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2003.03.01.(3/4.18호)본인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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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독립영화 안녕하십니까?

정리 원승환│본지 편집위원│amenic@korea.com

「독립영화」18호 특집 대담 중의 하나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어액트의 소장이자 노동자뉴스제작단의 대표인 김명준씨의 대담을 준비했다. 원래 이 기획이 취중 대담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담은 점심식사 후의 대담으로 진행되었다. 워낙에 바쁘신 분들이기도 하거니와, 두 분의 술자리를 마련해서 술을 마시면서 하기에는 이 기회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독립영화는 안녕하십니까?" 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대답은 두 분이 생각하는 독립영화로부터 시작해서 고등학생 영화, 계간「독립영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원승환_ "지금 독립영화는 안녕하십니까?" 라는 것이 이번 대담의 주제입니다. 따로 진행자 없이 두 분꼐서 이야기를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정성일 선생님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주십시오. 정성일 선생님께서는 어느 글에서 '단편영화들은 더 이상 독립영화가 아니다' 라고 쓰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단편영화들은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지 않다' 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보다 부연해서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김명준 소장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정성일_ 편하게 이야기하겠다. 독립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다. 독립영화라는 말이 80년대 중후반에 등장했으니까. 그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니고, 많은 견해들이 서로 생각을 나눈 것이다. 우선 한 가지 정의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단편영화와 독립영화는 틀림없이 다른 범주이다. 내 생각에 단편영화라는 것이 이미 모두 잘 알고 있듯이 형식적이고 길이에 의한 양적인 것이라면, 한국의 독립영화라는 것은 개념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이며, 그것에 대한 철학적 범주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영화, 더군다나 한국의 독립영화라는 말은 영어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독립영화를 인디펜던트라는 말로 번역하는 순간, 미국의 인디펜던트 영화나 유럽의 엥데팡당, 일본의 자주영화(自主映畵)와 뒤섞일 우려가 있다. 이것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마치 한국의 재벌이 영어로도 재벌(Chae-bul)이라고 번역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독립영화도 어떤 경우에도 독립영화라는 말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의미에서의 독립성을 확보했다고 믿는다. 독립영화 현장에 있는 분들이 더욱 잘 알겠지만 디지털이 없던 시대, 16mm로 밖에 영화를 만들지 못했던 시절에는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독립영화의 대다수가 단편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기에 대한 김명준 소장의 반론도 알고 있다. 이미 그 당시에 단편영화 감독들은 필름에 대한 물신주의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비디오 액티비즘에 대한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그래서 종종 그 용어상으로 80년대에는 독립영화가 단편영화와 등치로 사용되기도 했다. 물론 공집합은 있겠지만 그것이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언어라는 것이 사회적 자장 안에 들어와서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90년대에 독립영화와 단편영화가 서로 혼용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혼란은 곧장 전선의 오류로 나타났다. 이년 전 한 독립영화제에서 3일인가 영화를 보면서 같이 간 친구에게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이것은 대학교 영화과 워크샵이거나 혹은 졸업영화제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여기에 최근에는 각종 문화강좌 수료 워크샵까지 포함된 것 같다. 어떻게 여기에 독립영화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다소 불편하게 말하자면 그때 독립영화제를 운영하던 분들이 원칙 없이 작품을 선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이러한 영화들을 독립영화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단지 양적 팽창과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면(대동단결?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해서?) 나는 오히려 되물어 보고 싶다. 이 영화제는 단편영화제인가, 독립영화제인가? 그런 맥락에서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다. 독립영화는 무엇입니까? 오히려 이제야 말로 이 질문이 중요해진 것이 아닐까? 물론 상황이 바뀌었다. 그렇기 때문에 80년 말 90년 초에 비해서 독립영화라는 용어가 유연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용어에 대해 어떤 도그마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영화라는 말을 정의하면서 자본과 사법적 제도로부터의 독립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한 이야기에 대해서 지금의 정황을 검토하면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전술적으로 매우 유연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제도 아래서 만들어지는 실습작품과 워크샵, 졸업영화들도 독립영화라고 불리어진다면 곤란하다. 독립영화라는 미명아래 영화제에 내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제도권영화에 간택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며, 실제로 기존 제도권의 제작자들이 그 자리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단걸음에 연출부 생활이 지겨우니 영화제로 떠서 그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죄책감 없이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독협은 이러한 현재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 독립영화라는 정신을 지켜낼 미학적, 정치적, 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내가 내부의 논쟁을 잘 알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한독협의 기관지 성겨을 지니고 있는『독립영화』를 15호까지 보면서 오히려 그런 논점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묻어두자. 이것을 여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단편영화들 중에도 독립영화의 정신을 지향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친구들이 있다. 나는 그런 영화들을 분명히 보았고 그런 작업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에 들어서서 독립영화라는 용어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갖고 있는 좀더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서로 원칙 자체를 논쟁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개별 작품에 대한 평은 읽을 수 있지만 독립영화 전체의 입장에 관한 글을 읽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단편영화 심사를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작년에 단편영화 심사를 세 군데를 하다보니 320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고등학교 학생 작품부터 보게 되는데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첫째 고등학생 영화에 대해서다. (아직 이것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것을 청소년 영화라고 정의해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용어가 필요한 지, 여기에 대해서는 매우 긴급하고도 신중하게 토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독협이 고등학생 영화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영화는 미래의 영화다. 이 영화들이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그들에게 더욱 많은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제는 한독협에서 새로운 세대들에 대한 교육과 독립영화 정신에 대한 토론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한 이들이 만드는 영화는 대부분 대학교 진학용으로 그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친구들이 얼마나 영리한 친구들인가 하면 소위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뽑혀온 평론가, 감독이란 인간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너무나 정확히 안다. 마치 수능시험에서 답안 정확하게 작성하는 요령으로 영화를 만든다. 내가 심사를 하다가 내 입맛에 맞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알고 지내는 전교조 선생님한테 전화를 했다.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전에 고등학생 영화를 많이 안 봐서 그러는데 이것이 하나의 경향이냐고 질문을 하니까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거야 수능시험이죠, 라는 대답을 들었다. 상을 받으면 높은 점수로 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으니까. 이들이 영화과에 진학하고, 이 과정은 결국 재생산될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

