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정신』 1994.02.작품

사람/ 박광수

역사를 다시 서술하려는 야심가

한국영화에 관한 <난처한> 질문,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한국영화를 보러 가실 때 무얼 기대하고 계신지요?

영화를 한편 보는 것은 책을 한 권 사는 것과는 다르다. 책은 사서,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읽거나 또는 읽지 않은 다음, 보관하거나 다시 팔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그 영화를 보고, 나가야 한다. 그것은 입장권을 산다고 해서 일정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다. 다만 영화관에서 자신이 지불한 영화의 좌석을 지정한 날, 지정한 시간에 한해서 양도받는 것 뿐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이제 양도계약은 말소되고 그 권리를 다시 행사할 수 없다.

오직 그 시간에 그 영화를 보기 위해서 오천원을 지불한다. 이 행위의 기대의 지평을 어디서 세울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정말 문화적 행위인가? 영화는 두 시간 동안 놀고 웃으며 소비하는 활동사진인가, 아니면 아주 심각하게 시대정신이라고 부를만한 그 어떤 반성적 인식과 전망의 기계복제 예술인가?

이것은 철 지난 논쟁인가? 물론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에서 이 논쟁은 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창백한 엄숙주의자들에게 이미 결론은 내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구경꾼들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영화는 산업적 의미에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직배영화의 시장 점거와 악몽 같은 93년 하반기의 연쇄부도 속에서 고발과 잠적, 구속과 해외 도피가 영화처럼 이어졌다. 지금 당장 한국영화에서 필요한 것은 돈과 잃어버린 관객이다. 그걸 끌어 모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세상물정 모르는 (또는 관심없는) 구경꾼들은 당장 임권택 감독의「서편제」를 들이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천만한 말씀,「서편제」로 포장된 93년 한국영화 자료를 단 5분만 훑어 본다면 그 <끔찍한> 통계 앞에서 어안이 벙벙해질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한국영화를 ‘심각하게’ 질문하는 두 편의 영화, 강우석 감독의「투 캅스」와 박광수 감독의「그 섬에 가고 싶다」는 서로 둔한 제스처로 서로가 서로에게 반문(!)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는 그 어느 쪽의 편을 들어 지지하면서 또 다른 한쪽의 시체부검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 정말 궁금한 것은 마치 모순된 어법처럼 서로 진술하는 한국영화 ‘관객’의 모순된 욕망의 지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의「투 캅스」는 말 그대로 철저한 상업영화이다. 만일 영화가 활동사진이고, 구경꺼리이며, 호기심이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감독의 세계관과 논쟁을 벌일 만한 성질의 문제이긴 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한 작품이다. 그는 자신이 다루는 주인공들의 약점과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잘 알고 있다. 그 속을 아주 재빠르게 파고 들면서 웃음과 스피드, 적당한 멜로 드라마와 개그, 그리고 아슬아슬한 권선징악의 게임의 규칙을 마치 곡예라도 하듯이 잘 지켜나가고 있다. 반면에 박광수 감독의「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전혀 다른 전통에 서 있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유산을 충실하게 따르는 일종의 작가주의 경향이다. 영화는 감독의 목소리이며, 장면은 다른 의미이고, 내러티브는 역사의 일정한 모태 위에 서 있는 자기성찰의 공간이며 시간이다. 그래서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울거나 웃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주 무거운 역사의 무게이며, 심각한 작가주의의 그 소리에 귀 기울여야 비로소 들리는 미로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이 두 편의 영화가 서 있는 지점을 한국영화의 전통 속에서 탐색할 때 생겨난다. 여기에는 계보의 혼란스러움, 더 나아가 그로부터 한국영화의 식민지적 체험과 역사를 경유하여 나타나는 타자의 위험한 흔적이 망령처럼 그 모습을 선뜻 드러낸다.

