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감독 홈페이지』 2001.01.01.(시기미확인호)본인인터뷰

김기영감독 홈페이지 - 정성일 <KINO> 편집장 인터뷰

이선화
구체적으로는 동숭회고전에서의 김기영 감독전이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김기영 회고전으로 가시화되었던, 90년대 후반 김기영 감독과 그의 영화가 다시 새롭게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컬트적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이며 그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정성일
김기영 감독의 영화가 다시 주목받게 된 기점은 동숭회고전이 아니라, 그 이전에 비디오를 통해서이다. 그 과정은 좀 더 복잡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83년 한국에 비디오 시장이 처음 열린 뒤, 많은 비디오들이 우후죽순 나오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영화매니아들과는 분리되어 비디오매니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89년 이후 대학내에서 운동권의 세력이 급격하게 퇴조하기 시작하면서 각 대학에서 이른바 '비디오 영화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경향이 두 가지로 분리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미개봉된 외국영화들의 출시되지 않은 비디오를 어렵게 구해서 보는 경우, 이를테면 타르코프스키나 앙겔로플로스의 영화 같은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출시는 되었지만 사람들이 전혀 뒤돌아보지 않았던 영화들, 즉 코헨 형제의 <블러드 심플>(<분노의 저격자>라는 이름으로 출시됐었다)이나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와 같은,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미국의 인디영화들과 같은 것들을 보는 경우였다.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던 이 사람들이 그 접점을 찾았던 곳은 의외로 통신공간을 통해서였다. 그러던 중 1992년경 PC통신에 영화를 보고나서 서로 퀴즈를 내는 영화퀴즈방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즉, 미출시 영화를 보는, 그리고 인디영화들과 같은 숨은 비디오들을 보는 전혀 다른 두 그룹이 사이버 채팅공간 속에서 교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로드 쇼>라는 영화잡지를 만들고 있던 나는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알고 있었던 컬트라는 현상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컬트'라는 이름으로 특집기사를 썼고, 그 이후 컬트라는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이 컬트라는 한국적 현상과 민족주의가 결합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즉 한국영화에는 컬트가 없나하는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국영화의 전통이라고 알려진 것은 흔히 말하는 리얼리즘으로 분류되었고, 사회적 리얼리즘적인 감독들만이 작가주의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 뭔가 다른 것을 찾고 있던 이 '반골'들이 한국영화사 속에서 항상 대감독으로 나와 있는 김기영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하녀>나 <화녀>같은 전기의 영화를 볼 수 없었던 이들 중 몇 명이 보게 된 비디오가 <육식동물>과 <바보사냥>이었다. 이 두 편의 영화가 갑자기 영퀴방의 주 대상으로 떠올랐고 이 영화들을 안 보면 안된다는 식의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1993-95년경에 갑자기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컬트영화가 되었고, 이러한 현상을 찾아낸 것이 동숭아트센터였던 것이다. 그 후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였던 부산영화제가 제2회 영화제에서 뭔가 붐을 조성할 만한, '발견'해 낼만 사람이 없을까하고 고민하던 중에 선택하게 된 것이 김기영 감독이다. 즉 부산영화제가 지하에 잠적해 있던 김기영 감독을 끌어 올려 영화제의 상품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기영 감독의 경우는 '재발견'이 아니라 매니아들의 컬트 현상과 영화제에 의한 상품화간의 기이한 결합이다. 왜냐하면 김기영 감독은 60년대에는 흥행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는 별도로 그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된 것은 앞서 말한 두 가지의 결합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김기영 감독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유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의 죽음이 대중들이 가진, 영화문화에서의 하나의 '패션'fashion을 '신화'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작품에 대한 평가는 별도로 한다면, 김기영 감독은 거꾸로 한국영화사 속에서의 김기영 감독의 재발견이 아닌,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의 영화문화의 패션의 컨텍스트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안민화
그렇다면 김기영 감독의 발견은 평론가나 영화학자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정성일
김기영 감독은 비평가나 영화학자에 의해 재발견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작업에 아무런 관심도 없을 매니아들이 김기영 감독을 발견한 것은 그들의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디오를 통해서였고, 비디오를 통해서 발견한 것이 컬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시네마데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한국에서 비디오가 일종의 시네마데끄의 기능을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굉장히 90년대적인 현상이다. 즉 '김기영 현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비디오 문화와 사이버 채팅공간, 그리고 갑작스레 젊은이들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한국의 상황 이 삼자간의 기묘한 결합이었던 셈이다. 만약 이것들 중 어느 한가지만 없었어도 김기영 패션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김기영 '패션'이었던 것이다.

