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원-부산대교지』 2001.06.(여름.52호)본인인터뷰

영화평론가 정성일씨 인터뷰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연대하라!"

일시 : 2001년 5월 15일 저녁 8시
장소 :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월간 <KINO> 사무실
인터뷰어 : 이민하 (편집위원)
이은정 (편집위원)
지언경 (수습위원)
이현영 (수습위원)
객원 인터뷰어 : 김광준 (경제학과 95)
정리 : 이민하 (편집위원, mhredtea@freechal.com)

우리들은 어떻게 영화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가, 혹은 영화는 정말 우리들에게 세상을 보여주는가. 영화는 우리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복무하는 기계장치인가, 부르주아의 나른한 여가를 위무하는 예술 장르인가. 국내 영화평론 역사에서 가장 독자적인 지형 위에 자리잡으며, 줄기차게 영화의 진실을 변호하고 영화의 거짓말들에 맞서 싸우던, 우리 시대의 앙드레 바쟁 영화주의자 정성일. 올해로 42세가 된 만년 소년과의 3시간짜리 롱테이크 인터뷰.

여기, 영화를 잘 '쓰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년 전에는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마술과 같은 언어로 우리들에게 영화의 꿈을 배달해주며 우리들의 쓸쓸한 밤을 위로하던 사람, 지난 7년 동안은 영화잡지 <KINO>에서 영화를 통해 그것을 만든 작가와 그것을 보는 관객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야기하던 사람입니다. 또 한편으로 그는 거짓말하는 영화들에는 침묵으로 항의하고, 영화의 적들 혹은 적의 영화들에는 맹렬히 맞서 싸웠습니다.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방식이며, 영화의 친구들에게 손 내미는 방식입니다.

그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를 이곳에 초대한 것은 영화와 세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어렴풋한 확신을 갖고, 좋은 영화와 더불어 올 좋은 세상을 믿는 그의 지혜를 훔쳐오기 위해서입니다. 해지는 하이델베르크 거리에서 과거와의 발전적 단절을 결심했다는 그. 이 작은 페이지가 여러분들에게도 그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인터뷰 전, 이틀 동안 밤을 세웠다고 하면서도, 오랜 시간동안 우리의 이야기와 질문을 듣고 열렬히 답변해 주었다. 편집위원들의 소개를 받으며 01학번에게 "큐브릭 학번이군요"라며 정겹게 웃는 모습에서, 우리들은 영화평론가의 권위보다는 동네 비디오 가게 아저씨의 수더분한 모습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우리는 '인터뷰'이기 이전에 '대화'를 나누고자 했고, 우리 스스로를 '인터뷰어'이기 보다는 '팬'으로 소개하며 슬며시 맞웃음을 단졌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공격적인 질문을 요구하며, 그러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더 잘 알아가고 '그 속에서' 서로의 잘못된 점들을 고쳐나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터뷰는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빨리 뜨거워졌다.

근황

그는 2001년 1월부로 7년간 몸담았던 월간 영화잡지 <KINO>에서 사임했다. 그 와중에 '제 2회 전주국제영화제' 수뇌부와의 견해차이로, 자신의 원칙을 위해 프로그래머 자리를 사퇴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제는 정말로 그가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우리들은, 무엇보다 그의 최근 근황과 현재진행중인 고민의 정체가 궁금했다.

  "일단 쉬고 있어요. 지난 7년간 만들어왔던 KINO를 그만 두고, 1년 정도 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쉬면서 중국어 학원에 매일 나가고요. (갑자기 두 주먹을 감싸며 "니 하오마!"라고 흉내낸다) 임권택 감독님의 인터뷰집을 최근 <장승업>까지 포함해서 15년만에 버전업 할 계획입니다. 또, <2046>의 인터뷰까지 해서, 왕가위 감독에 관한 책을 준비중이고, 개인적으로 준비하던 다큐멘터리를 상반기까지 완성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영화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하고/듣고 있습니다. 저는 40이 되면 근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0이라는 나이가 되면 자기의 판단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자기가 원했었던 것에 다가가는 방법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순차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을,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과정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순간이 제가 저의 토픽을 만들어 내야될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자기가 창간한 잡지를 그만두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토대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옛 선현의 말씀에 따라(저는 여전히 옛 선현들의 말씀을 믿습니다. - 웃음) 토대가 바뀌어야마 제 의식이 바뀌지 KINO 안에서는 다른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았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힘들었지만, 일단 작별을 했고 그로부터 약 4달 보름이 지난 셈입니다."

