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 1996.05.에디토리얼|엔드크레딧

다시 시작하면서, 지금 돌아보며
첫번째 일주년의 자기 비판

키노의 5월은 일주년을 맞는 작은 행복과 다시 시작하는 자기비판입니다. 우리는 정말 원칙을 지켜왔는가? 그래서 영화의 작가주의에 관해서 뭉서을 지키고 무엇을 버렸는가? 작가주의는 노선이 될 수 있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노선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세상과 싸우는 것임을 다짐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간 일주년 우리의 특집은 영화광과 인디펜던트 다큐멘터리입니다. 이제 키노는 다시 한번 시작합니다.

키노는 영화의 일백일주년에 일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두번째 세기의 첫 해에 키노는 삼백 육십 오일째의 아침을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다시 시작하고 있는 세기, 아직까지는 무어라 불러야 할 지 정해지지 않은 시대,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함께 발명해야 할 순간에 여기 이렇게 도착한 것입니다.

키노는 영화에 관해서 지난 일년간 새로운 제안을 했고, 또 영화의 바깥과 안으로부터 새로운 친구를 모색하였으며, 적과 아군을 원칙으로 제시하고 분명하게 나누었고, 그리고 그 원칙 아래에서 함께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영화에서 동세대로서의 작가주의를 지키려고 했으며, 그와 동시에 '발견'이라는 임무를 계속 해왔습니다. 그리고 왕가위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쿠엔틴 타란티노, 배용균, 푸른 영상, 변영주, 노동자뉴스 제작단, 헬렌 리의 영화 속에서 연대하고 옹호하였습니다. 또한 스탠리 큐브릭과 로버트 알트만, 마틴 스콜세지, 임권택의 영화에서 작가의 교훈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켄 로치, 딥 디쉬, 할 하틀리,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비탈리 카네브스키는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발견을 기다리는 이름들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방적은 짝사랑이나 이해관계가 얽힌 전략으로서 선택한 것이 아니며, 또한 발견과 함꼐 항상 비판하고 경계하며 거꾸로 작가주의의 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으로 감싸안는 이름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구도는 바로 그러한 원칙 아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화에 의해서, 영화를 통해, 영화를 통해, 영화로 세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중심에 놓인 무게추입니다.

키노의 두번째 노선,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작가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가에 관한, 영화에 대한,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에 의한 사랑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세상 속에서 만들어지고, 세상은 영화의 토대이며 또한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영화 사이로 끼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서로의 관계는 적대적 모순에 빠지고, 영화는 종종 위기에 놓이거나 함정에 걸려들어서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리거나 엉망진창으로 사지절단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영화에 개입하는 것은 스캔들을 생산하거나, 일시적인 소동을 만들어서 세간의 이목을 끌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 원치 않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와 세상을 접하시키고, 그리고 그 속에서 도덕의 율법을 과학적으로 실천하는 전투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만일 영화가 옳지 않다면 비판받고 당장 중지되어야 할 것이며, 세상이 옳지 않다면 당연히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입의 실천은 한편으로는 항상 윤리적이고 철학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변화가 결코 나르시시즘에 빠닌 동어반복의 중언부언으로 끝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키노의 세번째 노선,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독자 여러분을 끌어들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하고, 바로 여기 토론의 빈 좌석에 앉혀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옳고 그런 것을 토론하며 노선의 잘잘못을 검증하고, 그리고 비로소 서로 함께 동의하며 잘못을 고쳐 나가고 옳은 것을 지지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큰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은 목소리, 더 많은 비판, 그리고 더 많은 사랑만이 우리가 새로 시작하는 두번째 영화의 세기를 일보전진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간 일백년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명단을 공개하고, 재판을 벌이고, 심지어 완전히 잊어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잊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만일 두번째 세기에서 지난 일백년의 잘못된 방향을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름은 명단에 오를 것이며, 우리 다음의 영화를 살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재판받을 것이며, 그리고 영화의 역사 속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던 이름으로 완전히 잊혀져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잡담을 늘어놓을 여유가 없습니다. 이미 새로운 세기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여기 함께 이미 한발 들여놓은 것입니다.