두 번째 영화과 학생들의 작품, 습작이라고 부르는 작품들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영화제 심사를 하러 가서 느끼는 것은 영화제가 평등한 기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두 개의 영화제(서울 단편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를 진행하면서 느낀 것이다. 영화제에서 모든 영화를 다 틀 수는 없고 결국 선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한된 영화에게 제한된 기회를 주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가 결국 나누어지는데, 문제는 좋은 영화에 대한 어떤 기준을 가지고들 있느냐, 라는 질문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 완성도가 기준이 되면 매우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영상원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모두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기자재가 우선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들이 한편으로는 특정학교 중심으로 재편되고, 다른 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어떤 기회를 상실하게 한다. 독립영화제라면 좋은 영화, 나쁜 영화를 가늠하는 기준이 이 영화가 독립영화 정신과 맞느냐, 아니냐가 되어야지 일반적인 미학적 기준과 판단을 가지고 영화의 완성도가 높으냐, 주제가 무엇이냐, 드라마가 잘됐느냐를 따진다면 꼼짝없이 함정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 함정은 예술, 작가주의, 연출자 중심주의이다.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독립영화제는 제도권 입맛에 맞는 미래의 감독들을 골라내는 일종의 게이트 키핑 매커니즘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두가지가 21세기를 막 시작하는 미디어 환경 속의 독립영화의 논점들 중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의미에서다.

김명준_ 글쎄,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이야기 하다보면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개념을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텐데, 그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각각의 개인들은 무엇인가 선택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그 얘기들을 혼란스럽게 뒤섞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뿐이다. 독립영화라는 개념이 혼란스러울 수 있는 것은 주류가 아닌 모든 것들을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까 충무로에서도 충무로 영화가 독립영화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물론 할리우드에 비교한다면 독립영화일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뒤섞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 이 개념은 굉장히 공세적으로 쓰였을 때는 일종의 전선의 개념이 될 수 있겠지만, 수세적으로 됐을 때는 진보적인 입장이나 소수자의 의견이 삭감되는 정치적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독립영화라는 표현은 80년대부터 나온 것이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쓴 것은 90년대이다. 나도 처음 영화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독립영화라는 표현을 썼다고 스스로 착각할 때가 있는데, 사실 돌이켜 보면 80년대에는 이 개념을 거의 쓰지 않았었다. 문제는 한국에서의 독립영화라는 용어가 80년대 영화운동의 흐름이 이어져 오면서 현재까지 오는 과정에서 전선의 개념 혹은 탈정치적인 개념 어느 쪽으로 결정되었다가 보다 그 긴장이 유지되면서 이어져오고 있고, 그러다 보니 동일한 용어가 서로 다른 개념을 함축하며 사용되고 있으며 현실에서도 서로 다른 경향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독립영화로 현실을 설명하고 지향점을 토론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아직까지 교착상태에 머물러있는 이 개념이 지닐 수 있는 모호함을 줄이기 위해 떄로는 '진보적' 이라는 수식어를 '영상운동' 이라는 주체에 붙여서 사용해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동의하는, 그리고 정말 '독립' 이라는 의미에 충실한 영화운동은 아직 '독립영화' 라는 개념을 자기의 것으로 완전히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의 독립영화 혹은 진보적 영상운동을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조직적 성격이 강하고 특정한 계급운동과 결합한 영상운동 형태를 모든 진보적 영상운동이 가능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이것이 협소하므로 -이것이 전부이니 협소할 수밖에- 그것과는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것이 독립영화의 진보라고 바라보는 것이 가장 초보적인 편향이면서도 가장 지배적인 편향이다.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집회의 슬로건 혹은 뉴스릴 정도로만 제한하려는 것은 본래적 의미의 진보적 운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양한 주체들이 어떻게 뒤섞이면서 세상과 일정한 정치적 긴장을 형성하고 가느냐가 중요하다. 그 주체는 개인일 수도 있고, 조직일수도 있고, 때로는 어느 날 하루 촬영해서 그 날 올리는 인터넷 방송일수도 있고, 몇 년을 제작한 장편다큐일수도 있고, 매니아에게 보여주는 작품일수도 있고, 영화적 전문성이 전혀 없는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주 대상으로 삼는 작품일수도 있다. 운동은 이렇듯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의 세상에 대한 정치적 긴장, 일정한 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영화운동을 독립영화로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세상을 변혁할 것인가라는 긴장 속에서, 그 안에서 관점, 자신의 존재, 활동 방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전제들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사회적 변화의 국면 속에서 그 경계 또한 계속 변할 것이고. 여기서 좀 더 역사적인 평가를 해보자.

