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2008.08.05.(665호)본인인터뷰

interview

“영화에서 아직 찾아낼 게
많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2회째 Cindi 공동집행위원장, 영화평론가 정성일


정성일

오는 8월20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시네마디지털서울 2008(이하 Cindi)이 7월28일 기자회견을 열고 본격적인 개막 준비에 나섰다. 경쟁 부문 20편, 초청 부문 20편을 초청한 지난해와 달리 2회를 맞은 Cindi는 총 71편의 영화를 상영하며 그에 따라 상영 부문도 많아졌다. 지난해에는 하나뿐이었던 초청 부문이 올해는 초청, 디지털 회고, 디지털 복원으로 분화했고 디지털 단편, Cindi 익스트림, 인스톨레이션 등의 부문이 신설된 것이 특징이다. 박기용 감독과 함께 Cindi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은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디지털영화의 발견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한편,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확장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번 영화제의 가장 큰 실험은 시행착오가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들을 고쳐야 하고, 또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지 다방면의 시도를 통해 고민해볼 것이다.” 기자회견 직후, 마주한 그에게 어떤 시행착오를 준비하고 있는지 들었다.

지난해 영화제의 자랑부터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Cindi가 발견해낸 감독들의 작품이 이후 다른 영화제나 매체를 통해 더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있었다. 위원장으로서 그런 모습을 보며 남다른 소회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제를 하면서 가장 신나는 일은 내가 그 영화를 가장 먼저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선보인 다음에 동료들에게 지지를 받고, 다른 영화제에서 재발견됐을 때, 가장 기쁘다. 또 발견을 통해서 좋은 제작자를 만나고, 더 좋은 조건으로 다시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을 때의 기쁨이 크다. 영화를 프로그래밍하며 껴안은 영화들은 마치 가족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때는 마치 가족 중 누군가가 금의환향한 것 같은 감동이 있다. 올해는 지난해에 수상한 우밍진과 위광이가 두 번째 영화를 가지고 찾아왔다. 나쁘면 어떻게 하나 싶어 불안했는데, 다행히 두편의 영화가 여전히 흥미로웠다. 그 점만으로도 무척 고맙더라.

위광이와 우밍진의 두 번째 작품은 어떤 변화가 있던가. 위광이의 첫 영화인 <마지막 벌목꾼>은 목숨을 건 듯이 촬영한 작품이다. 그리고 디지털에 대한 신뢰와 불안이 교차했었고, 그 안에서 자기가 새로운 시네마로 넘어온 것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차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매체에 대한 미숙함이 있었다. 사실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나는 <마지막 벌목꾼>이 더 좋다. 하지만 이번에 만든 <살아남은 자의 송가>는 한 가족의 처참한 삶을 쫓아가는 방식에서 어떤 끈질김이 보였다. 그의 첫 영화가 중국 디지털영화의 경향에서 새롭게 발견됐다면, 두 번째 영화는 위광이라는 감독의 이름에 대한 발견이다. 우밍진에게 느끼는 건 신뢰에 가깝다. 지난해 왔던 <코끼리와 바다>는 매우 개인적인 기록이었고 차이밍량 영화 같은 느낌과 함께, 말레이시아영화의 경향이 보였다. 아시아영화의 자장 안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불안했는 데, 3번째 작품인 <터키블루 스카이>에서는 비로소 그런 것을 떨쳐냈다. 자기만의 방식을 끌어왔고, 차이밍량의 느낌은 아예 없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우밍진이 더 평이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흔히 젊은 감독이 가지는, 심리적인 충격과 즉각적은 반응을 일으키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난 점에서 흥미로웠고 어떤 성숙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두편의 영화를 초청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위광이의 <살아남은 자의 송가>의 첫 편집본은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가장 먼저 봤다고 하더라. 그들이 이 영화를 경쟁에 초청해 월드프리미어를 하려고 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그의 새 영화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위광이가 메일을 보내서 이 영화를 Cindi에 처음으로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스크리닝을 보내와서 영화를 봤는데, 아주 훌륭했다. 우리는 정중하게 답신을 보냈다. 꼭 우리의 월드프리미어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로카르노는 매우 좋은 영화제고 중요한 기회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Cindi로 보내고 싶다고 하더라. 그리고 우밍진의 영화는 시기상 다른 영화제와 경합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기자회견에서 가수 이상은이 만든 트레일러가 공개됐다. 문화예술인들에게 카메라를 쥐어주고 트레일러를 부탁하는 사례가 다른 영화제에서는 없는 일인데, 지난해 김영하 작가에 이어 2번째로 해보니 어떤 장점이 있던가. 김영하 작가나 이상은이나 트레일러를 연출한 다음에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있다. 이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이상은은 다음 신보를 낼 때, 한곡 정도는 직접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싶다더라. 말하자면 이제는 누구나 영화평을 쓰는 시대 아닌가. 그처럼 디지털 시대에는 누구나 영화를 찍는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감독이 무슨 특권이라고. 그런 용기를 이런 문화예술에 몸담은 이런 작가나 가수가 줄 수 있었으면 했다. 아마도 아무나 영화를 만들 수 있고, 기술이 발전하면 조만간 블로그도 글이 아닌, 동영상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혹시 모르지 않나. 먼 훗날 사가들이 기록하기를 블로그 동영상 시대의 첫 출발은 CIndi의 트레일러였다고 기록할지. (웃음)

