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모,『아름다운 시절』, 박영률출판사, 1998』 1998.11.21.작품

이광모,『아름다운 시절』, 박영률출판사, 1998, 271~280쪽

자신을 보는 자가 또한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의 죽음은 많은 즐거움을 빼앗아 갈 것이다. 더 이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의 기원을 찾기 위하여, 혹은 법칙과의 갈등을 말하며 증오와 연민의 변증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나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게 될 것이다.1)

살아간다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외롭게 마련이다. 삶이라는 것에 휘둘려 시련을 겪고 상처를 받다보면 우리는 운명에 대해 반항적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늘을 노려보며 우리는 자문한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1988년 아버님께서 작고하신 후, 나는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2)

1) 이 글을 롤랑 바르뜨의『텍스트의 즐거움』의 일부다(『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94~95쪽). 그 중 인용하면서 일부 문장을 생략하거나 다소 변형하였다.
2) 이광모, '제작노트', 1998.

기억에 구멍이 난 것은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모질게 베인 상처처럼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간절하게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은 그 구멍 안으로 들어와서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상처를 계속해서 다시 떠올리며 거듭해서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시절'의 영화이다. 시작하자마자 우리들이 서있는 곳은 저 우물의 어둡고도 습기 가득 찬 깊디깊은 구멍 안이다. 불안한 소란과 분노에 가득 찬 소리들이 우리들을 죄오오고, 아무 곳으로 도망칠 수 없게 사로잡힌 우물 안 구멍 속에서 알 수 없는 죄의식에 벌벌 떨면서 이 영화 속의 우리들의 위치는 그 가장 자리에 꼭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결정된, 그러면서도 서로 공명하는(우물 안에서 들리는 그 이상하게 메아리치는 듯 울리는 소리들이 불러 일으키는 시간적 좌표), 그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저 밑에 내려가서 위를 올려다보며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또는 아이들이 호기심에 가득 차서, 때로는 죄의식을 느끼면서, 또는 분노에 가득 차서 그 얼굴을 들이미는 곳은 텅 빈 방앗간 허물어져 가는 구멍을 통해서이다. 영화 속에 수많은 구멍들이 나 있는 것은 그 구멍에 의해서 그 안에 나 있는 지워져버린 흔적을 우리가 채워야 하거나, 있는 것은 그 구멍에 의해서 그 안에 나 있는 지워져버린 흔적을 우리가 채워야 하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그 안을 들여다 보기를 두려워했던 것을 결국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구멍은 우리에게 갚아야 할 채무관계에 놓인 기억의 부채이다. 기억은 그 누군가에 의해서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 대한 진술이란 언제나 논리정연한 시간적 재현이다. 하지만 그건 기억이 아니라 강요된 자백이며, 그 안에 숨어 있는 다른 자기 의지의 체현이다.) 자기의 힘으로 버티어 서서 지금까지 지속되는 과거의 현재이다. 그러니까 이미 우리 곁에 있지 아니하다고 해서 기억을 이루는 사람들이 (어쩌면 환영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은 이미 곁에 없는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 어떤 누적의 무게이며, 그것을 고스란히 감싸 안으면서도 계속해서 밀쳐 내면서 마치 그러하지 않은 것처럼 자꾸만 가벼워지려는 소외의 구도 사이의 그 어떤 좌표이다. 무게와 구도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바탕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명령한다. 말하라. 너의 두려움과 그 모든 잘못이 나에게서 시작되었으니, 그것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털어놓아라. 죽은 자들은 쉴 사이 없이 귀환하고, 그 안에서 우리들은 수많은 방법으로 푸닥거리를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예술은 죽음이 닿지못하는 것에 대한 가상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했다. 이광모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기억에 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기억 속에 들어와 있는 그 알 수 없는 이타적인 존재자들의 얼굴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광모는 결코 기억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미지를 끌어들여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역사가 아니라 기억에 관한 것이며, 전쟁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다. 그럼으로써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여기서 영화는 일종의 기억장치이다.

