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논쟁 토론』 2004.08.24.좌담

2004. 08. 24. 정성일, 전찬일의 <엘리펀트> 찬반논쟁 기사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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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08. 26. 정성일, 전찬일의 <엘리펀트> 찬반논쟁

‘호러보다 더 섬뜩한 공포와 슬픔을 전해주는 걸작’이냐 ‘정말 불친절하고 아무것도 결론 내리지 않는 무책임한 영화’냐. 구스 반 산트의 신작 <엘리펀트>에 대해 일반 네티즌들의 평이 엇갈리고 있다. <엘리펀트>는 작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하면서 절대적인 비평적 지지를 받았던 작품. 하지만 일반 관객들의 엇갈린 반응처럼 정성일, 전찬일 두명의 평론가도 이 영화에 대해 매우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지난 8월 24일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는 공식적인 지지입장을 밝힌 정성일과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전찬일이 공개적인 논쟁 토론을 벌였다.

비판적 견지를 보인 전찬일은 단지 구스 반 산트가 그저그런 메이저 영화에서 훌륭했던 초심으로 돌아갔다는 이유로 영화가 과대평가 받았을 뿐이며 하나도 새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음악의 사용, 롱테이크의 사용, 비전문 배우의 기용 등등의 스타일적 실험 또한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왕따 소녀, 흑인소년의 죽음이 전시되는 것과 사건을 벌인 알렉스와 에릭의 범행의 원인을 어설프게 제시한 것도 매우 위험하고 어설픈 원인 규명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엘리펀트>가 구스 반 산트 최고의 걸작이라는 지지를 표명한 정성일은 이 영화는 엄청난 사건이 이미 일어난 후, 벌어진 사건을 재현하면서 원인을 규명해보려는게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아름다운 순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영화라고 규정하였다. 콜럼바인 사건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마이클 무어처럼 선동하고 원인을 찾아내려는 행동인데 원인을 규명하려는 강박관념은 바로 거기에서 빠져나오려는 태도와 연결되기 때문데 위험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구스 반 산트가 그런 오류를 피하고자 어떤 식으로든 이런 것이 원인이었다는 식의 설명을 피하고 각각의 아이들(가해자까지 포함하여)이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자꾸 되돌아감으로써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엘리펀트>의 방식이 이런 사건을 다루는 윤리적으로 가장 옳은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엘리펀트> 논쟁은 피상적인 관객 동원 수치로만 영화가 재단되고 평가받는 현재 풍토에서 평론가와 관객이 사전에 영화에 대한 교감을 나눴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이다.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엘리펀트>. 이제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FILM2.0』Feature - Special Feature

  2004. 08. 27. <엘리펀트>는 과대 평가된 영화인가?

정성일 vs 전찬일, <엘리펀트> 공개 논쟁 중계

2004.08.27 / 양윤선 기자  

지난 24일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두 평론가가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거스 반 산트 감독의 문제작 <엘리펀트>를 놓고 상이한 시각을 보인 영화평론가 정성일, 그리고 전찬일의 공개 논쟁을 옮긴다.

2003년 칸영화제 감독상과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거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는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대낮에 실제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을 재연하고 있다. 학생과 교사들을 향해 900발의 총알이 무차별 발사된 이 비극은 두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막을 내렸다.

<엘리펀트>는 사건의 전후 상황을 오히려 조용하고도 매우 일상적인 톤으로 재연해 역설적인 충격을 준다. 이 영화의 특별 시사를 마치고 나온 한 관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영화 장난 아닌데”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장난이 아닌 영화' <엘리펀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정성일, 전찬일 두 평론가가 특별 시사회 직후 공개 논쟁을 펼쳤다. 관객들은 늦은 시간까지 두 평론가의 설전에 동참했다.