영화제 포스터에 관심있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포스터에 나온 얼굴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나도 궁금하다. 우리 아트디렉터가 어느 건설현장에서 찍어온 것이다. 그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만큼 우리의 일상생활을 가깝게 포착한 거다.

올해 오프닝 세리모니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박기용 감독과 둘이서만 하나. 그렇다. 영화제를 영화에만 집중시키자는 생각 때문이다. 다른 영화제들이 축제를 보여주는 방식도 존중하지만, 영화제 초기부터 들어와서 함께하지 않은 사람이 뜬금없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간혹 다른 영화제를 보면 갑자기 나타난 사회자가 영화제목이나 감독 이름을 엉뚱하게 이야기하거나, 나름대로 유머라고 하면서 영화에 적합하지 않은 단어를 쓰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그런데 이건 영화에 대한 결례가 아닐까 싶다.

지난해 영화제에서 작은 이벤트가 있었다면 두 공동집행위원장이 본의 아니게 분홍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절대 맞추지 말자는 게 컨셉이다. (웃음)

개최 시기가 지난해와 비교할 때 한달 뒤로 미뤄진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 이유였다. 첫째 방학이 관객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결정적으로 휴가철이다. 심사위원들을 초청하려고 하면 휴가 때 하기는 싫다고 하더라. (웃음) 이건 경쟁영화제이기 때문에 결과가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또 감독들이 승복하기 위해서는 납득할 만한 사람을 데려와야 한다. 그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둘째는 7월이 위로는 로카르노, 아래로는 베니스영화제가 걸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초청하고 싶은 영화들이 모두 그 영화제들의 답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세 번째는 사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부천영화제가 가깝게 있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좀 떨어져나오자 했더니 이번에는 충무로영화제가 가깝게 오더라. 우리보다 큰 영화제이기 때문에 그대로 갈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부천을 피하고자 했다가 충무로를 만난 거지.

영화제끼리 시기를 협의할 수 있는 창구는 없나보다. 없다. 영화제 협의회 같은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운 나쁘면 겹칠 수 있다. 혹은 누가 먼저 발표하느냐다.

지난해 심사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것은 이 영화제가 매해 전력질주한다는 것이었다. 감독과 비평가, 국내 비평가 등을 각각 5명씩, 매년 총 15명을 모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이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각오와 다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제일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그걸 철회할 생각은 없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나도 다른 영화제에서 심사를 해보면 제일 편한 게 심사위원 5명 모아놓고서, ‘자, 상 5개 주십시오’ 하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상을 주면 항상 나눠주게 된다. 나는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처음에 감독 심사위원 5명이 베스트영화 하나만 뽑게 할까 했었다. 그런데 그 5명이 절대적인 한편을 뽑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다른 영화에도 기회를 주고자 한 것이다. 또한 다른 그룹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 영화가 베스트 원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국제비평가그룹을 만들었는데, 또 생각해 보니 이게 너무 사대주의적인 거다. 한국의 서울에서 열리는 영화제인데, 한국 비평가들의 시선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또 다른 그룹을 만들었다. 물론 회를 거듭할수록 심사위원들을 초대하는 일이 더 힘들어지긴 할 것이다. 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건 아니니까. 그때는 또 현실적으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현재로서는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다.

그런 수상방식이 비평가에게도 배틀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의 배틀은 어땠나, 또 올해 배틀은 어떨 것 같나. 사실 나도 경쟁영화의 리스트를 뽑으면서 나름의 베스트 원을 꼽는다. (웃음) 그런데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영화들이 결정된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올해의 경쟁영화 중에도 이미 베스트를 꼽아놨다. 물론 끝날 때까지는 절대 이야기 안 하지. 아마 올해도 내 생각과는 다른 영화가 결정될 것이다. 그게 경쟁영화제의 재미인 것 같다. 심사위원의 결과와 내 생각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해서 틀린 게 아니지 않나. 다른 것뿐이지.

