤로그이다. 그런 다음 이 숲의 장면이 다시 반복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읽기를 제안한다. 상(喪)이 끝나는 숲. 그러나 상이 끝난 다음 이제 함께 껴안고 살아왔던 상실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 그대신 누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고통이 멈추었을 때 확실해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 아닌가? 말하자면 고통이야말로 애도의 마지막 방어선이 아니었던가? 고통을 치웠을 때 무엇이 죽음을 막아줄 수 있을까? 나는 이상하게도 서로에게 표시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런 다음 한 사람은 땅을 향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을 향할 때, 카메라가 그들을 멀리 떠나갈 때, 그 다음에 그들이 하게 될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왜 카메라는 거기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들의 마지막 제스처가 두 사람의 전생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혹은 그것을 이어질 환생의 예행연습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 다음은 소설가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