영화가 왜 좋은가?

영화에 다가가는 그의 여정 한 토막을 들으며 생각난, 매우 단순하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왜 영화인가, 영화가 어디가 좋습니까?

  "좋아하는 상대에는 이유가 없잖아요. 맹목적이죠. 영화에 대한 저의 사랑은 맹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갑니다. 그런데, 언젠가 술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김홍준 감독에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명아냐?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운명인데 한국에서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저주받은 운명이지'."

삶의 원칙

그는 끊임없이 '원칙'을 얘기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원칙. 삶을 살아가는 원칙. 그 원칙의 실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원칙이길래 이 사람은 이토록 한결같이 씩씩할까.

  "20대에는 제가 꽤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썩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웃음) 그 때는 지식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책들을 읽었고 여러분들의 20대가 그러하듯이 저도 기고만장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27살 때, 박광수 감독(당시는 조감독이었죠)의 소개를 통해, 이장호 감독이 <외인구단>의 성공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한국영화 감독의 인터뷰 집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박광수 감독은 제게 임권택 감독을 권해주셨죠. 당시 임권택 감독은 <씨받이>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하기 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임권택 감독을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장인'이라고 생각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임권택 감독 자신도 '나 같은 감독을 뭐 하러 인터뷰하고 책을 만들려고 하는가' 하시며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로 진심으로 인터뷰해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고, 이틀이 지난 뒤, 감독님께서는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자'라 하셨고 우리는 북악산 쪽의 모텔에서 12박 13일 동안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놀란 것은 감독님께서는 롱테이크나 미장센이라는 용어를 모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면을 설명할 때에는 저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게다가 제가 설명하려고 했었던 부분들과는 달리, 감독님이 들려주신 얘기는 사실, 영화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화사·제작자·연기자의 스케줄·제작비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이 영화로 만들려고 했던 예술적 의지를 조립하고 배치하여 어떤 효과를 표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에선 편집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영화를 찍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붙여 순서가 맞는지만 확인하는 것이 한국영화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필름을 이어 붙였더니 전혀 다른 의미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독님은 고민하다가 롱테이크로 찍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장면에서 꼭 이렇게 밖에 찍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들게만 한다면, 절대로 자를 수 없다는 것을 이 사람이 인식하게 만들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감독님과 인터뷰하면서 결국 영화라는 것이 개인적인 토대가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토대, 수많은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토대, 작게는 한국 영화에서 다른 산업과 무관하지 않는 정치적 토대, 그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 편의 영화에는 세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만일, '인식론적 다절'이라는 멋있는 표현을 쓰는 것이 허락된다면, 저는 그 순간이 하나의 단절, 하나의 점핑이었습니다. 또 제가 영화와 만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영화만을 갖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그 방식 안에서 내가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진 힘의 관계, 권력의 관계, 그 토대릐 배치를 읽어내는가, 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가 영화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동시에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세상에 어떻게 관심을 갖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 이후로 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계속해서 자신의 세계를 그러한 방식으로 추구해 왔고, 끊임없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성숙시켰고, 새로운 문제들을 끌어안았고, 그러면서 새로운 질문들을 저에게 계속 던졌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게 두 사람의 아버지가 있다면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임권택 감독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만큼이나 여러분들에게, 평생 여러분들의 삶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그분의 삶을 통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에게 토픽을 생산해 내고, 그 안에서 함께 점핑해 나갈 수 있을 그러한 분을 모시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삶, 그리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

그의 문체는 확실히 섬세하고 여성적이다. 이상한 것은 그것에서 진한 호소력과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곱게 자란 사람'일 것이라는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그의 글에서 느낀 일종의 '댄디즘'을 질문했다. 그렇게 여리고 섬세하기 보이는 사람이, 투박한 현실과 맞닥뜨리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떻게 '사회화'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싸움꾼'이었음을 고백한다.

