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L Cinema Club』 2001.08.21.작품

영화교실

큐브릭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그렇지 않다. 아니,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노릴 필요가 없었다.모호함은 오히려 피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2001년 우주 오딧세이』같은 영화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관객들 각자가 자신의 감정과 이해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모호함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관객을 시각체험에 몰입하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비언어적인 차원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다룰 때에는 모호함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예술이 갖는 모호함이다. 예술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이므로, 그것은 항상 다른 것이다.
- 스탠리 큐브릭

내가 큐브릭의 영화세계와 서로 조화를 이루는데 어려움은 없었다.첫 장면에서의 대화 같은 경우,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완벽하게 그것을 구현했다. 그것은 큐브릭에 대한 존경의 뜻뿐만 아니라 내가 그보다 잘 만들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나에게 전해 준 부분은 최대한 이용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창조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하는 매순간 큐브릭이 나와 함께 있다고 느꼈다. 이 영화 곳곳에는 큐브릭의 흔적이 배어있다. 나는 큐브릭의 비전이나 컨셉은 따로 두고서라도 나의 이야기를 하고 나의 비전을 표현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굳이 내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큐브릭은 내게 충분한 아이디어와 영감을 제공했다.
- 스티븐 스필버그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탠리 큐브릭은 지금 막『2001년 우주 오딧세이』를 끝낸 다음이었다. 그의 예술적 야심이 담겨있는 이 작품은 그 형이상학적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대부분 그의 동시대 거장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고 털어놓았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불현듯 준비중이던 영화를 중지하고 로마시대를 무대로 한 바로크적 양식미의 "사티리콘"에로 달려갔다. 펠리니는 "이제 영화에서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은 없어졌다"라고 찬양하였다. 앤디 워홀은 "거대한 환각파티장"이라고 미묘한 뉘앙스로 칭찬했다. 데이빗 보위는 이 영화를 본 다음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언지 알았다"라고 중얼거렸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앤드류 새리스는 "후반부가 너무 지루하다. 아마도 큐브릭은 자기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미루어둔 것 같다"라고 빈정거렸다. 이 영화는 60년대의 히피들에게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눈 앞에서 실현되는 것이 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스탠리 큐브릭은 이 장대한 SF영화를 끝내놓은 다음 두 가지 프로젝트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 하나는 나폴레옹에 관한 자서전이다. 그는 종종 이 영화를 우리 시대의『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될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게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의 전투 경력이나 정치적인 권력투쟁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성생활이 큐브릭을 잡아끌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영화는 동구권에서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뒤를 잇는 SF영화『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가지 프로젝트 모두가 연기되었다. 큐브릭은 이 두 가지 프로젝트를 그의 생애 마지막 날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A.I.』의 처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였다. 점점 더 지구는 물에 잠겨 가는데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 A.I.가 지구상의 컴퓨터들과 연대하여(!) 지구를 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A.I.는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다. 지금 인류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의 절멸을 방치하고 역사를 다시 시작할 것인가?

