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DVD』 2006.01.베스트

the Cinema|정성일, 정성일 식으로 말하다

정  성  일  이  뽑  은  
2   0   0   5   년   의
영 화  1  0 편

지난 호 ‘the DVD’를 보면서 아, 벌써 한 해가 지나가버리고 말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연말 결산 베스트 10이라는 말만 보면 그런 느낌을 갖는다. 그건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일인데, 한편으로는 재미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제 끝까지 남아서 당신의 영화적 안목을 물어보는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역사적 기록’이 되기 때문에 (이걸 직업으로 갖는 사람으로서) 목숨을 걸만한(!) 일이 된다. 이를테면 처음 <악어>를 본 다음 (김기덕의 미래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었던)1995년에 이 영화를 그 해 열 편의 영화 중의 하나로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평론가에 대해서 정말 이 사람 죽인다, 라는 느낌이 드는 경우는 둘 중 하나이다. 하나는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영화를 처음 보았는데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그냥 핵심을 딱 찍어서 설명할 때이다. 이를테면 칸 영화제는 지구상에서 그 영화를 처음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거기서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는 말은 그 어떤 참고의 글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럴 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 영화의 진수를 말하는 글을 읽을 때 감탄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절망적인 느낌을 준다. 이를테면 세르주 다네, 혹은 하스미 시게히코, 다른 하나는 20년 정도가 지나가버린 다음 그 사람이 남겨놓은 그 해의 베스트 10 영화를 볼 때 누가 정말 그 영화의 진수를 보았는지 결판이 난다.

아무리 그 영화에 그럴듯한 글을 써도 영화가 가짜면 그 영화에 대한 글도 가짜인 것이다. 가짜를 진짜처럼 쓰는 경우도 둘 중의 하나이다. 그 글이 사기이거나, 아니면 가짜를 보지 못하는 비평적 장님이라는 뜻이다(그리고 사실 둘 중 후자가 더 끔찍하다). 1950년대 까이에 뒤 시네마를 다시 보면서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은 20대의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 리베트, 로메가 뽑은 베스트 10 목록이 있는데 그들은 예외 없이 영화사의 고전을 놓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중에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졸작의 명단에 들어 있다가 결국 걸작으로 인정받은 영화들조차 이미 그때 용기 있게 자신의 명단에 올려놓고 있다. 사실 나는 영화 별점을 매기는 사람들을 보면 아, 이 사람들은 용기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바보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별 넷을 준 영화가 졸작으로 판가름 나도 그 영화를 걸작으로 우길 참인가? 혹은 별 하나를 준 영화가 결국 걸작이라면 그때 자신이 영화 장님이라는 비웃음을 피하지 못할 텐데 그걸 견뎌낼 (직업적) 용기가 있는가? 그런 평가를 충분히 고려한 다음 그 별점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한 것인가? 그 유명한 이야기.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에 별점을 주는 사람은 사실상 자신의 영화적 안목에 별점을 스스로 매기는 바보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각오를 한 다음 여기 내가 지난 1년 동안 본 영화 열 편을 뽑으려는 것이다. 우선 이 열 편의 목록에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우선 이 영화들은 올해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영화들이다. 영화제(나 시네마데끄)나 다운로드, 혹은 DVD로 본 영화들은 제외하였다. 그리고 재개봉한 영화도 제외하였다. 그 다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올해 개봉한 영화를 모두 보지는 못했다. (한국영화 87년, 외국영화 219편을 무슨 재주로 다 보나? 영화평론가라고 모든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본 영화에 한해서 명단을 작성했다. 그 점 양해하시기를. 그리고 여기 순서는 순위가 아니다. 한 가지 더. 나는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나누어서 뽑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말하면서 국적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우선 (나의 개인적인) 올해의 영화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이다. 크로넨버그는 점점 더 철학적 질문에 다가가고 있는데 이제 여기서는 마치 프로이드의 꼬마 한스의 예를 임상실험 하듯이 재현하고 있다. 꼬마 소년 ‘스파이더’는 어른이 되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방문한다. 이 방문은 말 그대로 방문이다. 마치 표현주의 영화처럼 재현된 세트 안으로 들어가 어른 ‘스파이더’는 소년 ‘스파이더’를 만난다.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수상쩍다. 아버지는 술집 여자에 빠져들고, 마침내 그 여자와 공모하여 어머니를 죽인 다음 뒤뜰에 묻어버린다. 그리고 그 여자는 집에 들어와 어머니인 척 하고 함께 살아간다. 소년은 거미처럼 집에 털실을 칭칭 감은 다음 그 여자를 죽여 버린다. 소년의 복수는 이루어진 것일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소년의 망상이었으며, 그가 죽인 것은 어머니였다. 크로넨버그는 이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우리를 속일 생각이 추호도 없다. 미란다 리차드슨은 이 영화에서 어머니와 술집 여자, 그리고 어른 ‘스파이더’를 돌보는 정신병원의 간호사 역을 하는 일인삼역으로 등장해서 이 모든 망상의 증후 안에서 매듭을 만들어낸다.