그러나 그 장치를 떠도는 기억과 추억은 계속해서 웅성거린다. 그 웅성거림이야말로 <아름다운 시절>이 만들어내는 아우라(aura)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이광모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어른들끼리만의 두런거림, 어린 자신이 잠들기를 기다리며 어렴풋이 이승과 꿈 사이를 오갈 때 안방 저편에서 들려오는 두런거리는 그 소리들 사이에 섞여 있을 알 수 없는 이름들과 한숨소리, 나직하지만 미움과 회환에 가득 찬 숨결,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울음들이 종종 잠드는 그 순간의 문턱에서 들려올 때 시간은 질서를 잃는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딸, 그 아들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 아버지의 아들의 아들에게 더 이상 알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아들의 어린 아들이 잠든 후에야 풀려 나오기 시작하는 법이다. 그것은 잠들지 않은 꿈이며,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이광모를 붙드는 것은 웅성거림의 시간이다. 그는 건넌방에서 잠들며 안방에서 들려오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하여 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사건으로부터 문턱 저 너머만큼이나 멀리 떨어진다. 우물 속에서 붙들려 올라온 빨갱이 부역자 상언이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매를 맞으면서 시작하는 그 첫 장면에서 그렇게도 멀리 떨어져 있는 카메라와 이 모든 이야기의 사이는 이 영화 전체 내내 지켜지는 거리이다. 이 거리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아간 시대를 바라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아들의 이중적인 거리이다. 말하자면 그 아들이 살지 아니하였던 시대,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아갔던 시절을 함께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가는 것은 경험의 재현이 아니라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의 아버지가 될 수 있겠는가?) 기억의 복화술이다. (그럼으로써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시절>에서 카메라의 위치는 도식적인 의미에서 기억의 이편에서 아들의 아들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형태로 머물고 있는 그 웅성거림을 통해서 떠오르는 기억의 의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문지방 이편에서 결코 그 턱을 넘지 못하면서 (그 이중적인 불구성) 만들어내는 거리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시절>은 두 눈을 부릅뜨고 보는 대신 그 반대로 가늘게 눈을 감고 그 사이에 찾아드는 수많은 잡념과 그 순간을 못 참고 끼여드는 그 언젠가 들었던 저편 어른들의 낮은 목소리에 기대어 서서 보아야 할 영화이다.