첫 번째, 우리가 독립영화라고 할 때 우리가 지칭하는 대상은 사실은 역사적으로 영화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것이지 원래 '영화' 로 제한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을 그 사실을 모두 잊어버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영화운동은 언제나 시장이 부여하는 경계를 파괴하는 '수렴' 의 관점을 언제나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에 왜 영화라는 표현을 선택했냐하면, 방송은 고려대상이 아니었고 방송운동이라는 것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며, 퍼블릭 액세스는 알지도 못했고, 군부 독재 하에서 그런 가능성은 꿈도 꾸지 못했고 심지어 충무로도 우린 생각하지 않았기 떄문이다. 한때 80년대 후반에 이전세대를 비판하면서 왜 충무로를 고려하지 않았느냐 할 때 반박은 쉬웠다. 당연하다, 그로할 가치가 없는데 왜 고려하느냐, 고려할 가치가 있을 때 고려하는 것이지. 고려하지 않은 것을 마치 정치적 한계처럼 이야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관념적인 비판 아닌가? 그런데 다만 80년대 영화운동의 주체들이 생각했던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방송은 아닌 것이고 그럼 영화와 비슷하고 필름이고 외국의 사례를 보다보면 제3영화운동에 영화운동이란 이름이 붙으니 따온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초기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 매체가 통합되는 형태로 활동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필름으로 활동하고 다른 이는 다른 방식으로 하고,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지금 이 영화라는 개념자체는 스스로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면도 있다. 그렇다고 영화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는 아니지만, 이미 외부에서는 그것이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지상파의 독립적인 외주 전문채널에서 독립영화이야기를 하면 독립영화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한다. 어떤 매체든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고. 그랬을 때 극영화부분은 더더욱 다큐멘터리에 비해서 유연한 사고를 하지 못했던 어떤 한계도 있다.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은 지금 이런 상황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 장산곶매의 파산이다. 사실 그럴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영화라는 것이 원래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 어떤 엄밀한 전략적 사고도 없었다. 결국은 그 과정에서 그 활동자체가 파산이 났고 물론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러면서 극영화진영의 진보적인 역량들의 재생산이 단절되고 말았다.

두 번째, 특히 단편영화 분야의 경우, 그 평가의 틀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투쟁만 만들다가 지금은 개인도 다루니까 다양하다, 라는 개념은 정말 황당한 것 아닌가? 그것이 그 시대에 영상물로 제작이 안되었다고 해서 그때 사람들은 인식이 협소했고, 우리는 그 인식을 바꿨으니까 발전이다라는 식의 이야기, 이건 발전이 아니다. 그런 정치적 조건과 제작의 물적 조건이 생겼을 뿐이다. 진짜 다양성은 자기가 다루는 매체가 어떻게 누구에게 어떤 의도로 어떤 공간에서 상영되고 그럼으로써 현실의 풍부한 다양성과 결합해내는가에서 찾아질 수 있을 뿐이다. 처음에 말했던 정치적 긴장 속에서 서로 다른 활동들이 제작자와 관객간의 소통을 매개로 서로 침투하고 발전하는 것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굉장히 구조가 단순하다. 단편영화 쪽은, 만들면 영화제가 끝이다. 그들은 관객들로부터 검증 받을 기회도 없고, 계급투쟁의 현장에서 꺠질 길도 없고, 본인 스스로가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서 자극을 받을만한 체계도 없다.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있고, 그것이 한편으로는 역사적 단절, 그 이후 지금 말한 그런 과정들이 계속 강화되는 과정에서 거꾸로 독립영화라는 표현이 가질 수 있는 수세적 국면 속에서 독립영화는 상업적으로는 굉장히 키워졌다. 서울단편영화제, 무슨 영화제, 그래서 공공기관들이 지금은 달라졌지만 몇 년 전까지 처음에 독립영화에 시민권을 부여한 것은 단편영화였다. 그것은 철저하게 산업적인 것이었고 탈 정치적인 과정이었다. 그것이 현재 이런 상황을 가속화시키는 그래서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다양성을 표출하지 못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단편영화들이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안 된다. 워낙 잘 안 봐서. 보다가 영 아니네 해서 안보고 조금 보다가 왜 이러지 해서 안보고. 악순환이다.

