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W』 2001.02.본인인터뷰

인터뷰_ 영화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뤄 두었던 일을 이젠 해야 겠구나… "

앞으로는 가급적 영화에 관한 글은 쓰고 싶지 않다며 2000년 12월로 '키노' 편집장을 그만 둔 이유를 밝혔다. '가장 많은 열성팬을 보유한 영화평론가' 라는 수식어와 함께 영화 전문 잡지 '키노' 편집장으로서 전주 영화제에 프로그래머로 참가하며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해 온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놀랄만한 고백이다.

키노 편집장을 그만 뒀지만 4월달에 있을 전주 영화제 준비로 요즘 그는 여전히 바쁘게 보내고 있다. "국제 영화제에 가면 외국인들이 중국에서 왔냐고 많이 물어봐요." 그러고 보니 홍콩 영화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있고 마음씨 좋은 한 아저씨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영화와 함께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시종일관 진솔하고 진지하게 풀어놓는 모습에서 이번 일이 그의 인생 행로에 한 획을 긋는 '결단'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제 막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의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영화평론가는 정성일이 원했던 길이 아니다. 처음에는 영화현장에서 연출부 일을 하면서 글도 쓰고 번역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나 25살의 나이에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던 그에게 이런 생활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영화 현장에서의 일을 포기하고 잡지사에서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운명이 13년이 됐어요. 중요하다는 30대를 그렇게 제가 원치 않게 살았죠. 물론 제가 선택한 길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순식간에 10년이란 시간이 사라져 버렸어요." 우리는 운 좋게도 훌륭한 영화평론가 한 사람을 선물 받았지만 정성일에게 그 길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늘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평가, 이에 따르는 작은 문화 권력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안주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9살 소년과 영화와의 첫만남

정성일과 영화의 첫만남은 그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3류 영화지만 아무도 나한테 얘기해 주지 않았던 세상을 처음 체험하는 순간 제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예요. 그 첫키스 이후로 지금까지 전 영화에 홀려 지내온 셈이죠." 그는 영화와의 첫만남을 소중한 첫키스의 추억에 비유한다. 사람들이 '영어'라고 하는 말이 자신에게는 '영화'라고 들릴 정도였다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그토록 영화를 사랑했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한 발 비켜서 있어야 했기에 '영화평론가 정성일' 이라는 타이틀이 그에게 행복만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 많이 보지 마세요."

정성일은 이 세상에 영화는 모두 다 봐야 될 것 같은 갈증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1700여 편의 영화를 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속해서 78일동안 영화를 본 적도 있다.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 일본까지 보러 간 경험도 있는데, 인생에서 가장 비싼 영화를 본 셈이다. 그러던 그가 이 세상에 영화가 다 볼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35살 즈음이었다. 영화와 인연을 맺은 지 25년이 지난 후의 깨달음이다.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읽어도 다 못 읽을 좋은 책들이 있고,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는데 두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영화만을 보고 살기에는 가치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두 시간이 이러한 문화적 체험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행복한 시간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가치 있다고 생각되면 그 영화를 보라고 말한다. "순간순간, 작은 사건들이 모여 삶을 이루는 거잖아요. 저는 그 시간들의 집합이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길 바래요. 그 소중한 시간에 시시한 3류 영화를 본다면... 불꽃같고 열정적인 삶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영화평론가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렇다. 영화 많이 보지 말라고…

"영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내 삶에 있어서도 목표는 영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내가 무엇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거죠. 영화는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영화를 빼놓고 그의 인생을 얘기할 수 없지만 영화만이 그의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의 영화관에는 영화를 제대로 알고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뚜렷한 주관이 담겨있다.

정성일이 생각하는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영화란 어떤 것일까. "나에게 좋은 작품이 관객들에게도 좋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비추어 자기를 격려해 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죠. 5년 후, 10년 후에도 나에게 새롭게 다가올 수 있고, 내 정신이 그 영화와 함께 커 갈 수 있다면 좋은 영화가 아닐까요."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가 사람들에게 소중한 의미로 다가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심심풀이로, 시간 때우기로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영화는 그 이상의 가치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좋은 영화 한 편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정성일은 영화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귀중한 의미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영화와 처음 만났고 그 이후 지금까지 정성일은 영화안에서 살아왔다. 그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한다.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길에서 한 걸음 비켜 서 지켜 본 그였기에 우리는 앞으로의 행보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그가 이제 영화안에서 어떤 새로운 좌표를 그려나갈지 궁금하다. 선언하듯이 하는 말보다는 직접 보여주고 싶다며 말을 아꼈지만 벌써 우리는 그의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그의 지향점이 녹아있는 영화를 보며 우리의 정신세계가 그 영화와 함께 커 가기를 소망해본다. 그의 말처럼 영화를 보는 두 시간이 나머지 22시간, 그리고 5년 후, 10년 후에도 우리를 키워 줄 수 있도록…

정성일은 키노 편집장으로 있던 7년 동안 단 한번도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쉬어 본 적이 없다. 그동안 격무에 시달려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최대한 다 쓰고 죽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불꽃같고 열정적인 삶에 대한 강한 의지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전주 영화제가 끝나면 이집트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피라미드를 실제로 보고 싶어서요." 사람좋은 웃음을 띠며 말한다. 그런데 쉴새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그를 쉽게 놓아줄지 걱정이다."

김이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