  "제 삶에는 많은 기복들이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중학교 때, 집안이 기울었고, 제 삶은(<친구>의) 동수가 될 뻔 했습니다. (주먹을 쥐어보이며) 아직도 제 오른쪽 손가락이 완전히 쥐어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삶을 보낸 십대의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저도 완전히 일탈되었습니다. 바닥을 본 겁니다. 바닥. 고등학교 때 안정을 찾았지만, 제대 후에는 완전히 망해버려 그 후에는 집에서 10원도 가져다 쓴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던 중에 제 친구들(전양준, 김소영, 유지나…)은 찰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어린 시절에 유학은 왕오천축국전이었죠. 불경을 얻어 와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하지만 저, 갈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노동자 의식이 있었다는 얘긴 할 수 없었겠지만, 그 이후 줄기차게 저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갖고 세상과 만났습니다. 그것이 제가 영화를 생각하면서 관념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굉장히 감사하는 저의 토대였습니다.

  저는 영화가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자꾸만 영화를 여가로, 소비로 만들고 있습니다. 번쩍이고 현란하고 스펙터클 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화를 통해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이 제 20대 때부터의 화두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저 자신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소비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의 생산,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주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영화잡지를 만들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하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모든 거짓과 싸우는, 일종의 계모의 프로젝트였습니다. 영화에 대한 글이라는 것은, 영화에 대한, 영화가 세상에 대한, 협잡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럴듯한 것으로 세상과 격리시키고, 더나아가 영화를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퀴방에서 제가 느낀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영화를 취급하는 가장 천한 형태. 말하자면 그건 '우리 집에 냉장고 몇 개 있어'와 같은, '너, 이거 봤니, 이거 봤니, 이거 봤니…'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영화에서 맞고 틀린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왜 이것이 되지 않느냐가 제 고민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저도 잡지를 만들면서 일정 부분 자본과의 타협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팸플릿을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계몽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는 않았으나, 제가 KINO를 만들면서 제 원칙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것이 제가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저 자신의 정체성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80년대

지금, 우리가 80년대를 호출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아닐까. "그때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나"라는 것과 "지금 운동을 떠벌리는 자들, 그때 어디에 있었나?"라는 것들. 이 뉘앙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뜨거웠던 시대 속에서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은, 지금 어떤 방법으로 80년대를 불러오고 있을까. 무엇이 바뀌고 어떠게 변했을까.

  "어쩔 수 없이 저도 80년대의 유령입니다. 끊임없이 불러오고, 사고하고 그리고 그것의 연장으로서 지금을 사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80년대에 대해서 갖는 부채의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브레히트처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같은 성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세상은 그만큼 진보했는가 하는 질문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저는 김대중 정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들에게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번 부평 대우 폭력진압 사태를 통해 너무나 자명해진 것 같습니다.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작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매우 안타깝게도 80년대 이후 진보진영들은 자기의 전술을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옛 선현들께서 말씀하신 변증법에서처럼 그 시대의 정황들과 함께, 자기들의 전투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상황은 변하지 않았으나 조건은 변했습니다. IMF가 해낸 가장 놀랄만한 성과는 한국의 자본주의에서 전근대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더욱 자본주의화 시켰죠. 그 속에서 문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본가가 되었습니다. 요즘 인터넷 사업가라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80년대 운동가들입니다. 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100억 이상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회사는 과연 자본으로붙의 해방구가 되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터넷이 인간에게 하나의 시험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인간은 하나님이었고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동의 커뮤니티를 만들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결과는? 인터넷 자본가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진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몇 개 나오지 않지만, sex라는 단어를 치면 수백 개가 나옵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시 시작을 해도 이렇게 될 것입니다. 알튀세르가 했던 가장 유명한 얘기 하나, "자본주의가 끔찍한 것은 역사가 그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시작해도 결국 그렇게 결정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디서 시작해도 결국 이 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글로벌리즘과 캐피탈리즘의 전지 구적 확장의 귀결지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끔찍한 것은 80년대의 그 투쟁들은 결국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보다 더 정교하게 된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0년대의 자본가들은 노조를 어떻게 다루어야 될 지 알지 못했지만, 90년대의 자본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80년대를 통해서 말입니다. 거꾸로 노조는 80년대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저는 거기서 패배의 그림자를 봅니다. 그것이 90년대의 고민이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재빨리 운동가들은 문화이론가로 변신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경제적,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점들을 문화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문화가 경제의 토대와 정치의 상부 구조 사이에서 매개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문화는 그 자체의 저항으로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것을 뒤흔들고 정치적 헤게모니의 전투에 뛰어드는 것으로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문화 이론가들이 90년대의 저항을 락이라고 할 때 가장 황당합니다. 너바나의 음악을 듣는 것으로 할 수 있는 전투가 무엇인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저도 너바나의 음을 좋아하지만 <Smells Like Teen Spirit>를 듣는 것이 정치적 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80년대가 정치적 투쟁의 실패였다면 90년대는 문화적 투쟁의 실패를 인정해야 합니다. 정치와 문화 모두에서 실패했습니다. 자본은 우리가 주도권을 잡은 적이 없습니다. 2000년대의 투쟁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좌표를 설정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80년대를 단절적으로 이해하기 보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의 연장선 속에서 파악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패배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거기서 어떻게 우리의 좌표를 그리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무엇일까.