정성일은 거스 반 산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이미 일어난 사건의 원인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윤리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전찬일은 이 영화가 집단 따돌림, 나치, 동성애 코드 등 여러 윤리적 오해 요소들을 심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칸영화제 수상 결과와 감독의 명성 때문에 지나치게 높이 평가 된 게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전찬일 사실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이 영화를 대놓고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 주목할 만한 영화이긴 하지만, 거스 반 산트가 초심으로 돌아간 데 대한 과대평가가 아니었냐는 생각이 든다. 철 지난 60년대식 유럽 작가주의 영화라는 느낌의 이 영화가 칸영화제 규정을 어겨 가면서까지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독식한 것은 납득할 수가 없다.

정성일   이 영화에 대한 그 어떤 공식적인 평가가 나오기 전, 칸영화제 언론시사에서 전찬일씨와 이 영화를 같이 봤다.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이 영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셸이 운동장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최고 걸작이 나올 거라 생각했고 영화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철 지난 60년대 유럽 작가주의 영화라는 시각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 영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다고 본다. 10대들의 상처가 어떻게 인간을 망가뜨리느냐를 보여주는 이 영화를 형식면에서만 보면 너무나 많은 부분을 놓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핵심은 미학적인데 있는 게 아니라 윤리적인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찬일   만약 거스 반 산트의 이름과 칸영화제를 지우고 다른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만들어 내놓았다면 그냥 주목할 만한 영화에 그쳤을 것이다. 좀더 작품적으로 들어가 보면 거스 반 산트의 방법론이 억지이고 작위적이며 우스꽝스럽다고 본다. 한 예로 음악 선택은 맹목적이다. 이건 영화적 효과라기보다 음악적 효과이다. 영화가 아닌 다른 순간에도 월광 소나타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엘리제를 위하여'는 알렉스가 치기 때문에 들어갔을 뿐이다. 영화연구에서 (어떤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으면 작가적 표시로 지칭되곤 한다. 이 영화에 사용된 롱테이크는 그 연장선이다. 거스 반 산트가 직접 편집을 하지 않았으면 좀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정성일   거스 반 산트는 사회학적인 규명과 사건에 대한 심리설명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귀납적이 아니라 연역적인 영화다. 왜냐면 이미 사건은 일어난 일이고, 설명이 아니라 재연을 통해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미셸이 하늘을 바라보던 그 아름다운 순간으로 되돌아가 보자는 것이다. 미셸이 하늘을 보는 장면에 알렉스의 연주가 깔린다. 알렉스가 서툰 피아노 연주를 하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의 반복된 편집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리고 영화의 1.33:1 비율. 시종 왜 1.33:1일까 생각해 봤다. 중간에 알렉스가 상대방을 총으로 쏴 죽이는 컴퓨터 게임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안정된 장면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비디오 게임과 같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롱테이크로 쫓아가며 찍고 있다. 샷 리버스샷도 없다. 마지막에 총에 맞는 상대방을 찍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 영화는 미학적인 부분보다 윤리적 형식이 더 중요하다.

전찬일   미학적인 것보다 윤리적인 태도가 중요하다는 건 맞다. 하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제공 되고 있다. 교실에서 왕따 당하는 알렉스, 아이들이 보고 있는 TV에서 나오는 히틀러주의 설정, 두 장본인의 동성애 코드는 넣지 말았어야 한다. (실제로는) 살인 모티브를 어설프게 제공해 놓고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문제다. 원인을 밝히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알리바이도 넣지 말았어야 한다. 외모 컴플렉스를 가진 미셸, 병신 같이 상황 판단 못하는 베니, 기성 질서에 대한 불만을 대표하는 교장이 죽는 건 용서가 된다. 하지만, 죽임의 순서가 윤리적으로 악의적이다. 납득이 안 간다. (이 부분은) 정성일씨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거다. (웃음)