명백히 이 영화는『2001년 우주 오딧세이』의 속편으로 준비되었던 것 같다. 인공지능 컴퓨터 A.I.는『2001년 우주 오딧세이』에서 우주 계획으로부터 궤도 이탈시킨 컴퓨터 H.A.L.의 이종사촌이거나 여기서 더 발전한 컴퓨터일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HAL은 IBM의 영어 이니셜의 순서로부터 한 글자씩 이전 글자로 구성된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매우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되었던 것 같다. 큐브릭은 만화가 크리스 베이커에게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여준 다음 스토리 보드와 스케치를 그리게 하였다. 거의 매년 내년에 보고 싶은 "꿈의 영화" 목록에는 영화 애호가들로부터 이 영화의 제목을 거론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 목록에서 내년에는 두 편의 영화가 빠질 것 같은데 다른 한 편은 판타지 소설 "반지전쟁"의 영화화이다. 이 영화는 피터 잭슨이 연출하여 올해 크리스마스부터 삼 년간에 걸쳐 개봉될 예정이다) 그러나 큐브릭은 1972년 갑자기 런던을 무대로 한 폭력적인 SF영화의 묵시록『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를 마치 개인 소장품과 같은 16미리영화 스타일로 찍힌 70미리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순식간에 세대를 전승하는 컬트영화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이 장르의 종지부를 찍거나 그 자신을 패러디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2001년, 우주 오딧세이』에 나온 모노리스가 다시 등장한다) 큐브릭은 갑자기 자신의 관심을 18세기에로 돌렸다. 그러나 그가 시대를 옮겼다고 해서 SF영화에 대한 관심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배리 린든』을 찍기 위해서 그는 NASA의 도움을 빌렸고, 마치 망망대해 우주에서 촬영하는 것처럼 우주탐사용 필름을 갖고 이 영화의 공간을 담아냈다. 그는 공간에 대한 탐색을 거듭하였다. 아마도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거대한 세트장을 사용했을『샤이닝』은 스테디 캠 카메라와 함께 홀린 듯이 이 공간을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녔다. 그는 공포영화의 장르 안에 들어가서 미국의 역사를 다시 사고하였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결코『A.I.』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SF영화의 르네상스가 오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 르네상스가 그저 유행에 지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미학과 정치학, 그리고 철학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SF영화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전장터가 되었다. 리들리 스콧트의『블레이드 런너』와 폴 바호벤의『로보캅』, 그리고 조지 밀러의『매드 맥스 2』는 SF 영화에 철학적 논쟁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여전히『2001년 우주 오딧세이』는 이 장르의 최고봉의 자리에 올라서 있었다. 큐브릭은 오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돌아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당황시킨 것은 그가 베트남전 영화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영화가 그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풀 매탈 자켓』은 베트남에 관한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정글전 장면을 빼고 그 대신 도시전으로 바꿔 놓았다. 거의 소품처럼 만들어진 이 영화의 전투장면들은 마치 50년대 헐리우드의 B급 전쟁영화처럼 보였고, 이 영화에서는 과도할 정도로 매달려 온 하이 테크한 영화 테크놀로지에의 강박관념으로부터도 풀려 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는 큐브릭의 지지자들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긴 침묵에 들어갔다. 그가 이 침묵의 기간동안 만든 영화(라기 보다는 찍은 디지털 장면)은 런던에 있는 그의 이웃에서 수 차례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의 정원에 매달린 과일을 따가자 법원에 제출하기 위하여 촬영한 15분 정도의 "몰래 카메라"가 전부이다. 그런데 99년 갑자기 사정이 변했다. 큐브릭이 다시 돌아온다는 소문이 워너 홍보실에서 흘러나왔다. 모두들 이제야『A.I.』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영화는 아르튀르 슈나츨러의 원작소설을 현재적으로 각색한『아이즈 와이드 샷』이었다. 큐브릭은 이 영화 다음 작품이『A.I』가 될 것이라고 비공식적인 인터뷰에서 대답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아이즈 와이드 샷』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예언했던 2001년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A.I.』는 "꿈의 영화"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큐브릭의 유가족들은 이 영화를 스필버그에게 맡겼다. 가장 놀란 것은 큐브릭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스필버그가 결코(!) 큐브릭의 숨결을 재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발표가 나오자 가장 지독한 논평은 빌리지 보이스에서였다. 