이선화
그럼 그 당시에 영퀴방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던 한국 감독은 김기영이 유일했는가?

정성일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당시 김기영 감독의 의미는 '에드 우드'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영화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김기영이 60년대에 대단한 감독이라는 존경심이 전혀 없었다. 다만, 정말 황당무게하게 영화를 찍는다, 거의 실험영화처럼 영화를 찍는다는 너무나 저예산이고, 너무 약점이 많은데도 시침뚝떼고 찍는다는 얘기를 할뿐이었다. 지금 영화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더니즘을 얘기하는 진지한 감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학술적인 의미를 부여할수록 대중들은 관심을 더 잃어갈 것이다. 컬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지하에 있을 때는 파워풀하지만 지상에 뜨는 순간 그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부산영화제에서 스타가 되었고, 뒤이어 서울단편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 되었고 그 뒤에 유명을 달리 했지만, 그후로 누가 김기영 감독에 대해 얘기하는가. 사람들은 벌써 잊어버렸다.

이선화
60,70년대의 흥행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동안 유현목을 이야기하고 다른 감독들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김기영 감독이 이야기되지 못한 것이 흔히 말하는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적 전통에서 그의 영화가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는가?

정성일
내가 처음 김기영 감독의 어떤 의식을 갖고 발견하게 된 것은 1978년 재개봉관에서 <이어도>를 보고 나서이다. 그리고 그 뒤에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를 보았다. 하지만 그 때 아무도 그의 영화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리얼리즘 쪽으로 아주 빨리 넘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1975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이 나오고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 나오면서 위세대의 영화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그때 위세대는 계몽영화를 찍고 있었고, 이장호나 하길종은 새로운, 젊은 영화를 찍은 것이다. 1975년 <별들의 영화>가 개봉해서 흥행에 성공하고 <바보들의 행진>이 흥행한 그 중간에 한 편의 영화가 개봉한지 일주일만에 사라졌는데, 그 영화가 <삼포가는 길>이었다. 그 뒤 이만희 감독의 죽음과 함께 그 위의 감독들은 모두 매장되어 버렸고 위세대 감독들에 대한 레퀴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70년대 후반 충무로에서는 영감쟁이들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영화판의 담론이었다. 기성세대에 대한 굉장한 적대감과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영화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당시 "박정희가 지겹다"는 담론의 변형이 사회적으로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기집권의 이미지로 인해 나이가 많다는 것이 어떤 죄악감을 갖게 하는 것이 되었고, 그렇게 이장호 감독이나 하길종 감독의 영화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 곧바로 젊은 감독들은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일찍 죽어버렸고, 위세대는 이미 파산선고를 받은 뒤였다.

또한 80년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정치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폭력이 만연된 세상에서 김기영 감독처럼 알레고리의 영화를 찍거나 섹스에 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한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당시에 사회적으로 Social 리얼리즘은 하나의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바람불어 좋은 날>이나 <어둠의 자식들>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고 사회는 데모로 시달리고 있었고 영화는 관심을 잃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시기는 영화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의 담론의 우선권은 리얼리즘 영화에 있었다. 사람들은 모더니즘 영화라는 생각 자체를 하질 못했고 리얼리즘 영화만이 옳다고 생각했다. 당시 젊은 영화인들의 문건을 보면 리얼리즘 영화는 하나의 도그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비디오가 출현하게 되면서 그것을 접하게 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 없었던 만큼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 사람들은 스스로 영화를 발견해 냈고, 김기영 감독의 발견도 그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들의 발견은 그만큼 한국영화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임권택, 박광수, 장선우를 지겨워하며 다른 것을 원하던 그들은 그때 김기영 감독을 발견한 것이다.

안민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김기영 감독이 알려지고 주목받게 된 것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이지 않을까

정성일
그러한 면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영화 소비의 속도는 굉장히 빠르다. 부산영화제는 재빨리 김기영 감독을 상품화시켰던 것이다. 그 이전에 사람들이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단지 그가 한국영화의 에드 우드 같다는 의미에서였는데, 그가 거장이라는 둥, 모더니티라는 둥의 얘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김기영의 영화는 점점 더 흥미를 읽게 되었다.

안민화
김기영 감독의 영화가 지금 이전의 관객들에게 발견의 의미로 존재했다면 지금의 관객들에게 그의 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정성일
지금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받아들인 것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구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치 그 때 키아로스타미나 기타노 다케시를 관객들이 그렇게 열광적으로 대접했던 것이 다른 누가 왔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처럼 말이다.