정성일_ 첨언을 하자면 아까 김명준 소장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독립영화에 방점을 주어야 하는 것을 독립영화라는 말속에 있지 않고 독립영화라는 활동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독립영화의 방점이 활동이 아닌 영화에 찍히게 됐다. 독립영화라고 이름지어진 움직임이 양적으로는 팽창됐지만 그 반대로 바깥에서 보기에 활동에서는 둔화되고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독립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여전히 물론 돈이다. 그 돈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이 문제는 아직 독립영화라 이름 지어지지 않은 시절에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들 모두의 고민이었다. 그런데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지금 이 많은 제작후원금은 영진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영진위의 그러한 후원금은 한독협이 따낸 것이라기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다. 영화진흥공사가 영진위로 바뀌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선거공약에 따라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 새로운 영진위 위원들이 이 386세대들은 80년대 독립영화 진영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영진위 위원들은 제도영화도 중요하지만 독립영화도 보호해야 한다, 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전체 액수에서는 굉장히 적다. 그러나 영진공 시절의 독립영화가 그런 펀딩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면서 주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이렇게도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독립영화진영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의 문제의식이 제도권에서 정책적으로 펀딩할 만한 수준에서 멈추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는 그 정도로 서로 타협지점을 마련할 수 있지 라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영진위의 기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히려 전술적으로 더 많은 기금을 따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이 주어진 기금이라는 의미를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이것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는데) 독립영화들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 배급구조를 지난 10년 동안 찾지 않았다. 또는 못 찾았다. 여전히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영화제가 모두이다. 그러니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모두들 영화제에 목을 매게 된다. 이런 표현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정말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 자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제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것도 1년에 별로 안 된다. 그리고 사실상 그 행사들은 가족잔치이다. 그래서 이 영화제에 오면 마치 학예회에 온 것 같은 느낌 이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목을 매는 영화제는 무엇인가?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국제영화제들이다. 어쩌면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는 충무로 제도권의 영화감독들이 거기서 떠서 해외영화제에 가고 싶다, 라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거기서 떨어지면 독립영화 진영에서 내 영화가 왜 부산영화제에서 떨어졌냐고 항의하는 이상한 희극이 벌어진다.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선정한다는 것은 영화제 마음이다. 왜냐하면 영화제는 자기 정체성이 있는 것이며, 내부 집행부에서 갖고 있는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왜 내 영화가 떨어졌냐, 하고 항의하는 순간부터 문제가 거꾸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즉 독립영화에서 배급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물론 고민은 하겠지만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미디어환경이 이렇게 바뀌고 있고 다양한 기회들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보여주는 기회는 영화제를 통한 것 밖에 없다. 그러니까 영화를 만든 많은 사람들이 재생산의 구조를 가질 수가 없다. 그건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나는 한독협의 사업목표는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구조가 없으니까 더욱 더 영진위 펀딩에 목을 매게 되고, 영화제에 가서 자신의 영화를 보여주는 기회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그러다가 EBS, KBS에서 그런 방송이 없어진다고 하면 항의하는 것 이외에 아무 수단도 대책도 없다. 그래서 이런 생각마저 든다. 당신들은 지금 수동적으로 주어진 열매를 먹는 것을 즐기고 있지 않는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만 있을 뿐이고, 새로운 배급창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서 이들에게 영화를 재생산하는 구조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또는 하지 않는 것은 나로서는 독립영화 진영이 10년 전의 고민을 그대로 떠안고 있는 것이 아니가라는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점점 환경이 좋아지니까 예전만큼 고민하지 않는 것 같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가 너무 막가고 있나? (웃음) 정말 새로운 노력을 보고 싶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김명준_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생각은 든다. 몇 년 사이에, 그 이전의 활동의 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그런 주체들과 새롭게 등장한 세대들이, 내가 말했던 그런 의미의 독립영화의 범주에 포괄된즌 주체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하고 비교하면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고민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아까 말한 단편영화 장르하고는 거리가 있다.