그는,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대만 감독 후 샤오시엔을 만난 후 그가 "영화는 제가 세상을 대하는 예의입니다" 라는 말을 했을 때, '영화에 대한 모든 책을 버릴 용의가 있다'라며 슬쩍 '오바'했다. 이것은 정말 오버일까, 아니면 이것이 지금 정말로 그가 내리는 영화의 현재적 정의일까.

  "지금 이 순간, 나이 마흔 둘에 영화에 대한 저의 입장은 결국 영화는 사유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그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지만 사실은 자신이 영화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본 것밖에 쓰지를 못하고 그것은 즉, 자기를 그 안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그 안에 채워 넣고 그것을 다시 풀어서 쓰는 것입니다. 푸코처럼 얘기하자면 영화는 자아를 기술하게 하는 장치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영화 평론가들이 영화를 해부하고 실험하고 희희낙락하며 쥐어든 창자는 바로 자신의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영화가 다른 예술들과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예술장르와는 달리, 영화는 열 명의 평론가가 쓴 글이 다 다릅니다. 그것은 열 명의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이제는 영화를 '쓰지' 않고 '찍을' 것인가?

  "네, 경쾌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는 영화를 만들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대학교 때 사진 수업을 들었는데 그 때, 상당히 재미있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첫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카메라는 고정시켜 놓으시고 한 사람씩 나와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무엇을 찍을지를 생각한 다음 누르랍니다. 그러면 누르는 순간 자신의 무의식이 담긴데요. 다음 시간에 가니깐 그 때 찍었던 사진을 현상해서 쫙 붙여놓으셨어요. 그리곤 그 중에서 자신의 사진을 찾으래요. 자신의 무의식을 캐치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거죠. 학생의 절반이 잘려나갔습니다. 수업을 들을 이유가 없으니 취미 생활을 해라는 거죠.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찍힌 사진에는 찍힌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찍은 사람의 무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영화를 만들어도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자기의 무의식입니다. 그것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영화

