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세상』 1995.03.11.(2호)GV|작품

가톨릭 영상 선교모임

밝은 세상 의 두번째 좋은 영화와의 만남에서
'열린 도시 Open City' 를 보고 나눈 이야기들

때 - 1995년 3월 11일 14:00-18:00
곳 - 성 베네딕도회 피정의 집
原題 : Roma, Citta Aperta
감 독 : Roberto Rossellini
주 연 : Aldo Fabrizi, Anna Magnani
각 본 : Sergio Amidel
촬 영 : 우발도 아라타
편 집 : 에랄도 다로마
음 악 : 렌조 로셀리니
상영시간 : 105 分
제 작 : 이탈리아 1945년 미네르바 필름, 흑백 발성영화

<줄거리>
지하운동가인 만프레디가 게쉬타포에게 쫓기는 것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은신처를 빠져 나와 동료의 아파트로 가서 동료의 약혼녀인 피나의 도움을 받는다.
그는 저항운동을 은밀히 도와주는 신부 피에트로와 접촉하고, 피나가 게쉬타포에 살해당하자 그의 옛 애인이었던 마리나를 찾아가 숨는다 .
그러나 마리나의 배신으로 만프레디와 피에트로 신부는 게쉬타포에게 체포되고 고문 끝에 처형 당한다.

