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THEQUE』 2003.09.01.(09-10월호)본인인터뷰

C I n e m a t h e q u e  i m a g i n a i r e  - 상상의 시네마테크


영화는 나와 세계, 이미지에 대한 경험의 사이에 위치하는 매혹적인 대상이다. 영화는 또한 역사의 이야기 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기억의 장소이다. 영화와 공생하고 직접 교섭하는 영화광映畵狂에게 영화와 나의 관계, 영화와 나의 거리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며 여전히 신비로운 관계이다. 영화, 그리고 영화관은 그들에게 대단히 친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내밀한 이야기의 희망과 슬픔, 상상, 환영을 담은 빛으로 가득한 그 방은 그들에게 가장 불확실한 장소이기도 하다. '상상의 시네마테크'는 시네필의 기억과 상상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영화가 무엇이었는가를 물어보는 자리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그 세 번째 자리를 함께 했다. (편집자)

김성욱: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램으로 꼭 했으면 하는 영화는 어떤 것이죠?

정성일: 이제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 감독의 영화를 상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갖는 바램은 단지 낯선 감독의 영화를 보자는 뜻이 아니라 이 영화들이 시네필들에게 통과제의와도 같은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지난 번 장 으스타슈와 필립 가렐 회고전에서 <엄마와 창녀>를 소개하면서 당신은 "이 영화가 처음엔 힘들겠지만 영화의 믿음을 느끼고 나면 영화와 더불어 숨쉬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었죠. 적절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몸으로 체험하고 영화와 함께 숨쉬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영화들을 만나는 체험이 시네필들에게 지금 매우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너무나 관습적이고 너무나 제도적이며, 상업적이고, 천박하기 때문입니다. 시네필 문화는 10년 전보다 오히려 후퇴한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90년대 초에 영화 문화가 더 성숙하고 깊이 있고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80년대에 영화와 사회를 연결해보자는 격렬했던 정치의 계절이 끝나고 90년대 문화의 계절로 넘어 오면서, 그리고 영화와 사회의 의제를 끌어안으며 천박한 대중문화였던 영화가 예술로서 격상되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한국사회에서 토픽의 단절이라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IMF 시기 이후에 왔습니다. IMF가 시네필 문화의 단절을 가져온 것이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지만 스크린 쿼터에 대한 논쟁이 총체로서의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큰 틀을 거꾸로 부정하는 측면도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그러한 영화들을 통해 몸으로 체험하고 변화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제도로서의 영화에서 벗어나서 영화를 믿음으로 사유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 영화적 체험은 어땠나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영화를 보았는데, 물론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에 남는 영화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대한극장에서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입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일주일 내내 낙타를 그렸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영화의 깊은 의미는 알 길이 없었죠. 프랑수아 트뤼포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볼때부터 시네필이 된다고 했는데, 내가 영화에 홀리게 된 시기는 영화를 혼자 보기 시작한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외로움을 홀로 경험하면서 시네필의 첫 시기가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처음 혼자서 내 돈을 내고 본 영화는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상영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인데, 이 영화를 앉은자리에서 계속 보았고 그 다음날 또 보러 갔습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홍콩 무협영화에서 시작된 겁니다. 그 당시에 초등학생이 재개봉관에 가는 것은 비공식 문화에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공간은 해방구 같은 곳이었습니다. 특히 장철 영화들이 심금을 울렸어요. <금연자>를 토요일날 4회 중간부터 보고 5회 끝날 때까지 보고 나서 그 다음 주에는 일주일 내내 가서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비디오가 없었으니, 그 영화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몽땅 기억하는 수밖에 없었고, 영화를 기억하려고 필사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쇼트와 신에 대해 배웠던 것 같습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영화에서 장면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하는 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장면들의 연결이 보였습니다. 스케치북을 사서 정말 꼼꼼하게 만화풍으로 마치 복기하듯이 그렸습니다.