이 실내극 형식의 영화에서 크로넨버그는 일체의 장식 없이 환상의 재구성 과정을 역순으로 따라가면서 소외로부터 분리에로의 과정이 실패한 이 욕망의 붕괴과정을 따라간다. 사태의 심각성.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죽인다. 오이디푸스는 이제 아버지를 죽이는 대신 어머니를 죽이면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즐긴다. 혹은 아들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 이 무시무시한 괴담은 어떤 무효화의 선언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대신 차라리 어머니를 죽였을 때 이 곤충 되기는 인간 되기의 어떤 포기각서와 같은 것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기. 크로넨버그는 점점 더 인간에 대한 어떤 실망이 있다. 크로넨버그는 내게 데이빗 린치와 함께 항상 다음 영화가 궁금한 사람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 없는 사람>은 올해 가장 웃기는 영화다. 그 웃음이 너무나 가슴 서늘해서 몸서리 칠 정도이다. 카우리스마키는 여기서 유럽 자본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죽었다 살아난 남자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이 장면은 정말 어리둥절하다. 죽었다가 그냥 갑자기 깨어난다. 마치 예수처럼! 그런 다음 떠돌다가 구세군 밴드를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상의 규칙을 하나씩 만난다. 우리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든 규칙이 얼마나 이상한 것들인지 우리는 이 남자와 함께 매번 부딪친다. 이 통렬함. 그리고 자본주의 잔인함. 구세군들의 가냘픈 노력으로 정말 세상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구세군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게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구원이다. 나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던 해에 그 수상식장에 앉아있었는데, 아마도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이 이 영화로 당연히 황금종려 대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대상은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에 돌아갔다. 모두 의외라고 생각했다. 카우리스마키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수상 무대에 오르더니 “이 영화를 제작한 나에게 감사하고, 이 영화를 연출한 나에게 감사하고, 이 영화로 상을 받은 나에게 감사 한다”라고 수상소감을 말한 다음 사진기자들을 뒤로 한 채 그냥 식장을 나가버렸다. 과연 아키 카우리스마키에게 어울리는 수상 소감이다.

홍상수의 <극장전>과 김기덕의 <활>은 내 생각에 올해의 한국영화이다. 그 둘에게서 내가 놀라는 것은 거의 막다른 지경까지 왔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자신들이 계속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홍상수는 세상이 너무나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세상이 영화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희극적으로 끝나고, 세상은 그 희극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한 채 끝난다. 그래서 영화배우 영실은 “동수씨는 영화를 잘 못 본 것 같아요”라고 말한 다음 여관방을 떠난다. 동수는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걸어간다. 홍상수의 존재론은 희극이다. 그러나 그때 웃으면 안 된다. 그것은 영화가 세상을 향해서 웃는 웃음이다. 그림자가 실재를 향해서 웃는다. 그 실재의 주인이 그걸 보고 웃으면 그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어떤 상실, 윤리의 도난, 그럼으로써 숭고의 포기. 그런 다음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반대로 김기덕은 점점 더 세상에 관심을 잃어간다. <빈 집>에서 침묵을 지키던 그의 주인공들은 <활>에서 이제 자기들끼리만 귓속말로 이야기한다. 혹은 빈 집을 떠돌던 그의 주인공들은 이제 바다 한복판에 떠있는 배 위에서 뭍 저편의 세상의 그 어떤 형상도 끌어들이지 않은 채 살아간다. 뭍의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소녀를 찾아오고, 그들은 결혼을 서두른다. 활은 정오에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지고, 할아버지는 소년을 통해서 거듭 태어난다.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김기덕의 이 간절한 초인 의지는 <활>을 그의 영화에서 두 번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인다.

후 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는 단순히 오즈 야스지로의 탄생 100주년 기념 영화는 아니다. 그는 오즈를 빌려서 <밀레니엄 맘보>의 가상 속편을 찍는다. 그 안에서 오즈를 생각하는 대신 여전히, 아직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가족의 시간적 건너가기를 생각한다. 여전히 딸은 살아가야 하고, 아직 아버지는 죽지 않았으며, 하지만 딸은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시간을 그들 자신의 궤도를 따라서 살아갈 것이다. 이 영화의 네 명의 등장인물, 아버지와 계모, 딸, 딸의 친구인 하지메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들의 삶은 그저 지금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네 대의 전철이 각자의 레일을 따라서 스쳐지나가는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감동을 안겨준다.

물론 아직 다섯 편이 남았다. 그러나 이 난이 허락한 페이지는 여기까지다. 슬프다. 그러므로 나는 남은 다섯 편은 명단만을 적어 넣어야 할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로스>에서)왕가위의 <손>,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중) 아핏차퐁 위라세타쿨의 <세속적인 욕망들>,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불안>, 그리고 짐 자무쉬의 <브로큰 플로워즈>이다. 아마도 이 다섯 편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직 2005년이 끝나지 않았으니, 혹시라도 이 책을 산 다음 이 페이지를 맨 먼저 읽어주시는 독자분이 계시다면, 이 영화들 중에서 당신이 놓친 영화는 꼭 보아주면 고마울 것이다. 나는 당신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할 수 있다. 그 맹세와 함께 당신에게 진심으로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