<무방비 도시>에 관한 평론가 강의
정 성 일

<무방비 도시>는 세계의 映畵史를 바꿀 정도로 가장 중요한 영화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보실 때 화질이 안 좋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자막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화질이 안 좋은 영화로 유명합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비디오 가이드] 라는 책을 보면 "여러분이 보시기에 가장 화질이 안 좋은 영화, 그러나 끝까지 보고 나면 무언가를 얻었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영화, 그러니 여러분은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본 후에 무언가를 얻기를 바란다" 라는 안내 문구가 꼭 붙어 다니는 영화입니다. 언제인가 파리의 시네마테크에서 이 영화를 볼 때도 화질이 너무 안 좋아서 자막을 읽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영화를 다 보고는 고개를 끄떡끄떡하고 나가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고 이 영화가 괜찮은 영화이기는 확실하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에 비해 여러분이 보신 지금의 화질은 상당히 좋은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로베르트 로셀리니 감독은 우리에게 흔히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을 처음 알려준 감독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운동이라는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폐허가 된 유럽에서 일어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그 이전에 이탈리아 영화가 映畵史에서 자리를 잡았었던 것은 무성영화시대 때 치네치타 촬영소를 중심으로 한 그야말로 대형 사극들이 중심을 이루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무성영화의 사극들이 유일하게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무성영화 시대 때 사극과 견줄 만한, 그러니까 유럽에서는 가장 대규모의 영화를 만든다고 알려진 영화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932년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으면서부터 그 후의 이탈리아 영화산업이라는 것은 국가 시책을 알리는 -우리 나라로 비유하면 새마을 영화 -그러한 영화로 시달리다 보니 재대로 영화다운 영화가 만들어질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영화 만들기를 지망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프랑스로 가서 영화를 공부하게 됩니다. 로베르또 로셀리니감독도 역시 1930년대 프랑스 영화의 대가로 알려진 장 르느아르 감독(인상주의 화가 오기스트 르느와르의 둘째 아들)인, 어쩌면 映畵史에서 가장 중요한 삼대 감독중의 하나인 장 르느아르(인상주의 화가 오기스트 르느와르의 둘째 아들 )감독에게서 연출수업을 쌓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에서 배운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여전히 파시즘 치하에 있습니다. 파시즘 시대에 로셀리니는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셀리니가 그의 데뷔작으로 찍었던 <비행사는 돌아 왔다 >는 파시즘의 선전영화였고, 그 다음의 <십자가의 남자> 역시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안전하게 찍을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세 번째 영화 <원망>역시 이른바 로셀리니에게는 가장 치욕스러운 파시즘 3부작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영화에서와 같은 상황들이 벌어졌고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눈이 떠지기 시작하면서 이런 영화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고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새로운 영화의 착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화가 <무방비 도시>입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같이하신 분은 여러분 중에 주의 깊게 보신 분은 자막에서 느낌으로 알 수 있듯이 여러분이 지난달에 보신 <길>을 만든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입니다. 그리고 펠리니가 이 영화의 조감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길>이라는 영화의 많은 부분들이 이 영화와 겹쳐있음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신부님의 아이들을 먼저 생각한 것은 펠리니였다고 합니다. 後日로셀리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신부님이 나오는 대목에서 할말이 자기보다는 펠리니가 더 많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셀리니가 <무방비 도시>와 같은 영화를 찍는데 정부로부터 감시가 느슨했고 이 영화를 찍는데 가능하였던 것은 그가 파시즘을 찬양하는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영화를 전시 중에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흔히 映畵史에서 영웅담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영화의 대부분이 전쟁 중에 찍혀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전시 후에 보충 촬영된 것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대목을 미리 알려 줄 수가 없었고 때문에 로셀리니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프로 배우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마추어 배우를 대부분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이 중에서 기성 배우는 안나 마냐니만이 전문 배우였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와 함께 시나리오를 썼던 펠리니나 촬영 기사를 제 외하고는 로셀리니의 의도를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로셀리니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웁니다. 그것은 우선 이 영화를 찍기에는 가장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여러분들이 보시면서 느끼는 중에 영화가 진행 중에 툭툭 끈기는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고 익숙한 헐리우드적인 영화 방법과는 달리 이 영화가 이어질라 하면 자꾸 끊어지곤 하는 것은 로셀리니가 어떤 미학을 생각했다하기 보다는 실제로 전시 하에서 충분한 필름을 공급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투리 필름을 모아 가지고 촬영을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문제였었습니다. 