그는 각종 매체에 기고하는 글을 통해 줄기차게 최근의 한국영화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지나치게 한국영화 속에 흐르는 일종의 공통된 '경향'들에 대한 비판으로, 한국영화 개별 텍스트들의 일말의 긍정적인 것들까지도 애써 무시하려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한국영화라고 해서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영화라는 범주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아시아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제가 한국 영화를 아시아 영화라고 부르고 비판을 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였습니다. 영화 속의 세상도 마치 인터넷 세상과 마찬가지로 감독이 창조해낸 인물들을 책임지지 않고 죽이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의 주인공들이 죽을 때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다른 영화감독들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후샤오시엔의 영화 속에서 인물은 거의 죽지 않습니다. 후샤오시엔에게 있어서 그것은 세상에 대한 예의인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함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두 주인공이 함께 살려고 정말 노력을 하지만 결국 실패를 합니다(<키즈 리턴>). 그의 마지막 노력은 이런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끝난 걸까?'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는걸' 그건 함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동반자살 하는 부부의 아내가 죽으면서 하는 마지막 대사가 '미안해요'라는 것(<하나비>)은 같이 살 수 없어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감독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JSA>의 이병장. 살 수도 있는데 갑자기 자살을 합니다. <비천무>, 애가 멍쩡하게 살아있는데 괜히 죽어버립니다. 말리지도 않습니다. <리베라메>,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 담뱃불까지 붙이며 죽습니다. 그 아이가 평생 기억하는 아버지의 자살하는 모습은 이 아이에게 어떤 정신적 충격으로 남을지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다>, 두 사람 호주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둘이 살면 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서 기어이(!) 죽습니다. 말하자면 멋있게 보이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삶이 소멸되는데 중요한 것은 멋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에 의존한 것입니까? 그건 소멸에의 의지입니다. 자기를 소멸시켜 버리려는 것입니다.

  아시아 영화들은 함께 살려고 노렵합니다. 정말 멋있었던 것은, 일본에서 사는 데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안노 히데야키가 <에반게리온>에서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합니다.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어른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 대답으로 만든 것이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입니다. '살아라'는 것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나이 드신 어른이 모두 살아보라고 하소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 사회가 어떤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젊은 감독들이 다 죽어버리려고 작정하고 있는데 가장 나이든 어른이 찍은 것은 무엇입니까? <춘향전>입니다. 게다가 <춘향전>은 지짜 백미인 '옥중가'를 빼고 '사랑가'만을 넣었습니다. <춘향전>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옥중가가 없는 <춘향전>은 섹스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젊은 감독들에게 화답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저는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 영화의 사유의 빈곤함을 느낍니다. 생각이 빈곤한 것입니다."

영화는 어떻게 세상과 싸우는가

많은 이들은, 영화에 대해 '혁명에 복무하는 기계장치'라는 도구적 입장과 '욕망의 충족을 위한 예술 장르'라는 순수예술적 이분법에 빠져 있다. 영화는 어떻게 세상과 싸우는 아름다움을 배달할 수 있을까.