그렇게 기억에 기대어 선 한국 전쟁이 진행되던 그 겨울 어느 날, 우물 안에서 거칠게 붙들려 올라온 그날, 그러니까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은 그날 그 장소로 끌어 올려진 채 내팽개쳐 지면서 '고향의 봄'을 듣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아름답습니다. 라고 (우리들의, 또는 이광모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합창하듯이 노래 부르면서 시작하는 <아름다운 시절>에서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은 (그 자신이 가 본적이 없는 고향 복사골의) 1952년 8월 10일에서 1953년 12월 26일까지이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자막으로만 떠오르는) 거제도 피난민이 읍사무소에 난입하던 그날부터 미군이 남한에서 2개 사단 철수를 결정하던 그날까지이다. 두 개의 시간, 그러니까 복사골에서 아버지 성민과 아버지의 아버지 최씨와 그의 아내, 여주댁, 그 딸 영숙이 살던 일년 사개월 십육일과 그들 모두의 저주받은 대지 위를 휩쓸고 지나간 역사로서의 시간이 병행하여 흘러간다. 이광모는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자신이 기억 속에서 알레고리로 만든 그 하나의 시간을 그 내재적 구도 위에서 커다란 세상과 작은 세상의 관계로 파악하는 대신 두 개의 기억 사이에 어우러져 진행되는 긴장의 상호관계를 껴안는다. 아주 개인적이며, 또는 부분적으로 지워져버린 그 이야기들 사이에서 만들어져 보여지는 그 기억들은 말하여져서 들린 것을 떠올린 것들이다. 그 기억들이 함께 살아갔던 시간들을 기술하는 제도의 시스템으로서의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자막에서 씌어지는, 그렇다, 모든 역사는 상징의 질서 아래 철자로 씌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그 사이에 인과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 사이의 합법칙성을 찾아내지만 이미 그 안에는 정서와 감각의 발현 사이에 스며든 흐느낌과 지워지지 않은 살의 상처들, 문득 문득 소스라치게 떠오르는 고통과 아픔의 현전(現前)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역사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것에서 떠나가 남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광모는 이미 역사가 되어가면서 동시에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바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잊혀지지 않는 그 순간 사이의 긴장을 본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그 중간 사이사이에 끼여드는 열 한 개의 자막들은 한국 전쟁이 진행중인 (그리고 그로부터 45년이 떨어진 1998년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진행중인!) 대지와 그 변경의 일부를 이루며 그 안에서 역사의 통일성 (동시대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내적인 밀고 당김의 풍경화이다. 이미 저 멀리 밀려나간 문서고와도 같은 역사 메커니즘과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을 통해 눈앞에 비밀스럽게 그 메커니즘을 간단없이 넘어서서 찾아드는 추억의 유령들은 이중의 무대를 만든다. 산으로 둘러싸인 복사골은 자막을 통해 끼여드는 그 수많은 사건들(1952년 8월 29일 연합군 평양공습, 1952년 8월 30일 생활시행령 발표, 1952년 10월 1일 남한에 대한 유엔의 원조 결정, 1952년 10월 2일 구호물자 전면 중단, 1952년 10월 12일 백마고지 전투, 1952년 10월 14일 제7회 유엔 총회의 한반도 문제 논의,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인, 1953년 10월 18일 반공포로, 북한 귀환 설득 거부, 1953년 11월 13일 닉슨 부대통령 내한, 그리고 1953년 12월 26일 미군, 남한에서 2개 사단 철수 결정)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쟁으로부터 상처받은 자들은 언제나 낯선 곳으로부터 이 마을을 찾아오거나 (창희 아버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서 (그 아들 창희) 알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그리고 결국은 성민의 가족들) 떠나간다. 복사골은 역사가 아니라 기억 속의 마을이다. 그럼으로써 벌어지는 그 모든 역사의 사건들은 복사골 저 편 산너머에서 벌어지는 것이며 (산으로 둘러싸인 복사골 마을의 산들은 언제나 아련한 안개에 둘러싸여 있거나 새벽 안개로 지워지거나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그 시간까지 기다려서 촬영한 빛과 안개를 산 주변에 배치한 장면들은 공기가 아니라 기억의 풍경화이다.) 기억을 품어 안으며 저 산너머에서 벌어지는 역사로부터 함께 벌어지는 그 둘 사이에 동시성을 말 그대로 기억과 역사의 원근법으로 다루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둘은 그 어느 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관계들의 집합 속에서 하나를 통해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대신 불가시한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이런 말이 허락된다면 (기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영화적인 정서의 의미에서) <아름다운 시절>은 시간의 페이드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자꾸만 페이드 아웃되어 가는 기억을 불러 일으켜 그 사이에서 페이드 인으로 끼여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시적이라는 의미는 꺼져 가는 시간 속에서 머물러 있는 이미지는 왜 남아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간섭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분명하지 않은 서로의 관계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알 수 없는 생략과 배제에 대해서 시종일관 불편하다. 왜 성민의 삼촌 상철은 상언이네 집에 쌀을 갖다주라고 한 것일까? 창희의 아버지 송씨는 추운 겨울 날 화투를 치는 최씨를 찾아와 무슨 말을 하고 간 것일까? 창희는 정말 미군들에게 잡혀서 꽁꽁묶인 채 물가에 쳐 박혀 죽은 것일까(아니면 저 멀리 어딘가 도망쳐 살아 있을까)? 그러니까 이 영화는 기억 속의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 나타나는 존재자들의 흔적들이 이루어내는 별자리의 짜임관계(Konstellation)이다. 그 관계들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기억들이 지워졌거나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이들 모두의 제스처들을 통해서이다.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아니면 등을 보이고 떠나가거나 그도 아니면 카메라 앞을 정면으로 지나가지 못하고 그 곁으로 조심스러이 지나쳐버린다. 