짧은 자투리 필름을 사서 영화를 준비하려다보니 아예 새로 운 방법으로 영화를 찍어보면 어떨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헐리우드적인 영화 찍는 방법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고 일단 야외에서 찍을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찍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독일 군들이 야외에서 어디에 인가 도착하고 뛰어가는 장면들은 전시 하에서 실재의 장면들을 찍은 것입니다. 일단 그러한 장면들을 로셀리니는 찍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다음 배우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로셀리니는 흔히 헐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안전한 편집 방법으로 알려졌었던 리버 셭드, 이 방법은 많은 액션의 매치커트라든가 연출진의 많은 노력이 따르게 되는데, 많이 세련된 연출이기는 하지만 비평가들에게서는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연출방법이 아니냐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던 이것을 오히려 로셀리니는 거꾸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느끼셨겠지만 많은 장면들이 한 장면에 통상 두 사람을 집어넣습니다. 또는 한 사람을 보여 준 다음에 정상적으로 다음 카메라로 상대방의 얼굴을 잡기보다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잡는다던가 아니면 종종 그룹 쇼트라고 하는 많은 사람을 동시에 잡습니다. 그렇게 인물들을 잡아내는 것이 오히려 모순된 현실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한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영화가 이루어지기보다는 그러한 참혹한 상황하에서 인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화면 속에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하다보니 관객들이 오히려 정상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서 대화를 쫓아가는 것 보다는 그 장면과 장면 사이를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그 장면들을 개별 단위로 생각하게 되고 개별화면 속에서 그 인물들의 사고를 관객들이 동화되는 대신에 관찰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 영화를 보시면 이 영화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기보다는 자꾸 밖에서 인물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는 쪽으로 영화가 찍혀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영화의 카메라 위치가 가장 안정된 구도라고 알려져 있는 화면의 싸이즈를 보면 가슴을 기준으로 해서 화면 위에 2/3를 비워 놓는 것 그래서 사람의 눈이 화면의 2/3 위치에 차지하는 것이 가장 안정된 화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안정된 방법인지 이야기할 때 클래식컬 헐리우드 스타일이라고 이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카메라가 바짝 자르기 때문에 화면이 항상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무언가 더욱 꽉 차 있거나 화면이 더 좀 물러나 있거나 해야 안심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보다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불안한 시점의 위치를 갖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인물들의 심리를 그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객관 적으로 바라 볼 수 있기를 로셀로니는 의도해서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이 있기는 했었지만 로셀로니의 이러한 장점이 <무방비 도시>에서 전적으로 꽃피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로셀로니의 <무방비 도시>에 대한 비판도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그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것은 대부분 좌파 비평가들로 하여금 많은 비평을 이끌어냈는데, 이 영화에 대한 결정적인 결점 중의 하나는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너무 멜로 드라마 적인 구조가 아니냐는 비판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전시하의 사랑이야기를 찍은 이상 이 영화가 무슨 메시지가 있는가 라는 비판의 목청을 높이는 비평가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로셀로니는 <무방비 도시>라는 영화를 찍고 난 다음에 찍은 영화가 <전화의 저편>이라는 영화였었습니다. 이 영화는 모두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 역시 <무방비 도시>와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무방비 도시>가 전시 하에 로마에서 촬영되었다면 <전화의 저편>은 연합군이 상륙하기 시작한 그 해변가까지 내려가서 연합군들이 차츰차츰 로마로 진격해 오는 과정을 카메라가 쫓아가면서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영화를 찍었으며, 이 영화에서는 로마가 해방되기까지 이탈리아인들이 어떤 고통을 어떻게 겪었나에 대해서, 전적으로 작가의 계획을 배제하고 감독의 객관적인 시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네오 리얼리즘의 원칙은 대부분이 <무방비 도시>에서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영화로 인하여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독>이나 르피노스 감독의 <대지는 흔들린다>같은 작품의 원칙들도 이 곳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찍으면서 로셀로니가 가장 고심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은 관객들이 영화의 등장 인물들로부터 관객들이 빠져나가서 이 영화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하느냐가 가장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기 위해서 리얼리즘에 아주 치명적인 한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영화는 찍는 바로 그 순간에 현실이 그대로 복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 가장 기교를 부리지 않은 영화가 가장 리얼리즘 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탄생했었던 영화가 역사에 역사를 거듭하면서 영화 속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작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역사의 역사를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점점 더 이야기 구조 즉 네러티브를 얼마나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될 것인가에 치중해서 달려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화는 점점 실내로 들어오게 되어서 1930년대 토키 영화 초기에 이르면 스튜디오 촬영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로셀리니는 거꾸로 카메라를 야외로 끌고 나가면서 영화를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영화 감독은 자기를 가르쳤던 르느와보다는 영화를 최초로 