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1996.04.에디토리얼|엔드크레딧

지금 영화를 포위한 두 가지 위기,
이제는 함께 싸워야 한다

키노의 4월은 베를린에서 질문하는 1996년 동세대 영화의 세계적 규모의 경향에 관한 이의제기 입니다. 세개의 중국은 하나의 체제처럼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포스트 아메리칸 시네마는 서방세계의 모순에 관하여 질문하는 대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새로운 상업영화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화가 갖는 문제의식은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언제나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 있거나 아니면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 영화는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키노는 영화의 이 편과 저 편을 나누는 몇 가지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 그 자체를 제한하고, 일정한 조건의 원칙 아래에서, 우리의 도덕과 원칙 그리고 순결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강요하는 창백한 원칙주의를 목표로 하여 기준을 정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전적으로 우리는 볼테르주의자(이런 말이 허용된다면!)들입니다. 볼테르는 생각에 대한 제한, 사유에 대한 억압, 사상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 분명한 원칙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나와 정반대되는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탄압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생각을 지키기 위하여 싸울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원칙입니다. 우리가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한 태도입니다.

우선 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관객의 행복한 자유의지이며 그 자신의 취향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말하는 것은 이제 의지를 실천하고, 취향을 전술로 바꿔, 영화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이 말하는 순간은 비로소 영화의 의사소통이 시작하는 시간이며, 말하는 장소는 영화가 의미를 생산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아, 유감스럽게도 시간은 매우 제한된 것이며 공간은 가진 자들의 몫입니다. 이제 여기 우리의 첫번째 기준이 있습니다.

공간은 헤게모니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일종의 전략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 곳은 언제나 이미 점거한 자들이 기득권을 누리며 그것을 연장하기 위해 조작하고, 재편하고, 변조하면서 그것을 설득하고 강요하는 제단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언제나 공간과 일정한 연대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위험하게도 그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협잡관계에 들어섭니다. 엉뚱하게도 엉망진창인 실패작이 '산문이라기 보다는 한 편의 시'라는 말장난을 부리고 영화와 영화를 말하는 공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무책임한 걸작 판정이나 광고 카피를 방불케 하는 격언조의 '잡담'을 직업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비판하고, 또는 감격하고, 때로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품행방정한 모범생' 이데올로기는 정말 우리와 맞서는 주례사입니다.

두번째, 키노에서 가위질에 관해 이의제기를 한 것을 독자 여러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영화에 심의가 아니라 검열을 해도 좋다는 그 관료주의적 발상과 경제주의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반대하는 태도를 자유주의자들의 무리한 요구하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철없는 예술, 도덕과 수치를 모르는 대중들의 저속한 관심, 우리들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가위질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백번 양보해서 그 의견에도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우선 가설을 세워보기로 했습니다. '가위를 가진 자들의 손목을 어떻게 부러뜨릴 것인가' 다섯번째 이야기는 여러분 독자로부터 온 편지를 소개합니다. 토론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귀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틀렸다면 기꺼이 주장을 철회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다면 우리는 여러분과 '틀린' 제도가 고쳐지는 순간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두번째 기준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기준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원칙은 언제나 단순명쾌하지만 그것이 현실 속에서 실천되는 순간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우리는 지루한 원칙론으로 무장하고 앵무새처럼 철없는 동어반복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가를 현실 속에서 심문하고, 비판하고, 기록하고, 대안을 찾아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내세운 '얼터너티브'는 말 그대로 '대안'을 찾아내는 순간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얻어낼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 혼자 찾아낼 수 없으며, 또한 그래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함께 찾아내고, 기어이 얻어내어, 비로소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일년이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리플레이스먼츠「저를 만나주세요」

펑크 얼터너티브의 음유시인 폴 웨스터버그는 거짓 약속을 짐짓 믿는 척한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화해하자는 악수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없는 화해는 그 순간 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훈없는 화해는 뼈 아픈 패배보다 더 위험한 법이다. 그래서 이 앨범의 마지막 곡을 '이제 더 기다릴 수 없어'라고 거의 비명 지르듯이 부르고 끝낸다. 말을 바꾸어 보자. 도대체 뭘 더 기다렸단 말인가, 화해나 하는 주제에.


샌디 플리터만-루이스『다르게 욕망하기 또는 페미니즘과 프랑스 영화』

영화에는 여러 가지 다른 목소리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 계급의 목소리, 민족의 목소리, 커뮤니티의 목소리, 시간의 목소리, 이 모든 목소리가 서로 자기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목소리들은 한 번도 평화와 화해에 대해서 토론을 나눈 적이 없다. 이제 자기의 진영, 자기의 노선, 자기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만을 남기고 모두 혀를 자르는 것이다. 여기에 화해의 여지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목소리가 아니라 시선, 말이 아니라 제스추어, 다른 방법으로 욕망으로 '숙청당한' 자아를 읽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삭제당한 자들의 편이다.


<인디아 송> 마르그리뜨 뒤라스

소설가이며, 영화의 친구였던 마르그리뜨 뒤라스가 지난 3월 4일 세상을 등졌다. 영화의 철학자 질 들뢰즈로부터 슬픔이 채 가시기 전에 떠나간 것이다. 그리고 연작의 대가 키에슬로프스키도 운명을 달리했다. 도대체 이 허전함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마르그리뜨 뒤라스는 사운드의 미장센을 발명하였으며, 그녀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텍스트의 기쁨을 기꺼이 영화에 나누어주었다. 알랭 레네와 앙리 콜피, 줄리에트 베르토, 그리고 장-자끄 아노까지 뒤라스는 그들의 곁에 또는 안에 있었다. 또한 뒤라스 자신이 만든 영화들은 부재의 영화, 신비의 영화, 상황의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믹스의 영화를 창조했다. 이제 어디서 다시 뒤라스 체험을 할 것인가.


...end CREDIT

Cinema 인본주의

<키몽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