정성일  알렉스가 왕따 당하는 장면은 교실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12명의 아이들은 왕따다. 나치 화면이 등장하는 장면의 구도는 창문 너머에 맞춰져 있다. 아이들은 TV를 켜둔 채 배달되어 올 총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알렉스와 에릭의 샤워신은 호모포비아가 아니라 거사를 치르기 전의 세레모니였을 뿐이다. 행여 달리 해석할까봐 미리 그런 것들로부터 영향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콜럼바인 사건이 터지고 흔히 한 해석 방식과 언론들의 온갖 분석들이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 것이다. 사건이 다룰 때 가장 나쁜 게 마이클 무어의 방식이다. 원인을 찾으려 하고 누가 잘못 했다고 문제 제기를 한다. 원인을 찾아 책임을 물으면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거스 반 산트는 빠져 나오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죽는 장면 역시 연출자로서는 찍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스 반 산트는 찍지 않았다. 교장이 죽는 건 납득이 된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김선일씨를 죽게 한 우리도 역겹지만 테러리스트도 역겹다. 테러리스트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해서 죽였다고 말하면 안 된다. 왜냐? 테러가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태도는 '누구는 죽여도 괜찮고 누구는 죽여도 안 된다'가 아니라 '이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와 '할 수만 있다면 사건 이전으로 되돌려 보고 싶다'인 것이다.

전찬일   영화에서 어떤 것을 묘사하고 생략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문제 제기 했던 것은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미셸은 빨리 죽어야 돼, 이런 식으로 보여 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인종차별 조장하는 영화는 당연히 아닌데 왜 하필 어벙하게 죽는 캐릭터를 흑인 베니로 설정했느냐, 하필이면 왜 그렇게 하는지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정성일  마이클 무어의 영화는 정치적 파파라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에 지지하긴 하지만 미학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려울 거 같다. 결과에 대해 원인을 찾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빨리 대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엘리펀트>는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만들어진 영화다. 결과가 원인을 붙잡을 때 그 원인은 허위 원인이 된다. 거스 반 산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이 영화의 윤리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만약 원인을 찾았으면 이 영화는 가짜다. 그것으로 콜럼바인 사건이 설명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 이유 없이 총기로 친구를 죽인 사건은 설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폭력은 이해될 수 없다. 거부될 수 있을 뿐이다.

전찬일   이 영화는 지나치게 방관적이다. <볼링포 콜럼바인>은 선동적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사고하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순간이 없다. 그 점이 아쉽다.


『씨네21』2004. 09. 07. 468호.  

  정성일 평론가와 전찬일 평론가의 <엘리펀트> 찬반 논쟁

    “첫 장면을 보는 순간 걸작이라고 생각했다.”(정성일) “과대평가된 촌스런 작품에 불과하다.”(전찬일) 지난 8월24일 오후 8시20분. 하이퍼텍 나다에서 시작부터 팽팽한 찬반양론의 줄다리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2003년 칸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받았던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 이를 두고 입장을 달리하는 영화평론가 전찬일씨와 정성일씨가 만났다. 1시간 반가량 영화기자 오동진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 두 사람의 토론은 그 열띤 분위기와 거침없는 논쟁으로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흥미로운 논쟁의 현장을 지상중계한다.

윤리적으로 봐야하는 걸작 vs 칸 수상으로 과대평가

사회 먼저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 전에 각자의 영화 <엘리펀트>에 대한 소감을 50자평처럼 들려줬으면 좋겠다.

전찬일 <엘리펀트>는 주목할 만한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철지난 60년대 유럽작가 스타일에 불과한 작품이다. 구스 반 산트가 초심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지만 상대적으로 과대평가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칸영화제에서 감독상과 황금종려상을 동시에 받았는데, 칸의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이 두 상을 동시에 거머쥘 만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성일 칸영화제 공식시사가 아니라 프레스 시사회에서 처음 이 영화를 봤다. 한마디로 지구상 최초의 <엘리펀트>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셈이다.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이 영화 죽이겠구나’란 감이 왔다. 운동장에서 미셸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최고 걸작이 될 것이다 싶었고. 지금까지 본 칸영화제 경쟁작 중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의 <오고, 가며>를 제외하고는 최고작이다. 이 영화는 미학적 입장보다 윤리적 입장으로 봐줘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 전찬일씨의 경우, 비판적 입장이 되기까지에는 칸영화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하나의 요인이 됐을 것 같다.