정성일_ 아, 물론 여기까지 이야기 한 것은 앞으로 이야기 할 독립다큐멘터리 이쪽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단편영화들, 제한되어서라는 것인가? 전제하겠다.

김명준_ 그래서 이제 폭넓게 이야기를 해 봤으면 좋겠는데 그런 의미에서 희망적인 것도 많이 있다. 그 희망적인 이유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세상이 너무 절박해지고 있고 그것이 대중적으로 폭로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나 전쟁 등등……. 우리가 꼭 잘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불행하게도 세상의 모순이 전혀 해결되고 있지 않다. (웃음) 한가하게 독립영화가 노니던 시절은 서서히 마감되고, 물론 모든 독립영화인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거꾸로 상황이 강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정하게 비판적인 고민을 하는 계기가 주어지는 것 같다. 어쨌든 종합적으로 희망적일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 뒤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전에 단편영화 이야기를 조금만 더 덧붙인다면 아까 말한 그런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게 있다. 조금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고 긴장을 가지려는 친구들이 처음에 장르를 선택할 때 극영화로 안 간다. 그래서 그 상황을 계속 가속화시킨다. 이것도 일종의 편견이다. 뭔가 진보적 영화운동을 하려면 원래 닼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웃음) 진보적인 활동은 다큐이고 이 장르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런 악순환이 생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뭔가 새로운 균열을 일으킬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물론, 독립영화와 걸맞지 않는 사고인 이른바 장르의 균형성, 이 장르도 발전해야 하고 저 장르도 발전해야 하고. 이런 경향을 철칙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특정 장르가 가지고 있는 일정한 위력이 이런 정치적 긴장과 진보적 성격을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그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성일_ 미디어센터는 독립영화와 어떻게 만날 생각인가? 미디어센터가 해야 할 많은 역할이 있겠지만 독립영화와 어떻게 만날 것이며 지역에도 미디어센터가 들어설 텐데 지역 독립영화 운동과 어떻게 만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김명준_ 일단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일단 독립영화, 아까 문제제기 한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자. 이렇게 개념을 규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독립영화라는 표현을 전문적인 제작자의 대안적 제작과 배급상영활동, 진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런 활동으로 규정을 한다면 우리가 이제 얘기할 때는 우리가 독립영화계에서 무엇을 하라기보다는 그런 독립영화를 포함한 진보적 영상운동을 통한 세상 바꿔 나가기,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모두 묶어서 독립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일단 과도기적으로 전자의 의미에 기초한다면, 영상미디어센터는 그런 독립영화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것들을 아우를 필요가 있고 유기적으로 연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아직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여러 주제가 나열되고 있지만 굳이 요약하자면, 퍼블릭 액세스 강화라든가 미디어교육의 활성화라든가 독립영화에 대한 제작 지원, 새로운 대안 상영구조 개척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영상을 통한 세상 바꾸기가 영상미디어 센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디어센터는 총체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또 다른 한편 우리는 지금 국면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역사적 성격에 대해 파악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륭화 주류로부터 철저히 대립되는 대안적 활동 외에는 경험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국면이 주류와 대안의 대립이 해소되고 이른바 시민사회에서 조화롭게 대화할 수 있는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립은 여전하다. 그런데 바로 그 이전 시기의 대립의 성과물로서 새로운 공간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주어지기도 하고 주요하게는 그동안 싸웠기 때문에 얻은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흔히 공공적 영역이라고 표현한다. 그 영역에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공공적 영역은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왜곡될 수도 있겠지만 일종의 중간지대이며 대안적인 성격으로 해왔던 활동의 성과를 공적 주체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는 공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대안적 활동에서 했던 정치적인 활동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보편적 서비스이기 때문에, 하지만 공공적 영역이기에 특정한 자본과 권력에서 독립할 수 있고, 넓은 의미의 독립영화와 일치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공간자체가 전략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정치적인 국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상황은 변화하고 퇴각할 수 있다.

결국 이 공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 동안 주류와 진보적인 운동간에 관계 속에서 개척하지 못했던 영역들을 개헉하는 기지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영상미디어센터는 한편으로는 독립영화 주체가 보편적인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안적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주체를 지원하는 촉매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센터이지만 모든 것이 집중되는 센터의 의미가 아니라 중간지대에 있으면서 나머지 영역을 지원하고 성과를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독립영화는 좁게 규정할 경우 그 역할은 독립영화와 미디어 교육과 영상문화 전반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진보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냐 하는 것으로 들어나고 보다 구체적으로 독립영화로 들어가면 다양한 측면이 있다. 제작 지원, 제작주체 양성, 상영공간 확도 등등 말이다. 이를 위해 센터는 영화와 방송을 넘나들어야 하고 기존의 운동의 경계도 파괴할 필요가 있다. 시청자 운동, 독립영화, 언론운동 등을 서로 소통시키고 통합하고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 내는 구조를 만드는 그런 역할이 미디어센터 역할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 정도로 이것이 발전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고 우리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둘러싼 실천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하는 것이 또 중요하니까.

