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1995.06.에디토리얼|엔드크레딧

영화라는 교과서를 찢어버리고
거리로 나와 '영화들'을 만나자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에 관한 담론은 영화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에 관한 모든 방법은, 철학은, 미학은, 그리고 언제나처럼 사랑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형이상학으로서의 영화, 권위로서의 영화, 하나뿐인 영화, 파시즘으로서의 영화를 쳐부수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서 영화들의 대화에 귀기울이고, 그리고 함께 껴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키노는 영화잡지입니다. 물론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생각하고, 영화를 비판하고, 영화를 만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키노는 영화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명제가 아니라 사활이 걸린 논쟁입니다. 영화에서 시작한다는 말은 영화를 근원으로 생각한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더 나아가 서로 겨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따분한 영화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며, 영화가 모든 것이라고 믿는 위험한 영화 원리주의자들이 아니며, 비겁하게도 영화를 내세워 근거없는 미신을 만들어내서 혹세무민하려는 위험한(최근에 유행을 전염시키고 있는!) 영화 '쿠데타'론의 음모론적 생산에 동조하지 않을 작정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영화에 관한 담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꿈꾸어 마지 않았던 천년왕국이 아닙니다. 영화의 천년왕국이란 다름아닌 영화 정신의 패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자본주의 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미 벤야민이 지적한 것처럼 영화의 분위기라고 이름지어진 기계복제의 이데올로기는 시장가치의 전화를 통해서 발명되고,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한다는 것은 그 위험한 경향과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영화의 시스템 속에서 과정으로서 생산에 맞서 실천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화와 영화를 한다는 두가지 말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끊임없이 영화를 누가, 어떻게, 어떤 체제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는가라는 과정에 관한 모든 토의를 말소시키면서 영화 그 자체에로 돌아가려는 보수 반동적인 경향의 영겁회귀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입니다. 말하자면 보편성으로서의 역사라는 말이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영화라는 일반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입니다. 오히려 수많은 다른 '영화들'이 서로 다른 토대 위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고 서로의 방법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들도 예외없이 헤게모니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일시에 하나인 것처럼 말하려는 것은 분명히 영화를 하나의 권력으로 만드려는 의지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영화를 제도 교육의 교과서로 만들어서, 영화들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리고, 비판으로서의 영화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그 다음에는 안전한 목소리를 흉내내어(안전하다는 것은 언제나 보수적이라는 알뛰세의 명제 그대로) 동조하려는 태도일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태도는 영화가 마치 신의 목소리, 하나의 근원이 있다는 파시스트적인 신화를 유포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화 그 자체란 없습니다. 영화들이 있으며, 우리는 더 많은 영화들의 담론을 생산해낼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들에게 스스로 말하고, 그 말이 서로의 대화가 되고, 대화가 우리의 시대정신을 이루어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결코 시대정신이 발명되기를 원치 않으며, 발명해 낸 자의 권력이 되기란 더욱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는 다시 분류되고, 다시 이름 지어지고, 다르게 바라 보고, 다르게 부르고, 그 다음에는 서로 모순을 만들어내는 역사의 맥락 속으로 돌려 보내야 합니다. 그 순간 비로소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며 동시에 모순으로서, 처음 영화가 시작되었던 장소에로, 우리 모두를 다시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영화는 멈추어서 정지하는 순간 권력으로 바뀌는 참으로 위험한 발명품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계속 소란스럽고, 수다스러우며, 서로 마음대로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한다는 말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시작하여 끝이 없는 영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해서 '무언가' 해야하는 것은 우리와, 독자 여러분의, 공동전선입니다. 그 무언가가 서로 맞서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이미 영화를 위해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신경쓰지마!」너바나

로큰롤이 단 한장의 앨범 때문에 다시 시작되었다. 커트 코베인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고, 바로 거기서 정신을 배운다. 그는 시대정신의 방부제이며, 패배와 타협으로 점철된 그 모든 계약을 파기시켰다. 스튜디오에서 멋대로 녹음하고, 하고 싶은대로 부르고, 그리고 두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너바나는 언제나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을 내세워 변명하는 것만큼 치사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키노가 하는 모든 사랑은 언제나 영화이다. 그걸 참견하고, 위혐하고, 협상하고, 엉뚱한 허깨비와 비교하고, 충고하고, 그런 다음에는 개입하려는 제안이 다가올 때마다 우리는 너바나의 트랙 앞에서 다짐한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해나간다. 신경쓰지마!


「벽없는 영화, 베트남 이후의 영화와 문화」티모시 코리건

도대체 베트남은 무엇일까? 보들리야르는 우리 세대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렀고, 푸꼬는 권력이 만들어낸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베트남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헐리우드 영화의 근본적인 인식론적 단절이 그 사이에 놓여있다. 해피 엔딩은 억지가 되었고, 착한 주인공은 컬트가 되었으며, 악당은 희생자처럼 보이고, 이제 꿈은 증발하고 악몽만을 꾸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 후로 줄기차게 헐리우드 영화는 베트남이라는 기억과, 기억이 생산하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역사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전쟁의 연장이다. 이제 남은 일은 참호를 파는 것이 아니라, 사방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전쟁을 막아내는 것이다. 영화가 있는 곳에 전투가 있고, 전투가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곳에 입장이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1+1> 장-뤽 고다르 감독

만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고다르는 만나는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영화라는 사건이 생겨나고, 사건 속에서 세계의 구조가 생산된다. 문제는 언제나 생산된 구조와 구조를 생산하는 세계 사이의 긴장이다. 고다르는 그 긴장 속에서 마치 데카르트처럼 질문한다. 영화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생각하지 않는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가 생각하는 것은 철학의 방법, 방법의 이미지, 이미지의 존재를 따라가는 순서의 역사이다. 그래서 영화는 언제나 방법론적이면서 존재론적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긴장이 영화를 변증법적 관계로 이끄는 것이다. 영화에 관해서 사고하고, 다시 쓰고, 그것을 통해 반성과 비판으로 이끌리는 키노는 그런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만나는 것은 중요한 말이다. 키노는 만나는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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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밤을 새우며 마감을 하는 순간이다. 저 어린 키노(?)들은 오늘도 밤을 새운다. 믿는 것이라곤 영화 밖에 없다. 영화잡지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악수를 청한다. 영화 잡지 만들기 재미있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한다. 한달에 이십 일을 밤 새우고, 원고지 삼백 장을 쓰고, 이백 오십 페이지 교정을 보고, 그 사이에 스무 명 이상을 취재하고, 서른 편 이상의 영화를 보고, 그러고나서도 데스크한테 왜 이렇게 게으르냐고 야단맞고 웃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요. 엉엉, 어린 키노들, 난 너희들과 함께 영화잡지 만드는 게 행운이야.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