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1994.01.07.작품

영화관람석

그 섬에 가고 싶다, 1993

그해 여름 남도 저편 그 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 죽어서도 그 섬에는 갈 수 없을까? 임철우씨의 연작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와 단편 <곡두 운동회>를 각색하여 만든 박광수 감독의 네번째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분단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야심찬 시도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남한' 반공교과서 역사와 싸우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쓰고 싶어한다.

영화는 상주와 그 친구를 태운 배가 꽃상여를 끌고 그 섬으로 향하면서 시작한다. 죽은 아버지의 원대로 고향 섬에 묻고자 가는 길이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상여가 섬에 들어오는 것을 결사 반대한다. 40년 전 그해 여름 그 섬에서는 국방군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들이닥쳐 `빨갱이 사냥'을 벌였던 끔찍한 참살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잡이 노릇을 한 상주의 아버지는 용서할 수 없는 한으로 섬사람들 가슴에 맺혀 있다.

박광수 감독은 한맺힌 수동적 역사의 아이러니를 한 공간에서 두 개의 시간으로 나누어 바라본다. 하나는 현재이고, 또 하나는 상주의 친구인 시인의 어린시절이다. 그것이 하루낮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현재를 축으로 회상을 따라 40년 전 과거로 넘나든다.

그건 현기증나는 시간여행이다. 여행이라고? 그렇다. 박광수 감독이 다시 쓰는 역사는 그 `시간의 현장'에 가서 지켜보는 관찰자의 기록처럼 별다른 감정이입 없이 풀어나가는 퍼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수수께끼가 되고, 인물들은 수상쩍게 겹친다. 세 남자(모두 1인 2역)와 그들을 둘러싼 네 여자 옥님이(심혜진), 벌떡녀(안소영), 넙도댁(최형인), 업순네(이용이)는 롱 테이크 공간과 시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는 스무고개이다. 지식인은 시인(안성기)을 낳고, 밀고자는 자본가(문성근)를 낳고, 희생자는 패배자(김용만)를 낳는다. 시인은 상주와 섬 사이에서 여전히 우유부단하고, 상주는 아버지처럼 섬사람들에게 큰소리치고, 섬을 지켜온 패배자의 아들은 마지막 순간 "힘없는 놈들은 왜 맨날 당하고만 사는겨"라고 울부짖는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이 단순명쾌한 피눈물의 아이러니가 퍼즐 속으로 끌려들어가면서 영화는 역사와 형식 사이의 대결로 바뀐다. 그리고 역사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비유와 알레고리와 우화와 그 상징성에 맞서면서 점차 미장셴의 도그마에 갇혀 버리고 만다. 역사는 증발하고 기억과 현재만이 끈질기게 오고 간다.

그 기억과 현재 사이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그날 빨갱이로 몰려 한날 한시에 죽어간 사람들의 학살현장을 왜 삭제한 것일까라는 의문이다. 이것은 절제나 생략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삭제시킨 것이다. 사실적 시간과 상징적 시간은 서로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만나지 못하고 끝난다.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여를 섬에 올리는 롱 쇼트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은 용서하고 화해한 것일까, 아니면 분단된 역사 속에서 여전히 덕배와 그의 아들이 이긴 것일까? 아, 아 모두 그 섬에 갔고, 그리고 아무도 그 섬에 가지 못했다. 정말 그 섬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