  "일단 이런 질문을 던져 봅시다. 영화는 혁명 전에 의미가 있겠습니까, 혁명 후에 의미가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60년대 라틴 아메리카 영화가 의미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20년대 소비에트 영화가 의미가 있었습니까? 저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영화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영화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부르주아들의 카페 문화가 되었습니다. 즉 여기서 진보는 미학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런데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영화들은 정치적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벤야민의 말을 조금만 뒤틀어서 인용을 하겠습니다. 벤야민은「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파시즘이고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사회주의 미학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결국, 미학적으로 사용된 수단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해 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진보의 의미들을 너무나 쉽게 미학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날카로움들이 사라지고 거세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 영화들은 우리에게 미학적으로 소개됩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그린다고 해서 우리에게 정치적인 의식을 일꺠워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술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도르노는 미학의 이론을 이야기하면서 '예술에서 이제 자명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 정치적인 것을 그린다고 해서 이것이 자명하게 정치적인 것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정치적인 것으로 드러내려고 할수록 그런 것들이 껍질 벗겨지기는 커녕 더 주술화 되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들이 계급의식을 일깨워 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영화에 대한 우리의 논쟁은 미학으로 만들어진 것을 어떻게 정치적인 것으로 깨우쳐주고 어떻게 환기시켜줄 수 있겠는가라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가 만들어 내는 효과를 즉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화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것을 예술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삐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로 돌아옵시다. <파업전야>는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얘기치 않았던 이데올로기가 끼어듭니다. 환수가 스패너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죠. 한국 영화의 역사 속에서 바로 그 순간은 80년 광주에 대한 죄책감에 풀죽어 지내던 한국 남자들을 위한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말하자면, 그 때는, 80년대라는 어느 기점에서 <바람불어 좋은 날>과 <만다라>를 통해서 어쩌면 한국 영화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꺨 수 있는 지점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업전야>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다시 한번 끌어들입니다. 이후의 영화들의 주도권은 다시 남자들이 지니고 있습니다. 바뀐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간단하게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데올로기가 그토록 많은 시간동안 이론가들에게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파업전야>에서, 주인공 환수가 겪는 갈등의 원인은 노동자 의식 때문이 아닙니다. 여자한테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이 파업에 뛰어드는 것은 계급의식 때문에서가 아니라 가부장제적인 나의 자아를 되찾기 위함입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시나리오를 써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파업전야>에 있었던 이들이 90년대에 만든 다음 영화들, <서쪽에서 해가 뜬다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의 공통점은 철저한 가부장제 이데오로기 영화입니다. 무섭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젝의 이야기, 이데올로기라는 아버지는 매장시켜야 하는데 충분히 매장시키지 않으면 'living dead'가 되어서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돌아오고 그럴 수록 같은 방법으로 죽일 수 없습니다. 왜? 이미 dead된 living이기 때문입니다. <파업전야>는 강력한 방식으로 죽었던 가부장제라는 아버지를 다시 살려내었습니다. 맑스-레닌주의를 살려낸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여간한 방법으로 죽을 것 같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광주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들을 무릎꿇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무릎만 꿇게 만들었지 죽여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파업전야에서 맑스-레닌주의가 귀신처럼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 왜 페미니스트들은 이 문제를 토론하지 않는가.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파업전야를 옹호하는 순간 '이 여자 페미니스트 맞어?' 하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ist들은, 그러니까 페미니스트, 맑시스트 들의 공통점의 하나는 철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원칙에 대해서는 철저하지 못할 수 있지만, 자기가 그 입장에서 어떤 텍스트를 세상과 만나게 할 때에는 자기의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 페미니스트들은 특히 페미니스트들은 원칙이 없습니다. 원칙이 없을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대한민국 페미니즘은 중산층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1회 여성 영화제를 보고 당신들은 틀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성 영화제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의 여자들이 극장으로 나오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애 때문에 못 나오죠. 육아문제입니다. 그러면 그 여성들을 집에서 끌어내어 극장으로 오게 만들려면 그 영화제 장소에는 아가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없습니다. 왜? 이 영화제의 주체인 여자들은 다 집에서 식모 거느리는 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대학교 다니는 아가씨들이니까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여성 영화제에서 다들 자랑하는 것은 "남 앞에서 담배필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피건 말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아가방은 있어야 이들을 가족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이 공간에 와 문화적인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아가방은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없어요. 왜? 자기네들은 다른 사람의 노동의 대가를 근거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부르주아지 페미니즘이 아닙니다. 여성 영화제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Y 모 평론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어떻게 왔어요? 애는?' 했더니 '뭐, 애 보는 사람 있어서.' 이런 문제들을 항상 관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념적으로는 자기가 추상적 수준의 원칙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행할 때도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관념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 말자는 얘기밖에 안되거나, 절대 이론 수준에 가 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저는 대한민국 페미니즘이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영화매니아

그의 줄기찬 비판 중의 하나는 '영화매니아'를 자처하는 집단/개인들을 향한 것이다. 영퀴방에서 느꼈다는 그의 절망. 우리의 질문은, 그래도 영화를 사랑한다는 그들을 어떻게든 끌어안고 가야 하지 않을까, 사실, 어떤 영화주의자도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었고, 그의 답변은 단호했다.

  "사실 저는 영화 매니아 싫습니다. 싫다는 표현보다 옳지 않다는 말이 맞겠죠. 그것은 철저하게 90년대의 산물입니다. 영화에 매니아라는 말이 들어가는 순간 영화는 말 그대로 계량적, 통계학적, 정보 즉산적, 분류적, 개통적, 그 다음에 분류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그것을 통해 우월해지고 권력을 가지고, 그것들을 통제하여 이윤을 얻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영화 '애호가'들이 해야할 몫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영화 '매니아'들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화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를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적대적 관계를 만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의견을 도출시킬 수 있다면, 그 의견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 어떤 것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때서야 영화가 하나의 힘('권력'이 아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단어이지만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 '힘으로의 의지'와 '권력으로의 욕망', Will To Power. 그런데 저는 힘으로의 의지가 권력으로의 욕망을 쳐부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영화 매니아는 제가 꾸준하게 싸울 대상입니다. 만일 본인이 영화 매니아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영화 애호가로 옮겨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도 제 독설입니까?