정성일_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미디어센터의 위치라는 것이 중간지대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것은 미디어센터가 문광부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갖는 한계이자 안전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미디어센터에도 독립영화들을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공간이 생겼으면 한다. 현재 중앙극장에서 단편영화들을 상영하고 있지만, 가끔 가서 영화들을 보는데 가면 참 썰렁하다. 그 극장 자체가 단편영화, 독립영화 상영조건에 맞지도 않고. 게다가 그곳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단편영화들 밖에 없고. 장편영화나 장편 다큐를 볼 기회가 없다. 그런 공간에 제공된다면 미디어센터 입장에서도 다른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거기서 더 나아가 미디어센터 웹사이트에서 정기상영을 할 수 있는 서버를 제공해 주면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되지 않을까 한다. 이를테면 대통령 선거에서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 폭발적인 영향을 발휘했는데 그러한 방식의 공개, 개봉 형식에 대해서 독립영화 진영의 고민은 무엇인가? 인터넷 매체를 활용하거나 그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또 한 가지. 그런 상영에서 무료 서비스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로 하여금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재생산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만이 독립영화를 독립영화답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김명준_ 그 부분은 토론이 많이 되지 않은 상황이고 지금 말한 그런 문제들이 남아있다. 아직까지는 온라인 영화 상영이 가장 들어맞는 장르는 에로영화다.

정성일_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하드코어, 몰카. (웃음)

김명준_ 그렇다. 말하자면 개인적이고 소비적인 공간이라 그런지 그런 장르들이 소비되고 기업들도 그런 영화들에서 수입을 올린다. 독립영화 쪽에서 본다면 장애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술적인 부분도 있고, 유료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강하고……. 영화운동 쪽에서는 어느 정도 재생산을 위한 판매라는 것에 대해서는 개념이 있다. 판매가 꼭 상업적인 활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보통신에서는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다 공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유료영상콘텐츠에 대해 어떤 거부감이 있으니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

정성일_ 이를테면 한독협에서도 스크린쿼터사수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참여하나, 참여해서 무엇을 얻었나? 물론 대의는 알고 있다. 그리고 필요성의 논리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그러나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서 운동에 참여할 때는 당연히 따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한국영화 상영할 때 한독협에서 추천하는 독립영화를 붙여서 상영하는 것을 내세울 수도 있다. 혹은 그에 대해서 일정정도 재생산할 수 있는 당신들의 펀딩을 해라. 그런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협상테이블들이 활발하게 기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협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나는 그 과정에서 제도권에서도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독립영화 진영과 함께 가야 할 필요성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스크린쿼터사수운동은 제도권과 독립영화 진영이 만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이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알고 배울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좋은 기회에 그저 인원이 동원되는 것 이외에 다른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김명준_ 단편영화 상영 등의 문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고, 지금 말씀하신 인터넷 이야기랑 둘 다 그런 고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 상영 부분을 봤을 때, 개별 작품을 상업적인 사이트에 들어가 몇 편을 계약해서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 벤처 거품이 빠지면서 아까 말한 그런 호시절은 다 갔다.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랬을 때 여러가지 발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방송국 시스템처럼 할 수도 있고.

말하자면, 특정한 인터넷 사이트가 많은 회원들을 확보하고 그것이 일정한 회원체계가 되면서 일정한 작품들의 컨텐츠의 양이 쌓여나가고 그 속에서 개별 작품으로 승부 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그 수익이 종합되고 분산되는 형태라든가 하는 개념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새로운 개념을 시도하려면 지금과 같은 고립 분산적인 상황에서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하려면 그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정보체계가 조직화되어야 한다. 아직은 미비하다. 그런 정보화라는 문제가 어떻게 진척되느냐와 절대적으로 이런 진보적 독립영화의 컨텐츠 제작주체가 양성되고 생산해내는 것, 그것이 이 문제를 돌파하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다른 과제와 맞물리기 때문에 인터넷만의 독자적인 실험만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것도 전략이 세워져야 하는데 아직 정리가 안 돼 있다.

두 번째 스크린쿼터 부분은 산업 쪽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 '그거 왜 독립영화가 같이 싸워요?' 하고.(웃음) 나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같이 했던 사람은 아닌데 한 가지 지적할 부분은, 지금 상황은 과거에 스크린쿼터 사수를 지지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엔 단순히 스크린쿼터 투쟁을 지지한다기보다는 영화인들 이른바 상업영화인들이 싸움을 지지하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몇 년 사이에 나름대로의 의식적 각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라도 현재는 스크린쿼터 뿐 아니라 BIT반대, 네이스에 대한 입장, 세계화에 대한 입장을 본다면 넓은 의미의 정치적 지향을 함께 할 여지가 생기고 있다고 본다. 그런 주제들은 독립영화들이 항상 끌고 온 문제였는데 그들이 함께 하게 되었으니까.

