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1987.12.인물

감독을 통해 본 한국영화⑤

김수용

김수용의 영화들은 그 자신의 끊임없는 변모로 인하여 고정된 비평, 섣부른 판단, 특정한 카테고리에 가두는 것을 금지시킨다. 30년간 1백 4편이라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엄청난 작업 속에서 우리는 한국영화 그 자체를 보고 있다. 말하자면 김수용의 영화들은 한국영화사를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찾아 떠도는 작가 정신

30년간 104의 영화를 만든
다작 감독

여기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시작하려고 한다. 그건 아마도 한국 영화사에서 김수용(金洙容)이 갖는 특별한 의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몇 영화감독들을 다루었다. 현실의 곁에서 카메라라는 비판의 무기를 들고 전후세대의 정신적 수라장을 담아낸 유현목, 그리고 그 맞은 편에서 섹슈얼리티(Sexuality)와 식욕이라는 본능의 공격성을 가정으로 옮겨 모더니즘의 시선으로 해체시켜 나간 김기영. 아마도 ‘오발탄’과 ‘하녀’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감독)와 함께 60년대 황금기의 한국영화를 열어놓은 작품들로 손꼽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만희와 임권택을 다루었다. 앞 사람이 60년대에 한국영화의 우수와 정감의 리얼리즘을 다루었다면, 또 한 사람은 80년대에 숨김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부드러움과 리얼리즘으로 재발견되었다.

물론 이 30년간을 연결하는 연대기에는 무수한 실패와 준비된 공격들도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좌절된 희망들이 포함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적으로 패배의 예술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들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영화의 부피와 두께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리얼리즘의 계보학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김수용의 영화들은 그런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신의 끊임없는 변모 자체가 한국영화에 관한 섣부른 판단, 고정된 비평, 특정한 카테고리에 가두는 것을 금지시킨다. 30년간 1백4편이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작업 속에서 우리는 한국영화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수용의 영화들은 한국영화사를 횡당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용은 틀림없이 상업주의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적어도 어느 한 순간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 계보와 만나고 있으며, 70년대 이후에는 하길종으로 대표되는 뉴 웨이브의 경향을 따르기도 했었다.

“이 땅에서 영화작업을 한다는 것은 종종 다작주의(多作主義)로 이끌게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작품만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선택하기 위해서 많은 영화를 연출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조건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경향은 더함도 덜함도 없이 한국영화 감독들이라면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이 수많은 영화들이 현실의 여백에서 얼마만한 진실의 몫을 떠맡었는가를 물어보려는 것이다.

김수용은 1923년 9월 23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3남3녀 중 장남인 그는 소설읽기를 좋아했다. 일제시대에 자란 그는 10대에 ‘설국’(雪國)을 쓴 가와바다 야스나리에 심취했었으며, 실제로 습작이었던 ‘K선생의 초상’은 소설가 계용묵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었었다.

서울사범대학에 진학한 그는 연극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익스피어·몰리에르 입센의 작품을 직접 무대에 올리면서 그 자신의 표현대로 ‘생명이 불어넣어진 등장인물’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최일남과 김세중을 만나 지적 교류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거리는 해방직후의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는 이데올리기의 수라장이었고, 거리는 파업과 데모가 이어졌다. 김수용은 그 외부세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예술은 참여보다 순수할 때 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처럼 보인다.

“그 시기는 내게 소중한 시간들이었었습니다 우선 낭만과 글쓰기의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었고, 연극을 통해서 나 자신을 무대 위의 삶으로 올려놓을 수도 있었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숨통에 물주었던 그 정서적인 체험들이 영화 현장에서 카메라와 겨루게 되었을 때, 구체적인 영상과 추상적인 언어 사이의 이중의 싸움에로 이끌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수용은 영화를 소설처럼 쓰고 싶어했던 바램을 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상상의 언어로 다루어진 소설과 현실의 여백을 드러내는 카메라는 항상 화해를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화가 때로는 갈등과 긴장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걸 강요된 싸움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소설가가 되려던 꿈은 1950년 6·25전쟁으로 영화감독이라는 모습으로 바뀌었어요. 그 시절에는 자기가 원하던 길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풍요롭지 못했죠. 오뚜기처럼 굴러가다 택한 길입니다.”

한국영화사에 찬연히 빛나는
연기자 김승호 발견

통역장교로 입대한 그는 처음에는 라디오 드라마에 관한 일을 했었다. 그후 국방부 정훈부로 옮기면서 군교육용 영화를 맡았다. 여기서 30여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당시 박정희소장이 있던 사단을 배경으로 ‘10분간 휴식’을 만들기도 했으며, 무명시절의 엄앵란을 기용해서 ‘윤중사의 수기’를 완성시키기도 했었다. 하지만 김수용 대위에게 영화는 예술이기보다는 업무였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한국영화계는 휴전이 되어도 당장 새출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방부의 영화기재를 빌려서 작업하곤 했는데, 김수용은 여기서 알게 된 충무로 제작자에게 조감독을 자청했다. 그 작품이 오영진 시나리오, 양주남 감독의 ‘배뱅이 굿’. 부대에는 인재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두달간 휴가를 신청했다. 그에게서 영화수업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김수용은 진짜 프로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재능있는 육군 대위를 관심깊게 지켜보았던 한 제작자가 작품을 의뢰했고, 그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김수용은 토요일 오후에 퇴근해서 월요일 새벽 귀대시간까지 ‘레디 고’를 불러 데뷔작 ‘공처가’를 완성시켰다. 그것이 1958년.