전찬일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전혀 새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째 보니 더욱 새롭지 않다. 구스 반 산트와 칸영화제라는 이름을 지우고 얘기해본다면, 이 영화는 그저 주목할 만한 영화에 그쳤을 것이다. 배경음악으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사용한 것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음악을 사용하다니. 이 영화에 감동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적 효과가 아니라 음악적 효과 때문이다. 중요한 장면에서 심금을 울리려는 촌스러운 음악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롱테이크와 들고찍기로 찍었다는 점 역시 그 자체가 작가적 징후로 읽혀지는 일종의 표지라는 점에서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칸영화제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양쪽 모두에 상을 줄 정도로 왔다갔다하는 영화제다. 경쟁부문이 아니라 ‘주목할 만한 시선’에 이 영화가 출품됐어야 했다고 본다.

스펙터클 제거한 윤리 돋보여 vs 그 설명없는 척하는 윤리적 태도가 문제

사회 반대의견을 들어보자. 정성일씨가 아까 이야기했던 말. 즉, 미학적인 면보다는 윤리적 측면으로 영화에 접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정성일 이 영화는 시간을 계속 반복시킨다. 같은 시점으로 영화는 몇번이고 되돌아가고 있다. 미셸이 운동장에서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장면은, 알렉스가 피아노를 방에서 치던 장면과 같은 시점이다. 이렇게 영화는 끊임없이 시간을 되돌려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마지막 장면을 이해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아까 전찬일씨가 치기어린 롱테이크라고 비판했는데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와 화면의 비율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영화의 화면비율은 1.33:1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쓰는 1.85:1을 쓰지 않았다. 왜일까? 1,33:1은 딱 폴라로이드 사진의 크기비율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폴라로이드와 같은 1회성의 사진을 찍고 있는 셈이다. 단 한번 벌어진 그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고 재연하는 의미로 말이다. 또한 영화 중간에 알렉스와 에릭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장면에서 영화는 가장 안정적인 화면구도를 보여준다. 화면구도를 노트북 사이즈로 만들어놓고 비디오 게임처럼 실제 인물들을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롱테이크는 비디오 게임 속에서 시간을 좇아가는 개념의 테이크로 이해해야 한다. 전찬일씨가 말한 유럽적 시간개념이 아닌 것이다. 총기장면도 그렇다. 감독은 최대한 총기장면이 스펙터클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 영화에 쓰인 반복되는 시간, 롱테이크, 화면비율은 모두 이 사건에 대한 감독의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 어떻게든 시간을 사건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열망. 비디오 게임을 영화로 전환하되 스펙터클하지 않게 재연하려는 감독의 노력 말이다.

