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1995.05.에디토리얼|엔드크레딧

영화의 '지나간' 100년
키노의 '새로운' 101년

영화는 언제나 시작은 있고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영혼처럼 나타나 영화들을 떠돌기 시작하면 그건 영생불사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따라 끝이 없는 순례를 떠나고자 합니다. 죽지 않는 과거의 영화, 새로운 101년에 우리와 함께 할 미래의 영화, 그 사이에서 당신과 함께 영화에게 해피 버스데이!

키노는 1995년 지금,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영화를 세상에 알린 날로부터 101년째인 오늘 여기서 여러분과 만납니다. 영화를 통해, 영화에 의해서, 영화에 관해서, 영화로 여러분과 만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만남은 영화의 바깥에서 그 안으로, 그 안에서 아주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에 다시 한번 영화를 사고하고, 보듬고, 따져묻고, 비판하고, 그리고 다시 안으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1995년이 중요한 것은 세가지 이유입니다. 그 하나는 영화의 한 세기를 맞이하는 축제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전쟁과 두 개의 혁명, 그리고 수많은 우리 세기의 기록 속에서 영화는 그 영혼을 담고 살아남아 우리 앞에 선 것입니다. 그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안고 함께 건배해야 할 일입니다. 또 하나는 누구나 근심하는 것처럼 영화의 죽음을 맞이하는 뉴 미디어의 묵시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인공위성과, 디지틀과, 비디오와, 케이블과, 게임과, 인터액티브와, HDTV 앞에서 산산히 사지절단 당하고 찢겨나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제 더 이상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자기 해체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고, 그것을 움직이는 논리는 전지구적 규모의 자본과 정치의 이윤추구라는 용서없는 법칙입니다. 이제 마지막 하나는 바로 그 두 가지, 축제와 묵시록 사이에 서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속에서 의지이며 운명인 영화를, 마치 형이상학적이고 고상한, 그러나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말장난처럼이 아니라, 영화라는 이름으로 거꾸로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와 피와 살과 눈물로 거기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이미 수없이 많은 영화에 관한 담론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사랑과 증오가, 풍자와 자살이, 패배와 절망이 서로 뒤섞여 알 수 없는 농담(?)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드문 사랑! 그리고 세상을 점령해버린 것 같은 황당무계한 테크놀로지의 천년왕국론과, 근거없는 비난을 일삼는 자해극들, 게다가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모르는 속임수는 심지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의 친구들은 90년대가 지난 십년전과는 다르다고 점잖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르다고 알고 있는 것은 그들과 다릅니다. 이제 더 이상 충무로는 한국영화의 유일한 근거가 아니며, 기업은 더 깊숙히 개입하고 있고, 직배영화는 더 많은 이익을 거둬가고 있으며, 더 적은 독립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더 많은 우리 영화들이 증발해버렸고, 그보다 더 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의 곁을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축제를 망치지 않을 것이며, 묵시록을 비켜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숨을 불어놓고 입을 맞출 것입니다.

올해는 영화의 101년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우리도 당신만큼 영화를 통해서 만났고, 영화로 함께 전진할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들, 우리의 연인들, 영화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우리의 영화 일백년을 진심으로 바칩니다.


바하「골드베르그 변주곡」글렌 굴드

지루한 바하, 한없이 반복되는 바하, 졸고 있는 바하를 깜짝 놀라게 깨워보자. 1955년 기벽과 독단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스튜디오로 달려가 뜨거운 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마스크를 뒤집어 쓴 다음 마치 기관총을 쏘는 것처럼 바하의 31개 변주로 이어진「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반복없이 36분 40초안에 녹음을 마쳤다. 그건 마치 바로크음악을 로큰롤의 정신으로 연주한 것처럼 보였다. 그 해 여름 엘비스 프레슬리는 선 레코드 녹음을 마쳤고, 필 스펙터는 경이의 윌 사운드를 창조했고, 척 베리는 전기 기타를 들고 전설의 런던 공연을 마쳤고, 마일즈 데이비스는 새로운 재즈를 꿈꾸기 시작했다. 글렌 굴드처럼, 우리 키노도 졸고 있는 영화를, 따분한 영화를, 지루한 영화를 깨우고 싶다.


「저항의 채널들」토니 다우먼트(편)

영화가 지금 표류하고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정말 영화는 헐리우드와 뉴 미디어에 포위당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가? 다행히도 푸꼬의 명제.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말은 영화의 마지막 구원처럼 보인다. 우리의 전자복제 예술작품의 시대에 권력과 싸우는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채널의 저항이다. 그래서 모든 토대를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거대한 영상 프로젝트의 스펙터클과 맞서서 저항의 파수꾼들은 유통의 순환구조를 타고 미끄러져 나간다. 전파의 여백 사이로, 디지틀의 비어있는 윈도우 시스템을 타고,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나가는 싸움이 진행중이다. 키노의 응원은 이제 텍스트가 아니라 바로 그 채널의 진지전을 향한 새로운 형태의 전선이 될 것이다. 이것이 디지틀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의 테제이다.


<공장에서 귀가하는 사람들> (1895) 오귀스트 뤼미에르와 루이 뤼미에르 감독, <달에로의 여행> (1902) 조르쥬 멜리에스 감독

사실과 꿈, 다큐멘터리와 SF영화, 영화의 첫 시작은 고전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시대정신의 투쟁(!)으로 나타났다. 너무 과장한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고다르는 바로 이것이 영화의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 영화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다시 한번 고다르로부터의 인용.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에서 귀가하는 사람들>이 기록영화이며, 멜리에스의 <달에로의 여행>을 드라마라고 불러 왔었다. 그러나 이제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면 뤼미에르 형제의 다큐멘터리는 19세기의 현실을 발췌하고, 배열하고, 그래서 다르게 보여주어 만들어내는 드라마이며, 반면 멜리에스의 SF영화는 20세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다큐멘터리라고 정의하였다. 영화의 101년에 다시 생각하는 영화의 시작은 뒤집힌 진실 사이의 변증법이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배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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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에 만난 소녀는 '영화가 나의 종교'라고 말했다. 사월에 만난 소년은 '영화때문에 산다'고 말했다. 언제나 영화가 우리의 문제이다. 그래서 상상해보자. 사운드트랙은 너바나의 '십대 영혼같은 내음'을 틀고, 그리고 시네마스코프를 배경으로, 영화신자인 소녀와 영화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소년이 달린다. 제목은? 뻔하지 머. <타고난 영화광들>.

PS: 여기서 '타고난'의 순 우리말 번역은 '올리버 스톤의(Natural Born)'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