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L Cinema Club』 2002.01.03.작품

영화교실

2001년 나를 움직인 영화들

이 무한한 거리의 한 끝에서 동전의 앞면이 나오거나 뒷면이 나오게 될 도박이 벌어지고 있다.
- 블레즈 파스칼

우리가 돌아보는 동안 이미 영화는 우리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 장-뤽 고다르

과거는 구원이라고 말하는 시간적 좌표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 사이에는 비밀스러운 동의가 있다. 우리의 도래는 지상에 예견되었다. 우리를 앞서간 모든 세대처럼 우리는 약한 메시아적 힘, 즉 과거가 요구되는 힘을 부여 받아왔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 테제"

따라서 오늘날 공화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제국 내부에서 투쟁하고, 제국의 잡종적이고 변조해가는 지형들 위에서 제국에 대항하여 건설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도덕주의와 모든 원한과 향수의 입장에 반대하여, 이러한 새로운 제국의 지형은 창조와 해방을 위한 더욱 커다란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대중은 자신의 대항의지와 해방을 향한 욕망 속에서, 제국을 뚫고 나가 다른 한쪽 면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 안토니오 네그리 "제국"

올 한해의 일기장의 첫 시작이 지난해에 관한 추억담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의외라고 생각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은 정확하게 2001년 12월 31일에 시작해서 무려 일년의 시간의 문턱을 넘어가면서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지 않으면 시간이란 종종 살바토레 달리의 그림과 같아서 늘어진 채 걸고 넘어지면서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 시간 안으로 넘어 들어오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저녁에 내리던 눈은 이미 그쳤고, 텔리비전에서는 온갖 수상식으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지금 텔리비전은 마치 라디오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오직 12시 제야의 종소리를 알려주기 위해서 저기 저렇게 저 혼자 떠들고 있는 중이다. 시간은 종종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또는 시간은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고 여러 갈래로 빠져나가면서 세상의 시간 안에 나의 은밀한 시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세상의 비참함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나는 이성적으로 아는 것이다. 제국의 폭격 속에서 맞이하는 소수민족의 크리스마스를 내가 어떻게 정말 육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세상의 무관심은 나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두 개의 시간은 서로 뒤엉켜 있지만, 나는 시간의 연금술사를 나의 친구로 두지 못했다. 현전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현전은 항상 총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 현전은 어떤 것은 행복이고, 어떤 것은 슬픔이다. 현전은 국면이지만, 그 안에 우리는 항상 일시적으로 머물면서 떠밀려 간다. 그러니까 머무르는 것은 밀려오는 것이며, 밀려오는 것은 다가오는 것 사이의 교차점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시간을 만들어가기 위해, 그 안에서 생산하기 위해, 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소비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나는 그 시간 안에 내가 떠밀려 가지 않기 위해, 그 안에 고정점을 마련하기 위해, 표류하지 않기 위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다음 항해를 위해서 등대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 이렇게 작은 표시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이 자리가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기꺼이 뛰어 들어서 함께 당신의 시간을 껴안으며, 이 시장 안에서 거래를 넘어서서, 그 안에서 상품의 유령이 달려드는 것을 밀쳐내며, 그 안에서 당신의 선택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지난해 보낸 시간들의 대부분은 영화보다는 독서와 관계되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점점 더 영화를 보는 일이 시시해진다. 그것은 내가 영화가 싫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볼만한 영화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건 영화 자체가 시시해졌다는 말이 아니다. 점점 더 서울에서 보는 영화들은 그 영화가 그 영화 같다. 나는 박스 오피스 결과에 관심이 없으며, 그렇다고 영화제를 보러 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한편으로 그 동안 온갖 일에 시달리면서 그 만큼 책을 읽을 시간을 놓쳤기 때문이다. 칠 년에 걸친 키노 편집장 일에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로 보낸 일년 반은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내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 시간들이었다. 그걸 즐기는 사람들에게 작은 행복이 있었다면, 그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보상심리는 가끔 도움이 되는 욕망이다. 나는 지난해에는 자끄 라깡에 매달렸다. (당신은 누구에게 매달렸나요? 대답하지 않는 애인에게?) 우선 불어라서 그 동안 엄두가 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나마 읽은 몇 편의 논문들은 나를 완전히 질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띠엄띠엄 읽었는데, 읽다가 싫증이 나면 금새 다른 책을 읽었다. 내가 갖고 있는 라깡의 책은 모두 9권인데, 우선 엄청난 부피를 자랑하는 "에끄리"가 있고(이 책은 번역이 거의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책이 나오면 대조하면서 읽을 생각이다) 그 곁에 그의 강의를 묶어놓은 "세미네르"가 있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세미네르"이다. 우선 두 권을 읽었고(1권인 "프로이드 기법"과 12권인 "정신분석의 네 가지 기본개념"), 지금은 2권인 "프로이드의 이론과 정신분석학 이론에서의 자아"를 읽는 중이다. 라깡에게서 재미있는 점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을 돌이켜보게 만들 때이다. 이를테면 무의식은 나의 일상생활의 침잠처럼 여겼지만, 라깡을 읽노라면 그것은 이미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건 계급의식이 항상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나에게 주어지는 것과 같다. 라깡의 사유는 종종 읽는 나를 텅 비어있는 존재처럼 다룬다. 그래서 이미 거기 있는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가 닿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결국 타자의 자리에 가려는 것이다. 그러니 욕망을 가로지르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결코 Z-도식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라깡을 읽으면서 반성하는 것은 내가 그 동안 라깡에 관한 해설서를 너무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주로 비판적인 책들을!) 하지 않은 말을 나는 비판적으로 염두에 두고 두려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그리고 그 곁에 여러 권의 책이 놓여있다. 로잘린드 클라우스의 "시각적 무의식"과 조나단 크레이의 "지각의 걸침"은 본다는 문제에 대해서 전면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들과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는 19세기 광학장치들에 관한 글들이어서 한결 이끌린다. 슬라보예 지젝의 "간지럼타는 주체"는 점점 그가 근본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가 하이덱거와 마주한 채 정색을 하고 "존재와 시간"의 쓰여지지 않은 속편을 마무리 짓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보여준 그 대담한 유머가 사라져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지젝이 쓴 오페라에 관한 책은 그저 목차만 훑어보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얼핏 보았는데 오페라에 여간한 지식이 없으면 누군지 번역하면서 또 컬트 책이 나오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번역이 나온 "향락의 전이"는 과장 없이 스필버그 이외의 모든 이름을 잘못 읽고 있다. 마이클 클라이튼이 마이클 ‘칠리턴’으로 옮겨진 대목에 이르면 종종 읽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게 된다. 웃기는 하지만, 그러나 괴롭다)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트 라클라우가 그들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 공저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버전 업을 내놓았는데, 덧붙여진 부분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폴 비릴리오를 읽고 있는데, 자꾸만 같은 소리를 다시 하는 것 같아서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다.