스크린쿼터 부분에 대해서 지적한 것은 결국은 독립영화 쪽의 교섭력의 문제겠다. 싸움을 한다면 꼭 내부적 성과를 따내기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위치를 확보하고 그 후에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해야 할 텐데 독립영화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형편없었다. 의제를 제시하고 공적영역에 어떤 정책을 제시할 수 있고 그 정책뿐만 아니라 중간지대로서 독립적으로 대안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지 상황을 꿰면서 정책의 의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필요할 때 터트려주고 필요할 때 교섭하는 훈련이 안되어 있다. 지금은 전반적인 내용 중 일부인 미디어센터 이슈가 돌파된 정도에 불과하다. 사실은 다른 주제들도 그렇게 가야한다.

스크린쿼터를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유기적 관계와 의미와 구체적 정책 그 속에서 현실적으로 정치적으로 관철해내고 이 과정을 조직적으로 장악하고 가야하는데 아직 약하다. 문제는, 늦었지만 이 힘을 어떻게 강화하면서 개별 몇 사람이 뛰어다니는 것이 아닌 공동체적으로 조직적으로 어떻게 함께 소통하면서 끌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을 한독협이 해결해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한독협은 지금 이것을 이른부 정책 대안을 내세운다는 것으로 왜소화시키지 말고 이러한 국면에서 한독협의 전략적 과제가 무엇이고 공적영역과 대안적 영역들을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구상 속에서 항상 자기 평가를 해야 한다. 자기 긴장을 갖고 얼마나 잘하고 있고, 회원들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역할을 하는지 고민해야한다.

정성일_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밖에서 본 입장에서는 방금 지적한 그런 것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어떤 의제를 갖고 이는지도 모르겠고, 어디에 동참을 했다는데도 왜 참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선의고 대의는 이해하지만 그런 일들을 할 때는 선의나 대의와 함께 전술이 필요하지 않나? 다시 말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거꾸로 제도권 영화인들과 산업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배우는 과정이다. 물론 일정정도 산업적 손해도 감수한다하더라도 그러면서 함께 할 때 더 큰 것을 얻게 되는 것일 텐데 그런 것이 밖에 있는 나에게는 잘 안 보인다. 내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진행하고 얻어내는지가 궁금하다.

김명준_ 노력은 하고 있다.

정성일_ [독립영화] 잡지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내용이 미안하게도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80년대의 자기반성의 과정은 사방에 팽배해있던 관념적이고, 개인창작 지향적이고, 작가주의라는 신화, 예술이라는 자기 신비화를 벗어나기 위해 고민한 것이었다. 80년대를 통과해 90년대를 가면서 어느 정도 자아비판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고 있으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하겠다. 영화 평을 쓰는 나와 내 동료들의 한국영화 평가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영화니까' 라는 온정주의와 왜곡된 민족주의이다. 이 때문에 서방세계, 혹은 바깥의 영화들보다 감싸고돌고 있다. 사실 독립영화 진영에서 제도권 영화들에 대한 평을 읽고 있으면 아주 한심하지 않나? 독립영화들에 대한 영화 평을 읽는 내 심정이 바로 그렇다. 이제 당신들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한국의 독립영화들에 대해 쓸 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온정주의까지 끼어든다. 냉정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320편의 영화를 보는데 솔직히 절반은 차마 못 봐주겠다. 정말 상식 이하였다. 물론 예술에서 객관적인 평가라는 표현은 한계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원칙이 없다. 그 글들에 의하면 대한민국 단편영화들은 다 걸작이다. 정말 그럴까? 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금 주어진 상황이라는 것이 개별 작품을 이야기할 만큼 한가한가? 그래서 아까 전제를 했던 것이다. 주어진 조건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주는 펀드와 갑자기 생겨나는 영화제들의 공개 기회 때문에 자본과 제도가 갑자기 주는 기회를 너무 즐기는 것은 아닌가? 즐기는 과정 속에서 나오는 현상은 다들 연출부 거치지 않고 단번에 충무로에 가서 영화를 찍으려는 도약의 발판이다. 그러면서 제도권과 밀월관계가 생겨난 것이다. 아까 김명준 소장이 길게 말한 것처럼 밀레니엄 시대에는 한독협에서 독립영화라는 것에 대한 개념정의를 우리 시대에는 새롭게 정의하겠다,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생각하는 방법도 있겠다. 하지만 명백히 독립영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 역사성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진화되고 배우고 부서지고 하면서 이 자리에 틀림없이 일정정도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지금의 독립영화의 활동은 무엇인가, 그 활동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사회에서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김명준_ 결론을 다 내리셨네. (웃음) 아까 말한 '한가한가, 아닌가' 라는 부분이 되새겨 볼 만한 이야기인 것 같다. 한편으로 분명히 개별 작품에 대한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또 안 되는 것이 있다. 막상 이론적 담론 등을 하지만 사실 별로 얘기되는 것은 없다. 그 작품의 총체적 평가가, 최근에 나오고 있는 작품의 경향이. 그걸 시도한 글들을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끄집어내서 경향을 짚어낼 뿐, 전체가 과연 어떻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떤지에 대한 총체적인 균형에 대한 것은 없고,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균형자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하루살이도 아닌데 좁게만 보려고 하는 건 아닌지……. 또 한편으로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오히려 80년대 비해 지금이 훨씬 더 정치적인 긴장이 없으면 위기를 돌파하기 힘들다고 본다. 지금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예전과 다르고 위기의 수준도 정치, 경제, 문화 모두 영역에서 다르다.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이 한국을 포함한 다양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제대로 보고 가자는 것이다. 어떻게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투명해 져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한다. 그것 자체가 지나간 얘기라는 둥 혹은 그런 얘기하는 것 자체가 식상하다는 둥 하지만 이미 그런 식의 반응들이 오히려 식상하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는 식상한 이미지를 스스로 머릿속에 내면화시키고서 모든 긴장과 정치와 문화적 진보적 성격을 고정된 이미지로 고착시키고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스스로 계속 합리화 하니까 그것이 마치 현실인양 착각하는 것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점을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다.