조선일보

어떤 방법으로든, 이제 한국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조선일보 기고문제에 대한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몇 차례 조선일보에서 그의 글을 발견했을 때, 우리들은 당혹스러웠다. 비록 짧은 글들이었고 그의 입장을 싣는 글들도 아니었지만, 그가 조선일보의 지면에 그의 이름을 실은 이유, 그 '정치적 의도'가 궁금해졌다. 신문방송학을 공부했다는 그는 조선일보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우리는 조금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간단한' 이유. '마음이 약해서'

  "강준만 선생의 운동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조선일보에 글을 쓴 것은 딱 두 번이었는데 제일 힘든 것은 이것입니다. 조선일보 이동진 기자를 너무 잘 안다는 거죠. 20번 청탁하면 한 번 정도는 써 줄 수밖에 없는 관계인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제가 원칙에 철저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죠. 좀 식상하겠지만, 저는 제 대학교 은사께서 일학년 때 한 말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언론에 대해 몽테스키외가 한 말, '나는 너의 의견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지만 너의 의견이 탄압받는다면 그 의견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 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 어떤 견해라도 그 견해를 밝힐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거짓말」은 정말 싫어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중간까지 보다가 졸았죠.「나쁜 영화」는 중간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저는「거짓말」이 심의에 탄압받는 것에 대해서 결사적으로 반대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견해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일보에 관해서는 그것의 경제적인 측면과 언론으로서 제자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가 거기에 기고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에 한해서 언론에 대한 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원고를 보내고 나서 굉장히 후회했습니다. 바로 다음 달에 강준만 선생이 <인물과 사상>에 제 이름을 올려놓았더군요. 강준만 선생께 KINO 한 권 보내면서 충고 고맙다는 편지도 썼어요. (웃음)

  그 이후로는 기고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에 원고를 쓴다고 해서 먹고 살만큼 원고료를 주지는 않아요. (웃음)

지루하지 않은 삶

그는 자신이 기자들에게 "너 참 지루했구나"라고 얘기하는 것은 "너 나가라"라는 말과 같다고 한다. 약간의 비정함(?)을 느낀 우리들의 순진한 질문. 어떻게 지루해지지 않을까.

  지루하지 않는 거요? 방법은 하나죠.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 자신의 믿음에 안주하는 순간 지루해져 버립니다. 애늙은이가 되는 것입니다. 왜? 세상은 계속 변하기 때문입니다."

대학 영상문화

이제 화살을 우리 대학으로 돌려서, 누구보다도 현재 영상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을 그가 대학 영상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최근에 대학생들이 찍은 단편영화는 대부분 세가지 종류입니다. 동성애 영화이거나, 유난히 sex 장면이 많거나, 아니면 폭력이 많은 영화. 뒤집어 얘기하면 이 세 가지가 우리 시대 대학생들의 시대정신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동성애 영화들은 겉멋인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를 아루느는 단어는 센세이셔널리즘입니다. 소재주의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제의식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던질 질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내가 살고있는 시대에 대한 시대정신을 설정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건 우리들의 시대정신의 공동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우리 세대의 단편영화들을 보면서 대학생들의 정신적인 황폐함 만을 봅니다. 현실 속에 들어가서 대상으로 오랫동안 관찰하고 관찰한 대상으로부터 자기가 작품을 끌어내는 모습을 저는 발견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몇몇 좋은 작품들도 가끔 만나기도 하지만 정말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는 고등학생들로부터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만든 몇 편의 영화를 통해 정말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예술에서도 중요하겠지만 영화에서도 진정성의 문제가 중요하거든요. 여러분도 만약 고민이 있으시다면, 그것을 고민하지 마시고 그 고민을 설명해 보려고 하세요. 그러다 보면 혹시 내가 지금 엄살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부산. 부산대.