전찬일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 윤리적 태도가 정말 문제인 영화다. 처음 볼 때는 이 영화의 미학적 측면이 싫었는데, 두 번째 보니 이번엔 윤리적 태도가 정말 싫더라. 정성일씨 말대로 구스 반 산트는 영화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는다. 로저 에버트 같은 평론가도 바로 이 점에 별 4개를 주면서 길길이 뛰었었다. 그러나 설명을 하지 않으려면 아예 하지 말아야지. 이 영화는 설명을 안 하는 것 같지만 이 소년들의 살인에 대한 기분 나쁜 이유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알렉스가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오물을 얻어맞는 장면, 이 아이들이 히틀러주의자란 설정, 동성애 코드의 키스장면. 이런 장면들을 집어넣지만 않았다면 이 영화는 정말 멋졌을 것이다. 그런데 감독은 이런 이유들을 집어넣으면서 호모포비아적 태도마저 보이고 있다. 아이들이 죽는 장면도 그렇다. 감독은 처음 죽는 미셸과 흑인 베니, 교장선생만을 자세히 구체적으로 보여줄 뿐 다른 아이들이 죽는 모습은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중에서도 베니는 난리통 속에서 어벙하게 교실을 어슬렁거리다가 죽는다. 난 바로 이 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다들 베니가 어슬렁거리며 걸어갈 때 저 흑인 아이가 뭔가 해내고 흑인 영웅이 되겠구나 싶었을 것이다. (모두 웃음) 그런데 그저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렸다. 하필 왜 여자, 흑인, 교사인가. 왜 이런 악의적인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1.33:1의 비율은 그냥 이 영화가 애초에 TV용으로 기획됐기 때문이다. 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정성일 일단 알렉스가 수업시간에 오물을 얻어맞는 장면은 일반적인 교실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이때 이미 알렉스는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그것 좀 얻어맞았다고 새삼스럽게 사건을 계획한 것이 아니다. 알렉스가 끊임없이 머리를 흔드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알렉스는 아이들이 불쌍한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나한테 죽을 텐데, 쯧쯧, 하고 말이다. 나치영화를 보는 장면도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아이들이 나치영화를 볼 때 감독은 TV가 아니라 창 너머 풍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게다가 “무슨 프로 봐?” 란 질문에 “몰라, 나도”라고 대답하지 않는가. 아이들은 그냥 틀어놓고 있을 뿐이다. 호모포비아에 대한 오해도 그렇다. 아이들의 샤워신은 그냥 세리머니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우리는 실재를 마주했고, 실재는 이미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이를 보여줄 때 가장 나쁜 방식의 영화가 바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다. 원인을 물어보는 것은 편한 것이다. 원인을 물어보는 순간 자신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구스 반 산트는 그것을 피하고 있다. 원인을 섣불리 물어봄으로써 자신은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행동 말이다.

원인 설명은 폭력에 굴복하는 것 vs 문제의식을 원했다면 관객과 소통했어야

사회 <볼링 포 콜럼바인> 이야기가 나왔는데, 정성일씨가 가장 편하고 저급한 방식이라고 표현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 대해 전찬일씨는 입장이 다를 것 같다.

전찬일 그렇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볼링 포 콜럼바인>쪽이다. 아까 이야기한 동성애 코드, 여성혐오 등은 모두 오해의 소지를 이야기한 것이다. 왜 굳이 이런 오해의 소지를 다분히 남겨놓은 채 영화를 만들었는가. 영화에서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수많은 아이들이 등장하지만 캐릭터와 이름을 부여받은 아이들은 12명에 불과하다. 이 12명에게 캐릭터를 부여했을 때 감독은 이미 그 12명을 통해 하고픈 이야기를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욱 못마땅한 것은 학생들이 배우도 아닌데 연기를 한다는 것이다. 비전문배우라면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보여야 하는데 이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식해서 연기를 하고 있다.

사회 올바른 정치적인 힘을 확장시키는 것이 저널리즘이라면, 이 영화도 어느 정도는 저널리스틱해 보인다. 그 점에서 효과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은데.

정성일 마이클 무어는 영화적 파파라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지지할 수는 있지만 미학적 측면에서는 지지할 수 없다. 결과에 대해 원인을 찾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벌어진 사건을 두고 가타부타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원인을 설명하다보면 폭력을 설명하게 된다. 설명하는 순간 이 영화는 가짜가 된다. 설명하는 순간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폭력은 설명하면 안 된다. 그저 거부해야만 할 뿐이다.

전찬일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도 주제의식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소통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관객이 별로 들지 않았다고 한다. 관객이 좀더 쉽게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영화는 과시용이 아니다. 문제의식과 자각을 원했다면 소통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고 본다. 소통이 되지 않는 한 이 영화는 치기어린 문제작으로만 남을 거라 생각한다.

글: 송혜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