아시겠지만 70년대에는 외화를 낭비한다는 이유로 외화수입이 각 영화사마다 한 편씩, 스크린쿼터제가 적용되면서 일년에 개봉하는 외화가 고작해야 30편도 안 되었지만 시기였습니다. 이걸 다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에 정말 목말랐고 주말의 명화로는 성이 차지 않았었던 중3 시절 발견하게 된게 프랑스문화원이었습니다. 그 나이 또래는 다 그랬겠지만 FM 영화음악실에서 <금지된 장난>의 음악을 들으면서 정말 이 영화를 보고 싶었습니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다는 이야길 듣고 그곳을 찾아갔는데 <금지된 장난>은 다음 회에 하고 그 날 상영했던 게 바로 <기관총 부대>였습니다.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었어요. 저건 도대체 뭘까 라는 생각이 들었죠. 중3때인 74년도, 그해 11월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문화원에서는 항상 5월과 10월에 최근 프랑스 영화들을 10편씩 보여주었고 다른 때는 감독별로 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다음해 10월에 고다르 영화를 여러 편 상영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난 고다르가 어떤 감독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그때 고다르 영화를 보면서, 조금 멋있게 표현하자면 <비브르 사비>를 보면서 인식론적 단절을 겪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처음으로 카메라를 보았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브레히트 이런 건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대신 '아, 영화를 카메라로 찍는 거구나' 라는 식의 느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영화에서 다른 걸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영화에 대해 시네마토그래픽한 인식을 획득한 것이죠. 감사한 건 이런 것들을 책을 보고 나서 깨달은 게 아니라 영화를 보고 꺠달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그 영화들을 필름으로 보았다는 것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영화는 첫 체험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비디오로 본 영화를 나중에 필름으로 보게 되더라도 기억에 남는 건 열악한 비디오의 화질이잖아요. 노스탤지어일지도 모르지만, 필름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시네마테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고등학교 때의 경험 때문입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자막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영화를 보았고, 그 과정들이 영화를 생각하게끔 한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독일문화원도 영화를 상영하지 않았기에, 프랑스문화원은 나한테는 시네마테크였고 영화학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고등학생들도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어쩌면 시네필의 걸음걸이를 대학교 시절에 시작하는 것은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시절에 본 영화들은 지금 다시 보더라도 몇몇 시퀀스들은 지금의 기억이나 경험과 비교할 때 별반 차이가 없지만 한 달 전에 본 영화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시네필 문화를 뿌리깊게 하기 위해서는 좀더 나이 어린 관객들이 영화를 체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등학생들이 어린 나이에 으스타슈나 르누아르, 고다르의 영화들을 경험하게 된다면 정말 시네필이 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평생의 지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9년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개봉한 해에 태어난 세대는 서구에서도 시네필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세대입니다. 비디오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80년대가 당신에게는 어떤 것이었나요?

59년에 <네 멋대로 해라>, <400번의 구타>, <로코와 그의 형제들>, <소매치기> 등의 영화가 나왔습니다. 제 나이 또래는 10대 시절을 70년대에 보냈는데 정말 황폐한 시기였습니다.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은 모두 불법이었습니다. 서구에서 90년대에 자유로웠던 70년대라며 70년대를 부활시킬 때 정말 너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세계사의 시간과 한국시간의 비동시성이 시네필에게도 참혹한 경험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80년대는 세계사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 문화의 백화점 시대였지만, 또한 정치의 시대였습니다. 78학번인 제가 군대를 갔다오니 82년이었습니다. 제 눈앞에서 친구가 분신을 하던 끔찍한 시기였습니다. 영화를 이야기하기 어려운 시대였죠. 80년대를 비디오의 시대로 기억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전함 포템킨>이 너무 보고 싶어서, 해외에 도망가는 꿈을 꾸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80년대가 있었기에 다큐멘터리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유럽 모던영화나 아트하우스 영화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에 내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아시아영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80년대 초까지 아시아영화는 제 머리 속에 없었습니다. 84년도에 유학 갔다 돌아온 친구가 내게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한 편을 소개해주었습니다. 그 영화가 볼 <펭쿠이에서 온 소년>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세계영화의 시간과 나의 영화적 경험이 동시성을 획득하는 순간을 느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과거의 영화들에 매혹되거나 고전영화를 보았을 뿐 동시대 영화를 체험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아시아 영화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아시아영화 하면 일본영화밖에 없었죠.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티야지트 레이의 영화는 정말 아름답지만 마음을 울릴 만큼 좋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영화 또한 동시성의 영화는 아니었죠. 하지만 대만에서 온 낯선 영화가 나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영화와의 만남이 소중했던 것입니다. 고맙게도, 80년대가 끝나갈 무렵 왕가위의 <열혈남아>를 또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이 영화를 지지하기 전에 저는 이 영화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 좋다고 하는 영화가 아니라 어떤 사전지식 없이 보았는데 정말 좋구나 하는 영화가 이제까지 내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프랑스문화원의 영화를 보며 영화에 대한 교양이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있어요. 영화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너무 많은 지금 그러한 사실들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영화를 내가 찾아냈다는 즐거움이 없는 것이죠. 저는 시네마테크에 오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평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가 정말 죽여, 그 이유는 이런 거야, 라는 그런 글들을 읽고 싶습니다. 으스타슈의 영화를 보며 <엄마와 창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교과서적인 것입니다. <산타클로스는 푸른 눈을 지녔다>가 더 좋더라, 라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으면 합니다. 공식문화를 쫓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기에 자기의 판단과 자기에 대한 사랑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80년대에 과학적인 영화이론과 비평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셨는데요.