이 뉴스에 덧붙이면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피터 팬의 동화로 만들어낼 것이 너무나 분명한 예정된 실패의 수순"이라고 말문을 닫았다) 스필버그에게 다른 프로젝트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스필버그는『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끝난 후 두 편의 영화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톰 크루즈가 주연을 할 것으로 알려진)『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장만옥이 주연을 할 것으로 알려진)『게이샤 이야기』는 매우 구체적인 상태까지 진행된 상태였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이 두 편의 영화를 모두 중단시키고, 그가 애착을 갖고 있었던『쥬라기 공원 3』의 감독도 조 존스트에게 넘긴 채『A.I.』에 매달렸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최선을 다해도 결국에는 만들어지지 않을 큐브릭의『A.I.』와 비교된 채 결코 이길 수 없는 게임에 뛰어든다고 모두들 스필버그의 무모함에 대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촬영현장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리고 큐브릭의 소원대로 이 영화는 2001년에 완성되었다. 하여튼 스필버그는 고인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스필버그 버전으로 고쳐진 이 영화의 줄거리. 지구는 온난화 현상으로 점점 물이 차 오른다. 그리고 인류는 과학적 진보를 거듭하여 로봇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인간에 가까이 가 닿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하비박사(윌리엄 하트)는 감정이 있는 최초의 로봇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몬트)를 만든다. 데이빗의 약점은 처음 자기가 사랑하도록 입력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정보는 수정되지도 않으며,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분해하는 수밖에 없다. 데이빗은 스윈튼 부부집에 입양된다. 스윈튼 부부에게는 아들 마틴이 있는데, 마틴은 지금 사고를 당한 이후 식물인간으로 지내고 있다. 스윈튼부인은 처음에는 데이빗에게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 데이빗에게 자기를 사랑하도록 입력한다. 하지만 행복한 날은 지속되지 않는다. 마틴이 깨어나 집에 돌아온 것이다. 마틴은 데이빗에게 질투를 느끼고, 데이빗도 마틴에게서 경쟁심을 느낀다. 사고가 이어지자, 스윈턴 부부는 데이빗을 만든 사이버트로닉스사에 돌려주기로 한다. 그러나 그 말은 데이빗을 폐기 처분하는 것이다. 고민하던 스윈턴 부인은 데이빗을 숲에 버린다. 자신이 로봇이라서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 데이빗은 동화책 "피노키오"에 씌여진 대로 어딘가에 있을 푸른 요정을 찾아가 소원을 빌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집 바깥으로 나온 데이빗을 기다리는 것은 사방에 출몰하는 위기다. 데이빗은 섹스상대로 만들어진 남창 로봇 조(주드 로)와 만나 여행을 시작한다. 데이빗은 마침내 푸른 요정을 찾아 세상의 끝에 오지만 그곳에서 기다린 사람은 하비박사다. 실망한 데이빗은 물에 뛰어들어 깊은 곳에 잠겨있는 공원의 푸른 요정 동상 앞에서 소원을 빌고 잠든다. (아마도 대부분의 영화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천년이 다시 지난다. 이제 인류는 멸종했고. 지구는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 우주인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데이빗에게 단 하루만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어머니를 유전자 공학으로 살려낸다. 데이빗은 처음으로 행복을 맛본다. 물론 이 이야기의 원형은 피노키오이다. 이것을 발견하는 일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시종일관 데이빗 자신이 피노키오의 대사를 읊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쓰려는 이들은 누구라도 피터팬이 만든 피노키오라고 빈정거리고 싶어서 혀가 근질거릴 것이다. 물론 그 말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누가 보아도 영화의 도입부는『태양의 제국』과『컬러 퍼플』의 변주이다. 중반에는『인디아나 존스』가 되었다가 에필로그에 이르면 영화는 갑자기『미지와의 조우』가 된다. 또는 이 영화의 주인-이야기(master-narrative)는 피노키오라기 보다는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홈-이데올로기의 원형인『오즈의 마법사』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여기에 로봇 원형경기장 장면은 『매드 맥스 3』를 닮았으며,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제임스 카메론의『어비스』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물론 스탠리 큐브릭의 흔적이 남아있다. 도입부는『아이즈 와이드 샷』의 외디푸스 삼각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남창 조가 등장하면『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의 세트장에 온 것 같다. 에필로그는 모노리스만이 등장하지 않을 뿐(꼭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마치 모노리스같은 석판이 집 안 한가운데 서있기 때문이다) 명백히『2001년, 우주 오딧세이』의 마지막 장면의 속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영화를 빌려 스필버그가 모자이크의 거대한 천장화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것이 고인에 대한 오마쥬라고 피해갈 수도 있다.