만든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야말로 자기가 가장 원했었던 이상적인 영화라고 말했을 정도로 뤼미에르 형제를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로셀리니는 이러한 리얼리즘을 찍기 위해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화 찍기를 아무리 야외로 나갈지언정 사건을 만들어 내야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문제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건을 만들어낼 때 그때부터 감독이 개입해서 영화를 조작해 내는 것이고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어떤 일정한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자기 딜레마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로셀리니는 고민하던 끝에 <무방비 도시>에서 사건을 강조하지 않고 사건을 사건처럼 보이지 않게 오히려 사건에 대한 사건이라는 어떤 이벤트에 대한 영화 등장인물들의 리액션 반응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도록 배치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통계학적으로 볼 때 즉 영화 속의 장면의 수를 통해서 볼 때 이 영화에서 일을 해나가는 사람의 쪽 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쪽으로 배치를 했는데 그러한장면 중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곳이 이 영화의 후반부에 있는 고문 장면에서 신부님의 표정 그리고 맨 마지막에 결국 죽음 맞이하는 표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장면들이 가해자 쪽보다는 피해자 쪽에 더 카메라가 위치 지어져서 그들의 표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정들의 배우들은 대부분이 아마추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연기하지 않는 아마추어였었기 때문에 관객들로서는 자기의 감정을 거기에 비추어 그 표정에서 그 사건들이 거꾸로 읽어낼 수 있는 배려를 해 놓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러한 방법들이 어쩌면 후세의 그 비평가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좀 이론적일 뿐이지 실제로 영화에서 활용되지는 못하지 않았는가 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정신은 그 후 두가지로 이어져서 그 생명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로셀로니 영화를 비롯한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을 보고 영향을 받은 1959년에 시작한 프랑스의 루벨 바그 감독들입니다. 가이드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에서 비평을 쓰고 있는 몇몇 감독들은 네오 리얼리즘 영화야말로 진실의 영화이다. 지금까지 영화는 모두 틀렸다. 스튜디오에서 찍는 영화는 모두 틀린 것이고 가짜이다. 진실을 담지 않았다. 그러니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거리에 나가서 영화를 찍겠다하고 16mm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의 표정을 찍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내면서 이제 스튜디오라는 잘 짜여진 공간 속에서 연기자들의 연기를 일일이 시키고 조명을 잘 설치해서 만든 웨이 메이드 필름보다는, 정말 영화가 진실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거리에 나가서 거리의 사람들의 생생한 표정을 잡아내는 것이 오히려 영화의 진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감독이 이야기할 때 비로소 감독의 목소리와 사회의 모순이 서로 만나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된 것이 하나의 물결이었고, 또 하나는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이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이 필름으로 라틴 아메리카를 돌아다니게 됩니다. 라틴 아메리카를 돌아다니게 됨으로써 이른바 특히 브라질이나 볼리비아 같은 지역에서 이 네오 리얼리즘의 영화를 보고 많은 영화 지망생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타 중심의 영화가 아니라 이른바 바닥에 사는 민중들이 중심이 되는 영화를 찍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흔히 시네마 노고 운동이라고 알려진 라틴 아메리카 제 3세계 영화운동의 정신 세계가 네오 리얼리즘으로부터 이어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받아서 영화를 찍은 감독들 중에는 아르헨티나의 솔라리스가 찍은 <용광로의 시간>이라든가 아니면 볼리비아에서는 우카마아 집단이라고 하는 영화 집단에서 만든 <민중의 용기>나 <콘돌의 피>같은 영화가 있습니다. 이들 영화들은 오히려 네오 리얼리즘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네오 리얼리즘 영화라는 것은 감독이 만들어낸 세계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지만 우카마오 집단이 만들어낸 영화는 자신들이 직접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지역에 가서, 탄광촌에서 영화를 찍을 때는 탄광촌에 직접 가서,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을 때는 그들의 자문을 받고, 그 사람들이 아니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면 그 장면은 지워버리고, 그렇다 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그들과 의논해서 찍는 이른바 제 3영화라는 것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 1영화를 헐리우드 영화라고 하면 즉 스튜디오 시스템 영화라고 하면 제 2영화는 감독이 중심이 되는 작가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는 보는 관객들이 그것을 그 직접 그들이 대상이 되어야 하는 그들이 주체가 되는 제 3영화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 네오 리얼리즘은 영화사에서 모더니즘으로 가는 길목과 제 3영화로 가는 길목을 열어주기도 한 것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올바른 방법이었느냐는 아마도 후세의 역사가들이 평가 할 것입니다. 다만 <무방비 도시>는 바로 그 둘로 나가는 네오 리얼리즘의 꽃을 피운 영화인 것만은 틀림없으며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점에서 갖고 있는 수많은 기술적인 단점보다는 이 영화가 갖고 있었던 도덕적 장점과 그리고 미학적인 장점들이 다시 한번 평가받아 다시 이 자리에서 이야기되기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1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계속적으로 나오는 인생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것도 있고 또 재미없이 슬픈 것도 있는 장면들이 굴곡되어서 시종일관 나오는데 인생이란 정말 살기가 어렵고 죽는게 쉽다라고 얘기하는 것에 감독이 관점을 두고 찍은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아이들에게 클로즈업되는 어린아이들이 중심 이 되는 그런 것에 관점을 두고 찍은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1