두 가지 야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영화를 인상주의 비평에서 구하자라는 생각이 있었죠. 보고 이거 죽이는 거 아냐, 라는 식의 8매짜리 영화비평에서 살았던 우리들은 이제는 영화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사고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지적인 배경들은 서로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조주의를 동시에 사고했습니다. 군대 가기 전까지의 선배의 권유로 비판이론을 학습했고, 그 이후에 김현 선생의 프랑스 비평서를 읽으며 바르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적인 쇼크가 있었어요.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열심히 탐독한 잡지가 <현대사상>이었는데 알튀세, 들뢰즈, 데리다 등의 글을 읽었습니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지만 이런 걸 어떻게 영화와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알튀세, 바르트, 필름 스터디와 관련한 글들을 번역해야 읽었고 그런 것들을 통해 인상주의 영화비평에서 영화를 구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영일 선생의 이야기를 넘어서자는 것이었습니다. 정영일 선생의 이야기는 당시 영화에 관한 많은 자양분을 주었지만, 매우 편중되고 제한된 영화 이야기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던영화 이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계영화사의 시간과 우리들의 감각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걸 이해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한편으로는, 이게 중요한 것 같은데, 프랑스문화원 세대들은 80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소개하는 독일영화들을 보며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편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비디오가 도착하기 전이죠. 독일문화화원 영화들은 지엽적으로 세계영화사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외면적으로 장산곶매에서 피크를 이루는 영화와 정치와의 관계가 있었지요. 82년도 10월에 서울영화집단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를 준비하면서 솔라나스의 영화가 교재로 사용되고, 라틴 영화들을 소개하며 실천의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런 것들이 80년대의 시네필들에게 정신분열증적인 요소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영화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맵핑을 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89년도에 두 편의 영화와의 만남이 모든 것들을 정리해주었습니다. 화양극장에서 본 <열혈남아>가 그 하나고, 그해 11월에 낭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 회고전이 열렸는데 거기서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내 자리를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제국주의 국가에서 지식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시아라는 공간에서 내가 사고해야 하는구나라는 자각 말이죠. 위대한 고전과 유산을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 하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내 글 속에서 어떻게 창조적으로 재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 겁니다. 롱테이크를 알고는 있었지만 <비정성시>를 보며 느낌이 달랐습니다. 이건 내가 대만을 이해하고 현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열혈남아>를 보며 홍콩이라는 도시성을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홍콩은 분명 파리나 뉴욕보다는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파리의 거리를 총을 맞고 달리는 미셸의 모습의 아름다움, 리용역 근처를 돌아다니는 소매치기의 손의 아름다움은 물론 숭고하지만 그건 나한테는 경배의 대상이었지 나의 고민으로 끌어들이기에는 너무 멀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내가 끌어안을 수 있었고 더 큰 희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브레송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어요. 그는 항상 경배의 대상인 거죠. 하지만 29살의 나이에 드는 생각은 이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이런 영화를 만든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질문하고 대답이 듣고 싶었어요. 그런데, 소망하니까 되더군요.

좀더 구체적으로 아시아적인 정체성의 문제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서른이 되면서 맹목적인 숭배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물론 지금도 가장 관심있는 감독은 고다르입니다. 브레송 영화 또한 좋습니다. 하지만 저의 시네필적인 사랑이 박물관에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동시성을 획득하고 싶은 것입니다. 동시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왕가위와 허우샤오시엔을 통해 브레송이나 고다르나, 드레이어를 발견하는 것이 저에게 이제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로마에서 자전거를 잃어버려 돌아다니는 시츄에이센이 북경에 온다면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하거나, 리용 거리의 소매치기가 펭양거리에 오게 되면, 이런 식으로 지리성과 신화성을 획득하고 그 안에서 동시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저에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방 세계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거기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를테면 80년대가 시작하면서 독일문화원에 강의를 하러 온 독일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파스빈더와 헤어조크의 영화에서 절대 이해 안 되는 측면들을 느꼈습니다. 그것 때문에 위대함이 덜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영화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지리적인 한계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영화도 아시아 영화라는 맵핑 속에서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비디오, 혹은 디지털 시대의 시네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비디오가 등장하는 순간 시네필의 시대가 끝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를 떠올릴 때 유일한 것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걸 복원하려는 순간 거기에 상상이 개입합니다. 하지만 비디오가 등장하는 순간 아무 때나 그 장면을 꺼내보게 되면서 시네필의 기억의 힘의 상실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네필이 죽는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비디오 이전과 이후, 즉 아날로그 시네필과 디지털 시네필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비디오와 함께 시작한 시네필들이 거꾸로 새롭게 정의내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게 앙드레 바쟁의 글을 읽고 실제로 그 장면을 찾아보면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기억에 의존해 쓸 수밖에 없었던 글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으로 보존하려 한 노력 때문에 앙드레 바쟁의 글의 힘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새르주 다네가 아마도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의 시네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시네필 세대는 어디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겁니다.

시네필들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대는 필요하겠지만, 경험적으로 보자면 힘든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연대할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공유하기 힘들죠.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네필의 다양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네필들은 모나드인 것 같습니다. 시네필들은 라이프니츠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지 스피노자적인 세계에 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시네마테크 또한 특별한 작품보다는 균형감각을 갖는 영화적 교양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