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DVD』 2003.06.본인인터뷰

정성일의 고전영화 읽기

40년 만에 다시 태어난 펠리니의 <8 1/2>

얼마 전 프랑소와 트뤼포, 베르너 헤어조크 박스 세트를 출시해 매니아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알토 미디어가 오는 6월 중순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컬렉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4월의 마지막 화요일, 특유의 진지하고 학구적인 목소리로 펠리니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만났다.

아마도 2003년 봄은 아트필름 매니아들에게 퍽 각별한 시기로 기억될 듯하다. 바로 아네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끌레오>, 로저 바딤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등 출시가 요원했던 고전영화들이 양질의 DVD로 세상에 나온 것. 그리고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 <프랑소와 트뤼포 박스 세트>와 <베르너 헤어조크 컬렉션>은 감동이라기보다 차라리 희열에 가까웠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유려하고 고급스런 박스 디자인은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으며, 그 안에 DVD라는 '뉴 미디어'에 새롭게 담긴 영화들은 40여 년의 시간차를 잊게 할 만큼 본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DVD들의 산파는 바로 알토 미디어. 지난 2001년 1월, <우나기>와 <박하사탕>을 출시한 이후 타이틀 제작에 잠시 휴지기를 가졌던 알토 미디어는 올해 초 <트윈 픽스> 극장판을 출시하며 DVD 시장에 새로운 모습으로 복귀했다.

이제 '한국판 크라이테리언'을 표방한 알토 미디어는 앞으로 고전을 중심으로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들을 DVD로 속속 선보일 예정이다. 물론 이전에도 몇몇 제작사에서 간간이 고전영화들을 출시해왔지만, 극소수를 제외하면 그 결과물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 사실. 따라서 알토 미디어의 이러한 행보는 국내 DVD 시장에 작은 지각 변동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차기 라인업으로 잡혀 있는 것은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박스 세트.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4월 29일, <길> <달콤한 인생> <나는 기억한다>와 더불어 펠리니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8 1/2>의 코멘터리 녹음 현장을 찾았다.

펠리니를 대신해 <8 1/2>에 숨결과 온기를

이번 코멘터리의 주인공은 바로 정성일 씨. 영화광을 자처하는 사람 치고 과연 그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89년부터 92년까지 '로드 쇼', 95년부터 2000년까지 '키노'의 편집장을 맡았으며, 그밖에 서울단편영화제 집행위원과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도 활약했던 그는 현재 영화평론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의 글은 익히 그 명성이 자자하지만, 이와 함께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달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90년대 초반 MBC FM '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주말 고정 코너였던 '정성일의 영화 읽기'는 당시 뭇 영화 소년,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런 그의 이력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코멘터리 녹음에서 그를 따라올 영화평론가는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미 한국 영화 <소름>에서 윤종찬 감독과 대담 형식으로 코멘터리 작업에 참여했던 정성일 씨는 이번에는 홀로 녹음에 임했다. 펠리니의 박스 세트를 기획한 알토 미디어의 최윤진 PD는 애초 정은임 씨도 함께 섭외하려 했지만, 그녀가 프리랜서 방송인이 아니라 방송국 소속 아나운서인 관계로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울 논현동에 위치한 사운드 퍼퓸 스튜디오에서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된 코멘터리는 약간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최근 제작된 영화라면 당연히 감독에, 배우들에, 제작진까지 한데 모여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엮어가겠지만, 펠리니라는 당대의 거장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작 <8 1/2>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시간인 만큼 스튜디오의 공기는 시종 차분함과 진지함으로 가득했다. 정성일 씨의 달변은 실로 놀라울 정도. 물론 영화의 러닝 타임이 2시간을 훨씬 상회하기 때문에 중반 이후부터 조금씩 힘에 부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는 몇 차례 휴식 시간을 가졌을 뿐 거의 일관된 페이스를 유지해나갔다. 이 녹음을 위해 정성일 씨는 꼬박 4일을 투자해 원고지 1백 매 분량의 자료를 작성했으며, 개인적으로 예행 연습도 했다고 한다.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면모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영화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DVD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가야

코멘터리 녹음은 6시가 거의 다 돼서야 끝났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의 온 에너지를 녹음 작업에 집중시켰으니 입에서 단내가 날 법도 한데, 전체 DVD 제작을 담당한 이정은 PD, 최윤진 PD와 함께 한 저녁 식사에서도 그의 영화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 와중에 이번 작업 및 DVD 전반에 관한 질문들을 그에게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답변은 명쾌했다.

"물론 <8 1/2>의 코멘터리를 맡게 된 것이 제 선택 사항은 아니었지만(웃음), 펠리니라는 위대한 감독의 훌륭한 작품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영광입니다. 예전에 30∼40번도 넘게 본 영화지만, 또 다시 세 번을 보면서 나름대로 많이 준비했고 녹음에 임하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아직까지 국내에선 이런 작업의 선례가 거의 없는 상황이기에 일종의 좌표를 마련하고도 싶었고요. 물론 저 역시 앞으로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겠지만, 이런 과정이 뒷받침되면서 제 다음 세대들이 저를 뛰어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국내 DVD 문화의 현주소는 어떤 모습일까.

"DVD는 단순히 영화를 보고, 소장한다는 의미를 넘어 교육의 개념까지 포괄한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8 1/2>과 같은 고전은 시대를 초월해 영화학도나 영화광이라면 꼭 봐야 할 작품이지요. DVD는 이를 위한 가장 적절한 매체이며, 여기에 수록된 코멘터리는 그 자체로서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입니다. 제가 남긴 코멘터리를 제 아들이나 손자 세대에서 듣게 될지도 모르지요(웃음). 분명 DVD라는 매체가 기존의 영화 보기 관습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현재 시네필보다는 AV 매니아들이 전체적인 DVD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한편으론 영화 자체의 중요성이 점차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 DVD를 영화와 보완 관계를 가진 매체로 파악하면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8 1/2>은 <영혼의 줄리에타> <사기꾼들> <페데리코 펠리니 다큐멘터리>와 함께 묶여 <페데리코 펠리니 Retrospective Collection Vol.1>이라는 박스 세트로 출시될 예정. 제작 여건상 정성일 씨의 코멘터리는 <8 1/2>에서만 들을 수 있다지만, 그 아쉬움을 잊게 할 만큼 이날 작업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사상 최고의 코멘터리? 아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글 _ 임흥렬 기자  │  사진 _ 최진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