감독의 세계관을 물어주시기도 한 것인데 사실은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점에서 일부분 이 영화에 대해서 이 자리에 배우러 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두 신부님께 이 영화에 대한 해설을 들으면서 저는 많이 배웠습니다.

<무방비 도시>는 양쪽 갈래로 놓여진 길목이라고 많이 합니다. 그것은 후세의 감독들에게도 그러하지만 또한 로셀리니 자신에게도 또한 그러합니다. 로셀리니는 이 영화 다음에 즉 1949년에 찍은 영화는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이 감독은 끊임없이 두 가지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톨릭으로 나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막시스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좌파와 기독교 사이에서 이 사람은 계속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오 리얼리즘 이후 이 사람이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초까지 계속 추구했던 세계는 기독교 세계였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1960년대 신좌파 운동들이 일어나고 베트남전의 시작과 문화혁명이 지식인들에게 주는 영향, 그리고 1968년도 5월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그런 수많은 좌파들의 활동과 함께 로셀리니의 세계는 유물론적인 세계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1970년대에는 <루이 14세의 왕자 등극>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른바 영화에 있어서 어떻게 인간들이 건축이나 아니면 어떤 시대에 사회의 이른바 생산 양식이라고 불릴 만한 것에 소외되어 가는가를 심지어 왕조차도 소외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해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점점 더 인간이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하는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처음 극영화를 찍기 전에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 시작했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라기보다는 뉴스 영화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을 터인데, 뉴스 영화를 통해 다큐멘터리 영화의 사고를 통해 끊임없이 영화를 시작했었는데, 사실 로셀리니의 인터뷰를 추적하다 보면 종종 모순된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이 사람이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나아가서 찍기 시작한 영화들은 대부분 르네상스가 시작한 인간이란 말을 신과 인간의 경계선을 계속 그어간 시대 때의 소재들을 잡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로셀리니가 대단히 야심작으로 찍은 영화 중의 하나가 72년대의 3부작에 걸쳐서 상영시간이 거의 다섯 시간 가까운 <메데치가의 유산>이라는 영화를 찍게 됩니다. 그래서 메데치 가문의 유산을 통해서 거꾸로 가문들의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영화를 찍었는데 이 사람은 그러면서 점점 회의론자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회의론으로 빠져든 로셀리니는 <소크라테스>를 찍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자기 영화 중에 가장 중요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한 인물에 대한 자서전을 준비하던 중에 유감스럽게 유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찍으려고 했던 한 인물의 전기는 예수에 관한 예기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에 관한 얘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사실은 바로 그 점에서 질문하신 대로 <무방비 도시>는 그런 모순된 감정이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 <무방비 도시>에 있어서의 아이들을 천사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폐허의 거리에 만약에 천사들이 와서 산다면 이렇게 밖에 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천사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러한 무방비 도시 속에서 로마에서는 이렇게 살 수 밖에는 없지 않은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로셀리니가 그것을 그렸고 그것을 구상화시키고 형상화 시켜낸 시나리오를 형상화시킨 사람은 펠리니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쩌면은 아이들의 이미지 속에서 우리가 종종 젤소미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우연은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는 그 두 가지의 형상이 아이들 속에 겹쳐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 인생의 모순되고 어떤 때는 유머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슬픈 것이 아니냐는 것에 이 영화의 제목이 오픈 씨티 인데, 바로 이 영화의 끝을 오픈 앤드로 열어 놓습니다. 