이 작품은 국도극장에 개봉되어 관객동원에도 성공했다. 김수용은 이듬해 전역하여 63년 ‘후라이 보이, 무전여행기’까지 5년동안 16편의 희극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구봉서·곽규석·백금녀 같은 코미디언에서 김진규·최은희·엄앵란·신성일같은 청춘 스타들까지 그 화려한 개성의 배우들을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워다. 그 희극들은 밀고 당김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웃음을 자아 냈으며, 관객들은 극장에 모여 들어 자신들의 주인공들에게 박수를 보내거나 야유를 던졌다. 말하자면 한국영화와 노스탈지아의 시기였었다.

이 영화들은 50년대 말의 어두운 시대를 김수용 자신의 방법으로 번역해낸 작품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웃음들은 휴전이라는 갈라섬과 이승만 정권의 답답한 현실, 이어진 혼란과 군정정권의 성립에 이르는 5년간 속에서 그 나름대로 발견해낸 숨통 열어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서 영화라고 불리울 첫 번째 영화는 63년에 만든 ‘혈맥’입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자신의 이야기와 그것을 담아낼 형식이라는 그릇을 발견해낸 셈입니다.”

말하자면 김수용은 희극이라는 과장되고 뒤틀린 웃음에서 그 스스로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이라는 계보에 걸어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은 전적으로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포근함, 따사로운 안식처가 마련되어 있다. 여기서 현실과 이야기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은 거의 고의적으로 자신의 주인공들을 건강하게 화해시키는 쪽으로 이끈다.

그러한 김수용의 세계는 60년대 전반의 ‘굴비’, ‘월급봉투’에서 김승호라는 이름을 통해 서민들의 삶에도 옮겨 갔다. 아마도 허장강과 함께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자의 한 사람이었던 김승호는 김수용의 영화에서 자신이 갖는 체취를 그대로 연기했다. 세파의 어려움 속에서 끈끈한 서민들의 애환과 희망을 구수하게 담아내는 김승호의 표정에서 김수용은 이제 그 세계가 사라져 가고 있음을 보았다.

그건 감독과 연기자 사이의 주고 받음이 부딪쳐서 만들어내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 땅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의 정서에로 맺어졌다. 그래서 세상의 인심이 각박해져 김승호를 괴롭히고 넘어뜨릴 때에도 그 이웃을 쳐부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꿈에 기댐으로써 갈등의 팽팽한 대립을 조심스러이 비켜섰다.

대표작 ‘저 하늘에 슬픔이’
‘갯마을’ 등

그 비켜섬은 65년에 완성한 ‘저 하늘에 슬픔이’에서 들여다 볼 수 있다. 흑백영화로 흥행에도 성공했던 이 영화는 소년 가장의 실화 수기인 ‘윤복이의 일기’를 다룬 작품이다.

여기서 김수용은 자신에게 몇 번이고 다짐하고 있다. 현실적인 고통과 겨루면서도 역설적으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도덕성을 회복하길 원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주인공들을 따뜻하게 껴안음으로써 상처의 아픔, 고통받는 영혼을 현실에 대해 항의하는 것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이 떼어놓기의 작업은 김수용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건 그를 현실로부터 멀어진 이야기의 세계에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모는 같은 해에 만든 ‘갯마을’에서 좀 더 구체적인 단절로 나타났다.

남정네들은 바다에 나가고, 여인네들은 개펄에서 조개를 딴다. 여기서 젊은 과부는 젊은 사내에게 이끌리고, 그들의 삶은 언제나 처럼 파국에로 치닫는다. 멜로 드라마? 그러나 김수용은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 세상과 거리를 둔 곳으로 옮겨 온 그는 이제 카메라라는 펜으로 글쓰기를 원하는 작가처럼 섬세하고 집요해진다. 그래서 사랑·질투·그리움·증오·만남과 떠남의 장면이 계속되지만, 사실은 그 주인공들을 둘러싼 세계의 형식미와 그 운명을 지배하는 영화의 공간들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것은 현실을 하나씩 해체해나가는 과정이 되었고, 김수용은 마침내 거기서 무의식의 공간이라고 불리우는 추상과 관념의 여백으로 옮겨갔다.

