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릭액세스 시민영화제』 2002.10.20.심사평

『제2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화제』
심사평 - ‘착한 영화’들에게 들려주는 ‘쓴소리’

착한 영화들에 대해서 원칙의 잣대를 들이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출품한 영화들은 모두 좋은 세상을 믿고 있었고 그에 동감하는 저는 자기 방식으로 세상에 대해서 진심을 가지고 말하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습니다. 저는 '착한 영화들'속에서 싸움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선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에 타협의 지점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나는 이 착한 영화들을 향해서 미학적 혹은 기술적 측면에서 문제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착한 영화들에게 일방적으로 손을 둘어줄 수 없습니다. 나는 착한 영화들을 보면서 '착함에 빠져버린 모순'을 봅니다. '목적론'에 사로잡힌 '창백한 예정조화론'의 세계를 봅니다. 예술의 자리는, 적어도 영화의 자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어야 하고 그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잘못을 벌어지고 있어 착하기만 한 영화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먼저 '착한 거짓말'을 경계합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유리, 자기기만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0살 예수님은 현실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저는 없는 예수님에 대한 '모사'보다는 차라리 세상 안으로 들어와서 세상의 잘못을 고스란히 상속받고 그 안에서 떠 안은 부채를 얼마만큼 인간적으로 갚을 수 있는 지를 고민하는 영화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영화가 인간적 상황을 잊어버리거나, 잊기 위한 것이 되거나, 또는 잊는 척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메시아적 테마를 다룬 영화들을 두 번째로 경계합니다.

다른 한편 영화는 소통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누구와 만날 것인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 언제 만날 것인가, 어디서 만날 것인가에 대햐서 만큼이나 왜 만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협상을 벌여야 합니다. 결국 영화를 통해서 영화를 만드는 자기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당신의 자리를 저 전지전능의 연출의 자리, 무오류의 감독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서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 삶의 행위 그 곁에서 가져다 놓고 함께 살아가려는 그 소통의 자리에서 시작하십시오.

그것이 착한 영화들을 그들 나름의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착한 영화의 본질에 동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