예전에 영어판으로 읽었을 때 도대체 종잡을 수 없었던 (그리고 이제야 번역본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미하엘 바흐친의 "프랑수아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시대의 민중문화" (내 생각으로) 위대한 고전이다. 바흐친을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쥘리아 크리스테바가 "세메이오티케"에서 상호 텍스트성이라는 말을 하면서 인용한 글을 통해서이다. 그 이후 줄곧 관심을 가져 왔는데, 이상하게도 한때 유행을 타더니 금새 잊혀졌다. (바흐친의 "도스토옙스키 시학"은 정말 굉장하다! 나는 이 책이 지지부진한 영화책들보다도 영화를 진지한 예술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작가와 텍스트 사이의 다성음에 귀를 기울이는 대목에 이르면 작가주의에 대해 이 보다 더 진지한 성찰을 나는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진짜 나를 흥분시킨 건 안토니오 네글리가 그의 제자이자 추종자인 마이클 하트와 함께 쓴 "제국"이다. 이 책은 알튀세의 "자본론을 읽는다" 만큼 격렬하고 글 행간마다 피가 흐른다. 네그리는 이제 제국주의는 없고 제국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이제 투쟁의 방식을 바꾸자고 선동한다. 네그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길을 잃었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천의 고원" (내게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나는 이 책을 일본어 번역판으로 읽었는데, 이 책은 사실 좀 위험하다. 왜냐하면 전염성이 심해서 읽고 나면 금방 베끼고 싶은 유혹을 참기 힘들기 때문이다. 최근에 유난히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글을 읽으면서 유목민과 탈영토화라는 용어를 접하는 것은 슬그머니 미소짓게 만든다.