강우석 감독의「투 캅스」는 비록 프랑스영화인 물로드 지디 감독의「마이 뉴 파트너」를 상당 부분 참고하기는 했지만, 그 영화정신은 헐리우드로부터 온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강박관념이 있다. 하나는 영화의 모든 장치(주인공, 플롯, 미장-센, 촬영, 장르적 컨벤션)들이 지금 보는 화면의 용어를 하나로 만들어서 단순명쾌한 언어로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화면을 읽어낸다는 말은 별 의미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그것을 읽어보지 못하도록 이 영화의 장면들은 모두 빠르게 움직이거나 짧은 속도로 편집되어 있다. 바로 그 정신은 헐리우드가 무성영화 초창기 시절 미국의 영화관객의 대다수를 점유하고 있던 이민 노동자들을 화면에 ‘쉽게’ 몰입시키기 위해서 세워놓은 금과옥조였다. 이후 이것은 상업 영화의 원칙이 되었으며, 영화가 꿈이며 오락이며 구경꺼리라고 믿는 관객들의 이상이 되었다. 헐리우드 영화의 철학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꿈 속에서 현실을 다시 읽어내는 것이다. 때로는 철저하게 포장하고, 때로는 해피 엔딩의 결말을 숨겨 놓고는 풍자하고 공격하며, 드물기는 하지만 꿈을 꾸면서 그 현실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강우석감독이 꾸는 꿈은 어떤 것일까?「투 캅스」는 그 꿈과 현실 사이의 미묘한 긴장관계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 낸다. 강우석 감독은 현실 속의 현실, 법 속의 법, 원칙 속의 원칙이 갖는 그 충돌의 모순을 자기의 무대로 만든다.

박광수 감독의「그 섬에 가고 싶다」는 유럽영화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 여기서 영화는 읽혀야 할 대상이며 깊이 가라앉는 비유와 알레고리의 수사학으로 잔뜩 무장한 함정이다. 이 얼마나 커다란 무게로 관객을 누르는 모더니즘의 정신인가?

이 영화의 무대는 남도 아래 자리잡은 작은 섬이다. 이 섬에는 예전에 네 명의 여인과 세 명의 사내가 살고 있었다. 김선생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문덕배는 아내를 괴롭히면서 바람이나 피고 다니는 난봉꾼이었고, 황설범은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마을 사람이었다. 가끔씩 말썽도 생기지만 그래도 이들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섬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마을에 공산군들이 닥친다. 그리고는 부르주아들과 반동들을 색출한다. 그동안 가진 자들에게 쌓였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이제 스스로 마을사람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배신한다. 그러나 이들은 공산군을 가장한 국방군들이었고, 그리고 스스로 ‘빨갱이’라고 고백한 이들을 모두 잡아다가 처단해버린다. 이 끔찍한 아이디어는 섬에서 쫓겨난 문덕배의 소행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문덕배가 죽고 그 아들이 아버지를 고향에 묻기 위해 배를 끌고 돌아온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죽은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용서하지 못한다며 섬에 이장시키는 것을 결사 반대한다.

영화는 연대기적으로 보여지는 대신 현대와 과거를 넘나들며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듯이 그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이제 스토리는 모자이크가 되고, 현재와 과거는 서로가 서로를 보충설명하면서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상반된 진술을 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진위를 판단하는 근거는 주인공이 아니라 영화 바깥에 있으면서 안에 들어와 있는 역사, 바로 그것이다. 그것보다 더 엄정한 재판관은 없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은 역사 그 자체를 다시 서술하려는 야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역사란 언제나 그것을 서술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고쳐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대기가 아니라 모자이크 수법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험한 내기가 뒤따른다. 무엇보다도 역사와 맞서면서 역사성historicity 그 자체가 증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형식 속에서 잘리우고, 덧칠당하고, 순서를 바꾸고, 그것을 빙빙 돌려 다른 것으로 이야기하는 일종의 복화술사로 둔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거꾸로 영화가 자기의 임무에 충실해지면 그럴수록 더욱 더 영화 속의 역사는 하나의 도그마처럼 도식으로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건 이 영화가 원하는 바가 아니며, 또한 역사는 더 이상 역사가 아닌 과거의 사실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을 불러 역사의 복수라고 하던가? 그런 의미에서 강우석 감독의「투 캅스」와 박광수 감독의「그 섬에 가고 싶다」는 자기의 계보에서 충실하게 자기는 최선을 다했음에는 틀림없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잘못 들어선 비상구인 것이다. 그것을 탈출하는 방법은? 도리가 없다. 돌아서서 나와서 다시 출발점에 서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