그런데 참여를 안 한다고 했지만, 전세계 어느 영화제에서도 집행위원장이 Q&A시간에 직접 손을 들고 질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하하.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웃음) 나름 그래도 공정성을 위해서 경쟁영화에 대한 리뷰는 절대 쓰지 않고, 또 경쟁감독의 관객과의 대화는 진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올해 감독 심사위원 구성이 매우 흥미롭다. 아모스 지타이, 지아장커, 홍상수, 김우형, 장률인데, 그들 속에 녹음기만 밀어넣어도 회의거리가 생길 것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더라. (웃음) 주최쪽으로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특집으로 다뤄야 할 이야기가 많겠지. (웃음) 주최쪽은 고사하고 내가 재밌다. 일단 흐뭇하지.

지난해는 경쟁과 초청 2가지 부문만 있었다. 이유를 추측하자면, 우리가 어떤 영화를 발견하겠다는 것에 방점에 찍혀 있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올해는 발견이라는 느낌이 약화된 느낌이다. 더 모험을 해도 되지 않았을까. 올해 영화제에 일할 사람들을 면접하면서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쇼크를 받았던 게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티켓 카탈로그를 봤더니 부산영화제에서 매진 안 된 영화만 남은 느낌이었다고 하더라. (웃음) 이것이 우리가 발견이라고 생각한 것의 반대 판본이겠구나 싶었다. 우리가 충분히 권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고집만 부린 건 아닐까 했던 거지. 나는 발견이라는 이 영화제의 정신은 여전히 지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15편의 경쟁부문 영화들 중에는 영화제를 취재하는 기자들도 처음 듣는 영화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초청부문에서는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갖기로 했고, 영화제가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시간이 많이 걸려서 10회까지 행사가 개최되어야 하고, 만약 내가 그때까지 일할 수 있다면 그때 이 영화제는 다시 1회 때로 돌아갈 것이다. 다 없애버리고 경쟁과 초청부문만 가지고 하면서 대신 우리가 당신들을 속인 적은 없잖아, 이건 발견이야, 이건 재발견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정성일

신디 클래스란 이름의 마스터 클래스 프로그램에는 아모스 지타이 감독이 초청됐다. 한국에는 처음인 것 같은데. 현재도 중동지역에서는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가장 중요한 감독이다. 하지만 한국의 전문가들에게는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감독이기도 하다. 이건 좀 이상하다. 평소 한국 비평가들이 자주 꺼내는 이야기 중 하나가 디아스포라 아닌가. 그에 대해서 아모스 감독만큼 문제제기를 하는 작가는 없다. 실제로 그걸 만들어낸 장본인 아닌가. 그래서 그가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기회를 한국에서 처음 갖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새 영화를 본다, 안 본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와의 첫 번째 만남이고 디아스포라의 토론은 어디서 시작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가장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 단편섹션이 생긴 것이다. 지난해에는 단편에 대한 입장이 확고했다. 디지털이란 세계가 단편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장편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데뷔하는 세계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장편 위주로 상영한다고 했었고. 어떤 이유에서 바뀐 건가. 지난해 영화제가 끝나고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고백한 게 있다. 영화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젊은 영화가 내게는 전혀 매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영화를 코디네이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신은실씨를 모셨다. 그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제안을 해왔다. 지금의 발견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발견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기회가 됐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름 단편을 상영하면서도 원칙을 가지자고 했다. 핵심은 뭐냐면 신작 단편으로 채우지 말고 모든 영화제를 다 거치고 와도 상관없으니, 베스트를 꼽아보자는 것이었다. 단편영화가 얼마나 많나. 그리고 영화제에 가도 다른 영화 보느라 잘 보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 차라리 어떤 영화제가 결산하듯이 보여주는 게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이 섹션에서 상영작을 늘리지는 않을 것이다. 딱 15편으로 그해의 베스트를 꼽을 것이다.