어떤 해석도 가능하게 그러니까 헐리우드 영화들이 크로즈 폼으로, 폐쇄된 폼으로, 해피 앤딩으로 또는 슬픈 앤딩으로 슬프면 슬픈, 주인공이 죽으면 죽어서 슬픈, 아니면 살아서 기쁜, 그러한 앤딩이 아니라 로셀리니는 사실은 이 신부님이 죽었지 만, 이 신부님이 처형당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영화는 희망을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그래서 영화는 그 죽는 모습과 아이들의 휘파람 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폐허가 이 도시를 아이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시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설마 전대가 저지른 것과 똑같은 잘못을 다시 한번 하지는 않겠지만 로셀리니의 정말 간절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장면이 이 영화 속에서 드물게도 이 영화 속에서는 의외로 카메라를 유심히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동 쇼트가 별로 없습니다. 정지 쇼트만을 통해 계속 영화가 인물을 돌아가면서 보여주거나 아니면 정지된 상태에서 가볍게 카메라가 올라가서 보거나 내려가서 보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지막 장면은 카메라의 이동 쇼트를 보여 줍니다. 그러니까 그 이동을 통해서 아이들이 폐허 같은 산악 지방의 모습을 보여주고 뒤이어 로마 시를 내려다보면서 사실은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싶다 합니다. 저는 이 영화 속에서 양쪽 어느 쪽에 해석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모순된 두 개의 관점이 같이 있는 것,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좌파와 가톨릭이 서로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 힘을 합칩니다. 어쩌면은 그 폭력적인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 어느 쪽도 중요하지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어느 쪽을 선택했었건, 오히려 둘이 만나서 같이 싸우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 속에는 거꾸로 이 영화가 로셀리니라는 감독이 나아가야 될 두 가지의 길이 또한 동시에 담겨져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쪽 중에서 어느 쪽의 편에 서서 어느 쪽을 위할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부분이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사이 속에서 어떤 화해 점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오픈 시티라는 해석보다는 무방비 도시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로마가 연합군에 의해서 해방된 다음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탈리아는 가야 될 무수한 길이 있었을 것 입니 다. 그 무수한 길 속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유럽에서 해방되고 나서 좌파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레지스탕스들이 활동을 했었으니까 또한 가톨릭의 목소리도 높았었고 많은 목소리들이 높았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과연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가 오히려 이 무방비 도시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로셀리니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런 희망이 있었던 것이 이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같이 썼던 페데리코 펠리니가 1960년에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를 찍습니다. <길>에서 그렇게 구원의 희망을 가졌던 펠리니의 스승이었었던 로셀리 니가 작가로서는 처음 영화를 찍는데 그 영화가 <달콤한 인생>입니다. 그 영화의 첫 장면은 헬리콥타에 예수의 동상이 실려서 어디론가로 날아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후 그야말로 현대의 복지 국가로 들어서는 이탈리아의 로마는 퇴폐와 타락에 물든 소돔과 고모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펠리니는 정말 희망이 떠나간 로마를 그립니다. 그래서 펠리니는 전쟁은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가톨릭과 좌파들이 서로 힘을 합쳐서 폭력을 몰아 낼 때는 희망이 있었을 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오히려 정말 그 타락과 퇴폐를 몰고 온 것은 화해가 사라진 다음이 아닐까 하는 예기를 펠리니가 1960년에 하면서, 1945년에서 1960년까지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사이에 그래도 전쟁 속에서 희망을 가졌던 것이 1960년대에 가서는 절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에서 오히려 이 <무방비 도시>에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요지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두 가지의 해석의 문이 이 영화에 항상 열려져 있다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이 영화의 상징성을 끄집어내서 분석하려는사람들은 오히려 이 영화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 속에서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를 찾아내기보다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다큐멘타리에서 시작한, 현실에서 시작한 끈을 놓치게 된다면 이 영화 속에서, 그 전쟁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영화를 찍으려 했던 로셀리니의 노력은 어쩌면 증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끈을 잡는 것은 끊임없이 이야기 해주신 대로 현실의 끈에서 이야기한 대사들을 다시 한번 생각 해보는 것,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쉽다라고 하는 그 말이 갖는 의미를 바로 죽음 직전의 신부님의 했었을 때의 그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그

