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1997.07.21.작품

필름 & 필링

보고싶고 만들고싶은 모든것 만날수 있어야

올해는 결국 왕자웨이(王家衛)의 해가 될 것 같다. 벌써 이 난에만 나는 왕자웨이 이야기를 네번째 쓰고 있다.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정작 왕자웨이는 가만히 있는데 우리들이 번번히 문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표절시비를 불러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심의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반려되었다.

도대체 무엇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에게 올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안겨준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내개봉 예정제목으로 원제목은 '春光乍洩' )이 7월11일자 공연윤리위원회 문서 '공륜 97-29084호' 에 따라 "동성애가 주제로서 우리 정서에 반함" 이라는 이유로 재심에서 반려되었다.

현행법에 따르면 재심에서 반려된 영화는 1년 이내에는 다시 심의신청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올해 이 영화를 보기는 '원칙적' 으로 틀린 셈이다.

우선 영화적으로만 말한다면 왕자웨이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은 걸작이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만든 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한다. 흑백화면과 컬러화면이 교차하면서 낯선 아르헨티나의 뒷골목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세 명의 중국인이 서로의 방식으로 '해피 투게더'(이 영화의 영어제목)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거의 목이 멜 것같은 감동마저 안겨준다.

두 번을 연속으로 보고 있자니 이 영화는 숱하게 드러나는 약점의 순간마저 마치 상처받은 마음처럼, 보는 우리를 번번이 울먹이게 만든다.

이건 '동성애가 주제인 영화' 가 아니다. 동성애자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그저 사랑의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유치하게 세 사람을 중국.홍콩.대만으로 나누어 알레고리로 만든 도식적인 1997년 홍콩반환용 유행패션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말 그대로 모두에게 낯설어지는 우리 시대를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려는 왕자웨이의 자기성찰적 사유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올해 만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를 완전히 놓쳐버린 것이다.

한 편의 외국영화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차례로 봉쇄당하고 있다. 이미 지난 6월 이 땅의 독립영화단체들이 준비했던 대학영화의 한마당 축제 '인디포럼' 은 세상 모두와 만나기 위해 그 많은 어려움을 넘어서서 지상으로 올라왔건만 '심의를 받지 않았다' 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지난 5월에 예정되었던 첫번째 동성애 영화제는 미처 말도 꺼내기 전에 영화관으로부터 버림받고 기약 없이 연기됐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은 한 가지 모순으로 빚어진 표현의 자유로부터의 봉쇄다. 이제 우리는 정말로 우리들이 보고 싶고, 만들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그 모든 것들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진지(陣地)를 가져야 한다. 만일 인디포럼이 그 진지를 만들지 못하고, 동성애 영화제가 그것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늘 서울에 오는 왕자웨이를 동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칸영화제와 아시아 영화들의 목소리를 유연하게 받아들여 저 시대착오의 모순을 이제 해소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 개봉이 목표가 아니라, 그 개봉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작의 좌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란 그 어떤 견해에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싸우는 것. 몽테스키외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