어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자기보다 어린아이들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앞에 아이들이 없을 때 그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면목이 없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거나, 또는 그들에게 희망이 없기 때문에 고개를 들고 쳐다볼 그 무엇이 없어서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들은 너무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결코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뛰어 놀고 그 곁에서 철없는 소리를 한다. 이 영화에서 우는 사람은 없지만(창희 어머니의 울음조차 그 얼마나 소리를 죽여가면서 그 소리를 이를 물고 참아내고 있는가. 울 때 소리를 죽인다는 것은 정말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종일관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어른들과 아이들 사이에서 서로를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자신의 속마음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저 땅을 보거나 등을 보인다. 어른들이 등을 보일 때 그것은 그 어떤 비난과 공격에 대해서도 무방비 상태로 버려져 있는 그들의 항복을 의미한다. 성민의 아버지가 창희 어머니를 미군에게 소개하여 방앗간에서 몸을 팔고 돌아가는 그 모습을 성민이가 몰래 숨어서 바라볼 때 보이는 두 사람의 등은 그래서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그 어른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은 몹시 화가 나 있다. 그들은 말하지 않는 대신 화난 얼굴로 어른들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어른들이 언제나 멀리 롱샷이나 아니면 비스듬히 서 있는 상태에서 멀리 보이면서 그들의 부끄러운 얼굴이 지워져 있는 반면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성난 얼굴을 보여준다. 그 구멍을 통해서 아이들이 어른들을 보면서 이제 아이들과 어른들은 뒤섞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순간 아이들에게서 아름다운 시절은 끝나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역사에 발을 들이미는 것이며, 그때부터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움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그저 먼 훗날 기억 속에 남겨놓은 채 어른이 된 다음 자기들의 아이들을 잠재우고 서로 모여 앉아서 조심스럽게 추억에 잠길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그것만이 그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매우 역설적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시절'이기 때문이다. 성민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거울을 잃어버렸으며, 창희는 꿈에서조차 돌아와 세상을 태워버릴 라이터를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건네주지 않는다. 자아는 그 어디에 두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며 (또는 잃어버린 것을 알지만 다시 돌려 받을 방법이 없으며) 세상에 대한 미움은 그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태워버릴 참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어른이 되는 방법이었다. 아버지(들)는 그렇게 아버지의 아버지들과 싸우면서, 그래서 부정한 그 아버지가 종아리를 아무리 아프게 때려도 결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절대로 잘못했어요 라고 빌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미군들에게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돌아왔을 때에도 결코 부축하지 않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이 영화는 두 개의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결코 어느 순간에도 어른들과 아이들은 뒤섞이지 않으며, 질서정연하게, 매우 완상하게, 결코 화해하지 않으면서 서로 다른 블록을 구성한다. 그 사이에서 어머니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또는 못한다.) 그들의 모든 가족은 부서져가고 있으며 (이 미 부서진 상언의 가족, 부서져 가는 창희의 가족, 결국 부서지는 성민의 가족)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기어이 버티어내며 그 안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기억의 몫이 아니다. 이 영화는 아버지를 우상으로 받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오히려 가여이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대부분의 장면들이 아름답지만 탐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실은 그 반대이다. 부끄러운 어른들과 화가 난 아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공기, 커다란 전쟁과 그것이 벌어지는 대지의 저 편 변경 사이의 풍경 사이에 선 카메라가 버티어 서서 롱테이크로 잡아내는 화면은 구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서의 지속을 나누지 않기 위해서이다. 창희의 관을 메고 아이들이 길을 따라 걸어갈 때,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으면서 기어이 버틸 때, 부모를 죽인 빨갱이의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 스스로를 못 이기고 그 아이의 손바닥을 때리면서 모질게 말할 때, 언제 돌아올지 모르면서 그 삶의 여정처럼 구비구비 언덕길을 따라 한없이 떠나갈 때, 그 모든 때 카메라는 거기 그렇게 멈추어 선다. 그것은 고통의 지속이다. 아무리 아프지만 거기 그렇게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화가 난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은 버티어야만 한다. 그래서 셈을 치러야 한다.

소멸을 두려워하는 것은 더 이상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시절의 공기마저 거기에 담아서 그 순간을 다시 만날 때마다 다시 살아나게 만들려는 노력은 미라처럼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그 아무 것도 아닌 기념비적 존재가 되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밍서 <아름다운 시절>은 제 스스로 존재하는 세상이 어떻게 우리를 이루었으며,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관한 성찰이다. 그 안에서 이광모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통해서 삶의 방식을 물어보려고 한다. 그것은 일종의 안간힘이다. 왜냐하면 점점 더 사라져가는 자기의 기억과의 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내기를 피하지 않으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내기를 통해서 역사라는 경기장 안에 들어가 스스로와 경주하면서, 그러면서 그 스스로의 침묵을 견디어내며 만들어내는 지속들은 전적으로 이광모가 창조해 낸 그 자신의 몫이다. 나를 보는 자가 또한 아버지를 본다. 요한복음 14장 9절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