영화에 관한 책으로 즐겁게 읽은 책은 파스칼 보니체의 "에릭 로메"에 관한 글이다. 그는 로메를 그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이 그 안으로 들어가 자유자재로 읽어나간다. 보니체에게서 배우는 것은 종종 영화에 따라서 자기의 위치를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일만한 책은 두 권의 모음집이다. 하나는 파트리시아 피스터즈의 "미디어 문화의 마이크로 정치학"이고(이 책에는 "들뢰즈-가따리의 리좀 읽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다른 하나는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이야기(들)>에 관한 글모음인 "영화, 혼자서"이다. 글 사이의 편차는 있지만, 그러나 문제의식들이 배울만하다. 여기서 대상으로 삼은 고다르의 이 8부작은 (내 생각으로) 90년대의 가장 위대한 작업이다. (이 영화는 지난해 전주영화제에서 소리 소문 없이 상영되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그 언젠가 영화는 여기서 자기의 사유를 배워갈 것이다.

이제 먼길을 돌아서 올해 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차례이다. 내가 올해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마음을 움직인 것은 우연히 보게 된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이다. 정말 예상치 않은 기습을 당한 것처럼, 얼어붙은 듯이 이 영화를 보았다. 다소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1995년 영화이다) 그런 것은 이 영화에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프랑스 시골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하녀를 들인다. 그런데 이 하녀가 무언가 이상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문맹이었던 셈이다. 선천성 문자난독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위장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는 해고당한다. 그날 밤 그녀는 이 마을에서 사귄 그녀의 여자 친구(이자벨 위뻬르의 거의 신기에 가까운 연기!)와 함께 이 집안에 들어와 모잘트의 오페라 "돈조바니"를 보고 있는 온 가족을 몰살한다. 샤브롤은 이 영화의 전반부를 마치 브레송의 영화처럼 신중하고 때로 무심하게 인물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의 중심을 빙빙 돌다가 갑자기 그녀의 비밀이 밝혀지자 힛치콕의 영화처럼 돌변하여 무시무시한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이 영화에서 샤브롤은 나쁜 부르주아와 착한 프로레탈리아 대신 착한 부르주아와 순진한 프로레탈리아의 도식으로 이 사건을 기이하게 비틀기 시작하는 대목부터이다. 여기서 카메라가 보는 것을 영화는 믿지 않는다. 또는 카메라가 보는 것은 사실은 메거핀이다. 본다는 것의 난독증! 이 전형적인 세리 느와르 소설의 영화화에서 샤브롤은 우리들의 시대를 본다. 그건 고전 안에서 읽어내는 동시대성이다. 좀 길긴 하지만(5시간 40분) 피터 와트킨의 <코뮌>은 보는 내내 목을 메이게 만든다. 파리 코뮌을 재현한 이 영화는 2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파리 외곽에 자리 잡은 한적한 스튜디오에 들어가 악전고투를 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만국 노동자의 평등에 관한 실험을 재현한다. 그들 중에는 연기자도 있고, 학생도 있고, 잘 곳이 필요해서 합류한 불법 이민 노동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피터 와트킨은 여기서 중간 중간에 자막을 넣으면서 파리 코뮌 이후 자본주의 세상에서 미디어가 떠맡은 역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파리 코뮌이 이루어지면 당신은 동의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사회주의는 끝장난 유토피아주의자들의 꿈이 아니다. 여기 이렇게 유령처럼 다시 불려오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에는 이루어져야 할 구체적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영화이며, 동시에 행복한 영화이다.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는 신기한 화법을 가지고 있는 시네아스트이다. 그는 항상 영화가 불가능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서간체 영화라고 불리울만한 방식을 통해서 이야기의 윤곽을 붙들고 난 다음 형상을 그려나간다. 그의 영화전은 사실 지난해 가장 중요한 회고전이라고 불릴 만 했는데, 그 중에서도 <프란체스카>는 진짜 무섭다. 고결하고, 순진하고, 우아했던 프란체스카가가 남자들의 꼬임 속에서 순결을 잃고 점점 미쳐 가는 후반부에 이르면 바람소리와 창문을 두들기는 빗줄기, 그리고 보는 이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무심한 프란체스카의 무표정한 얼굴 위에 떨어지는 촛불, 여기에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는 저주 섞인 편지의 문장들은 일제히 살아나서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알랭 레네의 영화들은 다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영화들 중에서 대부분 <히로시마, 내 사랑>과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만을 보고 난 다음 다 알고 있는 척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의 두 편의 짝패로 이루어진 <흡연>과 <금연>을 보고 나면 어리둥절해질 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서 마치 연극을 방불케 하는 작은 무대와 제한된 등장인물을 데리고(더 정확하게는 삐에르 아르디티는 일인 사역을, 사빈느 아제마는 일인 오역을!) 담배를 피느냐, 마느냐로 열 두 개의 다른 결론을 끌어내면서 이야기의 리좀이라고 불리울 만한 미시적인 이야기의 가지를 펼쳐 보인다. 여기에는 침울한 비극과 활기찬 희극이, 그리고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노동계급이, 예상치 않은 종말과 갑자기 방향을 선회한 해피엔딩이, 남편과 아내가, 친구와 연인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기상천외한 감정교육이라고 불릴 세상이 천변만화 한다. 알랭 레네는 점점 더 이야기에 이끌리는 것 같다.