안민화
90년대의 관객이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관심을 갖고 호감을 갖게 된 것은 다양성을 선호하는 그들의 성향에 기존의 리얼리즘적인 한국영화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김기영 영화가 맞았기 때문은 아닐까?

정성일
그렇게 보는 것은 자칫하면 김기영 감독을 신화화시키는, 일종의 history making이 되기 싶다. 그것을 그렇게 '아름다운' 현상으로 볼 것은 아니다. 물론 김기영을 발견한 것은 아래로부터, 영화매니아들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 후 통신에서 김기영 감독이 '뜬다'는 얘기를 재빨리 알게 된 동숭아트센터에서 김기영 감독을 포함한 '3인 감독전'을 열었고, 그 감독전을 본 이용관 교수와 평소 김기영 감독의 팬이었던 박광수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으로 김기영 회고전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 갑자기 뜨게 된 김기영 감독을 서울단편영화제에서도 심사위원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 이후에 베를린 영화제 측에서 영화제 프로그램으로 상영할 한국영화를 찾던 중에 김기영 감독의 영화가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회고전을 베를린 영화제에서 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 영화제에서의 회고전이 그리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 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열린 많은 회고전 중에 하나가 김기영 회고전이었고, 그의 전 작품을 상영한 것이 아니라 몇 작품만을 뽑아서 했다. 그 해의 베를린 영화제가 김기영 감독에게 오마쥬를 바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김기영 감독에게는 좋은 기회였지만, 이미 그 전에 임권택 감독 경우에는 유럽에서 2번의 회고전 -뮌헨 영화제와 낭트 영화제에서의- 이 있었고, 신상옥 감독의 회고전도 파리에서 열린 적이 있다. 그리고 한국영화회고전도 있었는데, 그때 상영한 60여 편의 한국영화 중에 김기영 감독의 많은 영화가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베를린 영화제에서의 김기영 회고전이 그렇게 대단한, 새로운 사건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베를린 영화제를 앞두고 김기영 감독이 갑자기 유고를 달리한 것이 문제였다. 그러면서 패션fashion이 신화가 된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이 패션이 90년대 한국의 미디어 문화, 즉 영화, PC통신, 비디오의 세 가지의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한국의 film culture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영화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여준다. 이 : 그렇다면 김기영 감독에 대한 연구 작업들이 그의 영화에 대한 평가와 함께 취해야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선화
그렇다면 김기영 감독에 대한 연구 작업들이 그의 영화에 대한 평가와 함께 취해야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정성일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들을 빨리 복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컬트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영화사 속에서 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작가적인 의미에서 발견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60,70년대 한국상황을 그의 영화들이 어떻게 거울로서 되비쳐내고 있는가 하는 반영성reflectivity에 대한, 그리고 김기영이라는 작가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자기반영성self-reflectivity으로 보여지고 있는가의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학술적인 작업으로서, 이미 대중들로부터는 괴리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영퀴방에서는 아무도 김기영 감독에 대한 문제를 내지 않는다. 문제는 독특한 컬트 필름문화로서 김기영의 붐을 연구하는 것과 김기영 영화를 연구하는 것은 이제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때문에 두 가지를 연구하는 관점은 전혀 별개의 것이어야 했다. 물론 앞으로, 그리고 이제부터는 두 가지 현상을 연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까지 벌어진 상황은 완전히 분리시켜 다른 틀framework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선화
한국감독에 대한 컬트적인 발견이 또 다시 가능하겠는가?

정성일
김기영 감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미디어와 결합하여 새로운 현상이 일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기영 감독 현상은 한국에서 그 단계에서의 미디어가 갖는 조건들의 불균질한 복합 현상이라는 의미이다. 피시통신 문화가 뜨기 시작한 것은 92-94년 무렵이었고, 인터넷은 90년대 말에 정착하였다. 통신문화는 젊은이들에게 '적분의 문화'였고, 반대로 인터넷은 '미분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어쩌면 '김기영 신화' 같은 것은 앞으로는 다시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피시통신에 의해 사람들은 모일 수 있었지만, 인터넷은 사람들을 미분시켜버린다.  김기영 감독이 90년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단순히 한국의 영화문화 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와 한국사회에서의 정치적인political 것과 문화적인cultual 것 사이의 교차 관계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영화만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 굉장히 특별한 현상이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김기영 감독에 대한 신화를 부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대한 바르뜨적 연구도 필요하겠지만, 또한 김기영 담론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푸코적 비판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