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1997.01.25.시론

필름 & 필링

영화를 닮아가는 도시들

도시는 영화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도시는 점점 더 영화를 닮아간다고 말했다. 도쿄는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SF영화처럼 보인다. 로스앤젤레스는 빔 벤더스의 '파리-텍사스'의 세트같다. 뉴욕은 점점 더 바보같아지면서 팀 버튼의 '배트맨'에 나오는 고담시를 닮아가고 있다. 파리는 이미 레오 카락스가 만들어낸 '퐁네프의 다리'에서 바라본 그 어딘가처럼 여겨진다. 홍콩은 어두운 심야 속의 명멸하는 빛 속에서 왕자웨이(王家衛)의 '중경삼림'처럼 중국반환을 기다리고 있다. 베이징은 장 위엔의 '북경잡종' 중심에 있는 천안문 앞거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거리는 스펙터클이다. 전투경찰이 거리를 달려가고, 곳곳에서 검문이 벌어지고 있다. 성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어깨동무하고 선언문을 낭송한다. 여전히 페퍼포크는 안개처럼 도시를 감싼다. 방송국은 아무일 없는 것처럼 그룹 H.O.T의 댄스음악을 태평스럽게 틀어놓고, 그 방송국 앞에서는 방송국 직원들이 파업중이다. 그 너머 전광판에는 뉴스와 광고가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여기가 우리의 나라, 대한민국의 서울이다. 그래서 서울을 영화처럼 읽어낸다면 그건 한편으로 일마즈 귀니의 '욜'이며, 동시에 코스타 가브라스의'Z'다. 이것이 우리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며, 후기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세계체제 내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시간이며, 우리가 세계화돼가는 방식이다. 단 6분만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죽음을 목격했다. 이 황당무계한 뒤죽박죽의 역사는 정말로 칸영화제 그랑프리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플래시 백(영화에서의 회상장면)의 시간 속에 빠져든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공들이라곤 악인들밖에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는 끝날 것 같지 않다. 이젠 정말로 이 저질 정치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와 밝은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아니 어쩌면 이미 바깥이라고 생각했던 우리가 다시 영화관 안에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무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문민정부라는 말은 정말로 시뮬라크라(모조)의 가장 좋은 예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예정돼 있던(그러나 정말로 아무도 원치 않던)속편이 시작되는 것일까.

이 이상한 스펙터클의 시대는 우리의 모든 믿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해피엔딩 따위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 어떤 등장인물도 배신과 타협, 위선과 능수능란한 변신으로 다들 주연상을 노리고 있다. 오직 그것만이 관심이다. 관객들이 무어라고 하건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같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도대체 기승전결의 어디쯤 와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아니 끝나기는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지루한 영화를 거부하고 비판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관에 입장료를 지불하고 입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이 절로 나며 감동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영화로 바꾸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꾸 이 저질 정치영화를 계속 보라고 우기는 저 뻔뻔한 제작자는 도대체 무얼 믿고 저러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환불소동이라도 일으켜야 한단 말인가. 더 나아가 그 환불금액으로 우리가 성금을 모아 우리의 정치영화를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영화는 모두가 함께 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컬트 정치영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걸 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