만일 이 영화들이 지나치게 고전적이라면 그 반대로 현대의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나아가 본 영화는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후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이다. 데이빗 린치는 세상을 거의 미로처럼 만든다. 그는 우리에게 영화에서 주인공이라는 개념을 바꾸려고 한다. 그 안에서 시간은 시제를 잃고, 주인공들은 종종 시간의 어느 순간에 서로의 문턱을 상대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입장을 바꾸기도 한다.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아마도 이 사이트에서 길게 쓰게 될 것이다. 조금 기분 내서 말하자면 "언젠가 모두 데이빗 린치처럼 영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들은 쫓아가던 사람을 놓치고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부터 우리는 불현듯 영화를 잘못 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갑자기 앞에서부터 영화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영화는 중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앞과 뒤를 번갈아 보여주는 중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한심한 비평은 "이 영화는 감각적으로 보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할 때이다. 도대체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또는 누가 감히 그렇게 영화를 보는 일이 가능할까? 그 말이 정말이라면 직관이 없는 사람은 영화를 보면 안된다. 그런데 직관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데이빗 린치는 그런 의미에서 60년대에 고다르가 했던 역할을 한다. 고다르가 영화를 만들자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방법으로 영화를 보는 일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데이빗 린치는 우리에게 그러한 교육을 하는 중이다. 고다르가 룻소에 점점 가까워졌다는 세르쥬 다네의 말은 이제 데이빗 린치에게도 해당한다. 그렇게 데이빗 린치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순간에조차 후 샤오시엔의 영화는 여전히 이미지가 할 수 있는 사유의 극단에 가 닿으려고 한다. 그의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다소 망설이고 있는 듯한 멜로 드라마라고 해서 그가 말하는 화법을 그저 시시한 것으로 지나쳐서는 안된다. <밀레니엄 맘보>는 감히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라이프니츠적인 성좌짜기에 이른다. 그에게 이제 모든 등장인물은 세상에 대한 창이다. 그 안에서 그 인물들의 조건이 세상과 모순되는 그 근거를 밝히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자체가 그 삶의 근거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의 근거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세상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그리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세상의 조건을 거부해야 한다. 마침내 후 샤오시엔은 그 조건의 바탕을 이루는 시간을 부정하고 서 있는 삶의 바탕에 관한 지도를 그려나간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영화는 일종의 타임 머신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이제 정말 진심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입>을 만들었을 때 그에게 영화는 일종의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트래픽>에서 그는 세 가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유자재로 몸을 틀어 한 쪽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에 대한 거울의 역할을 하면서 자기 성찰에 이른다. 그가 아직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소더버그가 그 계보에 서있는 작가가 되었음을 알리는 이 영화는 깊이가 있다. 모든 등장인물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아무리 작은 역할조차도 자기 몫을 해낸다.

