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1995.03.09.(49호)작품

■ 숨은 비디오 찾기 14

<고무인간의 최후>

감독: 피터 잭슨

주연: 피터 오헤르네    마이크 미네트

악취미 영화광만 보라?

'일부러 못 만든' 우스꽁스러운 공포영화

우선 상투적인 경고. 이 비디오는 임신부나 노약자, 심장이 약하시거나 비위가 약하신 분, 그리고 '고상한 취미를 가지신 분'은 절대 보지 말 것.

그러나, 만만치 않은 현실비유

뉴질랜드의 이단아 피터 잭슨이 제작, 감독, 각본, 편집, 조연을 한 1인 5역의 <고무인간의 최후(원제 Bad Taste)는 놀랄 만한 상상력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게' 만들어서 계속 웃을 수밖에 없는 기괴한 공포영화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일부러(!) 못 만든 영화이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고? 이 새로운 악취미는 80년대에 나타나서 전염병처럼 번져나간 영화의 새로운 경향이다. 컬트영화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데이비드 린치를 아버지로 샘 레이미, 하워드 지프, 레이먼드 존슨, 댈리 듀크, 존 행콕, 안소니 다우손(이 사람은 예명이 일곱개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스 콕스, 카메론 크라우, 파트리시아 로즈마, 프레드 쉐피시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 <양들의 침묵>으로 이들을 배신한(!) 조나산 데미도 초기에는 차마 믿을 수 없는 '한심한' 명장면의 시네아티스트로 악명을 떨쳤었다.

도대체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할리우드에서 '잘 만들어진' 통조림 영화의 제작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너무 따분하다고 생각했으며 유럽의 속물취향에 영합하는 작가영화나 만들며 영화제에서 잘난척하는 건 닭살이 돋고, 정치적인 독립영화를 만들기에는 세상에 대해서 별다른 희망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저 제작비와 최소 스태프를 이끌고 게릴라처럼 전통적인 가치관의 영화와 싸워보겠다는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인 셈이다. 그리고 피터 잭슨은 기꺼이 그 무리에 합류한다. <고무인간의 최후>는 정말 '법도 질서도 없이' 황당무계하게 만든 무법자의 도박과도 같은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무대는 카이흐로 마을. 이 곳은 텅 비어있다. 마을을 침략한 외계인들이 새로 개발해 판매할 예정인 인간버거(새로운 햄버거?)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양념까지 한 것이다. 그런 외계인들을 처단하기 위해 네 명의 사나이 데릭, 베리, 오지, 프링크가 이곳까지 추적한다. 그리고 여기에 바보같은 세일즈맨 가일즈까지 뒤엉켜 엉망진창이 된다. 참고사항,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이맥스임.

그러나 이 엉터리 같은 SF영화가 안고 있는 비유들은 의외로 만만치 않다. 우선 텅 빈 이 마을은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정부계획에 따라 강제 이주된 지역에서 철거직전에 촬영된 것이다. 영화는 줄곧 제3차세계대전과 핵문제에 대해서 농담처럼 수다를 떨지만, 아름다운 해변도시가 이토록 을씨년스럽게 황량한 폐가처럼 그려진 예는 달리 없을 것이다. 이 마을에 찾아온 네명의 남자는 AIDS(에이즈가 아니라 Alien Invasion Defense Service의 약자. 직역하면 '외계인 침입 방어기관'이지만 물론 철자장난이다) 요원들이다. 이 영화에는 단 한명의 여자 출연자도 없으며, 모두 남자들뿐이다. 게다가 외계인들은 두목을 제외하고 모두 똑같은 복장이다. 청바지에 청와이셔츠다. 이건 전형적인 블루 칼라들이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런 옷을 입는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들뿐이다.

컬트 팬들도 마음놓지 말라

그렇다면 어떤 비판적 의민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피터 잭슨은 비판의 패러디를 즐긴다. 그렇다면 이건 컬트영화인가? 컬트 팬들도 마음놓지 말 것. 피터 잭슨은 컬트영화의 고전인 조지 A 로메로의 <살아난 시체의 밤>, 알렉스 콕스의 <리포맨>,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로비 후퍼의 <텍사스 전기동력톱 살인사건>까지도 빈정거려가며 영화를 만든다. 도대체 어쩌자는 셈인가? 그건 이미 낡은 근심인지도 모른다. 이 대책없는 졸작은 벌써 아보리아츠 환상영화제(컬트영화의 칸느!)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으며, 전 세계에서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악취미의 영화광들' 사이에서 기념비적인 고전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이미 우리는 황당무계한 또 다른 리스트를 가진 지하문화에 감염된지 오래다. 영화는 꿈이지만 그걸 악몽이라고 믿는 또 다른 세대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이다.

아아, 우리의 시대는 무엇을 꿈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