런데 그 이야기를 한 신부님을 아이들이 휘파람을 부르면서 보냈을 때 그 아이들이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일까라는 그래서 작은 감방에서 시작해서 이 영화는 로마의 커다란 도시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시퀀스가 마무리를 짓습니다. 좁은 감옥에서 커다란 로마로 끌고 나갑니다. 이야기는 절망으로 끌고 가지만 화면은 희망으로 끌고 갑니다. 바로 그 모순된 것 바로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어떤 성찰이고 반성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셀리니는 다큐멘타리는 흔히 현실을 그리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로셀리는 거꾸로 가장 현실적인 것에서 그런 네러티브와 메세지의 모순을 통해서 형이상학적인 엔딩으로 끌고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질문 2

이 영화를 만든 로셀리니와 같은 세계관이나 작가 정신으로 현재 세대에 그러한 자세로 영화를 만든 감독을 든다면 누구를 들 수 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라면 어떤 영화인가를 묻고 습니다

답변 2

전쟁 영화라면 흔히 두 가지의 부류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전쟁을 다룬 영화가 있고 하나는 전쟁 속에서 찍은 영화가 있는데 아무래도 이 영화는 후자의 경우라고 봅니다. 전쟁 영화를 제일 처음 만들어 낸 것은 역시 헐리우드 입니다. 그리고 전쟁 영화야말로 그 유명한 헐리우드 제작자의 표현을 빌리면 전쟁만큼 스펙타클 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만큼 가장 영화에 어울리는 장면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영화를 찍으면서 헐리우드 영화가 놀랄 만큼 Technology가 발전을 이루었다고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전쟁 장면을 찍으면서 수많은 카메라의 트릭들이 발전했고, 또 수많은 사운드들이 점점 더 발전을 하였고 그래서 코플라가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옥의 묵시록은 두 개의 미학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화면의 충실주의와 사운드의 리얼리즘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사운드는 마치 전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극장 안에 들어와 듣는 소리로 영화관을 불바다로 만들어주고 화면은 마치 몽상극을 보는 것처럼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헐리우드가 영화를 진실로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비판받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로셀리니와 가장 비슷한 작가 정신을 가진 사람을 알려 달라고 말씀하셨는데 준비해 온 것은 없지만 많은 사람 중에 몇몇을 알려드린다면 특히 로셀리니를 스승으로 모시는 감독들일텐데 여러분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감독 중에는 첫 번째로 에밀 쿠스트리아챠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영화 중에 특히 추천하고 싶은 것은 <집시의 시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찍기 위해서 에밀 쿠스트리야차는 집시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집시들과 2년 동안 같이 살면서 그들의 신화의 세계라든가 그들의 구전 민요 같은 것들을 일일이 전부 채집을 하고, 그리고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그 마을의 집시들을 자기 배우로 썼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로셀리니의 영화미학으로 찍었다기보다는 아마 로셀리니와 같은 영화 정신으로 찍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내가 그들의 내면 세계를 얼마만큼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에밀 쿠스트리야차 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계속 생각했던 감독이 세 사람 있었는데 그가 인터뷰에서 대답한 감독이 하나는 장 뤽고다르였었고 또 한 사람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었고 마지막 한 사람이 로셀리니였었습니다. 아마도 그 세 가지의 정신이 에밀 쿠스트리야차의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고 대부분의 루벨바그 감독들중에 특히 에릭 로머하고 자그 리베트라는 감독이 있습니다. 에릭 로머는 영화속에서 어떤 도덕률이라는 것이 지키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라는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찍어 나간 감독으로 잘 알려있는데 아마도 그의 영화 속에서 로셀리니적인 영화의 전통이 다시 새롭게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은 영화를 주로 연작 시리즈로 많이 만드는데 이를테면 60년대에 그가 찍은 영화는 도덕에 관한 여섯 개의 교훈극이라고 해서 여섯 편의 영화를 찍었고 80년대에 들어와서 격언과 속담에 관한 이야기 여섯 편의 연작을 찍었었는데 그러나 이 두 명의 감독이 로셀리니만큼 치열하게 현실 속에서 시작하여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것이 가져온 예술적인 결과, 예술작품이라고 이야기해도 저는 달리 로셀리니가 만들어내고 그의 동료들이 같이 생각하고 사고하고 영화로 만들어낸 네오 리얼리즘의 정신을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만약에 기회가 된다면 아마 이 자리에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만든 네오 리얼리즘의 정신을 갖고 있었던 그 감독들 이 만든 그 영화를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유럽의 로셀리니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인 유럽의 패배의 지성주의가 어떻게 라틴 아메리카에서 낙관의 희망주의로 바뀌어서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는가를 보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질문 3