지난해 심사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국가별로 디지털 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필리핀은 디지털을 정치적인 미학이나 지역적인 미학으로 끌고 가려 한다. 중국은 다큐멘터리에 집중하고, 일본의 디지털영화는 개인적이거나 테크노적인 느낌들을 준다. 프로그래밍에 국가안배를 하지는 않아도 디지털을 중심에 놓고 봤을 때의 국가별 경향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차라리 한 국가의 영화로 15등을 끊는다면 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건 컨텍스트가 전혀 다른 영화들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라서 어렵더라. 혹시 내 취향 때문에 어떤 영화를 더 높게 평가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그 나라에서 나온 평들을 죄다 읽어보곤 한다. 그만큼 나라별 경향이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 디지털의 특징은 히키코모리다. 어떤 경우가 있냐면 초청은 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하루 종일 파트타이머로 일하는 사람의 삶을 찍은 영화가 있었다. 자기가 자기를 1년 내내 일기 찍듯이 촬영했다. 일본쪽에서 온 작품 중 상당수가 그런 방식이더라. 그런가 하면 중국은 디지털이 보급되면서 더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다. 지아장커도 HD카메라를 선택하면서 지하전영을 포기한 것 같더라. 처음에는 이런 결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아장커가 이렇게 배신하는가 싶었지. 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중국 감독들이 각자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필리핀은 실험적인 부분과 사회적인 억압에 대한 분노가 결합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어떤 것은 라틴아메리카 영화처럼 보이고, 한편으로는 천안문 시대의 중국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와중에서 디지털영화의 방법을 찾지 못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디지털로 저예산영화를 찍었다는 것 말고는 디지털영화의 가능성을 찾아냈다고 보기 힘든 게 대부분이다.

그런 와중에도 경쟁부문에 이상우 감독의 <트로피칼>과 김경묵 감독의 <청계천의 개> 등 두편의 한국영화가 포함됐다. 이 영화들은 어떻게 선택한 건가. & lt;트로피칼>은 트랜스내셔널 영화다. 물론 두편의 영화 모두 2개의 트랜스를 갖고 있는 영화들이지. 난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다. 이들은 디지털이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불가능한 영화를 구현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트랜스영화’라기보다는 ‘불가능의 영화’라고 이름 붙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작업들이 한국에서 디지털영화를 개념화하는 패러다임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 두 영화에 갖고 있는 나의 가장 큰 호의다.

상영작 가운데 빼놓기 힘든 건 왕빙의 14시간20분짜리 영화 <원유>다. 이 영화는 다른 첨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인스톨레이션(설치미술)으로 상영하는 방식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왕빙을 만났을 때, 그가 영화를 쉬지 않고 상영하는 게 원래 의도였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이미 로테르담에서 인스톨레이션으로 상영했으니, 이번에도 그게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어떤 방식의 인스톨레이션이 좋겠냐고 물었더니, 그것까지 자신이 이야기하면 인스톨레이션 작가의 영역까지 맡는 거라며 우리가 선정한 작가의 뜻에 맡기겠다고 했다. 마침 신은실씨가 환경영화제에 같이 프로그래머를 했던 정희우 작가를 추천해줬다. 영화도 알고 있고, 인스톨레이션으로 해외에서 전시회도 연 작가라더라. 정희우 작가가 현재 정해놓은 컨셉은 52개의 모니터를 이용하는 것이다. <원유>가 14시간20분 동안 52개의 숏으로 구성된 영화거든. (웃음)

지난해 위광이는 친구에게 빌려준 돈 대신 디지털카메라를 받았다가 영화를 찍게 됐다고 했다. 올해도 그런 독특한 사연을 가진 감독이 있는가. 올해는 희곡과 소설을 쓰다가 처음으로 영화를 찍은 <우부왕>의 장츠 감독이 있다. 이 사람은 폐소공포증이 있어서 극장을 거의 못 갔다고 하더라. 심지어 비행기를 타기도 힘들어서 이번 영화제에 올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말하자면 영화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거다. <우부왕>은 그가 카메라를 1주일 동안 배우고 찍은 영화인데, 이제껏 우리가 본 적이 없는 방법으로 찍었다. 보통 한국에서는 감독에게도 시네필의 경험을 요구하지 않나. 비평가에게 그러는 건 납득할 수 있는데, 감독에게 그러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감독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웃음) 그런데 장츠는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아예 새로운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거다. 이런 특징이 주는 울림이 있다. 즉 영화가 100년이 지나고 많은 표현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들이 영화를 좋은 의미에서 야만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거다. 나는 이번 영화제에 많은 한국 감독들이 찾아와서 영화의 표현이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니라, 아직 찾아낼 게 많다는 걸 깨닫는 재활의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 (웃음)

글 정한석, 강병진 · 사진 손홍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