10,000 매니악스『나의 부족에게』

나탈리 머천트는 무색무취로 투명하게 노래한다. 도대체 여기 무슨 일이 생긴 것이야, 라고 물어보면서 시작하는 그들에게 세상의 날씨는 연일 비오는 오후이며, 소년들은 신문을 팔기위해 그 거리를 뛰어다니고 있으며, 나무는 잘리우고,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광고판에 칠해진 바캉스 해변가의 반짝이는 모래를 쳐다보며, 거짓말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한숨을 내쉰다. 아, 우리의 부족들은 거리에 내몰리고 있고, 저들은 그 댓가로 안락한 의자에 누워있구나. 나의 부족들이여, 우리의 동지들이여, 키노가 바치는 애정은 바로 당신들이다. 우리는 일만명의 부족들과 함께 여기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들은 더 많아질 것이며, 결국은 이길 것이다. 이것이 악전고투하는 키노의 믿음이다.


텔 켈「앙상블로서의 이론」

'텔 켈'은 집단이다. 그러나 아무도 정의내리지 못한다. 필립 솔레르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손님으로서의 롤랑 바르뜨, 미셀 푸코, 자끄 데리다, 동지로서의 마르슬렝 플렌, 장 루이 우드빈이 그 교차로에 있다. 그들은 문학과 철학, 미술, 과학, 정치학 사이의 그 어딘가에서 '앙상블'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들 사이의 합의는 단 한가지이다. 이 모든 노력이 좋은 세상의 곁에 한걸음 다가서서 그것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솔레로는 '되찾는 천국의 진행'이라고 부른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키노는 동의한다. 키노는 진행중인 '준비하는' 천국이며, 천국으로 다가가며 연대하는 집단이다. 우리는 더 많은 친구를 만날 것이다. 그래서 키노는 더욱 철학적이며, 더욱 과학적이며, 더욱 실천적인 영화에의 사랑에 몰두할 것이다.


<아비정전> 왕가위

우리들의 첫번째 모니터 친구들은 '우리 세대의 영화사상' 베스트 1위의 영화로 왕가위의 두번째 영화를 선택했다. 이것은 결코 의외의 결정이 아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상황이 있다. 우선 이 영화는 저주로부터 구원받은 90년대 방식의 싸움의 과정이 담겨있다. 그와 함께 왕가위를 편견으로부터 (그 하나는 서투른 증오이며 또 하나는 과잉하는 숭배이다) '다시' 구출해야 한다는 비장한 선언이다. 아직까지도 <아비정전>은 진행중인 영화이다. 그 속편은 한없이 연기되고 있으며, 모든 것은 미완성의 상태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계속 자극하고 있다. 말하자면 왕가위는 제안하였고, 우리는 그것을 채워넣고 있는 것이다. 오아가위를 통해서 우리 세대는 대중들과 싸웠으며, 그리고 연합하여 구출했으며, 지금은 또 다시 맹목적인 소비로부터 보호해야 할 난처한 처지에 놓이면서 영화에 관한 교훈을 배운 것이다. 말 그대로 이 1위는 '왕가위 렛슨'이다.


...end CREDIT

영화 '잡지'를 만드는 일은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 '나의 영화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노는 나에게 직장이 아니라 매일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실천하고, 반성하는 '마음'이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나에게는 '이 잡지사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 영화잡지는 내게 영화'잡지'가 아니라 '영화'잡지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영화'잡지'를 만들고 있는 것은 정말로 '그 자신의 시간을 쓸모없는 일에 낭비하는' 것이며,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도 배신하는 일이다. 독자들은 영화잡지를 심심풀이로 읽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다면 영화잡지는 정말 심심풀이가 되는 것이다. 심심풀이가 필요하다면 진심으로 키노 대신 다른 연예지를 선택하기를 전한다. 우리는 심심풀이를 위해 이렇게 토론하고 밤을 새우며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돈을 내면 소비할 권리가 있겠지만, 그러나 돈으로 다른 사람의 노동까지도 심심풀이로 만들 권리는 없다. 그래서 키노에게 더 진지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러나 키노에게 심심풀이가 되라고 모욕할 권리는 없다. 그래서 심심풀이가 필요하면 우리를 선택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거의 같은 시기에 창간된「씨네21」의 조선희 편집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작년에 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키노를 창간한 일이요" 다시 물었다. "올해에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요" 다시 대답했다. "키노를 만드는 일이요" 그리고는 서로 응원(!)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이렇게 창간 일주년 기념 엔드 크레딧을 썼다. 덕분에 나는 키노와 나 사이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영화잡지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빼고. 나는 지금 하는 일에 정말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창간 일주년을 맞아 독자에게 하는 약속이다.