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1994.11.18.작품

영화관람석

우중산책, 1994

만일 단편영화가 언제나 미래영화라는 앙드레 바쟁의 말을 순진하게 믿는다면, 올해 한국영화는 `미래'를 발견했다.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경쟁작 15편 중 최우수작품상과 프레스상을 수상한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은 의심할 바 없는 올해의 `주목할 만한 시선'이다. 그는 혜성처럼 나타났으며, 말 그대로 일시에 충무로의 신인감독들을 `낡은' 물결로 몰아치듯이 축제를 통해 여왕으로 군림했다. 이 영화는 결코 황당무계한 실험주의나 성급한 정치적 스펙터클, 또는 모험주의에 빠진 스캔들이나 사변적인 철학적 수다에 휩쓸리지 않는다. 오히려 90년대 리얼리즘과 관련해 일종의 영감에라도 의존하듯이 일상의 여백으로 스며들어가 감정적으로 정화된 세계를 만들어낸다.

도시 변두리의 삼류영화관 매점 점원이면서 매표원인 강정자는 서른을 넘긴 노처녀다. 오늘은 맟선 볼 남자가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한가하고 지루한 영화관에서 그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기다린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영화관 앞을 지나간다. 강정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쫓아 빗속을 달려가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온다. 영화관에서는 또 한명의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순례는 무더운 여름날 오후의 하찮은 삽화 속에서 삶의 쓴웃음과 슬픈 현실 사이의 작은 마찰을 마치 솜씨 좋은 융단이라도 짜듯이 그물코로 엮어낸다. 그래서 13분 30초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정지된 카메라와 우울한 조명이 만들어내는 비어 있는 화면으로 종종 시간을 멈추어 세우면서 노처녀 강정자의 주변을 맴돈다. 그 망설이는 공간 속에서 그를 찾아오는 영화관의 손님들은 노인과 실업자들, 영업사원, 할부판매원, 할 일 없는 사내와 그를 찾아온 애 엄마, 그리고 재수생이다. 그들은 꿈을 만들어 파는 영화관에서조차 별다른 꿈을 꿀 권리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임순례가 자신이 만들어내는 리얼리즘의 공간 속으로 그들의 마음을 끌어내면, 나른하고 지친 영화관의 풍경은 인상주의적인 마음속 풍경화로 바뀐다. 그것은 분명히 90년대 아시아 영화의 흐름과 연대의식을 지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중산책>은 도식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이나, 베끼고 시침 뚝 떼는 코미디나, 역사에 관한 지루한 교훈극이나, 또는 포르노라고 우기는 자기모순의 자해소동에 지쳐 있는 한국영화에 대한 날카로운 일격(!)이다. 정말로 임순례의 영화는 충무로 영화의 방부제 이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바로 여기서부터 단호하게 결별하고 행복하게 전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