그러나『A.I.』는 그렇게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큐브릭과 스필버그의 화해의 흔적이 끝까지 발견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방식으로 버티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큐브릭은 여전히 자기의 영화적인 개념들을 영화 안에서 고스란히 다시 재현해내기 시작한다. 스필버그는 큐브릭에게 오마쥬를 바치는 대신 이 이야기를 자기의 영화적 비전 안에서 이해하고 그것의 형상을 구체성 안으로 옮겨온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개념과 비전은 서로 다른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활동하기 시작하고, 영화의 윤곽과 이 안에 담겨진 형상들은 서로 다른 원칙을 갖고 있다. 이 영화가 마치 서로 다른 세 편의 영화를 연결시켜놓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A.I.』는 그 자체로 영화라는 기계장치의 거대한 인공지능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이미지는 뇌의 구조와도 같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개념을 찾아내고 그 안에서 운동과 시간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들뢰즈의 설명은 더 할 나위 없이 이 영화를 위해 준비된 잠언처럼 보일 정도이다. 오히려 정말 중요한 것은 큐브릭이 이 영화에서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큐브릭이 이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 라는 불가능한 아쉬움을 멈추고 그 반대로 이 영화에서 여전히 남아서 버티는 큐브릭-얼룩이라고 부를만한 잉여지식의 왜상(歪像)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실현의 테마는 이미 여기서 보여지는 이야기에서 고정점을 어디로 옮기는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이 영화에서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았다는 스필버그의 말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두 사람은 같은 이야기에서 고정점을 다른 곳에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가 두 개의 다른 원근법을 가진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건 우리가 광경을 볼 때 어느 대상을 보느냐에 따라 그 광경자체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까운 것을 보면 먼 것이 보이지 않고, 먼 것을 보면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는다. 창문을 바라보면 풍경이 보이지 않고, 풍경을 보면 창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큐브릭은『A.I.』를『2001년 우주 오딧세이』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 만들고 싶어했다. 어쩌면 그 속편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말『2001년 오디세이』과 관계없는 SF영화였던 것일까? 만일『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가 그 후일담이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마지막 장면에서 느닷없이 모노리스를 보여준 것일까?)『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가 그 후일담인 것과 마찬가지로『A.I.』가 또 다른 후일담이라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혹시 둘 사이는 일종의 기형적인 쌍둥이인 것은 아닐까? 다시『2001년』으로 돌아가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으로 미래를 열어놓고 있다. 그 인류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 새로운 인류가 이드에 사로 잡혀서 미쳐 날뛴다면 무엇으로 그를 붙들 수 있을까?『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가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해결방식은 초자아의 폭력적인 정정이다. 그 사이에서 자아는 어디에도 설 수 있는 곳이 없다. 새로운 인류는 선 대신 악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반대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A.I.』는 그 반대의 선택을 보여준다. 그러나 큐브릭은 악의 선택에 대한 반대의 지점에 선을 갖다 놓지는 않는다. 그 대신 감정의 질병을 갖다 놓는다. 큐브릭은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를 믿지 않는다. 문제는 스필버그는『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대해서 균형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2001년』에서『A.I.』에 이르는 연결의 선을 다시 그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선 안에서 데이빗은 이미 자기의 쌍둥이형을 잃어버린 비대칭의 대상을 찾아야만 한다. 스필버그가 남창 로봇 조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좀 더 근본주의적인 의문이 있다. 그런데 도대체『2001년』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은 무엇을 지칭하려고 한 것일까? 그가 누구이기에 그의 성장에 큐브릭은 그렇게 끈질기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일까? 왜 이 영화를 2001년에 큐브릭은 만들고 싶어 한 것일까?『A.I.』는 시작하면 하비박사가 감정을 가진 로봇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토론한다. 그들은 마치 원탁의 자리에 모여 앉은 원로들처럼 과학적 발명에 대한 윤리적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제 발명은 끝났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감정을 가진 로봇에 대해서 그들은 자신에 넘쳐 있다. 그런데 한 여성과학자가 하비 박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랑할 줄 아는 로봇을 만들었을 때 인간은 그 사랑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합니까?" 모두들 그 질문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그런데 큐브릭은 이 사랑에 관한 근본주의적 질문을 던지는 동안, 스필버그는 사랑의 가장 숭고한 인간적 관계에 집착한다. 그럼으로써 큐브릭이 종교적인 의문에로 이끌리는 동안, 스필버그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사랑에로 옮겨간다. 그 두 개의 사랑 중 어느 쪽이 더 소중한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두 개의 사랑이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공존하고 있을 때 이 영화는 기형적인 틀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큐브릭은 이 영화를 2001년에 만들고 싶어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 에필로그는 2000년 후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순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데이빗이 2000년 후에 부활해서 우주(로부터 찾아온 외계인)을 향해 인간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반대로 지금부터 2000년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큐브릭에게서는 예수 프로젝트이다. 