정성일_ 한 가지 더 이야기한다면 최근 단편영화들은 볼 기회가 많다. 하지만 독립영화라고 말하는 다큐들은 볼 기회가 없다. 영화제를 제외하고는. 이런 영화들을 위해서 한독협에서는 사람들과 만나게 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한독협 회원증 많은 사람들이 단편영화를 찍는 분들이기 때문에 활동의 방점이 지나치게 그쪽으로 가있는 것은 아닌가. 또 실제로 작품들에 대해서 규명하고 토론한다면 이런 작품들이 심층적으로 다양한 견해 속에서 토론되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씨네21], [필름2.0] 지금은 없어진 [키노]에 그 역할을 넘겨놓고 단편영화들에만 지나치게 힘을 몰아주고 있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든다. 지금 만드는 [독립영화]가 안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독립영화를 지금 하고 있는 분들, 한독협의 정체성에 대해서 규정짓게 만든다. 다른 창구가 없으니까. 한독협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긴 하지만, 지금 한독협 이사장으로 있는 황철민 감독도 본인 표현으로도 컬트사이트다, 라고 말한다(웃음). 솔직하게 그것만 가지고는 활동을 잘 모르겠다. 한독협은 좀 더 홍보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전투적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좀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만났으면 좋겠다.

김명준_ 좀더 사회화시키는 노력들과 기관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겠다.

정성일_ 이 저널이 좀더 많은 사람, 장소에서 보일 필요가 있다. 정말 접하기 힘들다. 특히 충무로에 가면 접하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제도권에서 반대로 독립영화 진영으로 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폐쇄적인 곳으로 보인다.

김명준_ 두 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시네. 문제가 많다는 것과 많이 보여야 한다는 것과. (웃음)

정성일_ 저널을 만들어 본 저로서 이게 굉장히 힘들다는 것은 안다. 영진위 기금을 받지 않나? 이를테면 내가 지원금 결정 심사를 하러 들어갔는데 심사하는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서 의의를 알고 난 다음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 4/5가 한 번도 이 책을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독립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좀 더 다양한 진영에 걸쳐서 영향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특집의 테마를 정할 때 절대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지라는 것은 아니지만 정책의 설정 등이 더욱더 공공영역 쪽에 가서 여기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것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영화를 생각하게 되고 미디어활동을 생각하게 되는 의제 설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를테면 기존 저널에 대해 불만이 많지 않은가.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음에 대해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독립영화에 한정되지 말고 해야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매우 폐쇄적인 느낌을 받는다. 이제 18호까지 왔다면 좀 더 한 단계 더 뛰어넘어야 할 것 같다. 진심으로 기대하고 지켜보겠다.

김명준
1962년 서울생
1974년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 졸업
1989년 이후 노동자 뉴스제작단에서 활동
1994년-1998년 월간 키노 디베이스 실장 역임
1998년 이후 (사)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 및 정책위원
1998년 이후 진보네트워크, 노동네트워크 운영위원
2001년 이후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소장
 
 
정성일
영화평론가
1959년생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전공
영화잡지『로드쇼』『키노』편집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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