난니 모레티의 (올해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들의 방>은 실망스럽다. 그건 그가 다루는 주제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이 주제에 향하고 있는 것은 내게 이상하게 보인다), 차라리 그것을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그에게서 유머가 사라진 것은 비판이 사라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난니 모레티가 왜 심각해진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현실이 담고있는 질서 안에서 발작하듯이 일으키는 웃음에 담겨있는 전투가 사실은 세상에 대한 조롱과 고통스러운 그로데스크의 홀가분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시네아스트이다. 난니 모레티의 웃음은 세상의 균열을 보는 자의 놀람을 위장하는 경련이다. 이를테면 함께 찾아온 <나의 일기>에서 그 두 번째 에피소드를 생각해 보라. 여전히 <나의 일기>는 (<파롬벨라 로사>와 함께) 난니 모레티의 최고걸작이다. 그의 웃음은 그저 우울함과 씁쓸함을 가져오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웃음은 잔혹한 것이다. 그 안에는 세상을 어찌할 바 없이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무능력에 대한 확인과 그 세상을 어떻게 해서든지 조롱하려는 자기에 대한 부정의 몸부림이 있다. 그 안에서 난니 모레티는 매우 격렬해진다. 그러나 <아들의 방>에서 그는 더 이상 웃지 않는다. 그저 미소지을 뿐이다. 그 미소의 의미는 우리에게 잘 붙들리지 않는다.

중국영화는 우리들에게 아시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커다란 화두이다. 세 편의 영화가 주목할만한데 그 중에서 가장 시선을 붙드는 영화는 로우 예의 <수주강>이다. (다른 두 편은 왕 샤오슈아이의 <북경 자전거>와 지안 웬의 <귀신이 온다>이다) 로우 예는 여기서 상해를 무대로 갑자기 힛치콕의 <현기증>을 다시 찍는다. 그 안에는 서구의 영화역사에 대한 기이한 추억과 상해의 지금 여기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가 서로 뒤섞이면서 술래잡기를 벌인다. 그는 얼핏 보기에 왕가위의 영화를 흉내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정반대의 방법으로 중국의 동시대를 외곽에서 부서져 가는 가장자리를 통해 생각하는 지아장커의 영화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와 <소무>를 비교해 보라) 그 두 편의 영화는 중국영화가 안고 있는 두 개의 화두를 보여준다. 하나는 사회주의 중국의 자본주의 모더니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서 사라져 가는 공간이다.

열 편중의 마지막 한편은 빔 벤더스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다. 이 영화가 그렇게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진정성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빔 벤더스가 진정 쿠바에 은둔한 채 살아온 대가들의 음악을 (그와 함께 작업한 라이 쿠더와 더불어) 정말 즐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지난 학기 학생들에게도 한 말. 영화가 종합예술인 것은 아무리 만드는 사람이 그것을 부정해도 다른 예술 장르의 문화적 맥락들이 쉴 사이 없이 끼어 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여기에는 그 문제가 행복한 토픽을 생산해낸다.

