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1993.12.03.시론

영화관람석

93년 독립영화 결산

 남한에서 독립영화를 말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 하나는 사법검열을 포함한 일체의 정치·제도로부터의 독립이고, 또 하나는 특정이윤을 발생시키려는 상업적 자본의 경제적 목표로부터의 독립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영화는 뉴욕의 인디영화나 일본의 자주영화 또는 실험영화나 작가영화와는 전혀 다른 토대의 역사 위에 서 있는 것이다.

 93년 한해 동안 독립영화운동은 커다란 성과없이 지나갔다. 장산곶매는 <닫힌 교문을 열고>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독립영화협의회는 더 이상 협의할 만한 논쟁이나 강령을 준비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 속에서도 노동자뉴스단은 일보전진한 <고용안전, 믿고 계십니까>를 내놓았다. 그동안 속보형식으로 현장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모습의 투쟁과 성과를 담아온 노동자뉴스단은 여기서 이례적으로 한 기업체(동양엘리베이터)의 사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문민정부시대(?)의 노동문제와 인권문제를 따져묻고 있다. 여전히 현실로부터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서, 여기서는 새로운 형태의 전선 앞에서 영상매체가 어떤 전술로 그 임무를 계속 수행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영화모임 보임은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에서 아시아국가(한국·일본·타이) 여성들의 매춘현장 속에 들어가 그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그건 서유럽 페미니즘의 구호를 앞세운 도식적 비판에서 벗어나 왜곡된 식민지 질곡 아래서 희생되고 있는 사회의 타자로서의 여성들에게 바치는 슬픔과 분노의 기록이다. 특히 독특한 인터뷰 방식으로 이 영화의 여성 제작진들이 때로 참여하고 개입하기도 하는 모습은 카메라와 현실이 갖는 괴리를 뛰어넘으려는 연대투쟁의 새로운 모색이기도 하다.

 영화제작소 현실이 보는 `현실'은 패배와 좌절이다. "그해 겨울, 나는 조직의 해산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통고받았다."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로자를 위하여>(이지상 연출)는 대중봉기 혁명을 믿고 투쟁 속에 죽어간 독일의 여성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차라리 부럽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여기서 직업혁명가는 미래없는 전망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고백한다. 이례적으로 그 스타일은 실험적이고, 더 이상 현실을 리얼리즘으로 읽어낼 수 없다는 선언은 화면 속에서 메아리친다. 그러나 그 메아리는 상실이며, 눈물이고, 패배이다.

 독립영화창작후원회 기금으로 완성된 첫번째 영화 <비명도시>(김성수 연출)는 도시의 밤을 무대로 뒷골목과, 폭력과, 죽음을 음울하게 담아낸다. 화면에서 금방이라도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킨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전례없이 세련된 표현과 스타일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세련됨은 충무로와 독립영화를 연계시키려는 `낯선' 시도 위에 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판도라의 상자이다. 아무도 그 상자 밑바닥에 있는 것이 희망이라고는 섣불리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네 가지 다른 시도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립영화에는 커다란 숙제가 남아 있다. 그건 배급의 문제이다. 아무리 진지한 문제의식과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면 이미 절반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독립영화에 한걸음 다가가려는 우리들의 관심도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또한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