오늘날 영상세대에게 이 영화가 주는 가치를 어떻게 설명하시고 싶으신 지요.

답변 3

비판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게끔 유도하는 질문을 하셨는데 저는 영화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다 영화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거리에 나서면 온갖 광고판들과 이미지들이 여러분들을 다른 사고를 못하게 할만큼 이 세상이 영상화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상세대가 거꾸로 영화세대를 죽여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텔레비젼을 켜도 영상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에도 건물에 있는 형광판들이 영상을 막 쏟아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영화가 영상과 싸우고 있는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화의 이미지의 속도가 우리가 현대 속을 살아가는 이미지의 속도를 상대해서 거꾸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 그러한 것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들은 이제 점점 영화를 벗어나서 영상화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헐리우드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영화라기보다는 MTV와 광고 CF의 이미지적인 이미지들과 스타의 브로마이드가 그야말로 뒤섞인 일종의 잡탕 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영화라는 것이 시작하여 영화가 인간들에게 꿈을 주었을 때 영화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영화작가들은 우리가 통상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미지의 속도와 다른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래서 현실보다 다소 더 늦게 더 정지시키고 끌어당기고 그것을 지체 시켜가면서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저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 을 영화관에서 볼 때 여러분들도 많은 경험을 하셨겠지만 영화관이 여관이 된게 아닌가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관에서 자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지만 자다 일어나고 또 자는 영화관은 처음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러한 이미지의 속도가 현실의 속도로부터 너무 느리니까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감독들은 끊임없이 이미지를 불러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타르코프스키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현실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이미지의 속도를 이미지를 통해서 그러니까 독약을 독약으로 치료하는 것입니다. 왜 약이라는 그리스어에는 독약이라는 말과 같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미지의 속도를 불러 세워서 그로부터 이미지로 하여금 명상하고 성찰하게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실 그러한 감독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십계를 만든 키에실롭스키의 영화들이 또한 그러하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의 영화감독 중에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유난히 이미지의 속도가 느립니다. 그러니까 현실과 다른 속도를 만들어서 계속 사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런 <무방비 도시>가 만들어진 시기에 네오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라는 이야기는 이미지의 현실 속의 이미지의 속도와 영화 이미지의 속도가 거의 같았던 시기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하고 이미지의 속도는 점점 더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런 <무방비 도시>와 같은 영화들은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좋은 영화라고 일깨우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들고, 참고 그것을 보게 만들고 그래서 거기서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임과 같이 대화를 유도해 내서 그들로 하여금 영화를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할 때 영상세대를 저는 영화세대로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작은 희망을 걸어봅니다. 바로 이것이 영화를 끊임없이 찬미하고 영화를 전념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영상세대가 세상에 만연한다는 것은 영화가 세상에 만연한다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자기의 상품을 팔아내기 위해서 광고적인 이미지를 온 세상에 만연시킨다는 의미라고 저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화가 우리 영상세대에게 갖는 의미야말로 즉 고전의 영화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말은 고전 소설을 다시 읽어서 옛날 것이 좋은 것이라고, 溫故之新이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러한 이미지의 속도를 불러 세워서 그러한 속도를 다시 한번 올바르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 옳기 때문에 바로 이런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저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밝은세상에서 주최한 제2회 좋은영화보기 모임에서 함께 본 명화 Open City에 대해서 도움말을 해주신 정성일씨는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