모든 이들이 한국영화를 말할 때 나는 영화관에서 번번이 몸을 뒤척이며 가까스로 그 영화들을 보아야만 했다.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한국영화를 보았지만, 그러나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들은 많지 않았다. 다만 김기덕의 <수취인 불명>과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즈>, 그리고 윤종찬의 <소름>만이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이 영화들에 대해서 여러 지면에 내 견해를 밝혔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감싸안는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와 정재은의 <고양이를 부탁해>, 그리고 (차라리 최민식의 영화라는 표현이 어울릴) <파이란>에 대해서 나는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맞고 남이 틀렸다는 말은 여기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또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해서 쓰는 글은 평결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나의 세계관에 비추어 지지할 수 있는 영화를 통해서 내가 그 영화를 통해 얻어낸 행복을 전하고, 동의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영화가 깐느영화제에 가서 황금종려상을 받건 말건 관심이 없다. 또는 그런다고 해서 내 견해를 철회할 생각도 없다. 나는 이 영화들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정말 내 세계관을 걸고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동료들은 나와 다른 영화를 지지하고 반대할 것이다. 사실 가장 불쌍한 영화들은 반대의 견해에 부딪친 영화들이 아니라 무관심하게 만드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 다시 말하지만 <엽기적인 그녀>,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그리고 <화산고>에 관심이 없다. <친구>는 그 이상한 대중적 성공이 내게서 대중들의 욕망에 대한 증후로 읽게 이끈다. 그건 좀 특별한 이끌림이다. <무사>는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이 영화를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독립영화라고 불리우는, 하지만 사실은 더 이상 독립영화라고 불리울 수 없는 단편영화들과, 디지털영화들과, 졸업작품들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나는 좀 무언가 이 영화들이 이상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끌어들일 생각이다. 내가 <나비>와 <꽃섬>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이들 영화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그 반대로 지지의 의미가 아니다. 그러니까 나의 2002년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원래 축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스포츠)를 싫어한다. 아마도 나의 일기장에서 축구 이야기를 읽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벌써 1월1일의 아침이 창 아주 가까이 찾아왔다.

추신; 나는 음악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여기 추천할 자격은 없다. 다만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과 의견을 나누기 위한 정도이니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읽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 들은 팝-락 앨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반은 마누 차오의 "에스페란짜"이다. 스페인 라틴 팝과 프랑스 일렉트로니카(이를테면 에어를 연상하면 된다)와 영국의 브리톨 트립 합을 기묘하게 리믹스 시킨 이 청년의 음악은 귀에 착착 감긴다. 정말 라이 쿠더가 기획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이후 최고의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 다음은 갑자기 등장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세 장짜리 "1969년 불법 해적판 라이브"이다. 해설에 따르면 소니 녹음기로 담았는데, 각오하고 들으면 녹음상태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특히 "씨스터 레이"의 세가지 버전의 녹음은 황홀경이다. 매번 거의 30분을 넘나들며 임프로비제이션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이 정도의 연주는 진짜 오래간만이다. 이 두 장의 앨범이(좀 정확하게는 네 장의 앨범) 나에게는 지난해의 앨범이다. (그 전 해에는 매그네틱 필즈의 "69 사랑의 노래들"이었다)

비욕은 여전히 창조적이다. 이번에 나온 "베스퍼타인"은 거의 홀린 상태로 부르는 노래들이다. 그것은 듣는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밥 딜런의 "사랑과 도둑질"은 로우 파이한 걸작이다. 아마도 세션 밴드들일 법한 친구들을 끌고 와서 한바탕 벌이는 노래들은 어느 곡이라고 할 수 없이 심금을 울린다. 나는 밥 딜런의 정규 앨범을 빼놓지 않고 갖고 있는데 이 앨범은 그의 최고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거의 그 반열에 올려놓을 만 하다. 그는 여기서 오히려 자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마치 1950년대의 블루스 음악의 대가들이 그러했던 것만큼이나 자유롭게 음악을 만든다.

