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문화』 1996.03.01.(3·4월호)작품

비디오 천국

영화속에서 현실찾기,
예로 드는 이 세 편의 영화


영화가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인류학자 에드 모랭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들은 좀더 정확하게는 영화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대중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기계복제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시장가치의 원리에 지배되는 첫 번째 예술작품이라고 비꼬는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시장의 흥정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건 대답은 한 가지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바로 지금 세상의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곁에 다가와서 영화관 개봉을 바로 눈 앞에 둔 세 편의 영화 속에서 동시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세상에서 지금 가장 별난 아이디어를 갖고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장 삐에르 쥬네와 마르끄 까로 콤비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마치 서로가 서로의 절반인 것처럼 항상 함께 작업한다. 이미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여인숙에서 벌어지는 식인축제와 전쟁을 그린 SF 괴담 「델리카트슨」으로 열광적인 팬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작년 깐느 영화제에서 오프닝으로 첫 선을 보인 두 번째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로 쏜살같이 돌아왔다.

이 영화의 무대는 마치 표현주의 미술의 세계로 들어간 듯한 기계장치들이 사방에 늘어선 지구 끝의 세상이다.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밤. 창가 진열대에는 장난감이 나란히 놓여있고 귀여운 소년이 잠들어 있다.

드디어 기다리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벽난로를 통해서 들어온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산타 할아버지가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게 아닌가. 아이는 공포에 질려서 울어대고, 산타 할아버지들은 성큼성큼 다가간다. 이 모든 것은 악당 크랭크의 꿈이다. 이 악당은 아이들을 유괴해서 그 꿈을 훔치며 그것을 즐긴다.

이상한 사람은 크랭크 뿐이 아니다. 크랭크의 아내라는 난쟁이 여인, 똑같이 생긴 여러 명의 쌍둥이 아이들, 프랑켄슈타인처럼 생긴 사내, 이 모든 것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있다. 이제 이 악몽같은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힘을 합쳐 섬을 폭파시키는 것밖에 없다.

쥬네와 까로는 이미지를 너무 뒤틀어서 거의 상징의 꿈을 남겨놓지 않은 상상의 세계로 마치 다이빙이라도 하듯이 뛰어든다. 그러나 동화처럼 꾸며진 이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조작되고, 관리되고, 감시 당한다. 그것은 분명 우리 세계의 일상생활에 대한 은유이다.

심지어 악당 크랭크는 꿈을 훔치고, 그 꿈에 주인공으로 나타나 난장판을 만든다. 그래서 아이들은 꿈을 되찾기 위해 힘을 모으고 함께 싸운다. 이것은 희망에 가득 찬 무정부주의인가? 그건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악당 크랭크와 싸우면서 아이들의 전술전략은 분명 크랭크를 닮았고, 더 잔인하고, 더 용의주도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다시 이어지고, 권력은 심지어 확대 재생산된다.

쥬네와 까로가 몽상 속에서 현실을 넘나든다면 마티유 카소비츠는 곧장 현실의 복판 속으로 뛰어든다. 서른 두 살의 젊은 감독 카소비츠의 두 번째 영화 「증오」는 ‘관자놀이에 들이댄 총구’같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영화가 시작되면 독백이 들린다. 이 것은 50층에서 떨어지는 한 녀석의 이야기다. 녀석은 계속 중얼거린다. 여기까지는 괜찮아, 여기까지는 괜찮아. 이건 추락하는 게 아니라 착륙하는 거야.

파리의 근교이자 치외법권이라고 불리우는 방리외. 그러나 오늘 아침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열여섯 살 소년이 심문받는 동안 경찰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그 소년은 어제까지만 해도 이 동네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분노하고 절망에 빠진 방리외의 전사들은, 뒷골목의 아웃사이더들은 격렬히 항의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러나 경찰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무조건 해산을 강요한다. 마침내 충돌하고, 순식간에 소요로 번진다. 거리로 뛰쳐나온 버림받은 아이들은 자동차를 불지르고 유리창을 깨뜨리며 항의한다. 경찰은 곤봉을 들고 무차별하게 때리고 연행한다. 그 속에는 이제 우리가 함께 24시간을 보내게 될 세 명의 주인공도 보인다.

「증오」는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삼색기 아래에서 자행되는 프랑스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폭력의 영화이다. 카소비츠는 어느 날 경찰에서 맞아 죽은 자기 나이의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시시한 연애 이야기 따위에는 관심을 잃었다고 대답한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 카메라처럼 분노한 거리를 날뛴다. 곳곳에서 전장터처럼 연기가 치솟아 쓰러지고 잡혀간다. 처음에는 절대로 폭력만은 안돼, 라고 이야기하던 방리외의 평화주의자들도 기꺼이 전장에서 필요한 것은 쇠파이프라는 것을 배운다. 세상은 양쪽 진영으로 나위어 증오만을 배운다. 세상을 사는 것은 전쟁이다. 카소비츠가 아니라 전쟁학을 썼던 클라우제비츠의 이야기이다.

여전히 역사의 무게와 싸우는 것은 아시아에만 남은 것 같다. 대만 영화 감독 후 샤오시엔(侯孝賢)의 「호남호녀」는 영화와 영화 속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한다. 복잡한 남녀관계로 고민하는 여배우는 새로운 영화를 촬영 중이다. 이 영화의 무대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대만이다. 남자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중국 공산당의 군대에 입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중첩자로 몰려 감금당한 채로 종전을 맞이한다. 그리고는 대만과의 협정에 따라 대만으로 송환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에 의해서 빨갱이로 몰린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가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조작한 1949년 사태에 휩쓸려 처형당한다. 영화는 그 남자의 인생 곁에서 함께 살아온 여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영화의 안과 밖을 오가며 그려진다. 그래서 오늘의 대만과 어제의 대만이 때로는 날카롭게 맞서고, 때로는 여전히 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후 샤오시엔이 그려내려는 것은 정치적 논쟁이 아니다. 오히려 엉망진창인 삶을 살아가는 여배우가 영화에 출연하면서 어쩌면 어머니였을지도 모르는, 또는 그때 태어났더라면 바로 자신이었을지도 모르는 한 여인의 삶을 배워 나간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삶이란 역사로부터 진실을 얻어내는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성찰하듯이 느리지만 몇 번이고 다시 삶의 순간 사이에는 언제나 역사가 배어들었으며, 그래서 사람은 시간 속에서 배우고 깨달음을 얻어낸다는 사실을 매우 조용하게 바라본다.

서방세계의 영화가 몽상과 일상생활, 거짓과 진짜 사이에 놓여있다면 아시아의 영화는 시간과 삶 사이의 관계를 끌어내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화, 우리의 무의식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