“물론 나의 주제는 인간입니다. 그 인간은 처해있는 환경을 넘어서서 그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의 구혼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 느낌은 관객의 몫이죠. 그리고 그 몫을 차지하려면 관객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걸 나는 영화의 의사소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안개’를 기점으로 60년대 후반에 시도했던 작업들, 이를테면 ‘까치소리’와 ‘사격장의 아이들’에서는 그런 것들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을 영화화시킨 ‘안개’는 김수용의 걸작의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이야기가 그의 전적인 대상이 아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비로소 그는 영화가 담는 아름다움이 시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무거리낌없이 뒤섞기 시작한 것이다.

김수용은 여기서 추상적 공간을 거니는 권태로운 에로티시즘을 윤정희에게서 발견했다. 조용한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옮겨가는 조심스러운 카메라의 흔들림, 천천히 거니는 한 여인의 머나먼 구도, 그건 마치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 만큼이나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 그 절망과 권태 속에서 이루어지는 윤정희의 정사를 통해 김수용은 지금까지 그 자신이 그렇게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던 이웃이 어쩌면 사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은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한 되울림에 불과하며, 그녀 자신도 주어진 풍경의 짜임새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는 그러면서 슬쩍 떠오르는 상념들을 중간중간에 어떤 논리적인 설명없이 끼워 넣고는, 그 대답을 관객의 상상력의 몫으로 되돌려 놓는다. 김수용의 영화는 관객들에게 자기 자리 되찾기를 요구하는 미로가 된 것이다.

‘허튼 소리’ 파동으로 은퇴선언

그러나, 김수용은 여기서 더 나아가기를 멈춘 것처럼 보인다. 영화산업은 관객을 버려두고 한없이 비상하려는 감독을 용서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봄, 봄’(69), ‘무영탑’(70), ‘딸 부자집’(73년), ‘토지’(74), ‘본능’에서는 현실과 이야기, 리얼리즘과 추상, 의미론과 수학의 어지러운 뒤엉킴이 발견된다. 이것은 한국영화 산업의 70년대 퇴조와도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자기 개인의 완성과 형식에의 혁신에 줄기차게 관심을 기울였으면서도, 사실상 그의 영화내부가 한국영화 별개의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시켜준다는 사실이다.

김수용을 재발견시킨 것은 77년 ‘야행’(夜行)을 통해서이다. 자신의 ‘안개’를 재영화화한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찬반양론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특히 민중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제단작업이 행해졌는데, 사실상 그가 서민들의 삶에서 시작한 출발점을 생각해 본다면 김수용의 변모만큼이나 비평도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김수용이 다루려는 주제의식, 즉 자신과 타인이 아니라 자신과 자기 내부가 치열한 투쟁을 벌일 때 거기서 얻는 인식의 깊이가 반드시 타인을 위한 싸움으로부터 얻는 시선의 넓이보다 덜 중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김수용은 산업화가 시작되던 60년대에 끊임없이 희망을 이야기했고, 그 이웃을 타이르모, 우리들의 아버지와 그 윗대의 도덕과 미덕과 삶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보상없는 그 안간힘을 기울였었다. 아마 한국영화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자신을 되돌아 보고, 패배한 4·19세대의 파산당한 꿈이 어떻게 재편성되는가를 바라본 다음 그는 이 현실에 대해서 체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윤정희라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서 비유섞인 야유와 은유처럼 들리는 자학을 시작한 것이다. 그건 더 이상 위로가 필요없는 시대에 대해 그 위기의식의 절망감을 억지로 덮어 누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 이 의도적인 강제성이 이제 김수용의 영화에서 삶의 깊어짐 대신 극단적인 사물화와 주인공들의 준비론적 패배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주인공의 침묵으로 이어지는 자살여행의 에세이 ‘웃음소리’(78), 사랑의 부재를 확인하는 무인도에서의 고독의 깊이 ‘여수’(78), 그리고 버스 안내양의 삥땅을 소재로 그녀들의 사회에 대한 신뢰의 붕괴과정을 다룬 ‘도시로 간 처녀’(81)는 모두 그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김수용은 한곳에 머무르는 작가가 아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85년 그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자신의 영화 속에서 항상 다퉈왔던 두가지 형식, 즉 추상과 리얼리즘을 함께 다뤄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는 이 새로운 작품에 ‘주관적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영화는 중광이라는 파계승이자, 화가이며, 행위예술가인 동시에 자칭 ‘자유인’이라는 인물에 관한 영화적 기록이었다. 여기에는 그가 지금까지 다뤄 온 웃음과 아유, 그의 삶의 연대기와 스쳐간 사건, 그리고 장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관념과 현실, 영화와 글쓰기, 그리고 거짓과 진실이 서로 그다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각에 대해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이른바 ‘허튼 소리’ 파동이라는 문공부와의 정면 반박전을 낳았고, 그 결과 영화는 거세당하고 김수용은 은퇴선언으로 항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수용에 관한 우리의 판단은 좀더 유보되어야 하는데, 그 시기의 결정이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괴로움이 좀더 깊어지는 것이다. 이 논의는 언제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나는 은퇴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작업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진 것입니다. 영화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영화는 그때에 거꾸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진실과 거짓을 평가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