데이빗은 섹스 없이 태어난 아이이다. 그는 부모를 떠나 이제 말씀을 구하기 위해 황량한 벌판으로 나가 부활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는 이 순례길에서 사도 두 명을 거느리고 떠돈다. 한 명은 아기 곰 테드이고, 다른 한 명은 남창 조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며, 살인의 누명을 쓴 자이며, 음란한 자이며, 도둑질을 한 자이다. 그러나 그들은 간절히 자신들의 죄의 사함을 소망한다. (조는 자신이 폐기처분 되기 위해 잡혀가면서 데이빗을 향해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네가 인간이 되거든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죄의 원인은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로봇이라는 존재의 근거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은 나쁜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만들어진 결과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불가피한 것이며, 그래서 그 원인에 대해서 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데이빗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믿는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데 자신이 로봇이기 때문에 잘못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사함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바다 심연 안으로 뛰어들어 거기서 2000년을 다시 기다린다. 데이빗은 인간에게 사랑의 의미를 질문하기 위하여 2000년마다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여기서 예수의 의미를 애써 회피한다. 그가 큐브릭의 의도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큐브릭과 마찬가지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이후 그의 영화에서 줄기차게 기독교의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그것을 회피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종교적 권위는 지속적으로 뒤틀어 판타지로 만드는 대상들이다. 그럼으로써 종교적 법은 스필버그에게 환영주의의 형태를 띤다. 스필버그에게 가족을 찾아와 그 안에서 신뢰를 되찾게 만드는 방문객들은 대부분 종교적 속성들을 지니고 있지만, 영화에서 펼쳐지는 양태는 불가능한 실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상상의 모습에로 바꾼 채 다가온다. 그 상상의 모습은 대부분 가족과 접촉할 수 있는 타자로 변장한다. 그 변장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그러나 그것은 항상 결여된 가족의 부분을 채우는 비어진 구멍 안의 조각이다. 그러나 그 조각은 결국에는 외부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것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 채우기와 양보의 과정이 스필버그 영화의 속성과 양태 사이의 총체적 구조이다. 문제는 그 구조 안에서 다른 모든 대상들은 잉여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쥬라기 공원』에서 공룡들은 사실은 아이들을 위기에 빠뜨린 이후, 계속 그 자리를 거절했던 아버지의 자리를 박사가 다시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상들인 것이다.『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상징적 아버지가 상상적 아들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쉰들러 리스트』조차 아버지의 윤리적 의무를 일깨우는 주제를 제외하고 나면 별 달리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말이 스필버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로 들려서는 안 된다. 그가 매달린 주제가 결코 타르코프스키나 키아로스타미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스필버그는 그의 동세대 영화 감독들 중에서 가장 끈질기게 자기의 테마를 이야기의 구조와 일치시켜 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스필버그의 약점은 바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항상 환상에 머물려 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대상들이 실재와 마주하지 못하도록 수많은 장벽을 설정하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스필버그의 주인공들은 결코 초자아를 마주보지 못한다. 그것을 마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영화 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가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공동체 삶의 윤리적 기준으로부터 유아적 판단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예수는 결국 피노키오로 축소된다.

큐브릭과 스필버그가 결국 갈라서는 지점은 마지막 에필로그이다. 데이빗은 2000년만에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그 부활은 무엇을 실현하기 위해서인가? 큐브릭은 질문의 순환을 본다. 우주인들은 데이빗에게 너의 기억 속에 있는 데이터들이 인간에 대한 증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기억은 우주인들의 소망에 대한 재현을 통해서 실현된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의 재현이 아니라, 데이빗의 상상의 실현이다. (이 문장을 좀 더 축소시키면 "재현이 아니라 실현이다") 그러나 그 상상의 실현은 동시에 실재의 귀환이다. 그 귀환을 둘러싸고 허구와 실재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우면서도 아주 먼 것이 된다. 어머니는 정말 귀환한 것일까? 단지 그것은 데이빗의 시선 안에서 그가 보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실재와 환영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놓여있는 것일까? 큐브릭의 강조점은 환영에 놓이고, 스필버그의 고정점은 실재에 놓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큐브릭은 우리에게 다시 물어본다. 우리들은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무엇으로 책임질 것인가? 스필버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대답한다. 간절한 소망은 항상 이루어진다.『A.I.』를 보면서 큐브릭의 버전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스필버그의 리믹스를 선택할 것인지, 그래서 그 누구를 따라갈 지에 대해서는 당신의 자유이다.

다음 이야기 ->> "정성일의 영화일기" 다음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