부산에 대해 그는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95년에 부산대 총학생회의 초청으로 강연을 가진 적이 있고, 98년에는 서면 문화공간 反에서 11시간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 그 날의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는 영화로 건설한 하룻밤의 '서면 꼬뮨'이었다. - 그리고 부산은 이제 해마다 국제영화제를 치르고, 많은 영화의 로케 장소가 되고 있다. 부산과 부산대에 대한 그의 이미지.

  "제가 부산대에 강연을 갔을 때, 강연이 끝나고 밥을 먹으로 갔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갑자기 한 여학생이 일어나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앞뒤가 좀 안 맞았어요. 그럴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옆에 있던 남학생이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그러는 거예요. 제가 놀랜 건, 그러니까 그 여학생이 정말로 가만히 있더라구요.(웃음) 이런 건 정말 지방색이라고 생각해요. 서울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면 가만히 안 있거든요.

  근데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 때, 주변의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굉장히 쇼크를 받았어요. 여성 여러분 분발하십시오. 다음 번에 제가 부산대에 갔을 때는, 그런 풍경을 제발 안 보게 해 주십시오. (웃음)"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이다. 그리고 <친구>

인터뷰를 마루리하며,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으레 영화 평론가에게 하듯이- 대학생들에게 추천하는 영화를 질문했다. 그의 답변도 예상해 보면서. 그러나 곧 그 질문을 하는 우리들은 조금 무안해지며, 한편으로 좋은 영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객이 있는 것이라고 그가 어디선가 한 말을 떠올렸다.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는 없구요. 영화를 정치적으로 볼 것, 어떤 영화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지 무엇을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친구>를 보고서 왜 한국에 이런 깡패들의 의리가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는지 매우 신기했습니다. 더 이상했던 건, 정말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던 대목인데, 그 영화에서는 어머니들을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아버지처럼 살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랑 똑같이 살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아버지를 부정하고 가짜 아버지를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상택입니다. 두 사람에게 상택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죠. 그런데 이 아버지는 제도권에서 성공한 부르주아 아버지이거든요. 말하자면, <친구>는 그것에 무릎꿇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완벽하게 재생산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의리를 통해서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 관대해 지는 것입니다. 즉, 폭력적인 권력을 갖고 싶어하는 무의식이 배면에 짙게 깔려 있습니다. 게다가 더 야비하게도, 자기 손에는 피 묻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아하게 살고 피는 딴 놈이 흘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정치사입니다. 푸코가 얘기했었죠. 파시즘이 정말로 문제인 것은 파시즘이라는 권력이나 대상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고 우리 속에 파시즘이 스며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파시즘이 집행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친구> 속에는 폭력에 대한 동의가 있습니다. 이게 끔찍합니다. 어디서 만들어졌건 그것에 대해 600만이 동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일보가 동의했다는 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겨레>도 <딴지일보>도 <오마이뉴스>도 동의하고 있어요. 그건 영화를 미학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폭력에 대해서 미리 근심하고 염려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들의 무의식을 처절하게 공격할 수 있습니다."

부산대의 영화친구들에게 한 말씀

"뭐, 옛 선현들처럼 이야기 해야죠(웃음).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연대하라!"

저녁 8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11시가 되어서야 마쳤다. 새로운 단장을 위해 분주한 KINO 사무실로부터 압구정 지하철역까지 그와 함께 나랗니 걸어가며 우리는 우리의 애프터를 부산국제영화제로 정했다. 그리고 처음 같은 웃음으로 헤어지고, 역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우리들이 내린 결론.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것, 엄살떨지 말 것, 응석부리지 말 것, 삶의 원칙을 세울 것, 세상에 대한 예의를 지닐 것. 세상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것. 그리하여, 지루해지지 말 것.

자기가 창간한 잡지를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아는 사람들이 말하듯, 그에게는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새로운 토픽을 만들어 다시 나타날 그를 향해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 모두, 서로,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