라디오헤드의 "건망증"은 그들의 "오케이 컴퓨터"나 "키드 A"만큼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U2에 버금가는 위대한 밴드가 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깊이를 담고 있다. 여기서는 소란스러운 음악을 바라는 팬들이 실망할 지 모르지만, 거의 명상하는 듯한 그 깊이가 우리를 상념에 잠기게 만든다. 한번 듣고 나면 그 다음에는 녹음해서 그냥 틀어놓고 싶은 앨범이다. 그 뒤를 바짝 뒤쫓는 개비지의 "예쁜 개비지"는 우아하고, 아름답다. 이전 작인 "2.0 버전"보다 특별히 좋아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의 음악을 즐기면서 만든다. 오히려 스트록스의 "이게 그거야?"가 주목할 만 하다. 이걸 2001년의 펑크라고 부를만 하다면, 고질라의 동명 셀프 타이틀은 지난해의 패로디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싱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몇번이고 다시 들어도 재미있다) 제이-Z의 "블루 프린트"는 아웃 캐스트의 신보가 없는 한 힙합의 새로운 진수를 들려준다. 알리시아 케이의 "A단조의 노래들"은 리듬 앤 블루스와 힙합이 기묘하게 섞여들었다. 그녀는 로린 힐 이후에 내 마음을 이끄는 새로운 목소리이다. 2001년에 테크노는 거기서 거기였던 것 같다. 베이스맨트 잭스의 "루티"와 대프트펑크의 "발견"은 기다린 것에 비하면 제 몫을 못한다. (그렇다고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이상이 나의 열 장의 앨범이다.

재즈는 사실 내가 나설만한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64년 존 콜트레인의 "러브 슈프림" 이후는 거의 듣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비밥에서 쿨 재즈를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사이렌트 웨이즈 세션 컴플리트 셋트"는 몇번이고 이 기나긴 연주를(세 장) 다시 듣게 만든다. 나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일렉트릭한 오중주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 앨범은 무척 좋아한다. (다들 명반이라고 뽑는 "비치즈 블류"보다는 이 앨범에 더 손이 자주 간다) 그리고 이 세션은 거의 나를 위한(!) 박스 세트인 셈이다. 지난해에는 별로 과거의 명반들 중에서 복각되어 나온 음반들이 특별히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클래식은 이제는 연주보다는 레파토리를 더 넓히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 동안 미루어 두었던 나이브 레이블의 호르디 사발(다들 죠르디 사발이라고 발음하는데 스페인계인 그의 이름은 호르디가 맞는 것 같다)에 손을 댔는데, 예전의 오비디스 아스트레 레이블 시절이 훨씬 더 좋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70년대 사발의 녹음을 불러낸 8장짜리 박스 셋트인 "스페인 음악모음집"은 그 아름다운 선율과 진지한 연주의 신선함이 모두 살아 나오는 것 같다. 그 동안 레파토리로만 보아온 모자이크 사중주단의 (내가 구한 다섯장의) 모짤트 현악사중주는 기복이 심하다. 어떤 대목은 매우 훌륭한데, 어떤 부분은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것 같다. 그들의 하이든 현악사중주를 듣고 열렬한 팬이 된 나로서는 속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린제이 사중주가 베토벤 현악사중의 두 번째 사이클에 도전했는데, 아직은 초창기 녹음만 해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들의 첫 번째 녹음을 알반 베르그보다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말 기대가 크다. 하지만 정말 궁금한 것은 크로노스 사중주가 베토벤 현악사중주에 손대는 날이다. 머레이 페러이어는 차례로 바하의 곡에 도전하고 있는데, 골드베르그 변주곡은 꼭 그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영국 조곡"이 참 좋았다. 안젤라 휴이트의 바하가 대단하다고 칭찬하는데,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삐에르 앙타이가 쳄발로로 도전하는 바하를 기대하는 중이다. 브룩크너는 아직 첼리비다케의 연주를 조금씩 섭렵하는 중이다. 우연히 한스 크나츠퍼부쉬의 브룩크너 교향곡 전집을 구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서 미루어 두고 있는 중이다. BBC에서 녹음한 존 바르비롤리의 말러 교향곡 연주들(3번, 4번, 9번)은 이 대가의 이름에 걸맞는 연주들이다. 거장들의 녹음들이 묶여져서 나오는데 클리포드 커즌의 모짤트 피아노협주곡 모음은 그 예이다. 하지만 클리포드 커즌은 슈벨트를 연주할 때가 진수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넋두리가 길어지는군, 여러분들도 시시한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좋은 영화를 보면서 때로는 음악을 들으면서 당신의 삶을 소중하게 채워나가시길. 결국 행복은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질에 담기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